로마서 1장 1-7절, 마태복음서 5장 43-48절
인사
온전한 사랑을 베푸시고 우리를 온전하게 붙드시는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여기에 계신 생명사랑교회 교우분들과 온라인으로 예배에 참여하고 계신 성도님들에게 가득하길 빕니다. 오늘은 우리 교단이 정한 교회력을 따라 종교개혁주일이면서 동시에 이단경계주일로 예배를 드립니다. 특히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해 개신교에 속한 전 세계 많은 교회들이 개신교의 시작을 알렸던 종교개혁의 정신을 되새기고, 온전한 복음의 의미를 되새기는 뜻깊은 날이기도 합니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깨달음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사이자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신학 박사였던 마르틴 루터가 95개의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 교회 정문에 게시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루터는 부패한 제도 교회를 향해 95개조 논제를 제시하면서 이에 관해 논의하길 원했습니다. 그 95개조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은 주제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면벌부의 정당성과 효력에 대해, 속죄에 대해, 교황의 사죄권에 대해, 마지막으로 구원에 관한 내용입니다.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의 첫 번째 논제는 이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우리의 주요,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 명령하셨을 때, 그 뜻은 신자의 모든 삶이 돌아서는 것이다.” 수도사이자 신학 박사였던 루터를 부패한 교회에 맞선 종교개혁자로 만든 것은 그의 깊은 신앙적이고 실존적인 질문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선한 자에게 상을 베푸시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시는 것이 어떻게 좋은 소식인가? 그것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인가?’ 루터의 눈에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구분하고 그에 맞게 대우하는 하나님은 도저히 은총의 하나님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특히 스스로를 비참한 죄인으로 여기는 자신에게 하나님은 진노하는 하나님이지 용서하는 자비로운 하나님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런 깊은 실존적 고민을 가지고 씨름한 루터는 신약성서 로마서 1:17에서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계시처럼 그 답을 얻습니다. 바울이 전한 말은 이러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루터의 깨달음은 하나님의 의로움이란 죄인을 벌하여 자신의 의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용서받을 자격없는 죄인을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들의 죄를 은혜롭게 용서하심으로써 자신의 의를 세운다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은 이후 오직 은총, 오직 믿음이라는 종교개혁의 중요한 핵심 사상이 됩니다. 역사신학자 야로슬로프 펠리칸은 종교개혁의 핵심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오직 믿음을 통해, 곧 오직 은총을 통해 의롭게 된다는 것은 곧 예수의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해 하느님께서 이루신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뜻했다. 이것이야말로 종교개혁의 핵심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오늘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온전한 복음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온전한 복음이 보여주는 세 가지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성찰하고자 합니다.
온전한 복음, 첫 번째 – 차별없는 하나님의 은총
온전한 복음의 첫 번째 내용은 차별없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의 시작은 루터가 16세기 당시 부패한 교회와 교황에 저항하기 위해 일으킨 것으로 이해됩니다. 당시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직전 중세 말기의 상황은 총체적 위기였습니다. 서방교회는 분열을 거듭해 급기야 2-3명의 교황들이 생겼으며, 교회의 개혁을 위한 공의회들은 모두 실패했습니다. 인쇄술의 발명으로 사람들은 지식에 대한 갈망이 높아져서 뭔가 새로운 세계관을 곧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교황청은 개혁을 고집스럽게 거부해왔고, 시대에 맞지 않는 르네상스식의 화려하고 위압적인 위세를 과시하려 했습니다. 이는 경제적 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교회의 부도덕학 행위와 이권 다툼으로 나타나고 결정적으로는 베드로 대성당을 신축하기 위한 교황청의 착취에서 정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귀족들은 고위 성직을 독점하여 부유한 삶을 누렸고, 반면 가난한 이들 중 매우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신학 교육을 받지 못한 채 하급 성직자가 되어 가난을 면치 못하고 교회의 위상 역시 크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너무 많은 교회의 축일들과 빈약한 신학도 문제였지만 민중들 역시 미신과 성유물 존숭, 묵시적인 종교적 광신, 허례허식적이 된 전례, 성직자들에 대한 증오를 표출했습니다. 이는 당시 영적이고 정신적인 혼란과 총체적인 사회적 위기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루터의 종교개혁이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는데 그 근본적 동기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부패한 교회에 저항한 것은 맞지만 그보다 먼저 더 근본적인 동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복음에 대한 각성이었습니다. 온전한 복음을 향한 루터의 신앙적 각성은 그가 처한 시대의 현실을 직시하게 했고, 이 각성으로 인해 교회를 온전한 복음으로 돌이키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종교개혁은 루터가 온전한 기독교 복음을 깨달았던 것이 먼저였고, 그 깨달음이 그를 종교개혁자로 내몬 것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의 바탕이 된 루터의 깨달음은 한 가지 질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은총에 관한 질문은 루터뿐 아니라 사도 바울에게도 중요한 것이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예수님에게도 그러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선언한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는 말은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문화적 종교적 기준으로 하나님의 보편적 은총을 제한하는 모든 시도에 대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신실하심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한 기준임을 명백히 밝힌 말씀이었습니다. 바울은 롬1:16-17에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모든 인종적 구분과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위치, 성적 지향, 인간 중심성을 넘어 동물과 식물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막을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피조물을 차별없이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은 온전합니다. 그 은총의 범위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복음 역시 온전하고 또 그러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모든 사람, 모든 피조물을 차별없이 사랑하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임을 말합니다. 따라서 구원은 차별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실천하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 역시 온전한 복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마5:44-45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 모두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하나님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대교리문답』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거울입니다. 이 거울은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그분이 없다면, 아버지는 진노로 가득하고 끔찍한 심판관으로만 보일 것입니다. 또한 성령이 계시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에 대해 무지할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라는 거울을 통해 하나님을 보고 우리 주위를 본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내가 싫어하고 내가 거부하는 사람들 심지어 내가 무관심하게 여기는 사람들 역시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내가 은총에 합당하지 않은 죄인인데 나 역시도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가장 먼저 깨닫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악하고 불의한 사람이라 여기는 사람도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자비와 은총의 대상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은 차별없이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인간의 사고 방식은 늘 이분법적입니다. 선과 악, 옳고 그름, 거룩하고 속됨을 자기 기준으로 나누려 합니다. 특히 우리는 그 기준으로 이 세상을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누어 하나님의 은총을 제한합니다. 이 세계가 추구하는 중심적인 가치로 여겨지는 것들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규정하고, 그외의 것들은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으로 간주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제한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세계에서 주변으로 밀려난 자들, 병자, 귀신들린 자,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자, 종교적으로 부정한 자, 그리고 죄인들과 함께하심으로 이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찾아온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가 그 중심에서 밀려난 주변부의 인생을 사시면서 하나님과 일치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사건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더 이상 구분이 없음을, 다시 말해 거룩함과 속됨의 구분 자체가 폐기되었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보여주심으로써 이제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음을 믿으며 사는 새로운 길을 주어졌음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온전한 복음, 두 번째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불가능한 하나님의 은총
온전한 복음의 두 번째 내용은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하나님의 은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질문은 온전한 복음을 향하여 어떻게 살아가야 할것인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롬1:1-7까지 말씀은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인사말입니다. 이 인사말 서두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의 부르심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의 부르심의 근거를 자기 자신이나 이 세상의 조건에 두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경건한 바리새인이라서 혹은 가말리엘 학파의 율법적 우월성을 가지고 있어서 혹은 순수 유대인 혈통을 지니고 있어서 사도가 되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의 사도로서 부르심은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 합니다. 이런 이유로 그가 전하는 복음도 자기 자신의 주장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한 주장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가질 수도 알 수도 없는 전적으로 우리의 차원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복음”이어야 했습니다. 복음은 사람의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인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1922년에 나온 제2판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바울이 전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이다. 그것은 철저하게 새로운 진리, 사람들이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기쁘고 좋은 진리, 곧 하나님의 진리다. … 다시 말해, 그것은 인간의 신성 혹은 인간의 신격화에 대한 어떤 종교적인 메시지, 설명, 지침이 아니라, 전적 타자이신 한분 하나님의 메시지다. 그분은 인간으로서는 전혀 알 수도 가질 수도 없는 하나님이시며, 바로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기대할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이처럼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이라 말했을 때, 그 뜻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의 기쁜 소식이란 우리에게 그 근거를 두지 않는 것 곧 우리의 의로움이나 도덕적 수준, 지식이나 행위,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도덕적 성적 육체적인 범주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래서 오히려 도무지 우리로서는 가늠할 수 없는 은총을 주시는 우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소식입니다. 온전한 복음은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그것은 인간 인식, 경험, 도덕적 행위 심지어 종교적 경건함으로도 우리가 어느 것 하나 기여할 수 없고 닿을 수 없는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전혀 닿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은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질까요?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설명하면서 곧이어 그 답을 제시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을 사도로 부른 하나님의 복음의 중심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놓여있습니다. 롬1:2-4에서 바울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으로 그의 아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아들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으며, 성령으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나타내신 권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되신 분이십니다. 그는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칼 바르트의 주장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빛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없는 닿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의 지식이 아닌 계시로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속한 이 세계와 우리가 속하지 않은 하나님의 세계가 만나면서 또 분리되는 장소입니다. 부활의 빛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계에 “위로부터 수직으로 가르며 들어오는 알려지지 않은 영역”이고 “깨고 들어옴”이며, “사람의 아들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복음 안에서 이 세계를 온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우리 자신, 어떤 회생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이 세계, 비루하고 잔인한 현실, 심지어 하나님을 향해서도 저주하는 인간을 하나님이 그토록 좋아하시고 원하시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온전한 은총의 구원은 우리가 예상치 못하고, 받을 자격이 없고,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선물이자 신비이며 역설인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부르심을 상기시킵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자 성도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에 둡니다. 이 세상이 혹은 자기 자신이 제시하는 기준으로 스스로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비록 이 세계에서 보이지 않고 이해할 수 없고 닿을 수 없는 루터가 말한 “숨어 계시는 하나님” 그리고 다석 류영모 선생님이 말한 “없이 계신 하나님” 안에 자신이 용납받은 자로, 사랑받는 자로, 그리고 온전한 복음을 따라 이 세계에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는 자로 부름받았음을 믿는 것 뿐입니다.
온전한 복음, 세 번째 – 전체 생명의 자리에서
온전한 복음의 세 번째 내용은 복음이란 전체 생명을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온전한 복음의 두 가지 내용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차별하지 않는 하나님의 무차별적 은총이 있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에게 불가능한 하나님의 은총이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온전한 복음의 세 번째 내용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것은 바로 전체 생명입니다. 온전한 복음은 자기 자신만의 생명이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만의 생명이나, 인간만의 생명이 아닌 온 피조 세계를 포함하는 전체 생명을 추구합니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수많은 도전과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런 도전과 위기는 한국사회의 병리적 현상으로 드러납니다. 자기 이익과 욕망을 최우선이라 주장하고 이러한 욕망을 끊임없이 부추기는 이 세계의 경제적 문화적 시스템은 자신과 타자가 전체 생명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가 서로의 생명을 지탱하고 있다는 현실성과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게 합니다. 그 결과, 극단적 개인주의와 타자 혐오로 자기 생명과 타자의 생명을 비롯한 전체 생명을 위협하고 저해하는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철학자 김상봉은 한국 사회의 분열과 분리라는 근원적 문제의 원인을 “내가 전체와 하나라는 믿음”의 부재 곧 “영성의 부재”로 꼽습니다. 이 믿음 곧 영성이 없을 때 우리는 타자와 자신이 전체 생명 안에서 하나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우리에게 묻습니다. “이처럼 나와 세계가 고통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데, 어떻게 나와 세계가 하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보다 앞서 씨알 함석헌 선생님은 전체 생명을 저해하는 한 가지로 당파주의를 꼽습니다. 함석헌 선생에게 당파주의는 차별적인 이분법적 구도로 순수성을 주장하며 나와 다른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여 전체 생명을 저지하는 폭력의 이데올로기입니다. 함석헌 선생은 이러한 당파주의를 극복하는 새로운 종교와 세계관이 가져야할 본질을 무차별적 비폭력으로 제시합니다. 여기서 비폭력이란 단순하게 폭력을 사용하지 않거나 저항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너 나의 대립을 초월한 것”이자 “차별상(差別相)을 뛰어넘은 것”의 믿음과 생명에 대한 감수성에서 나오는 실천입니다. 그런데 함선생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무차별뿐 아니라 인간과 가축 사이의 무차별까지 그 지평을 확장합니다.
이처럼 온전한 복음이 차별하지 않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면 그 은총은 전체 생명을 살리라는 절대적 의무를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오늘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10.27 악법저지를 위한 2백만 연합예배 찬양&큰 기도회’가 오후 2시에서 열린다고 합니다. 이 집회를 주도하는 손모 목사는 이 집회가 차별금지법과 동성애를 막고자 한국교회 성도들이 모여 정치 편향 판결을 한 법원과 악법을 만드는 국회를 규탄하자’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 집회를 주도한 손모 목사의 인터뷰 내용의 일부는 이러합니다. 우선 기자의 질문입니다. ”이번 10.27 2백만 연합예배가 대법원의 동성 커플에 대한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부여 등에 대한 위기감 때문으로 안다. 지금 한국교회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고 보는가?“ 다음은 손모 목사의 답변입니다. “심각한 위기다. 한국교회가 동성애를 막지 못하면 유럽처럼 미전도 국가가 될 수 있다. 반드시 막아야 한다. 그 절박감 때문에 한국교회 대부분이 10.27 집회 참여를 찬성했다고 본다.” 이 답변을 보면 오늘 집회의 주된 동기는 동성애 혐오와 한국교회 스스로 가지고 있는 불안입니다. 특히 그 불안은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외면받고 있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이미 시민사회의 인권에 대한 인식과 감수성이 한국교회의 수준보다 높기 때문입니다. 냉정하게 되돌아 보아야 할 현실은 교회 밖 사람들에게 대다수의 한국교회 곧 오늘 광화문 광장에 나오는 교회는 누군가를 혐오하는 집단, 그 혐오로 소수자들을 희생양으로 만들어서 자신 안에 가득차 있는 불안정하고 폭력적인 힘을 밖으로 분출하려는 집단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보이고 싶어하는 존재감과 메시지는 시민들에게는 욕설과 소음에 가까운 것입니다. 결코 복음이라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매우 안타깝게도 오늘 집회를 계기로 광화문에 결집한 한국교회는 누군가를 차별함으로써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하는 정체성을 세웠다고 자화자찬할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교회는 자신이 가진 신앙적 불안함, 신학적 빈약함을 보여주며 무엇보다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을 제한하고 왜곡하며 무효화함으로써 그리스도교 복음과 정반대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왜곡한 자리에서는 스스로를 정상성으로, 다른 이들을 비정상성으로 구분하여 이들을 배제하며 차별하고 혐오합니다. 무엇보다 비극적인 것은 그렇게 차별하는 나 자신조차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 있는 존재임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불안함은 끝내 해결되지 않고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어 다시 누군가를 차별하면서 스스로에게 거짓된 위안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복음을 제한하고 왜곡하고 반역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온전한 복음은 무차별의 비폭력으로 전체 생명을 추구합니다. 전체 생명의 자리에 서면 약함과 못남이 오히려 강함과 아름다움으로 드러납니다. 약함과 못남은 그 자체로는 스스로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온전한 복음의 자리 곧 전체 생명의 자리에서 약함과 못남은 전체 생명을 위해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보여줍니다. 전체 생명의 자리에서 약함과 못남은 힘이 없기에 오히려 폭력이 아닌 비폭력으로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투쟁의 조건이 됩니다. 연약하기에 약한 생명에 대해 민감합니다. 못남은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한 아름다움을 향한 성찰의 자리를 마련합니다. 그래서 함석헌 선생은 약함과 못남의 자리야말로 이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는 자리라 말합니다. “연약한 씨만이 인간의 본면목을 가질 수 있고 따라서 인간 이상의 지경을 알 수 있다.” 그렇습니다. 약하고 부드러운 생명에 대한 민감한 마음이 전체 생명의 아픔을 느낄 수 있기에, 그래서 전체 생명의 자리에서는 그것이 강함과 아름다움이 됩니다. 세상을 바꾸고 구원을 가져다주는 은총은 바로 약함과 못남의 자리에서 가질 수 있는 생명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과 겸허함입니다.
얼마 전 소설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저도 곧장 한강의 책,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채식주의자』를 구입해서 읽고 있습니다.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유는 이러했습니다. “한강의 작품은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하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다.” “한강은 작품에서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칙에 맞서며, 작품마다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다.” “한강은 육체와 영혼, 산자와 죽은 자 사이의 연결에 대한 독특한 인식을 갖고 있으며, 시적이고 실험적인 스타일로 현대 산문의 혁신가가 되었다.” 그렇습니다. 이 세계는 폭력적인 현실 속에 처한 인간 삶의 연약함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는 섣불리 기독교가 이런 인간 삶의 연약함에 대한 대답을 주리라 결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생각하는 기독교의 복음은 대답을 주는 종교가 아니라 이 연약함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품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온전하신 하나님이 온전한 사랑으로 이 세계를 무차별하게 품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이해할 수 없는 은총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전체 생명의 자리에서 살아내고 살려내라는 하나님의 절대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이 복된 부르심 속에서 온전한 복음을 향해 나아가는 생명사랑교회와 성도님들이 되길 희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온전한 사랑으로 온 세상을 품으시는 성삼위일체 하나님.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온 세상에 충만한 주님의 은총을 발견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조건이나 자격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의 비루하고 연약한 삶조차도 끌어안게 하옵소서. 나와 다른 사람들 심지어 내가 거부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라도 선한 자와 악한 자 모두에게 비를 내리시는 온전한 주님의 은총의 눈으로 보고 이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세계를 병들게 하는 분열과 분리, 대립과 폭력, 무관심에 길들여지지 않게 하시고 전체 생명의 자리에서 우리 모두가 서로 하나임을 깨닫게 하셔서 생명에 대한 민감함과 온전한 사랑이 이 세계를 구원함을 고백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온전한 복음으로 힘있게 이끄셔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서게 하여 주옵소서. 온전한 은총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