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한문덕 목사] 하나님의 무기 – 2020년 2월 21일
사무엘상서 17장 41-47절, 시편 44편 4-8절, 에베소서 6장 10-20절
[목사와 장로의 역할과 공교회성]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들의 장로들을 불러 고별설교를 하면서 목사의 역할에 관한 매우 중요한 한 마디를 합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 후반부의 말씀입니다. “성령이 여러분을 양 떼 가운데에 감독으로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시고 오순절 강림사건을 통해 거룩한 영이 제자들에게 임했을 때,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이어서 전 세계로 주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복음의 전파로 각 지역마다 나사렛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가정들이 생겼고, 이것이 각 지역마다 가정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들이 탄생한 역사입니다. 예루살렘 지역의 가정교회들을 비롯하여 소아시아 지방 전역에서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당시의 지배자인 로마제국이라는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새로운 교회들이 세워지고 유지되는 데에는 두 종류의 지도자들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는 계속 선교여행을 떠나면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입니다. 게르트 타이센이라는 독일 신학자는 이들을 방랑하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라고 부릅니다.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목표로 이들은 계속 선교여행을 했습니다. 이들에 의해서 교회가 생기면 그 교회 공동체는 스스로 신앙들을 유지하며 공동체를 일구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공동체 구성원들로부터 존경받는 이들이 생기고 한 지역의 교회를 이끌어가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었는데 바로 장로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 사도가 에베소 지역의 교회 공동체의 장로들을 불렀을 때, 바로 바울은 복음 전도자였던 것이고, 장로들은 그 교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장로들에게 성령께서 당신들을 교회를 돌보는 감독자로 세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감독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교회를 돌보며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교회를 지키는 사람을 뜻합니다.
미국장로교 전통을 물려받은 한국의 장로교 교회들에서는 교회 장로들을 ‘가르치는 장로’와 ‘치리 장로’로 구분합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자 깔뱅이 디모데전서 5장 17절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두 배로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특히 말씀을 전파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장로들은 더욱 그러하여야 합니다.”라는 말씀에서 ‘잘 다스리는 장로’와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장로’를 구분하여 해석한 것에 따른 결과입니다. 장로를 둘로 나누는 장로제도가 한국에 정착하면서는 목사, 장로, 집사와 같은 직분들로 더 세분화 됩니다만 목사는 가르치는 장로(Teaching Elder)로서 설교와 가르치는 역할, 성례집전을 맡고, 치리장로(Ruling Elder)는 교회를 운영하며 치리를 하지만 목사를 돕는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우리 교단의 헌법에 따르면 목사는 교회의 대표가 되고, 장로는 교인들의 대표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직제를 말하면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바로 바울 사도의 권면에 따라 목사나 장로 모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를 유지하고 보존하고 돌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로교에서 보통 교회라고 하면 우리 생명사랑교회와 같은 지교회를 말하는 것이지만, 초대교회의 전통에서 교회는 거룩한 영의 활동에 의해 사도전승에 따라 세워진 보편 교회 즉 전 세계의 그리스도교가 하나의 교회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목사는 지교회를 보살피고 돌보는 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 즉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교 그 자체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데에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교회에만 머물지 않고, 노회와 총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세계교회협의회 등 공교회의 일에도 함께 참여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지교회의 활동을 하지만 “전 세계의 교회는 하나의 교회다” 하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주 예배에서 사도신경을 함께 고백하면서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거룩한 공교회”라는 말은 가톨릭과 정교회, 개신교 모두를 포함하는 세계기독교(World christianity) 전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생명사랑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지만, 우리들의 시야는 거룩한 공교회로 확대되어야 하고, 우리의 사역은 공교회성을 지녀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년에 서울북노회 소속 교회들은 코로나 상황에서 “교회가 진심으로 죄송합니다”라는 현수막을 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몇몇 교회들에서 “우리교회가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현수막을 걸어야 하느냐” 하는 소리가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말하는 교인들은 스스로가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도 교회의 공교회성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공교회성을 회복하려고 할 때 가장 아픈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한국의 많은 지교회들과 지교회 구성원인 교인들은 교회의 공공성을 망각하고 전부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들이 전부인 줄 아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정관에서 우리의 첫째 목표인 “작으나 건강한 교회”의 세 번째 항목으로 “개교회주의를 배제하고 한국교회의 건강성 회복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만 한국의 많은 교회들은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는 신앙고백의 의미를 깊이 성찰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사랑제일교회와는 분명 다르고, 우리 입장에서 볼 때 전광훈 같은 사람이 목사라고 동등하게 불리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지만,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신천지나 부천 영생교나 한국 개신교회들이나 다 거기에서 거기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또 그런 분위기와 시선들이 실제로 전체 한국교회의 이미지 형성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줍니다. 한국 개신교에 대한 사회전반의 따가운 눈초리는 바로 우리 생명사랑교회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속 사회 속에서 세계교회가 어떻게 설자리를 마련할 것인가 하는 거시적 관점을 염두에 두지는 못해도 한국 사회 속에서만이라도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자리매김을 하며 한국 개신교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 한명,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태도와 자세가 바로 한국 기독교 전체와 연관된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생명사랑교회라는 지교회의 담임목회자이면서 동시에 한국 개신교의 올바른 회복을 위해서도 헌신해야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 교인들은 그런 사실을 잘 알고 계시고 그런 의미에서 제가 노회의 교회와 사회 ․ 평화통일위원장으로, 총회의 연금재단 이사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종교간 대화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사단법인 평화나무에서 수요사경회를 인도하고 각종 기관에서 강의하는 등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 교회가 선교에 중점을 두고 여러 단체와 선교사들에게 후원을 하며 사회의 여러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도덕성을 세워 갈 뿐만 아니라 이 사회 전체를, 한국 개신교 전부를 새롭게 하고 회복하는 일에 동참할 때, 우리 생명사랑교회도 더 성숙하고 건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와 개신교의 현실과 극복 방법]
그런데 문제는 지금 한국 개신교의 상황이 정말 너무 어렵습니다. 한국 개신교의 잘못된 관행들이 깨끗하게 정화되는 과정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해 보지만, 지금 한국 교회가 처한 어려움은 매우 심각합니다. 한국교회의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통계는 올해 각 교단의 신학대학원 지원자가 미달되는 사태들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서울신학대학원은 0.54:1, 침례교신학대학원은 0.53:1, 성결대학원은 0.40:1, 아세아연합신학대 0.28:1로 마감되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큰 교단인 장로교의 주요 신학대학원인 장신대는 2.41:1, 총신대는 1.44:1로 간신히 정원을 채웠고, 신학교 학부로 내려가 보아도 비슷합니다. 감리교 계열의 세 신학교 감신대, 협성대, 목원대가 전부 정시에서 정원 미달이었습니다.
신학생의 급격한 감소와 목회자 수급의 불균형 사태는 우리 교단도 다르지 않습니다. 앞으로 5-10년이 되고 베이비 붐 시대의 목회자들이 은퇴하고 나면 교회가 목회자를 모시고 싶어도 모실 수 없는 교회들이 수두룩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고, 많은 교회들이 이런 상황들에 적응하지 못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코로나 19 상황에서 보여준 교회들의 비상식적 대처는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됨과 동시에 교인들의 엄청난 교회 이탈을 불러 오고 있습니다. 코로나가 쉽게 끝나지 않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앞으로 많은 교회가 구시대의 유물로 남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지금 교회는 생존 경쟁, 살아남기 위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럼 어떤 교회가 앞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상과 에베소서의 본문은 모두 전쟁 상황이나 전쟁의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구약의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입니다. 골리앗은 다윗이 앳된 얼굴의 소년에 지나지 않음을 보고 그를 우습게 여기며 모욕을 줍니다. 힘으로 승부했을 경우 누가 보아도 골리앗이 이기는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다윗은 전장에서 뼈가 굵은 블레셋 장군의 엄포에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담하게 맞서며 이렇게 외칩니다.
“너는 칼을 차고 창을 메고 투창을 들고 나에게로 나왔으나, 나는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곧 만군의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너에게로 나왔다. 주님께서 너를 나의 손에 넘겨주실 터이니, 내가 오늘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사람의 주검을 모조리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밥으로 주어서, 온 세상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게 하겠다. 또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를 쓰셔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에 모인 이 온 무리가 알게 하겠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싸움의 목적과 방법이 서로 다릅니다. 한쪽은 지배하기 위해, 한쪽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고, 한쪽은 무기로, 다른 쪽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는 다윗이 승리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세상에 맞서서 교회가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까? 여러분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처한 상황과 비슷한 상황이었다면 다윗처럼 나설 수 있었을까요?
만약 나설 마음이 선뜻 생기지 않는다면 다윗은 지녔고, 여러분은 지니지 못한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교회가 세상과 맞설 때 그 방식이 다윗과 같은 신앙의 모습이었을까요? 아니면 힘대 힘이었나요? 지금 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 것은 골리앗 세상이 갖추고 있는 두터운 갑옷과 엄청난 무게의 창과 방패들에 맞서 교회가 그와 비슷한 창과 방패, 갑옷을 준비하면서도 그것이 너무나 빈약했기 때문입니다. 적절한 교양을 갖춘 시민이 그리스도인을 만나기 싫어하는 이유는 신앙인들의 모습이 비호감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변화에 무지하면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고집을 피우고 겉으로는 거룩한 체 하지만 속으로는 제 잇속을 차리는 모습에 그만 질리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면 하나님의 뜻과 지혜와 능력을 보여 주리라 기대했지만,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으면서도 세상보다 못하기 때문에 더 조롱거리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이 사울이 내준 놋 투구와 갑옷, 칼을 버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대신 다윗은 자신에게 익숙한 목동의 지팡이와 시냇가에서 고른 돌 다섯 개가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팡이와 돌을 의지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서 닥치는 여러 문제들과 난관들과 장애물들 앞에서, 세상의 공격과 세속 사회의 유혹에 맞서서 어떤 장비를 준비하고 있으며, 무슨 신념을 가지고 그것들을 이기려고 하십니까? 여러분이 든 지팡이는 무엇이며, 여러분에게 익숙한 돌멩이는 무엇입니까?
제가 많은 강의를 다니면서 만난 평범한 한국 교인들을 보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들은 형편없었습니다. 그들이 지녀야 할 신앙의 강력한 무기들은 전부 망가져 있거나, 겉치레이거나, 모조품, 짝퉁이었습니다. 그동안 교인들의 신앙이 그 정도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세상과의 싸움에서 번번이 패배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진리의 허리띠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의 가슴막이로 가슴을 가리고 버티어 서서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전할 차비를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방어 용품들은 진리와 정의와 평화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준비하는 공격용 무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령의 검이 무디어진지 오래이고 그런 칼을 가지고는 무 하나 제대로 베어낼 수 없었던 것이 지난 날 그리스도인들의 상태였던 것입니다. 더 문제인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준비할 무기들이 아닌 힘과 권력, 돈과 명예욕, 세상의 지식으로 똑같이 세상과 맞서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교회가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참된 신앙을 회복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의 삶에서 말씀을 적용하며 그리스도교의 수행 전통을 통해 스스로 자라나는 신앙인이 될 때 세상은 우리를 귀하게 여기고 찾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그런 도전들을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 상황이지만, 생명사랑 씨알 미션을 통해 여러분들이 신앙이 새롭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더 힘을 내시고 정말 하나님을 믿는 그 올바른 신앙으로 세상을 이겨내십시오. 말씀을 깊이 이해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하십시오.
최근에 우리 국민을 자랑스럽게 하는 좋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바로 여러 중소기업들이 최소잔량 주사기를 개발한 것입니다. 주사기 백신의 잔량을 최소화해서 기존의 주사기가 5명에게 주사할 수 있다면 이 주사기로는 6명까지 가능하게 만든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주문이 쇄도하고 있는데, 이 주사기 개발이 더욱 의미 있는 것은 중소기업과 대기업, 그리고 정부가 나서서 서로 협력해서 개발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중소기업은 대기업이 자신의 개발품에 관여하는 것이 두렵고, 대기업은 중소기업에 별 관심이 없을 수 있는데, 중소벤처 기업부의 노력으로 이런 성과를 달성했던 것입니다.
이런 경험은 매우 소중한 경험이고 신뢰 자산이라고 하는 매우 큰 자산을 확보하게 됩니다. 코로나 이전부터 우리나라는 상당한 신뢰자산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카페에서 노트북이나 휴대전화를 놔두고 화장실에 다녀와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곳이 바로 우리나라였고, 외국인들은 이런 상황들을 매우 놀랍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서로의 정직성과 시민성을 믿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한 것이고, 이런 우리들의 신뢰 자산들이 바로 코로나 정국에서 한국을 돋보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자본주의 세상에서도 이처럼 서로 믿는 신뢰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 정도의 신뢰도 줄 수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올해 초 사람들의 입에 많이 회자된 하나의 칼럼이 있습니다. “눈을 떠보니 선진국이 돼 있었다”라는 한빛 미디어 이사회 의장인 박태웅 씨의 칼럼입니다. 그는 최근 다양한 지표가 한국의 선진국임을 보여 주고 있다면서, 선진국은 개발도상국과는 다르기에 이제부터는 나라의 경영이 달라져야 한다고 하면서 몇 가지를 제안합니다. 서민과 중산층을 두텁게 해야 하고 협상을 잘하는 합리적 시민을 양성해야 하며, 4차 산업혁명을 준비하며 데이터 기반의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들이었는데, 저의 눈길을 사로잡은 제안은 첫 번째 제안인 바로 “정의하는 사회”라는 첫 번째 항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동안 한국은 개발도상국으로서 앞서 나간 국가들의 것을 열심히 베껴 왔는데, 그 덕분에 이 자리에 올라 왔는데,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 스스로 모든 것을 정의내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 생명사랑교회의 생존과도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생명사랑 교회 구성원 전부와 우리 예배에 참여하는 전국의 성도들은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서 정의를 내릴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무엇인지, 하나님은 누구신지,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으며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시는 분이신지, 구원은 무엇이며,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무엇이 다른 것인지를 스스로 정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 사도는 진리의 허리띠를 동이고, 정의의 가슴막이를 갖추고 평화의 복음을 전할 차비를 하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추구하는 정의는 세상의 정의와 무엇이 다릅니까?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평화의 아들딸이 됩니까? 내 마음 속 불안과 두려움은 어떻게 몰아냅니까?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 있는 말씀처럼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희망에 대하여 설명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는 준비를 해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오늘 설교 제목은 “하나님의 무기”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무기일까요? 바로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무기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말한 대로 하나님은 칼이나 창 따위를 쓰셔서 구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무기인 우리가 갖춰야 할 가치와 양식과 삶의 태도와 능력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갖추고 있으며, 그것을 갖추기 위해 지금 어떤 훈련을 하고 계십니까? 바울 사도께서 말씀하신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특별히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고대의 사유 속에서 표현된 이런 것들은 모두 오늘날 생존하는 모든 생명체들의 삶을 억누르고 억울하게 만들고 한이 쌓이게 하는 거대 힘들입니다. 우리는 그런 힘들과 맞서서 어떤 무기를 지녀야 할까요?
여러분들이 그 무기를 준비하고 싶다면 정말 진지하게 지난 5년의 세월동안 우리 교회 다음 카페에 전부 올려 있는 제 설교와 월요 아침 묵상, 사순절/대림절 묵상 그리고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성서 공부 자료, 믿음의 식구들이 주일예배 때 했던 기도문들을 찬찬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지난 5년의 세월동안, 그리고 지금도 계속 되고 있는 동영상의 신앙 강좌들을 보고서도 무기가 뭔지 모르겠거든 그 때 제게 오시면 확실히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 험한 세상 살아가시면서 세상의 방식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무기를 장착하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아니, 여러분이 곧 세상을 변화시킬 하나님의 무기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길어지는 코로나로 지쳐가는 우리 영혼을 위로해 주소서. 이 환란의 시간이 속히 지나가게 하여 주소서. 그러나 절망 속에서 헤매지 말고 인내하면서 단련된 인격이 되도록 더 노력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소서. 눈물의 밤을 보내고 기쁨의 새벽을 맞이할 때는 한껏 성숙한 신앙인으로 거듭나게 하여 주소서.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일들을 감당할 능력을 주시고, 거짓 선동과 헛된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여 주소서.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로 가슴보호대를 삼으며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발이 되게 하소서. 성령의 검을 날카롭게 하여 세상 사람들의 골수를 쪼개고 그들의 생각을 드러내게 하시고, 언제나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구원의 투구를 받고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십시오. 온갖 기도와 간구로 언제나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무기가 되어 세상을 이기십시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거룩한 친교가 진리의 갑옷을 입고 성령의 검을 들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생명사랑교우들과 이 시간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아픈 세상에서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