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황은영 목사] 만유의 주이신 그리스도를 따라서 – 2024년 10월 6일

히브리서 1장 1-4절, 2장 5-12절

8년간 시무하시던 한 목사님이 하나님께서 주신 다른 사역을 하시러 가신 후 첫 설교를 제가 맡았기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든든한 버팀목이신 목사님이 계셨을 때, 수련의 일부로서 설교를 할 기회를 얻었던 것과, 이제 상실감과 혼란함을 느끼실 회중 여러분 앞에서, 부족한 제가 설교를 하는 것은, 분명히 매우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더 말씀을 통한 위로와 힘이 필요로 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만큼 더 설교자의 부족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려운 상황에서도 부족하지만 또한 말씀을 통해서 저와 회중 모두가 유익을 받기를 구하고 바랄 뿐입니다.

오늘은 교단의 교회력에 따라 주어진 구절입니다. 오늘은 세계 성찬 주일입니다. 세계 성찬 주일은 서로 흩어져 있는 여러 교회들이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 지역을 넘어서 공동의 성찬을 통해서 지구적 연대성을 회복하기를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오늘의 구절에서 우리는 성찬에 관한 명시적인 내용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력에 따른 구절 선정이 잘못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은 우리가 성찬을 통해서 먹고 마시는 그리스도가 만유의 주로서, 비록 가리워져 있을 지언정, 부정의와 전쟁, 경쟁과 폭력, 기후위기와 환경 오염에 시달리는 이 세계를 힘겹게 떠받들고 계심을, 그리고 흩어진 우리 각각의 교회들은 이를 기념하며 희망이 되어서 함께 서야 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가리워지고 또한 보이지 않고, 더 나아가서 무력한 듯 보이는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게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또한 뚜렷하게 훼손되고 억눌린 이 세계를 회복시켜 가실 것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만유를 통치하시고 회복하신다는 비밀을 맡은 자로써, 희망 안에서 그 비밀을 지속적으로 드러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접하는 본문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드러나시는 광채이자 그 본질의 드러난 모습으로써 비록 힘없이 무력하고 고난을 받으시는 듯 하지만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며 우리 역시 그를 따라 고난을 받지만 그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것 입니다. 사실 이러한 요약 자체로는 본문이 주는 의미를 헤아리기 쉽지 않습니다. 왜 일까요? 우리는 우리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리고 만물이 어떤 것인지, 그것을 창조하고 보존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헤아리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신학적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해하기 힘든 상징과 논리로 넘쳐납니다. 우리 본문에서 나오듯, 하나님의 본체나, 천사들, 만물의 창조와 보존, 대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 천상의 도성 등등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하기에 이전에 많은 학자들은 히브리서를 초대 교회의 신학이 정착되고 아주 한참 후에 기원 후 100년 중반에 쓴 것으로 추정했기도 했지만, 놀랍게도 최근의 연구는 히브리서가 복음서보다도 더 일찍 쓰여진 것으로 추정하게 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이제 이 서신을 아마도 클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 이루어진 박해 이후,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전인 65년 로마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합니다. 어떤 면에서 최초의 박해의 트라우마가 다시 되살아나는 상황에서 초대 교회에서 유대적 배경을 가진 분에 의해서 작성된 정교한 신앙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실 히브리서가 결국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인 11장 1절에서 3절에 맞닿아 있는 구절입니다. 11장 1절-3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즉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입니다. 선조들은 이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으로 증언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나 있는 것에서 된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는 선조들의 믿음의 본을 따라서 희생 제사의 제사장이자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되셔서 고난을 받는 예수와 함께 믿음 안에서 고난을 견뎌내기를 권면합니다. 당시 로마의 기독교인들에게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박해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생생했고 지금 살고 있는 네로의 치세에 반기독교적인 정서는 더욱 커져가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믿음의 문제는 삶의 의미가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 삶의 이유 그 자체 였습니다. 때로는 보이는 상황 자체가 의지할 것이 없어서 연약한 희망 자체만을 붇들고 살아야하는 때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시도 비슷합니다. 이성적으로는 보이지 않고 오직 바라지도 못할 것을, 보게 하고 또한 바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당시에 무지한 이들에게는 우주는 다양한 신들이 돈, 농업, 목축, 사냥, 수공업, 예술 등등 다양한 삶의 영역들을 주관하는 힘들로 활동하면서 그들의 영향을 받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교육받은 이들에게 우주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법칙에 의해서 관할되고 조율되는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들 모두 보는 이 세상은 제국의 질서 하에서 다름 아니라 군벌과 군벌, 가문과 가문, 파당과 파당이 서로 경쟁하며, 무력을 통해서 강한 힘이 드러나는 만큼 그것이 가진 영광과 광채가 드러나며 그에 따라서 질서와 평화가 세워지는 곳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여러 신들이 돕는 것이든, 혹은 우주의 섭리가 그렇게 조율하든, 결국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강하고 두드러지는 이들의 질서와 논리, 그리고 힘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히브리서는 보이는 것을 넘어서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볼 때, 말씀이 세상을 창조하고 보존하고 유지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교리적으로 이해되는,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를 넘어섭니다. 히브리서의 선포는 우리가 세상을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논리나 힘의 흐름, 그리고 힘들의 경쟁과 타협, 비록 우리가 보기에는 명백하지만, 실재로 그것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선포되어야 할 진실은, 다른 이의 부서진 삶을 세우고 다른 이의 허물을 용서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삶을 내어놓은 삶의 방식, 즉 희생을 위한 제사장이자 희생제물로서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비록 우리의 연약한 눈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그러한 삶의 방식이 진정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고 그 길을 유지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믿을만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현실은 곧 권력들의 균형과 제국 통치의 행정적이고 법적인 시스템으로 굴러갈 뿐이었고, 기본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이유로 추방당하고 박해당하며 고난을 겪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현실은 차가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보이는 현실의 논리에 따라서 살 수 없습니다. 하기에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믿기 힘들지만 또한 결국 유일한 삶의 의미로서 그만큼 붙들 수 밖에 없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인해서 고난을 받지만, 그리고 그 믿음은 사실 믿을 만 해 보이지 않지만, 동시에 그것은 삶의 유일한 의미로서, 그만큼 그것 없이는 살기 힘든 그런 것이었습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를 통하여 온 세상을 지으신 것입니다. 왜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의 삶과 인격, 그 정신을 따름이나 믿음에 대한 논의를 넘어서서, 그리스도와 만물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아갈 까요? 2020년 이맘때, 나훈아의 테스형이라는 노래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젋은 분들에게는 그저 하나의 밈으로 소비되었지만 50-60대 분들에게는 심금을 울리는 노래였습니다. 소크라테스를 의미하는 테스 형에게 고통스런 삶의 의미를 묻는 노래입니다. 특히 “그저 와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 일반적 민초들의 삶의 어려워지는 오늘의 현실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삶은 더 이상 선물이 아닙니다. 삶은 힘들이지 않고도 또 그렇게 오는 저렴한 선물이지만 동시에 그만큼 매일 두렵게 치루어야 할 형벌이고 또한 부채이기도 합니다. 그 때 터져나오는 물음은 “세상이 왜 이래 왜이렇게 힘들어” 입니다. 지금 사는 세상이 너무나 힘들어, 죽음 보다 힘들어, 죽음 뒤의 안식을 꿈꾸기도 합니다. 하기에 “먼저가 본 저 세상은 어떤가” 묻기도 합니다. 하루하루는 결국 수난과 고통을 살아가면서 그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아는 것 만큼, 결국 세상은 무엇인가를 묻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히브리 서의 수신자 역시, 비슷한 관심을 가질 것 입니다. 히브리서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는 주제가 고난과 믿음, 그리고 속죄입니다. 역시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서 사는 삶으로 인해서 세상과 충돌하고 불화하며 고난을 받게 될 때, 우리 역시 세상이 왜 이래를 묻게 됩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테스형의 그것과 다소 다릅니다. 테스형의 대답은 나는 모르겠다 라면, 복음의 대답은 그러기에 믿어야 한다일 것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에게 나왔고 그를 통해, 그리고 그를 향해 온전해져 감을 믿으며, 그 안에서 우리의 고난 역시 의미를 가진다는 믿음입니다.

2절은 그리스도가 만물의 상속자로서 그가 우리가 사는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이야기 합니다. 전통적 신학에서 로고스 론은, 이 구절을 바탕으로 소위 그리스도가 일종의 세계를 창조하는 설계도와 같은 이성적 원리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오늘 우리의 본문이 가진 역동적인 상을 다소 약하게 합니다. 그 역동적인 상을 두드러지게 하는 요소는 바로 마지막 때입니다. 마지막 때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향해 가진 뜻과 행하시는 일이 이제 명확히 이루어지고 드러나는 때 입니다. 이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뜻을 밝히는 분은 그리스도 입니다. 그렇지만 그 그리스도의 밝히심은 오로지 믿음으로 다가서는 그리스도인들 외에는 가려져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그리스도는 현실을 움직이는 로마 제국에 매우 볼품없고 참혹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설령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부활을 고백하지만, 그 부활은 역시 그리스도인들 외에는 아무도 믿지도 알지도 않고, 더 나아가서 관심도 가지지 않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가 진정한 세계의 상속자라고 그리고 세계의 근원이라고 고백합니다.

상속자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상속자 하면 일단 지금은 유보되어 있지만 앞으로 재산을 물려받는 신분과 법적 지위를 가진 이, 그리고 동시에 그 관활권과 관리 책임이 법적으로 양도될 이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상속 혹은 유산은 성경을 관통하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아브라함의 늦둥이 이삭이나, 야곱과 에서의 장자 쟁탈전, 그리고 다윗의 자손으로서 예수 의 고백에 모두 언약 백성의 자손으로서 그 계승자가 가지는 정당한 신분 그리고 그에 따라 인정될 관할의 권리와 책임 등등의 개념이 실려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만물의 상속자라는 것, 이 역시 결국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결국 그에 대한 그리스도의 소유권, 그리스도의 주권을 드러낼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상속자라는 용어 자체가 이미 이루어짐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음의 긴장을 담고 있습니다. 상속자는 분명히 그 신분상에 있어서 물려받을 유산에 대한 소유권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물건에 대한 실질적 처분과 연관된 행위, 그리고 그에 대한 인정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미와 아직 아니의 긴장이 크면 클 수록, 이야기는 흥미로와 집니다.

여러분 아마 소공녀라는 어린이 동화를 기억하실 것 입니다. 소공자와 소공녀, 그리고 비밀의 화원 등으로 유명한 프랜시스 버넷이라는 소설가의 작품입니다. 동화책으로 혹은 어린이 명작 만화로 티브이에서 자주 틀어주었던 동화입니다. 지금도 읽히는지 모르겠지만, 엄청난 부호의 딸인 세라가 아버지의 인도에서의 사업 실패와 병으로 인한 사망 이후 다니던 기숙학교에서 하인 노릇을 하며 천대와 구박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그 도덕적인 차원에서의 고귀함과 존엄을 잃지 않고 견디다가, 아버지의 친구가 와서 실재 대박이 난 아버지의 재산을 알려주고 그 상속권을 회복시켜준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미의 차원에서 소설의 주인공 세라는 지속적으로 상속녀의 신분이었고 그 재산 역시 잃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니의 차원에서,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온갖 학대와 천대, 구박을 받습니다. 하기에 그 이미와 아직 아님의 차원의 간격이 더 크면 클 수록, 그 만큼 더 소설의 결말은 감동적이게 됩니다. 그녀가 상속녀라는 현실은 애초에 변하지 않는 진실이었고 또한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지만, 그녀가 상속녀라고 어느 누구도 인정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소설의 진행 과정에서 그녀 역시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심도 가질 수 밖에 없게끔 상황이 힘들게 돌아가지만, 결국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그녀가 기본적으로 가진 성품의 자질과 도덕적 고귀함이 바로 두드러지게 됩니다.

어쩌면 오늘 히브리서 본문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 역시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만물의 상속자 입니다. 그로부터 세상의 모든 것이 나왔고 그를 통해서 그 모든 것이 유지되고 작동하며, 결국 그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세상의 모든 것은 굴러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세상 안에서, 그것을 움직이는 듯 보이는 제국의 힘과 법칙, 그리고 세력들에 의해서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으며 살아가는 이들 역시 고난을 받으며 천대를 받고 죽음에 거의 맞닿은 삶을 끌고 갑니다. 바로 그 순간은 믿음을 포기하는 순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믿음이 강해지고 더욱 굳세어지고, 또한 더욱 깊어지며, 더욱 넓어지는 계기가 됩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의 주권이 없는 것 같지만 앞으로 그 상속권이 실행되어서 이 세계의 모든 존재들이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상속자로서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고 하나님의 본체대로의 모습이라고 선포합니다. 사실 수수께끼 같은 말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라는 말은 곧 하나님 스스로 가지는 힘과 능력, 그리고 권위가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고스란히 뿜어져 나온다는 말입니다. 소위 존재감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체대로의 모습이라는 표현은 곧 원어로 카락터, 현재 말로 캐릭터이죠, 라는 표현으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하나님의 본질 자체가 그대로 찍히는 도장, 새겨짐 혹은 각인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에서는 언제나 이 세계가 주관하는 틀과 질서가 우리의 삶에 찍히고 새겨지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각자의 삶에는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가 지향하는 가치와 권력 등이 우리를 성장 시키면서 그 흔적을 우리의 삶에 마치 문신처럼 새겨넣습니다. 로마 시대에서 바로 이러한 힘의 논리는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깊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국가적으로는 지속적으로 타국을 침략하고 복속시킴으로써 국가 자체가 가진 힘과 영광을 다시 재확인하고 자신의 힘을 다른 나라에 새겨넣으려 했습니다. 더 강한 가문과 약한 가문은 서로 간에 후견인 관계를 맺고 호의를 주고 끌어주고 그에 보답하면서 자기들의 관계 속에서 권력의 서열을 다시 새겨넣습니다. 사회에 바닥에 있거나 혹은 정복 당한 이들에게는, 반란이 일어날 경우 십자가 처형 등으로 잔혹하게 보복하고 그것을 대로에 전시함으로써 공포심을 깊이 새겨넣었습니다.

역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교육에서는 학생들이 서로 서로를 도우며 민주 시민으로서 서로 연대하며 자율적으로 통치하게 하는 시민적인 덕목을 배우지 않습니다. 우리의 교육에서는 어린 시절 부터, 다른 이에 비교해서 탁월성을 발휘해서 성공하고 나머지는 도태시키는 방식의 훈육을 우리의 육체와 영혼에 새겨넣습니다. 그리고 학폭이나 차별에서 일이 처리되는 방식 역시 언제나 좋은 배경을 가진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고 승리한다는 논리가 학생들의 삶에 새겨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냉혹한 논리는 성인이 되어서도 매 순간 우리의 삶에 새겨지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사는 그 세계 자체가 원래 전혀 다른 가치와 다른 힘으로 생겨나고 유지되고 있음을, 그리고 그 가치와 힘은 세상에는 보이지 않지만, 삶과 죽음 부활을 겪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깊이 세겨져서, 깊이 찍혀서 우리가 볼 수 있게 되었음을 증거 합니다. 폭력과 경쟁, 그리고 무자비와 위선이 가득 찬 세계에도 불구하고 그 세계가 원래 선한 가치와 선한 힘, 즉 선하신 하나님의 뜻과 힘을 구현하고 있으며 그러한 방향으로 향한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선한 가치와 힘은 일방적으로 무력하게 그것을 겪어나간 그리스도의 삶에서 깊이 아로 새겨져 있음을, 그리고 선명하게 찍혀서 드러나있음을 증거합니다. 물론 세상은 그리스도 안에 찍히고 새겨져 있는 근원적인 가치와 힘을 보지 못하고, 세상에 드러난 힘, 즉 폭력으로 혹은 욕망으로 남을 조종하고 지배하는 힘의 논리만을 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속에서 우리의 삶에도 역시 그러한 선한 가치와 선한 힘이 새겨져가고 찍히고 각인되어 감을 봅니다.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우리의 삶에 새겨져 있는 선한 힘과 가치는 경쟁과 폭력 그리고 힘의 논리가 가득 찬 현실의 세계 속에서 비록 무력하게 드러나지 않게 묻혀지는 듯 보이지만, 실재로 꼭 되어야 할 세계, 곧 당위의 세계의 본질임을 드러냅니다.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며, 또한 하나님의 본질의 모습 혹은 각인 혹은 새겨짐인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논리는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지금도 그렇고 당시에도, 세계를 창조하고 운영하며 완성시키는 그러한 힘과 가치가, 무력하게 고난을 받은 희생된, 이름 모를 한 사내에게 온전히 구현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하기에 오늘 본문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이 아니라 천사들의 다스림을 믿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세계를 창조하고 구원해나가는 하나님의 아들, 즉 그 자체로 사람이 된 하나님의 아들이 고난을 받는 다는 것, 더 나아가서 흉악범이나 당하는 십자가 형벌을 당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논리였습니다. 하기에 차라리 세계의 창조나 보존, 그리고 완성은 하나님 보다는 낫지만 하나님의 아들 보다 더 높은 위계에 있는 대천사들에 의해서 이루어질 사안이며, 그리스도는 그저 그 아래에 종속되어서 인간으로서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의 주관자라고 여기는 사고 방식이 있었습니다. 천상의 신비한 힘을 통해서 세상을 주관하는 천사들이 분명 고난받는 인간 보다 우월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현대인도 이런 점에서 마찬가지입니다. 근본적으로 세계를 이성적으로 조율하고 또한 그 안에서 진보를 이뤄가는 것에 있어서, 십자가로 대표되는 바 남을 위한 자기 희생과 고난의 가치가 필요한 것인가, 그것은 외려 진정한 세상의 발전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꼭 한 편이 희생하지 않더라도, 서로 간에 최대한 상호 이익, 혹은 윈윈을 추구하며 합리적으로 최적화된 계산을 하거나 혹은 강한 힘을 가진 리더가 알아서 현명한 통치를 하고 제대로 공동체를 조율하는 것이야 말로 더 나은 세계를 가져올 것 같다는 생각도 우리는 가질 수 있습니다. 분명히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남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며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의 가치가 세상의 모든 곳에서 구현된 것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자신의 선한 힘과 가치로 세계를 조율해 나가고 계시지만, 세계 자체는 그것을 지속적으로 배반하고 그에 어긋납니다. 8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사람에게 복종시키심으로써,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기로는, 아직도 만물이 다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실재로 만물이 복종하지 않는 듯 보이고, 만물이 남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죽는 그리스도의 삶의 가치와 힘을 따르지 않는 듯 보입니다. 세상은 로마제국의 힘의 논리를 따르는 것처럼 보이며, 이방 종교인들은 그 제국의 힘과 권력 속에서 저마다 영역들의 일을 담당하는 다양한 신들의 작용들을 믿고, 유대인들은 그 속에서 천사들의 다스림을 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그러한 세상의 힘의 논리 속에서 남을 위해서 스스로를 내어주며 고난을 겪는 그리스도의 삶이야 말로 세상을 진정한 방식으로 완성시키는 것에 꼭 필요한 가치와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가 겪는 고난의 삶으로 인해서 그를 믿는 많은 이들 역시 그의 삶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2장 10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많은 자녀를 영광에 이끌어들이실 때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으로써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를 따라서 세상의 완성을 이루어나가도록, 즉 그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동시에 땅에 떨어지는 하나의 밀알처럼 더 많은 생명의 살아남과 피어남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놓는 삶을 거쳐 가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의 창시자이신 그리스도는 바로 그 자신의 고난받는 삶을 통해서 세상 안에서 진정한 삶의 방식, 남을 위해서 스스로의 삶을 드리는 그러한 삶의 방식을, 자신 안에서 깊이 새겨내며 이를 이루어내셨습니다. 우리는 역시 바로 그러한 삶의 방식이 진정으로 세상을 창조하고 보존하며 완성하는 힘이라는 것을 믿으며 그 힘과 가치를 우리의 삶에 새겨내며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누구나 세상의 법칙, 즉 힘들이 가진 균형과 흐름, 그리고 그것을 조율하는 합리적 규칙들과 논리들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려 하는 우리는, 결국 그것은 세계의 참된 진리가 아니고 참된 진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다른 이의 살림과 세움, 그리고 용서를 위해서 자신의 삶을 내어놓는 삶이야 말로 우리의 세계를 유지시키는 진정한 힘과 가치임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생명 사랑 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 이행의 시기 속에서 많이 혼돈 스럽고 또한 무력감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을 자신의 사랑과 희생의 힘으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가 다름 아니라 바로 여러분 각자의 마음 마음에 계시고 무엇보다도 이 교회에 하나의 머리이자 하나의 몸으로 계십니다. 여러분 각자가 만유를 창조하고 보존하는 그리스도를 담아내면서, 그리고 그리스도가 여러분 각자의 삶을 통해서, 바로 이 교회를 붙들고 계십니다. 생명 사랑 교회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여러 시련의 순간을 겪어나가면서도 믿음 하나로 붙들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해왔습니다. 앞으로도 늘 그래왔던 것처럼, 묵묵하고 굳세고 믿음직하게 한국 교회와 지역 사회 안에서 하나님의 맡겨주신 소명을 교회로서 감당하리라 믿습니다.

다같이 기도하십시다.

사랑의 주님.

저희가 보이는 현실을 넘어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 믿음으로 당신을 따르도록 불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님, 당신은 당신이 모든 것들의 살아남과 회복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놓으셨던 것처럼 저희 역시 그 길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게 하옵소서. 당신을 믿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이미 모든 것을 주관하는 당신의 지혜와 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저희가 함께 믿습니다. 저희를 하나로 모으시고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분깃 대로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나가고 당신의 진정한 영광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