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덕 목사] 초월의 사랑 – 2024년 9월 15일
에베소서 3장 14-21절
[바울의 기도와 에베소 교회, 그리고 오늘의 현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바울 사도의 속 깊은 마음이 담긴 기도문입니다. 그중에 가장 핵심적인 구절을 제가 한 번 더 읽겠습니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에베소서 3:17b-19)
바울의 이 감동적인 기도문에서 우리가 함께 곱씹어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를 깨닫는 것이고, 둘째는 그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들, 겪는 모든 사건 속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충분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교회에 대해서 설교하면서도 말씀드렸는데, 에베소는 아르테미스 신전을 비롯해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로마 여신을 위한 신전, 도미티아누스 신전을 두고 종교와 문화, 정치와 경제, 상업 행위와 삶의 모든 방식이 로마와 로마의 신들을 중심으로 철저하게 재편되어 운영되던 곳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방 신들의 문화 한복판에서 교회를 세웠고, 그 교회 교인들이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고, 로마의 온갖 신들로 채워진 도시이지만 교인들의 삶과 마음에는 오직 하나님으로만 가득 채워지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첫 교회는 로마제국 아래서 벌어지는 잦은 전쟁과 폭력의 일상화, 거짓 평화와 선전, 불평등한 신분사회에서 당할 수밖에 없는 굴욕, 언제든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심지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서 자신들을 지켜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어떠한가요? 지금도 아무런 대책과 대안 없이 진행되고 있는 의료대란 사태 속에서 우리도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능한 정부의 온갖 실책들 속에서 서민들의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소수 기득권자의 이익 편취는 우리 사회를 점점 살기 어려운 정글로 만들고 있습니다. 사회가 험악해지면서 사람들의 인심도 더욱 흉흉해지는 것 아닌가 합니다.
오늘날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이야기 하나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친구 둘이 정글 속을 걸어가다가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A는 자기들이 함께 숨을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B는 샌들을 벗고 잘 달릴 수 있는 운동화로 갈아 신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A가 B에게 물었습니다. “너 무슨 생각이니? 사자보다 빨리 달릴 수는 없어!” 그러자 B가 대답합니다. “나는 사자보다 빨리 달릴 필요는 없어. 단지 너보다만 빠르면 돼!”
이 이야기는 수학의 천재이자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앨런 튜링(Alan Turing, 1912-1954)의 삶을 다루는 <이미테이션 게임(The Imitation Game)>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짤막한 농담입니다만, 사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A는 위기 앞에서 자신과 친구 모두가 살 방도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B는 적자생존의 방식, 친구를 죽게 함으로써 빠른 자기가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습니다. 안타깝게 오늘날은 사회의 공공선을 생각하며 모두가 함께 살 방도를 찾는 사람보다 아주 사적인 자기 이익을 기준으로 능력 있고 잘 적응하는 자만 살아남는 사회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당면한 과제들을 함께 힘 모아 풀어보려는 사람들은 적어지고, 모두 다 경쟁의 사다리에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만 발버둥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쟁의 사슬에 매여 있는 현대인들은 경쟁에서 탈락할까 하는 두려움과 불안, 경쟁에서 밀려났을 때의 좌절과 무력감 그리고 분노의 감정에 너무 자주 휩싸이게 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경쟁의 한복판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 곳이 없을 때는 심각한 외로움과 고립에 빠져들고 맙니다.
[부름 받은 자, 그리스도인인]
첫 교회는 로마제국에서 신음하는 이들에게 구원을 베푸는 장소이자 모임이 되었습니다. 바닥 삶을 살던 사람들, 사람 취급받지도 못하는 사람들, 가진 자, 힘 있는 자들에게 늘 시달리던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들었고,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사람이라는 그 자체로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신념 속에서, 자신을 드려 하나님 나라를 일구신 주님 예수님을 본받아 첫 교인들은 로마제국과는 다른 세상을 만들어 갔습니다. 세상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체포당하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심지어 죽임까지 당하는 일이 있었지만, 첫 교인들은 하나님 나라 행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바로 우리 사회를 구원하는 기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으로 이 아픈 사회를 치유할 수 있을까요? 오늘 바울 사도가 우리에게 명백하고 확고하게 말씀하시는 치료약은 바로 “사랑”입니다. 성서는 일관되게 그리스도인의 목표가 있는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요한문서들은 특히 세상이 우리가 예수의 제자인 줄 아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리스도교의 영원한 이상이자 실현해 내야 하는 과제로서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
흔히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사랑을 아가페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리스어로 “사랑”을 나타내는 단어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에로스(ἔρως), 필리아(φιλία), 아가페(ἀγάπη)입니다. 그래서 아가페를 에로스와 필리아와 비교하면 그리스도교적 사랑인 아가페의 특성이 잘 드러날 수 있습니다.
우선 에로스는 신약성서에는 단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칠십인역에 보면 잠언 4장 6절과 에스더서 2장 17절에 딱 두 번 일상적인 용어로 사랑한다는 뜻의 에로스의 동사형 에라오가 나옵니다. 에로스에는 크게 세 차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일상에서 평범하게 사용되는 “사랑하다. 좋아하다”의 의미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잠언의 성서구절을 보면 “지혜를 버리지 말아라. 그것이 너를 지켜 줄 것이다. 지혜를 사랑하여라. 그것이 너를 보호하여 줄 것이다.”라고 되어 있고, 에스더서를 보면 “왕은 에스더를 다른 궁녀들보다도 더 사랑하였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2세기 안디옥의 주교였던 이그나티우스는 순교당할 예정으로 로마로 압송되면서 편지를 쓰는데, “비록 지금 내가 산 채로 여러분에게 글을 써 보내지만, 저는 죽음을 사랑합니다.”(ζῶν ⸀γὰρ γράφω ὑμῖν, ἐρῶν τοῦ ἀποθανεῖν)라고 씁니다.
둘째 에로스는 통속적인 의미에서 육체적이고 성적인 사랑을 뜻하기도 합니다. 고결하지 못한 느낌의 부정적 뉘앙스를 풍기기도 하지요. 셋째 에로스가 다소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지닌 경우입니다. 플라톤의 천상적 에로스라고 이름 붙인 이 에로스는 두 번째 의미로 이해된 육체적이고 성적 이미지가 아니라, 궁극의 미와 선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열정 같은 것입니다. 더 나은 아름다움과 선을 추구하고 그것을 얻으려는 욕망이지요. 한편 신플라톤주의의 대표인 플로티노스는 에로스를 신과 다시 합일하려는 영혼의 귀환으로 생각합니다. 천상적 에로스의 특징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정리해 보면, 에로스적 사랑은 우선 궁극적 미와 선을 향한 자기중심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더 높은 곳을 추구하는 열망과 열정으로 육체와 물질세계보다는 영혼을 중시하는 이원론적 성향을 갖습니다.
한편 필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 속에 잘 나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이런 방식으로 묻고 답하기를 세 번 하는데, 여기에 나오는 ‘사랑’의 단어가 다릅니다. 예수님은 첫 번과 두 번째 질문에서 나를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반면, 베드로는 일관되게 필리아의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답합니다. 베드로가 계속 필리아의 동사형인 필레오를 쓰기 때문에 예수님도 3번째 질문에서는 필레오로 물으십니다. 즉 베드로는 예수님을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은 감당하기 어렵다라고 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필리아는 어떤 사랑이고, 또 아가페는 어떤 사랑일까요?
플라톤은 뤼시스라는 책에서 필리아는 동성 간에 끌리는 호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필리아를 우정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지요. 그런데 호감의 바탕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말합니다. 유용성에 기초한 필리아, 즐거움에 기초한 필리아, 훌륭함에 기초한 필리아입니다. 즉 필리아는 조건이 붙어 있는 사랑입니다. 서로 만났을 때 유용하거나 즐겁거나 훌륭한 점이 있기에 사랑하는 것을 말하는 거지요.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필리아”를 설명하기를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러한 바람이 쌍방적이면서도 그러한 상태를 쌍방이 인지하고 있는 품성상태’라 말합니다. 에로스가 자신의 완성을 추구하면서 주로 자기에게 관심을 돌리고 있다면, 필리아는 내 앞에 서 있는 당신, 너를 생각하며 배려하는 상호간의 인격적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진실한 우정 속에서 필리아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지위 즉 왕의 아들의 지위를 존중합니다. 한편 요나단은 다윗의 능력과 그의 진실함을 인정해 줍니다. 그들의 동지애와 우정은 과도한 사울의 횡포 속에서 서로를 보호해 줍니다.
그러면 이제 에로스와 필리아와 다른 아가페 사랑의 특징을 알아볼까요? 아가페의 첫째 특징은 위로부터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요한1서 4장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아가페 사랑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져서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아가페의 둘째 특징은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온전히 드러난 사랑이지요. 예수님은 요한복음서에서 씨알 하나가 떨어져서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그냥 내어주는 것이 바로 아가페입니다.
아가페의 셋째 특징은 조건이 붙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필리아는 유용함이라든가, 즐거움, 또는 훌륭함 같은 조건이 있어서 그 조건으로 인해 사랑하게 된 것이라면, 아가페는 조건이 붙지 않습니다. 아가페는 사랑할 만한 것이 없음에도 사랑함으로써 오히려 사랑스러워지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5장 6절에서 8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제 때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의인을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감히 죽을 사람은 드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경건하거나 강하거나 선한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조건없이 사랑해 주시기 때문에 약한 우리가 강해지고, 경건하지 못한 우리가 경건한 사람이 되며, 죄인인 우리가 더 이상 범죄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아가페의 넷째 특징인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변화를 받아서 구체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즉 아가페는 능력의 사랑입니다. 외로움에 시달리던 삭개오, 예수님은 그에게 눈길을 주시고, 그의 집을 방문하셨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험담들을 막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삭개오가 말합니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아가페의 특징은 차고 넘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의 본문에서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우리가 충만해지기를 빈다고 바울에 말씀하셨는데,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차고 넘치는 특성이 있습니다. 비록 작은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였지만, 그것으로 무려 5,000명이 넘는 사람이 먹고도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에 차고 넘쳤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 아가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지는데, 대가를 바라지 않으면서 조건 없이 주어지고, 받는 사람을 변화시키면서 계속 자라나서 차고 넘치는 사랑입니다. 에로스가 내재적이면서 자기중심적이고, 필리아가 상호조건을 말한다면,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사랑 아가페는 위로부터 부어지면서 어떤 조건이나 대가도 없는 그러나 차고 넘치는 사랑인 것입니다.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
오늘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지식을 초월한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은 우선 아는 것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앎이 아니라 삶에서, 말뿐이 아니라 행동에서 실행됩니다. 아가페 사랑의 특징을 안다고 해서 우리가 곧바로 아가페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르게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소리 나는 꽹과리나 울리는 징처럼 그저 허공에 흩어지고 말소리라면 아무 소용이 없지요.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의 사랑, 아가페 사랑에 대해 구체적인 행동 양식으로 증언합니다.
먼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린도전서 13장 4-7절 말씀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유럽에서 한동안 “고린도”라는 말은 성적 쾌락과 유흥과 결부되었습니다. 가령 “고린도 사람 같다”라고 하면 성적으로 방탕하다는 의미였습니다. 고린도는 고대 그리스의 해양도시로 한 때 60만명의 인구가 북적였던 국제도시였습니다. 온갖 인종의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고, 상업이 발달했습니다. 나와 다른 남들이 가득했기 때문에 내 권리와 자유를 지키는 것이 큰 관심사였습니다. 다른 이들을 위한 양보나, 공공을 위한 희생은 미덕이 아니었습니다. 내 것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 고안되고 발달했습니다.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남들을 설득하는 수사학이 발달했고, 2년마다 열리는 이스트무스 축제를 통해 대규모의 운동경기가 벌어지면서 경쟁과 승자독식의 문화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생존과 번영을 위해 강자에게 굴복하고, 강자에 기대어 권력을 탐하고, 수사학을 동원하여 온갖 이득을 얻어내어 한껏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고린도의 일반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은 언제나 조롱의 대상이었습니다. 가난은 무지와 어리석음의 결과이고, 약함은 적절한 후원자를 찾지도 못하고 지혜롭지 못해 힘 있는 무리에 들지 못한 탓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빈부격차가 심했고, 조금이라도 성공을 거둔 이라면 더 높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거나, 그 사다리에 올라야 한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도시가 바로 고린도였습니다.
바울이 편지를 쓴 고린도 교회는 이런 고린도 섬의 문화가 물밀 듯 들어와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공동체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주도권 갈등이 일어나, 교인들은 바울파, 베드로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 등 분파가 나뉘어서 서로 헐뜯고 상대방의 도덕적인 흠집들을 폭로하였습니다. 한편 어떤 여성들은 한 남편의 아내이기를 포기하고, 남편과의 성관계도 거부하면서 방언을 통해 고린도교회를 좌지우지하려고 했습니다. 또 고린도 교회에는 주인과 종,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갈등도 심각했습니다. 이런 어려움들 가득한 교회에 바울 사도가 편지를 쓰면서 권고합니다.
“여러분들에게 내가 가장 좋은 길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사랑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은 바로 이런 바울 사도의 멘트로 시작됩니다. 사랑이 그 무엇보다 좋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금 전에 제가 읽어 드린 사랑의 목록이 등장하지요.
여기에는 모두 15개의 동사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열다섯개의 동사를 어떻게 찾아낸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고난 당하시는 모습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온갖 모욕을 당했지만,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는 친절했고, 시기하지 않았으며, 뽐내지 않았고,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도 원한을 품지도 않았고, 그 어느 누구에게도 무례하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불의를 기뻐하지 않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렸고 그 상황에서 언제나 진리이신 하나님과 함께 하였습니다. 예수는 모든 것을 덮어 주고, 하나님의 모든 섭리를 믿으며,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바라며 끝까지 견뎠습니다.
고린도전서의 사랑 목록은 놀랍게 오래 참는 것에서 시작해서 모든 것을 견딥니다라는 말로 끝납니다. 사랑의 가장 확실한 표징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견디어 주는 것입니다.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 논리를 넘어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모든 것을 견뎌주는 것입니다. 믿고 끝까지 참아주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성서는 곳곳에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우리를 통해 어떤 식으로 전개될 수 있는지 아주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들을 찾아서 여러분의 것으로 만드셔야 합니다. 성경에서 찾으셔서 자신의 행동 양식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바울 사도가 들려주는 아가페 사랑의 구체적 행동 양식을 하나 더 말씀드리고 오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가득 채우시길 빕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 열심을 내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십시오. 소망을 품고 즐거워하며, 환난을 당할 때에 참으며, 기도를 꾸준히 하십시오. 성도들이 쓸 것을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하지 마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롬 12:9-18)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생명과 사랑의 하나님! 우리에게 2024년을 주시고, 첫 사랑의 마음을 품고 새 걸음으로 걸어온 지 벌써 아홉달이 다 되어 갑니다. 새해를 맞이하며 품었던 뜻을 잘 간직하고 실행하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 봅니다. 올 한해 우리는 지식을 초월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르려고 노력하고자 했습니다. 이 길에 주님께서 함께 해 주셔서 도와 주소서. 알고 깨닫기 위해 매일 기도하며, 올바르게 걷기 위해, 방황하지 않도록 말씀을 배울 때, 하늘의 지혜를 허락하소서. 무엇보다 사랑에 뿌리를 내리려고 합니다. 사랑으로 우리와 하나 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사랑 안에서,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고자 합니다. 하나님, 우리는 주님의 길 안에서 걷겠습니다. 하나님! 주님은 우리의 발걸음에 함께 해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거룩하시고 좋으신 하나님! 말씀으로 생명의 세상을 창조하시고, 부활로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날에 우리를 한 자리에 불러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 만나고자 나온 생명사랑 믿음의 식구들에게 마음의 평안을 허락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 삶에 일렁이는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하나님의 역사와 성령님의 평화와 위로가 우리를 감싸시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주님, 지금 이 시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옵니다. 우리들의 삶과 생각과 진실한 마음을 드리려고 나옵니다. 우리가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그 사랑의 징표로 드리는 이 예물을 온전히 받아 주시옵소서. 가난으로 하루가 고단한 이들을 위로하시고, 지친 몸과 마음으로 삶의 의욕을 잃어가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함께 하여 주소서. 그 때 우리가 드린 예물을 사용하여 주소서. 우리가 온전히 주님만을 섬기고 맘몬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하여 주소서. 생명이 온전히 주님께 달려 있음을 믿으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으십시오. 그리하여 모든 것에 부족함 없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여러분 삶에 가득하게 하십시오.
* 축도
생명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감싸고 여러분을 도우시기를 빕니다.
사랑의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지키고 모든 고통에서 건지시기를 빕니다.
거룩한 성령님께서 여러분 곁에서 항상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이제는
성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모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머무는 생명사랑 교우들과
전국에서 우리와 함께 예배하는 성도들에게
하늘의 힘과 달의 고결함, 불의 영광과
번개의 빠름, 바람의 야성과 대양의 깊이, 대지의 견고함과
바위의 단단함을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