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은영 목사] 역사의 증인 – 2025년 3월 30일
이사야서 30장 8-18절, 요한계시록 3장1-6절
오늘은 사순절 넷째 주일이자 또한 총회 순교자 기념 주일 그리고 제주 4.3. 기념 주일입니다. 어쩌면 기념이라는 것은 곧 과거의 일을 현재로 되살려서 미래 우리가 살아갈 방향을 정하는 행위입니다. 현재 파악하는 앞으로 미래에 살아갈 방향을 생각해서 과거를 다시 기억한다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까요. 세상 속에서 조롱받고 박해받던 그리스도의 가치를 살아냄으로써 죽음을 무릅 쓴 이들을 순교자라고 부를 때, 마르투스라는 그 용어는 증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순교자는 기념되기에 순교자입니다. 우리가 순교자를 기념하면서, 곧 그들이 생명을 버려가며 지킨 가치를 살아내리라 결심하기 때문입니다. 4.3 역시 우리가 함께 기억해야 할 사안입니다. 6.25. 까지 이어지는 좌우 대립과 내전 상황 속에서 서로 충돌한 가치관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앞서서, 가장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사실은 국가 폭력에 의한 희생, 그리고 그 가운데 서북 청년단이라고 알려진 기독교인에 의해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의 죄책입니다. 역사의 비극의 현장 속에서, 폭력 앞에서 죄없이 국가 폭력의 희생양으로 죽어간 이들의 희생을 기념할 때, 역시 우리는 또 다른 방식으로 그들의 증인됨을 듣습니다. 순교자의 죽음에 대한 기념이 그들이 증언한 가치를 이어받아 살겠다는 우리의 각오라면, 희생자들에 대한 기념은 곧 죄없이 학살당한 그들의 죽음을 기념하면서 국가 폭력에 대해서 비판하겠다는 결단이며, 민간인들이 서로를 학살하고 비인간화한 증오와 혐오를 멈추겠다는 각오이며, 더 나아가서 그러한 학살을 자행한 이들과 그러한 체제들을 우리의 삶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에 들여놓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우리는 현재 헌재의 판결을 앞두고, 결국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무엇인가를 기념하게 될일을 가질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최악의 경우 일시적인 후퇴는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되든 간에, 결국 여러 도는 길 이후에 그 모든 것을 후대의 세대는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서 역사에서 결국 부정되어야 할 것으로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과거에 대한 기념은 곧 우리의 미래의 삶을 위해서 지향할 가치를 바탕으로 현재 우리의 시선으로 과거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또한 이상중 목사님 취임식이 있는 날입니다. 어쩌면 목사님의 취임에 앞서서 기억과 해석의 공동체로서 생명 사랑 교회가 무엇을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지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흥미롭게도 삶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두 가지 책이 나옵니다. 우리가 읽은 이사야 30장과 계시록 3장 모두 각각 두 가지 책이 등장합니다. 한 책은 이사야가 명령받은 바, 유다 백성의 불순종이 기록될 책이고, 다른 한 책은 사데 교회의 신도들 중 순종할 이들이 기록될 생명의 책입니다. 두 책 모두 서로 다른 두 부류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억되고 기념될 책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이들 모두 공통점이라면 나름 대로 자신이 처해있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백성의 삶으로 성공했는가 혹은 실패했는가에 따라서 판별받게 되고 그것이 영원히 기억되고 기념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날, 그들의 삶은 모두 지나갔지만, 현재 우리는 그들의 삶을 성서를 읽으면서 기억하면서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각오를 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30장에서 이사야는 유다 백성의 반역의 삶이 영원히 기억되게끔 기록을 남기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유다는 당시 날로 강성해지는 아시리아의 위력 앞에서 자신들의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서 아시리아에 대항하는 이집트-시리아 동맹에 편입하였습니다. 이사야는 지속적으로 섣불리 동맹을 맺고 부화뇌동하기 보다는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라고 했지만, 유다의 지휘부들과 소위 거짓 예언자들은 당장 자신들에게 좀 더 명확히 드러나는 동맹의 힘과 자기 자신의 힘을 의지하였습니다. 사실 그러나 이사야의 선포는 단순한 외교 정책에 대한 훈수의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거짓 예언자는 친-이집트 파이고 이사야는 단순히 친-아시리아 파라는 문제가 아닙니다. 예언자의 비판은 단순한 국제 정치의 관계학이 아니라 예언을 듣는 유다 백성이 하나님에 대해서 가지는 관계에 대한 충실성과 그 결과로 인한 이웃에 대한 억압과 사악함을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보기에 유다 백성을 규정하는 특징은 반역, 자기기만, 그리고 무법성과 고집 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모두가 자신들에게 전달되어지는 하나님의 뜻, 즉 선포되는 예언에 대해서 그들이 가지는 태도입니다. 이사야가 보기에 유다는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없고 단순히 그들 스스로의 힘과 계략에만 의존하는 이들입니다. 앞서 30장 3절에 드러나다시피,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는 계략과 모의에 의존하며 이집트의 힘만을 의지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힘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드러난 힘만을 의지하고 그 속에서 안전을 찾고자 하는 이들이란 점에서 반역의 백성입니다. 그들은 또한 그들 스스로를 격려하는 듣기 좋은 말만 듣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이웃에 대한 불의를 멈추라는 예언은 피한다는 점에서 자기 기만에 깊이 빠져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서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자신의 힘을 지탱하고 유지시켜 줄 하나님 아닌 존재들, 그것이 자신의 군사력이건, 혹은 이집트의 군사력이건, 아니면 동맹이 가진 억지력이건, 에 의존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맹목적인 생존만을 원칙없이 도모하려 하기에 불법적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자신의 잘못 자체를 일깨우는 여하의 소리를 듣고자 하지 않고 들리는 소리 조차 억압한다는 점에서 어리석은 고집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과 왜곡된 관계는 결국 이웃과 사회에 대한 왜곡된 관계를 낳게 됩니다. “너희가 이 말을 업신여기고, 억압과 사악한 일을 옳은 일로 여겨서, 그것에 의지하였으니,“ 즉,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이집트의 힘만을 의존하고, 예언을 통해서 전달된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면, 결국 내부의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정의의 원칙이 아닌 힘과 압제의 원칙만이 횡행하게 됩니다. 결국 삶의 준거점을 무력해 보이고 또한 인내를 요구하는 하나님의 가치가 아니라 생존과 번성을 보장해주는 힘만을 숭상함으로써, 결국 공동체 구성원들의 삶 역시 서로 자신의 힘에 따라서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며 그 사악함을 정의이자 질서로 여기는 일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생존이 아니라 필연적인 붕괴와 몰락입니다. 13절에서 17절 까지 이어지는 것은 결국 모든 믿을만한 그럴싸한 것들이 차츰차츰 무너지는 상황입니다. 지켜줄 것 같은 성벽은 무너져내리고, 단단한 항아리는 깨져버리고, 불씨를 담을 아궁이에는 불씨가 없고, 물을 줄 웅덩이에는 물이 없고, 신속한 도망은 더 신속한 추격에 의해서 좌절되며, 군대를 소집하는 깃발이 서있음에도 군대는 뿔뿔히 흩어집니다. 이사야는 결국 하나님 없이 자신의 힘 속에서 모든 안정과 신뢰감을 찾으려는 시도는 결국 그 힘의 무력함으로 인해서 좌절될 것을 이야기합니다. 일종의 힘과 권력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15절에 그 반대의 역설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곧 자신의 힘에 의존하기를 포기하고 단순한 내어 맡김 속에서 잠잠하고 신뢰할 때, 진정한 구원을 얻게 될 것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결국 그 상황에서 찾을 것이 구원이라면, 그것은 나의 힘에 의존하려는 투쟁이 아니라 보이지 않고 없는 듯 보이는 상황에서 그 분께 내어드리고 내어맡김 속에서 잠잠하게 기다리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유다는 결국 자신의 힘만을 의지하는 것을 선택했고 그로 인해서 그 어리석음과 심판은 영원히 기록되어서 오늘 날 우리가 우리의 삶을 점검하기 위해서 기억되고 있습니다.
개인의 삶이나 공동체와 국가의 삶 모두 그 자신의 힘 혹은 장점에 지나친 신뢰감을 가짐으로써 그로 인해서 몰락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가깝게는 개인이 하는 투기적인 주식 투자의 실패에서부터 혹은 워너비-독재자의 자만과 자기 과신이 불러일으키는 친위 쿠데타의 실패, 그리고 강대국의 오만함에 기인한 오판과 이로 인한 무리한 해외 원정으로 인한 실패 등등. 이 모든 것을 헤아리는 것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릇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힘과 계획이나 아니라 역사의 한 복판에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묻고 이를 살아가려 노력해야 합니다. 때로는 허공을 치는 것 같거나 혼잣말 속에서 뱅뱅도는 느낌이 있을지언정, 누구나 다 그렇다고 긍정하고 또한 의존할법한 강하고 신뢰할 만한 힘이나 보장된 결과 등이 아니라 불가능해보이고 또한 자신의 삶을 취약하게 하는 것일 찌라도, 선하고 아름다운 가치를 찾아내고 그러한 가치를 최대한 자신의 삶에서 가져오려는 노력을 해야합니다. 물론 우리의 인생은 언제나 애매하고, 삶에서 이런저런 셈과 헤아림을 아니 할 수 없기에, 그러한 가치를 살아내는 것이 언제나 뚜렷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뚜렷하지 않은 것이 캄캄한 것은 아니고, 적어도 조금이나마 자신의 삶의 약함을 각오하면서 지켜야 할 가치들을 고수하려 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이름으로 역시 이사야에 나온 유다의 경우처럼 하나님을 단지 장식품으로 만들고 실제로 보이는 힘에 의존하고 숭상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소위 보수 우익 기독교의 이름으로 한미동맹 자체나 자유시장경제나 혹은 윤석열의 계엄 시도가 마치 교회를 지켜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만큼 더 교회가 이를 수호하려고 하는 일들이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때로는 진보 기독교에서도 일어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만일 정권이 교체된다면, 양당제적 권력 관계 속에서 단순히 진보적 정권의 우군으로서 동원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이든, 교회가 드러내는 정치적 실존은 현실 정치가 양당제적 기득권 층들의 정치 놀음과 대중 동원에서 담아내지 못하는 사회의 외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곳에서는 이웃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나누고 마음을 고치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구체적 이웃 사랑과 그들을 위한 정치적 호소와 행정적 민원 제기, 그리고 정치적 운동이 구분되지 않는 곳일 것입니다.
이제 오늘 살펴볼 계시록 3장에는 또 다른 종류의 기억을 의미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의 이름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생명책입니다. 오늘 계시록의 본문은 바로 사데 교회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계시록은 주로 학자들이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기 박해의 상황에서 그러니까 약 90년대 정도에 쓰여졌다고 보곤 합니다. 당시의 상황에서 도미티아누스는 자기 자신을 신격화해서, 주이자 신으로 부르게 하고 특히 유일신교에 대한 박해를 자행했습니다. 로마 안에서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또한 예루살렘 성전에 바치는 성전세를 성전 파괴 이후에 쥬피터 신에게 돌리는 정책을 강요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의 측근인 사촌 부부가 기독교로 개종을 하자 이들을 처형 혹은 유배 보내고 그 과정에서 소아시아 일대에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박해가 자행되었던 상황입니다. 기독교인 됨 자체가 완전히 소수자가 된 상태 속에서 그 존재 자체가 위험이 되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계시록 저자는 생명책을 언급합니다. 생명책은 유대-기독교 묵시 사상 전통에서 역사 속에서 시련을 거쳐서 그 의로움을 증거한 의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서 이후에 종말의 시간에 그 생명을 약속하고 보장해주는 책입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전체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박해받는 상황 속에서 모든 이들이 아니라 오직 소수만이 그 생명책에 기록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바짝 긴장하게 하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어쩌면 너무 힘든 상황 속에서 더욱 힘빠지게 할 만큼 엄혹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은 곧 그리스도로서 이는 종말의 시간에 하나님의 통치권이 가지는 권위와 영광이 그리스도에게 위탁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어떤 면에서 그 분이 사데 교회 교인들에게서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살아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자이다”할 때, 이는 역사의 종말을 가져오는 분이자 심판하시는 분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평판이나 세간의 평가와는 별개로, 역사 안에서 우리의 행위와 실천 이면에 본심, 즉 내면의 생명을 궤뚫어보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 역사를 이끌어가시며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그 속으로 이끌어가시면서 정화하여서 알곡과 가라지, 혹은 남은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나누십니다. 계시록 저자의 예언은 곧 사데 교회의 교인들 역시 그러한 역사 속에서의 심판의 시간을 겪어나갈 것을 강조합니다. 어쩌면 대 박해의 시간 속에서 교회 구성원들에게 교회에 속했다라는 사실 만으로 격려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오늘 계시록의 예언은 단지 교회에 속해서 사람의 눈으로 평판을 받는 것을 넘어서, 그 행위 자체의 완전함을 구현하지 못한다면, 결국 교회에 속하지 않은 것과 다를 것이 없음을 강조합니다. 살아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 죽은 것이라는 주장은 외부의 사람들의 평가가 그들의 행동 속에서 일종의 독특한 삶이 있다라고 우호적이었을지라도, 실재로 그 행동 배후의 내면의 삶을 볼 때, 그 삶은 단지 가식일 뿐이었고 진정한 생명이 없다는 것을 그리스도가 궤뚫어보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어떤 면에서 교회에 속하면서 박해를 받아서 살아가면서 외부인들에게 무언가 독특한 삶의 가치를 지킨다라고 평가받는 이들에게 너희들 대다수는 실재로 교회에 속하지 않은 이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죽은자와 같다라는 야박한 평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야박한 것일까요? 이는 역사 속에서, 즉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속에서, 심판은 언제나 이루어지고, 그 속에서 알곡과 가라지가 갈라지고 알곡으로서 남은 자는 그 만큼 더욱 알곡으로서 그 심판을 이겨낼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깨어있는 상태 속에서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과정은 언제나 결단을 요구하며, 그 결단은 바로 나의 내면의 신앙이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살아있는 참 신앙인가 아니면 단지 외면의 소속감이나 상황 속에서 휩쓸려가서 스러지는 죽은 신앙인가를 가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결단의 순간은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저 멀리 있는 영원한 시간에서부터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나에게 오는 순간이며 또한 나의 마음의 깊이에서부터 나의 삶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순간입니다. 저 먼 그리스도가 나의 선택의 순간으로 걸어들어오는 것입니다. 매 순간 우리는 우리의 선택 앞에서 그리스도의 심판에 서게 됩니다. 2절에서 보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깨어있으라!를 외치며, 죽어가는 이들을 굳건하게 하며,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행위의 완전함을 요구합니다. 이는 우리 스스로 역사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그 일을 할 수 있게끔 각성 상태에 있고 동시에 언제나 성찰 중이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합니다. 또한 더 나아가서 우리 주변에 있는 그리스도의 형제들 중에서 그 심지를 잃어가는 이들을 다시 새우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 속에서 그 동기의 순수함은 물론 그 결과의 효력 까지도 꼼꼼하고 세세하게 따져서 최대한의 완전성을 새울 수 있게끔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와 만남의 순간 혹은 심판의 순간은 나의 삶 마지막에 이루어지거나 혹은 나의 삶의 거창한 어느 정점에 주어지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계시록의 예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네가 깨어있지 않으면 나는 도적같이 올 것인데, 어느 때에 내가 네게 올지를 알지 못한다.” 이 구절은 평이한 듯 하지만 대단히 어렵습니다. 깨어있지 않고 그냥 저냥 흘러가듯 살아갈 때, 우리는 마치 강도의 습격을 받듯 그렇게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언제나 지연되는 듯 보이기에,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때로는 어차피 오지 않을 약속이라고 생각하고 넘기곤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그리스도를 만나는 시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날 때, 우리 삶 동안에 충분히 깨어있지 않다면, 나는 나의 죽음 앞에서 그리고 역사의 현실 속에서, 너무 늦은, 회한으로 가득차고 민망한 마지막 깨어있음만을 남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사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일까요. 다시 오늘의 주제로 돌아가자면 어떻게 역사의 한복판에서 살아가야지, 과연 생명책에, 즉 하나님의 백성의 삶으로 하나님에게 기억될 수 있을까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스스로 깨어있고, 형제들을 살리고, 행동의 완전성을 내면과 외면 모두에서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깨어있음은 세상과 구분되고 세상과 대비되는 삶을 상징하는 “흰 옷”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그리스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힘과 자신의 세력의 범위와 기한에 따라서 매순간 순간을 이해 득실만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을 가도 정승이 죽으면 가지 않는다는 속담은 바로 사람들은 저마다의 힘의 추구와 이해 득실에 따라서 타인의 힘의 범위와 기한을 계산하며 이용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가치 속에서는 구원의 역사 속에서 담당하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생각이나, 그 앞에서의 의로움 같은 개념은 없습니다. 오로지 나의 미미한 삶 속에서 나의 힘을 최대한 증폭시키려고 다른 사람의 힘을 쥐어짜거나 혹은 올라타는 것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가치에 때가 타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의 흰 옷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어놓은 어린 양처럼, 자신의 힘을 내어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의 도구가 되어서, 언제나 깨어있고 그의 이웃을 살리고, 그 삶의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때로는 역사의 위급한 순간에 다른 이를 위해서 그리고 다른 이와 함께 공동의 대의를 이루어가는 일을 하는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동시에 그 삶은 평온한 일상의 삶에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간에 다른 이의 삶을 돌보며 함께 살아가는 도움과 섬김의 삶일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 건 간에, 결단을 해야 할 때, 주목을 받지 못해도 가장 그늘진 곳에서 그리고 가장 구체적인 곳에서 사람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도구로서 스스로 깨어있으며 형제 자매를 살리고 그 행동의 최대한의 완전함을 추구하며 사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의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 혹은 생명책에 기록되는 삶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생명 사랑 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의 선택은 우리의 삶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책에 매순간 기록되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매 순간 기억하십니다. 그 때 우리는 결국 나 자신의 힘을 확인하며 도취되며 사는 길로 향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약속 만을 바라며 자신을 하나님에게 내어맡기고 결단하며 역사의 삶 속에 자기 일을 담당하는 일을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그리스도를 내 안애 품은 살아있는 신앙을 어떻게 살아낼 수 있는가, 그리고 이를 위해서 나는 어떻게 결단해야 하는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 같이 기도하십시다.
사랑의 주님. 저희를 주님의 품 안에 부르시고 또한 역사 속에서 주님을 따라 하나님의 일의 도구로 저희를 불러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주님, 저희는 그럼에도 얼마나 결국 나의 삶의 선택을 나의 힘이나 나의 유익을 위해서 끌고 갔는지, 나 자신의 삶을 위해서만 살려고 했는지를, 돌이키며 고백합니다. 주님 저희로 하여금 매 순간 깨어있게 하셔서 저희 안의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산 믿음이 되게 하시고, 저희의 역사적 환경이 어떠하건 간에 저희의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드러나게 하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