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한문덕 목사]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 – 2022년 3월 20일
역대지하 1장 7-12절, 시편 68편 1-6절, 누가복음서 4장 21-30절
[춘분과 부활절]
오늘과 내일 사이에 우리는 24절기의 네 번째 절기인 춘분(春分)을 맞이합니다. 태양의 황경이 0도가 되는 오늘 밤 12시 33분에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고, 이후로 낮의 길이가 더 길어집니다. 춘분은 전 세계가 다 기념하는데, 일본에서는 춘분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서양에서는 춘분 이후부터를 봄으로 봅니다.
춘분은 우리 그리스도교 절기와도 깊게 관련이 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유월절 절기는 원래 춘분 축제의 하나였습니다. 유대의 전통 달력은 태양태음력을 사용했고 1년의 시작을 바로 춘분으로 잡았는데, 그 첫 달이 니산월이며, 니산월 14일이 바로 유월절 축제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고, 거기에서 체포되어 십자가 처형을 당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고, 예수님은 죽음을 물리치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역사적 발자취를 따라 부활절 역시 춘분을 기준으로 계산합니다.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춘분이 지난 후 보름달이 되는 날로부터 맞이하는 첫 일요일을 부활절로 정합니다. 그래서 부활절은 매년 다릅니다. 고난과 죽음을 가져온 어둠과 죄악의 세력을 극복하고, 새로운 희망을 여는 부활절이 기나긴 추운 겨울을 뒤로하고 따뜻하게 맞이하는 봄의 시작을 알리는 춘분과 잘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춘분을 맞이하고, 부활절은 4월 17일인데, 60만 넘게 나오는 오미크론 신규 확진자도 오늘을 기점으로 정점을 찍고 줄어들고, 부활절에는 우리의 모든 일상이 회복되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로 깨닫고 알아야 할 사실은 봄이 와도 봄이 온 줄 모르고 겨울의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고, 겨울에도 따뜻한 봄의 삶을 연주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코로나라고 하는 위기는 전 세계에 닥쳤지만, 그것을 대하는 태도와 처신들은 저마다 다릅니다. 개인도 다르고, 국가와 사회도 다릅니다. 교회도 서로 다르게 대처했습니다. 사람은 자연의 환경과 역사의 도전에 순응만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을 생각하며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작은 일에도 크게 낙심하며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사실 행복과 불행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꾸어 가는 것입니다.
[어떤 나를 만들 것인가?]
체로키 부족 출신의 한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었습니다. “얘야, 지금 내 안에서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단다.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는 끔찍한 전쟁이지. 그 중 한 놈은 매우 사악하고 고약한 놈이야. 그놈은 분노, 질투, 전쟁, 탐욕, 슬픔, 후회, 죄책감, 열등감, 거짓말, 오만, 우월감, 이기심, 그리고 불손함과 같은 것들이란다. 다른 또 한 마리의 늑대는 매우 선하고 아름답단다. 그는 다정하고, 즐겁고, 평화롭고, 사랑이 많고, 희망적이고, 고요하고, 겸손하고, 친절하고, 정의로우며 인정이 많아. 사실 내 안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 마음 속에서는 이와 같은 전쟁이 일어나고 있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손자가 물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어떤 늑대가 이겨요?” 할아버지는 손자를 지그시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먹이를 주는 늑대란다.”
오늘 설교 제목은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입니다. 우리는 불행은 멀리 달아나고 행복만이 우리를 찾아오길 기대합니다. 그러나 세상살이란 언제나 양지와 음지가 동시에 존재하고, 행운인 줄 알았던 것이 불행이 되기도 하고 재앙이 변하여 복이 되기도 합니다. 문제는 매 상황에서 내가 누구에게 먹이를 줄 것인가 하는 선택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엔서니 드멜로 신부님은 어느 책에선가 “행복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행복하게 살면 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맨 처음에는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고 저도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읽어보고 또 읽어보다가 깨달았습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언제든 행복을 자신의 삶의 1순위로 놓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정으로 행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행복이 1순위가 아니라 다른 것이 1순위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돈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멋진 차가 있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은 언제나 두 번째로 밀려납니다. 그 사람은 행복이 아니라 돈을 찾은 것이고, 멋진 차를 삶의 1순위에 올려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이 진짜 가장 중요하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실제 행복은 조건이 없습니다. 행복의 조건을 찾다보면 행복은 멀리 달아납니다. 행복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은 행복한 날들이 늘어나지만, 조건을 따지면서 불행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은 행복의 날들이 줄어들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 더 행복한 삶을 사는 것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미 드릴 말씀은 다 드렸습니다.
여기서 설교를 마치면 많은 분들이 황당하게 여기실 것 같아서, 조금 더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편견에 사로잡혀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서의 말씀은 불행을 자초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향 나사렛에 가셔서 안식일에 회당예배에 참여하시고 설교를 하십니다. 회당 예배를 주관하는 사람으로부터 성경 두루마리를 받아 그 유명한 이사야 61장 1-2절의 말씀을 읽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다 읽으시고는 성경을 시중드는 사람에게 다시 돌려주시고, 자신을 보고 있는 회중들을 향하셔서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의 모든 동작과 어조, 눈빛과 목소리는 회당예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고,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감탄합니다. 이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고, 이사야의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그 기쁜 소식에 함께 참여했다면 이들 모두는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과 모습에 감탄한 사람들이 내놓은 반응은 이것입니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차서 갈릴리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어릴 때부터 보아 왔던 요셉의 아들만 기억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고, 모든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아, 예수의 소문이 사방 온 지역에 두루 퍼졌음에도(4:14-15), 예수의 고향 사람들은 과거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예수께서 엘리야 예언자가 이스라엘의 많은 과부를 물리치고 시돈에 있는 사렙다 과부를 돌본 이야기와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많은 피부병 환자보다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고친 이야기를 들려주자, 이들은 이성을 잃고 분노에 사로잡혀 예수를 동네 밖으로 내쫓을 뿐만 아니라, 벼랑으로 끌고 가 밀쳐 떨어뜨리려고까지 합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주의에 물들어서 하나님의 손길이 이방 사람들에게까지 닿았다는 말에 시기와 질투를 느끼고 화를 낸 것입니다. 자신이 얻은 구원을 우리의 이웃과 남들과 나누면 더욱 좋은 것인데도, 그렇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제가 살아온 인생이 길지는 않지만,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겪으면서 또 그들의 인생을 살펴보면서 깨달은 것은 사람들이 제 고집을 버리지 못해서 불행을 자초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경험한 것, 그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자신 스스로 모든 것을 해내려고 합니다. 더 나은 길이 있고, 얼마든지 자신보다 뛰어난 이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을 거부하면서 불행에게 먹이를 주게 됩니다. 오늘 나사렛 유대인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자신의 경험과 편견이 하나님의 아들을 벼랑으로 내몰게 한 것입니다. 구원이 아니라 심판을 선택하고 맙니다.
[지혜와 지식을 구하라]
우리 사람은 누구나 보고 들은 것을 오래도록 보관할 수 있는 장기 기억 장치가 있습니다. 덕분에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면서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고 진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장기 기억 장치에 저장된 옛날 기억 때문에 현재를 망치고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기도 합니다. 세상은 넓고 매우 많은 가능성들로 충만합니다.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곳에서 새로운 일이 발생하고, 새로운 길이 열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거에 묶여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본다 해도 그 길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유한성 안에 자신을 가두지 않기 위해 오늘 우리는 솔로몬과 같이 하나님께 지혜(wisdom)와 지식(knowledge)을 구해야 합니다. 지식은 우리들의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정보들을 말합니다. 생리적인 욕구를 해결하는 것에서부터 자신에게 맡겨진 일들을 처리하고 사람들 사이에 좋은 관계를 맺으며 어제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충분한 지식정보는 매우 큰 도움이 됩니다.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정보들을 자신의 삶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꿰어서 적절한 순간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는 경험과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몸이 익숙해질 때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창의적 사유와 직관적 통찰도 지혜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종류의 지혜 또한 꾸준한 노력에 의한 시간의 축적에서만 가능합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바로 이것을 달라고 한 것입니다. 지식을 쌓고 지혜를 얻는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가슴 벅찬 행복을 누립니다.
그런데 오늘 솔로몬의 간구에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바로 10절에 나오는 “이 백성을 인도하게 하여 달라”는 말입니다. 즉 솔로몬이 지식과 지혜를 구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티끌같이 많은 백성을 잘 인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솔로몬은 자신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왕으로서의 책무를 기억하고, 온 백성과 나라 즉 모든 구성원이 누리는 공공의 삶을 생각합니다.
나만의 행복이 아니라 모두의 행복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내가 더 행복해지는 지름길입니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행복할 때 나 또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얼마든지 부와 재물과 영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권력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수많은 정적을 없앨 수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보통 권력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원하는 바이고 하려는 것입니다. 보복 정치를 하고, 자신의 권력과 부를 더 늘이려는 것이 모든 지배자와 권력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그 사람을 불행의 늪으로 빠져들게 하고, 고통의 수렁으로 밀어 넣습니다.
오늘 솔로몬이 그런 유혹에 말려들지 않고 백성을 올바르게 이끌기 위한 지혜와 지식을 구한 것은 참 잘한 일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갈수록 복잡해지기에 배우고 고려하고 생각해야 할 것이 기하급수적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지식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와 지식뿐 아니라, 부와 재물과 영화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지 않아도 지혜와 지식을 충분하게 받은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으로 인해 부와 재물과 영화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부와 재물과 영화를 맛볼 때 더 조심해야 합니다. 그때부터 지식과 지혜를 추구하려는 마음을 놓치고 부와 재물과 영화에 관심이 쏠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곧바로 추락합니다. 솔로몬의 말년이 좋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오늘 역대지하에 나오는 구절에서 솔로몬이 구했던 지혜와 지식이 열왕기상에는 “지혜로운 마음”이라고 나오는데(왕상 3:9), “지혜로운 마음”이라고 번역된 원문은 “듣는 마음”입니다. 왕이 되어서 백성들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자 했던 솔로몬이 부와 재물과 영화가 생기자 거기에 파묻히게 되고 백성들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일어나실 때를 기억하라]
오늘 우리는 시편의 말씀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일어나실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서술합니다. 하나님께서 두 팔을 뻗치시면 하나님의 원수들은 흩어지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도망치게 될 것입니다. 연기가 날려 가듯 악인들은 날려가고, 불 앞에서 초가 녹듯이 녹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들은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기쁨에 겨워서 주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고난과 고통이 따르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사는 이들이 더 행복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뿐입니다.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서 일어나실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일구실 때 이뤄집니다.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을 돕는 재판관이신 하나님께서 외로운 사람들에게 머무를 집을 마련해 주시고, 갇힌 사람들을 풀어내셔서 형통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바로 그 일들을 하면서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일구고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마틴 루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모든 노력이 쓸데없는 것처럼 기도하라. 모든 기도가 무용지물인 것처럼 일하라.”그렇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기뻐할 줄 알고 행복을 찾아내는 사람들입니다.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 헤매지 마시고 오늘도 행복한 순간, 행복한 시간을 보내시길 빕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바로 예수님은 행복한 삶을 가꾸시는데 천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극빈자들 사이에서, 잠시 머물 수 있는 보금자리 하나 없이 떠돌이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들에 핀 꽃 한송이에서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왕의 영화보다 더 찬란한 아름다움을 봅니다. 공중 나는 새를 보면서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와 창조주께서 주시는 풍성한 생명을 느낍니다. 그는 십자가의 죽음에서조차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자신을 못 박은 사람들을 용서하시며,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의 영원한 품에 맡기실 줄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지금 우리와 함께 예배하는 전국의 성도 여러분! 눈을 크게 뜨십시오. 살랑대는 바람 한 점에서 상쾌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십시오. 두 눈을 감아보십시오. 침묵 가운데 펼쳐지는 하나님의 원대한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온몸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을 거역하여 메마른 땅에 살지 마시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하십시오. 꽃을 피우려고 잔뜩 웅크리고 있는 벚나무 살구나무들 가지를 보십시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이 꿈틀거립니다. 살아 있는 것이 감사한 일이고, 움직이는 것이 기적이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있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모두가 행복입니다.
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날이 가물수록 깊이 뿌리를 내리는 민들레에서 삶의 지혜를 배우게 하여 주소서. 햇살 가득하고 빗물 넉넉해서 꽃피고 열매 가득한 날도 있지만, 늦도록 물러가지 않는 추위, 깊은 가뭄 속에서 이파리들을 떨구고 제 살을 깎아내야 하는 시절도 있음을 압니다. 겉보기에 빈약하고 초췌하여 지친 듯 보여도 그럴수록 더 깊이 뿌리내리는 민들레처럼 우리 삶도 더욱 단단해지게 하여 주소서. 다른 이들이 겉모양을 꾸미며 남들에게 어떻게 잘 보일까를 꿈꿀 때, 우리는 주님 계신 곳으로, 주님 가신 그 낮은 곳으로 더 진지하게 내려가게 하여 주소서. 꽃 피기 어려운 때일수록 두 배 세 배 더 깊이 뿌리내리는 민들레에서 배우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고,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오직 주님을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코로나 판데믹 속에서도 우리를 지켜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삶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사랑을 위하여 늘 기도하길 원합니다. 코로나 19의 마지막 고비를 넘어가며 지혜로운 방식으로 서로를 돌보게 하시고, 삶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을 함께 나누게 하여 주소서. 동시에 내면을 풍성하게 하는 일에도 힘쓰게 하여 주소서. 어둠 속에 감춰진 빛을 바라보는 우리들에게 주님의 은총을 부어 주시고, 우리의 사랑이 더욱 힘 있고 아름답게 피어나게 하소서. 오늘 우리는 우리의 전 삶과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을 기억하며 주님께 예물을 드립니다. 이 예물이 하나님 나라 사역에 올바로 쓰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손만 뻗으면 언제나 잡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손을 내밀어 오늘도 내일도 언제나 행복한 삶을 살아가십시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거룩한 친교가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생명사랑 교우들과, 이 시간 함께 예배하고 생명사랑교회와 함께 좁은 길 걸어가는 전국의 모든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아픈 세상에서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