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한문덕 목사]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에서 – 2024년 7월 7일

히브리서 412-13, 요한계시록 212-17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

오늘은 소아시아 지역 버가모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이제 막 생겨나던 시절, 교회는 자체 건물을 갖기가 어려웠습니다. 대개는 그나마 조금 넓은 집을 가지고 있는 어느 교인의 집에서 모여서 예배를 드리거나, 아니면 무덤으로 사용되는 동굴의 공터에 모여 예배를 드리곤 했지요. 오늘 우리가 버가모 교회라고 부를 때, 오늘날처럼 번듯한 건물이 있는 교회를 생각하면 안 됩니다. 버가모 교회란 ‘버가모 지역에 살고 있는 교인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저자가 편지를 써 보내면 이들은 이 편지를 각 가정마다 돌려가면서 읽거나, 아니면 주일 예배로 모였을 때, 함께 낭독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의 편지나 베드로의 서신, 요한계시록 같은 문서를 읽을 때는 바로 이런 상황들을 떠올리면서 읽어야 합니다.

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날카로운 양날 칼을 가지신 분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시작부터가 좀 무시무시하지요. 주님을 소개하면서 날카로운 양날 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한자로 칼을 뜻하는 단어는 크게 두 개가 있는데, 칼 도(刀)와 칼 검(劍)입니다. 도는 보통 요리하는데 사용하는 한쪽 면만 날카로운 칼이고, 검은 무기로서 전쟁에서 사용하는 칼이지요. 검술, 검도 등에 사용되는 단어 검(劍)이 바로 날카로운 양날칼입니다. 주님을 소개하면서 날카로운 양날칼을 가지고 있는 분이라고 한 것은 버가모 교인들이 치열한 영적 전쟁의 한복판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이어서 나오는 말은 “나는 네가 어디에 거주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 곳은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다.”입니다. 버가모 교인들은 사탄의 세력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생활하였다는 것입니다.

도시 버가모를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으로 묘사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버가모가 최초로 로마 황제의 신전을 세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버가모는 기원전 3세기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 상당수를 관할하던 아탈로스 왕조의 수도로 건립된 도시인데 기원전 133년경에 로마에 편입되었고, 로마의 여느 도시처럼 로마 여신들을 위한 신전들이 있었습니다. 에베소가 발전하여 거대도시로 되기 이전에 버가모가 소아시아 지역의 수도로서 총독이 머물던 곳이었으며, 버가모에는 자신들의 주신으로 섬기던 제우스와 자신의 수호신으로 여겼던 아테네 여신을 모시는 신전도 있었습니다. 이 신전은 정면 폭이 35m, 세로 길이가 33m에, 높이는 12m에 이릅니다. 신전으로 오르는 계단의 폭도 20m나 됩니다. 그런데 버가모는 어느 도시보다 먼저 신이 아닌 로마 황제를 신격화하면서 최초로 “아우구스투스의 신전”을 세웁니다. 그래서 그리스의 최고신으로 받들어지는 제우스의 신전과 로마의 첫 황제의 신전이 동시에 세워지게 되어 오늘 성경에서는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으로 묘사되는 것입니다.

또 이곳은 세계 최초로 양피지를 개발한 곳이고, 이 고급가죽종이로 오늘날 형태의 책들을 만들었습니다. 파피루스 종이로 만든 책은 두루마리 형식이라면, 양피지 책은 옆으로 넘기는 최초의 책인 것이지요. 양피지 책을 만들게 된 경위는 학문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와의 경쟁 때문이었는데, 버가모의 도서관이 확대되면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입지를 위협하자, 이집트가 파피루스 수출을 금지했고, 버가모는 자구책으로 양피지를 발명하게 된 것입니다. 버가모 도서관에는 20만권의 장서가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50만권, 에베소의 켈수스 도서관에는 2만권이 있었으니, 버가모가 얼마나 대단한 도시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또 버가모에는 치료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아스클레피에이온, Ἀσκληπιεῖον, Asclepieion)도 있었습니다. 이 신전은 사실 의사를 키워내는 의학교이자, 병원이었습니다. 이 병원의 입구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신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죽음은 이곳에 들어갈 수 없다.”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히포크라테스가 바로 여기에서 활동했으며, 이 병원은 약초/약물 치료뿐만 아니라, 환자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 연극 공연을 하던 3,500석 규모의 원형극장을 보유하고 있었고, 심리적으로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는 터널 같은 곳에서 수면치료, 진흙 목욕 치료시설, 마사지, 도서관에서의 독서, 건강을 위한 샘물 공급 등 전인치료를 하는 곳이었습니다. 이 병원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는 클라우디오스 갈레노스(Κλαύδιος Γαληνός)인데 이 사람은 원래 버가모 출신으로 서머나와 알렉산드리아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비롯한 4명의 황제 주치의였으며, 해부학에도 조예가 깊어 두개골 절제 수술도 했습니다. 그의 연구는 19세기까지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갈레노스가 위대한 의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여기 버가모에서 검투사들의 의사로 5년간 복무하면서 다양한 상처를 치료한 경험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몇 가지 사실을 통해 버가모 또한 황제숭배의 중심지로서 자부심을 지니고 화려한 문명을 뽐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버가모 도시의 일상에는 화려한 문명을 즐기려는 온갖 향락 문화와 이곳에서 한몫 잡기 위한 경쟁과 승리한 자들의 오만함,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는 강한 열망 등이 매우 깊숙하게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도 역시 그리스도인들은 박해와 핍박에 시달렸는데, 안디바라는 교인은 순교를 당하기까지 했고, 이런 곤경 속에서도 버가모 교회는 주님을 향한 충성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순교와 배교 사이에서]

그리스-로마의 다신적 사회와 문화의 한복판에서, 전 세계적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도 배척을 받으며, 그 양쪽 어디에도 동조하지 않았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수많은 박해와 핍박을 당했고, 숱한 고문 속에서 순교를 당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난 주에 다룬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궁핍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바로 이 서머나 교회의 주교였던 폴리카르푸스는 155년 경에 순교를 당합니다. 이 폴리카르푸스의 순교는 책으로도 나와 있는데, 그가 순교 당할 때의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폴리카르푸스가 경기장에 들어섰을 때, 하늘에서 “폴리카르푸스야, 힘을 내고 용감해져라” 하는 소리가 울렸습니다. 아무도 말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으나, 거기에 있던 우리 공동체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 중략 ~ 그가 끌려왔을 때, 전 집정관은 그가 폴리카르푸스인지를 물었습니다. 폴리카르푸스가 이를 시인하자 전 집정관은 그에게 그리스도인임을 부인하도록 설득하였습니다. “‘당신의 나이를 생각해 보시오’라고 하면서 관례적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습니다. “황제의 수호신에게 맹세하고, 마음을 바꾸시오. 그리고 ‘무신론자들을 없애라!’ 하고 말하시오.” ~ 중략 ~ “(황제의 수호신에게) 맹세하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을 풀어 주겠소. 그리스도를 모독하시오.” 하고 다그쳐 경고하자 폴리카르푸스가 대답했습니다. “여든여섯 해 동안 나는 그분을 섬겼습니다. 그분은 나에게 어떤 그릇된 행위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구원하신 왕을 어떻게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폴리카르푸스 순교록 9장에서 발췌)

서머나 교회의 주교였던 폴리카르푸스가 155년에 86세의 나이로 죽음을 당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는데, 요한계시록은 95년경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만약 폴리카르푸스가 이 때에도 서머나 교회에 있었다면, 26살에 이 편지를 받았을 것인데, 무려 60년이나 험난한 박해의 세월을 견디며 믿음을 지켜냈던 것입니다. 정말 대단한 신앙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쪽에서는 안디바나 폴리카르푸스처럼 이렇게 끝까지 믿음을 지켜내며 순교를 당하는 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또 다른 한쪽에서는 배교도 일어나고, 배신자들에 의한 밀고와 이중 박해도 진행되었습니다. 오늘 버가모에는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과 니골라 당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고 성경은 적시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양날칼을 가지신 분께서 직접 그들과 싸우시겠다고까지 합니다. 이들이 신앙의 순결함을 헤치고,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왜곡시키며, 그것으로 심지어 성령을 모독하는 일까지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니골라 당에 대해서는 에베소 교회를 다루면서 말씀드렸으니, 오늘은 발람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민수기 22~24장), 발람은 모압의 예언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모압의 왕 발락은 매우 큰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대제국 애굽마저 물리친 야훼 하나님을 따르는 무리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자신들도 멸망시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자신들의 점술가이자 예언자인 발람을 시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는 예언을 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발람 또한 야훼 하나님이 두려운 나머지 저주의 예언 대신 4번에 걸친 축복의 예언을 합니다. 이렇게 되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축복하는 발람에게 호의를 갖게 되고, 나중에 모압의 여인들이 이스라엘 남성들과 음행을 벌이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25장, 31장 16절) 성경은 모압의 여성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꾀어 주님을 배신하게 하고, 주님의 회중들이 염병에 들어 죽음을 당했던 일이 발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고, 그래서 이후 유대교 신앙 전통은 발람이야말로 이방 종교와 야훼 종교를 마구 혼합하여 뒤섞게 하는 원흉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에서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에 대한 책망은 바로 당시 버가모에서 로마문화에 동화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책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4월 명랑책방에서 우리는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라는 소설을 통해 순교와 배교 사이에서 과연 믿음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논의한 적이 있습니다. 과연 오늘날도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왜 오늘 성경 말씀은 주님을 날카로운 양날칼을 지닌 검투사처럼 소개하면서 니골라당과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과 싸우겠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니골라당이나 발람의 가르침은 모두 오늘날 사회의 언어로 번역하면 “잘나가는 삶”을 누리는 것인데 말입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으며, 문화적으로도 세련된 삶을 사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인데, 그것이 뭐 그렇게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고 물을 수 있습니다. 사실 모두가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다면야 괜찮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만이 돈과 권력, 문화를 향유하고 있고, 그 소수가 그런 자리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다수를 짓밟고 온갖 악행을 저지른 것이라면 확실히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로마 황제 중 누구를 섬기는가 하는 문제는 단순히 종교적 선택의 문제라기보다 우리 사회의 온갖 죄악을 어떻게 극복하여 모두가 상생하는 세상을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바로 이런 자리에서 순교와 배교를 말했던 것입니다.

[거대한 악에 대하여]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 본문에서 제 맘속에 깊숙이 박힌 말은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라는 구절입니다. 버가모 교회 교인들이 처한 상황에서는 바로 로마 황제가 신으로 숭배되면서 무자비한 폭력으로 전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정의와 평화, 자유와 평등, 상생과 사랑의 정신이 아니라 오로지 독재자 한 사람이 자기 멋대로, 힘을 가지고 다수를 내리누르고, 소수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다수가 고통당하는 그 현실이 바로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 됩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은 독재자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시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에게 나라의 살림을 맡기고, 그가 자기의 욕망대로 하지 못하도록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들을 통해 만든 법을 따르게 하며, 그것을 어길 경우 사법적 절차를 통해 적절하게 제어하는 시스템입니다. 우리 모두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삼권분립의 민주주의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왕정이 아니라 민주정인 오늘날에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마치 사탄의 왕좌가 있는 것처럼 억울한 죽음과 말로 안 되는 폭력, 인간을 깊은 수렁으로 몰아넣는 죄악들이 가득합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주님을 향한 충성을 간직하고 니골라 당과 발람의 가르침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에베소 교회나 서머나 교회, 버가모 교회가 맞서 싸워야 했던 것은 모든 권력의 정점에 있던 로마 황제요, 로마 황제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는 불평등한 제도와 사회적 시스템이었습니다. 오늘날은 왕정은 아닙니다만, 여전히 존재하는 우리 사회의 온갖 사탄적 세력에 맞서서 우리 또한 싸울 필요가 있습니다.

좀 더 문명화된 사회는 힘과 권력이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 하고, 구성원 전체 중 어느 누구 하나도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법과 원칙들을 만들어 놓습니다. 우리나라도 헌법을 비롯하여 정말 다양한 법조문이 있고, 이것에 따라 사회를 운영하는 법치주의 사회입니다. 헌법 11조에 보면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사회적 특수 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만약 이런 법치주의 원칙들이 무너진다면, 바로 거기가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겪는 일이지만 돈이 많은 재벌, 공권력을 부릴 수 있는 행정부의 주요 관리들, 법을 직접 다루는 국가공무원인 검사들, 재판의 주체가 되는 판사들, 국민의 여론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언론인들의 경우, 어떤 이들은 모든 법과 상관없이, 또는 모든 법 위에 군림하여 행동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소수의 기득권자들이 법 위에 서서 제멋대로 할 때, 반드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생기고,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좀 더 문명화된 사회는 우리 일상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법이 촘촘하게 구체적으로 마련되어 있고, 그것을 행사하는 과정과 절차도 매우 투명하고 공정합니다. 그러나 이런 법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그 사회는 불안하고 위험하고 스트레스와 분노가 많은 사회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법조문은 우리네 인생의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삶을 다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법도 매번 개정되고, 새로운 법이 만들어지기도 하지요. 더불어서 법에는 없지만 한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 전체가 마음으로부터 이미 알고 있고, 행하는 공통의 윤리의식과 상식이 있습니다. 공통의 윤리의식 수준이 높을수록 사회는 더 살기 좋은 곳이 됩니다.

예를 들면 횡단보도에 사람들이 지나갈 때 차를 미리미리 정차하여 보행자의 안전을 우선시한다든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장애인과 약자를 배려하여 줄서기를 하고, 장애인을 위한 지정 좌석을 마련한다든지 하는 공통의 윤리적 감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의 물건을 함부로 가져가지 않고, 식당이나 휴게실 같은 곳에 휴대전화를 두고 화장실에 다녀와도 도난당하는 일이 별로 없는데, 이같은 사회적 신뢰 자산 같은 것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이 사람을 존중하고, 모든 살아 있는 것을 귀히 여기며 그들을 배려하려면 모든 사람이 조금 더 인간적인 면모를 갖추어야 합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소중한 가치들과 전 세계 사람들이 함께 지향하는 여러 귀중한 가치들을 지켜내는 이들이 많아야 합니다.

오늘날은 고대 사회의 전제 군주 같은 사람은 없지만, 그 자리에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돈을 올려놓으면, 우리가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에 세상은 망가지고 불안과 두려움이 더 많은 사회가 됩니다. 최근 필리버스터를 하던 국민의 힘 주진우 의원이 채상병 사망 사건을 군 장비 파손에 빗대어 이야기를 해서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고 있습니다. 사람을 하나의 물건으로 취급하려는 사고와 생각은 돈이 중심이 되고 힘을 숭상하며, 개개인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는 전체주의적 사유 속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많은 것을 소유하면 국민을 개돼지로 알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남의 목숨도 파리목숨처럼 생각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들에게만 모든 문제를 돌려서는 안됩니다. 사탄의 왕좌가 있는 자리를 만들어 내는 일에 어쩌면 우리도 한몫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철학자 중 한 명인 찰스 테일러는 우리 사회의 문명이 분명히 발전하고 있음에도 사람들이 상실감과 몰락의 느낌을 갖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현대 사회가 지니고 있는 개인주의, 도구적 이성의 지배,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현대인들로 하여금 불안하고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말이 조금 어려운데 쉽게 풀어보자면, 현대인들은 과거 사람들처럼 자신을 어떤 큰 질서의 한 부분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를 전체로 여기며 오로지 자신의 안락이라고 하는 좁은 영역에 자신을 가두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자기중심적인 개인이 편협한 시야 속에서 자기가 생각하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가장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방식만을 고집한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효율성 중독에 빠지는 것인데, 테일러가 말하는 도구적 이성은 바로 이런 효율성만을 생각하는 이성입니다. 자기만 생각하며 자기의 목적에만 봉사하려는 현대인들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정치활동에 잘 참여하려 들지 않고, 그래서 국가와 사회의 기능은 갈수록 관료화되면서 점점 시민과 국가가 멀어지게 된다고 분석합니다. 즉 더 간단히 말해서 자기만 아는 개인주의자들이 단편적으로 자기에게 유익한 것만을 생각하면서 모두에게 필요한 것들에는 전혀 동참하지 않을 때, 우리 사회는 온갖 죄악과 불안과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으로 바뀌어 간다는 것입니다.

찰스 테일러가 분석한 대로 오늘 세상은 정말로 그렇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함께 사는 세상에는 서로를 향한 보살핌과 특히 아프고 약한 이에 대한 연민과 공감의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오늘날 세상은 이타적 행동에 대해서 어리석은 짓이나 위선으로 낙인찍고,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적 행동을 마치 능력이 있는 지혜로운 것처럼 말합니다. 저는 이 상황이 마치 버가모 교인들이 느꼈던 사탄의 왕좌가 있는 자리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세상 풍조에 휩쓸려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공동체적 삶을 지향해야 합니다. 나도 중요하지만 모두가 함께 안전하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을 함께 꿈꾸어야 합니다. 우리 세상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히브리서의 말씀을 기억하며 늘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몸과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를 분석하고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의 속마음까지도 다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잘못된 것은 고치고 잘하는 것은 더 잘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만나를 얻고, 주님께서 인정해 주신다는 표시의 흰돌을 얻으려면, 우리는 사탄의 왕좌가 있는 것에서 더욱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진리에 서서 이기적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서 흘리신 피를 생각하며 믿음의 형제 자매와 이웃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적인 이익에만 골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 꼭 필요한 공적인 역할이 무엇이 있을지 진지하게 생각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21세기 사탄의 왕좌는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를 속이고 유혹하려 할 때, 우리는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양날칼로 맞서 싸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 이번 한 주도 하늘의 양식을 얻고, 주님께 인정받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하나님! 오늘 우리는 버가모 교회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버가모 교인들이 순교를 당하는 지경에서도 믿음을 지킨 것에 대해 박수를 보냅니다. 그러나 발람의 가르침과 니골라당의 무리에 동화된 이들도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사탄의 왕좌가 세워진 곳은 어디인지 살피게 하시고, 그 어떤 곳에서도 오로지 주님의 말씀과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일구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소서. 세상 풍조는 때때로 주님의 거룩한 말씀에 저항합니다. 거역하고 멸시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래서 덩달아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우리들마저 고난을 당하는 일들이 생깁니다. 그럴 때 용기를 주시고, 하늘의 지혜로 이겨내게 하소서. 끝까지 잘 싸워서 주님이 주시는 만나, 주님께서 새 이름을 새겨서 주시는 흰돌을 얻게 하소서. 우리의 친구이시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장마가 전국적으로 한창 진행되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사고 소식도 들리고, 비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한숨 또한 늘어납니다. 장마가 그치고 다시 일상을 회복할 때 주님께서 위로해 주시고, 모두가 서로 돕는 마음이 되게 하여 주소서.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통해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지의 구름이 걷히고, 우리의 모든 이웃이 주님의 향기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나의 고집과 아집, 편견과 무지를 깨고 주님께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신 은혜도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삶과 예물을 드립니다. 꼭 필요한 곳에 써 주소서.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곳에, 생명을 살리고 복음의 소식을 전하는 곳에 쓰이게 하소서. 생명사랑교회의 모든 사역을 통하여 우리 믿음이 굳세어지고 더욱 더 주님과 가까워지게 하여 주소서. 사탄의 왕좌가 서 있는 곳을 볼 때 더욱 더 용기를 내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에 더 충성된 우리가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에서도 하늘의 고결함을 간직하십시오. 세상 풍조에 맞서 싸우고 거룩한 향기를 뿜어내십시오.

* 축도

지금은 산 자에게 사랑을, 죽은 이에게는 평화를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와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과 성령의 거룩한 사귐, 애틋한 위로가 사랑과 지혜의 영, 거룩한 영의 가르침에 따라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려는 생명사랑 교우들 위에, 거룩한 영을 힘입어 주님의 자녀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전국의 모든 성도들 위에, 이 땅에서 고난 당하며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작은 형제자매들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