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덕 목사] 진리에 협력하는 사람 – 2024년 6월 9일
요한삼서 1장 1-12절
[요한삼서에 대하여]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삼서는 요한이서를 쓴 분과 같은 분입니다. 편지의 서두에서 자신을 장로라고 부르기 때문에 편의상 장로 요한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요한이서가 장로 요한이 특정한 교회에 보낸 편지라면, 요한삼서는 가이오라는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장로 요한은 선교사들을 가이오가 살고 있는 지역에 파송하였고, 가이오는 이들이 선교 사역을 잘할 수 있도록 도우면서 후하게 대접하였습니다. 장로 요한이 파송한 선교사들은 이방인 출신 선교사들이었는데, 이방인들로부터 생계 지원을 받지 않았기에 가이오의 친절하고 극진한 대접은 큰 감동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장로 요한에게 다시 돌아가서 보고를 하였고, 그래서 장로 요한이 편지를 써서 데메드리오 편에 보낸 것이 우리가 읽은 요한삼서입니다.
한편 가이오가 살던 지역 교회의 지도자였던 디오드레베는 장로 요한이 파송한 선교사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쁜 말로 험담도 하면서, 선교사들을 맞이하고 후원한 사람들을 교회에서 내쫓아 버렸습니다. 이에 장로 요한은 화가 많이 났고, 후에 자신이 직접 방문해서 디오드레베가 한 일들을 꼬치꼬치 따져보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요한일서부터 요한삼서까지의 서신을 통해 1세기 교회가 영지주의 사상에 물든 그리스도인들과 어떻게 다투고 분열하고 지속적인 불화를 겪고 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됩니다. 아마도 디오드레베는 요한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 영지주의적 사상을 가미한 그리스도교 교회를 세운 사람들의 지도자였을 것입니다.
장로 요한은 분열된 공동체를 어떻게든지 다시 화해시키고, 함께 연합하여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고자 하는 사람인데, 이것이 뜻대로 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읽은 요한삼서는 장로 요한의 입장에서 쓴 것이니, 어쩌면 한쪽으로 치우쳐 있을 수도 있습니다. 디오드레베도 나름대로 할 말이 있을 것이지만, 우리에게 전하는 글이 없으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초대 교회나 지금의 교회나 사람 사는 세상, 부족하고 실수하고 연약한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에서는 늘 이런 일들이 발생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진리와 한국교회의 분열상]
편지의 저자는 요한일서와 요한이서에서처럼 오늘도 “진리”라는 단어를 여러 번 쓰고 있는데, 우선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선교사들의 보고에 진심으로 기뻐합니다. 여기서 “진리가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 있는데, 편지 안에서 진리의 내용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요한 문서들의 전체적인 맥락을 보았을 때,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보이는 물질세계든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든 모두 귀하다는 일원론적 사고를 갖는 것이 진리의 한 측면입니다. 영지주의의 이원론적 사고가 둘을 나누고 한쪽에 치우치거나, 둘 사이의 갈등과 분열을 조장한다면, 일원론적 사고는 모두를 포함하면서 조화와 균형 그리고 일치를 지향하는 사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매우 긍정적으로 봅니다. 잠시 악이 성행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회복하실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를 굳건히 간직합니다. 또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은 저마다 각기 고유한 특성들이 있어서 다른 것과 비교할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소중하고 귀합니다.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부르는 찬송 중에 “똑같은 건 없어요.”(신현정 글, 곡)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노래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하나님 주신 세상에 똑같은 것은 없어요/ 생긴 것도 달라요 마음도 달라요/ 하나님 주신 세상에 꼴찌도 일등도 없어요/ 서로 잘하는 것이 다를 뿐이지요/ 나무도 꽃들도 길가에 돌멩이 하나도/ 똑같은 건 없어요 세상에 단 하나/ 우리는 모두 한 가족 하나님 안에 한 가족/ 달라서 더 소중한 주님의 한 가족
이렇게 모두가 소중한 주님의 한 가족으로 세상의 단 하나뿐인 모든 존재들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이 장로 요한이 말하는 진리의 둘째 측면입니다.
정신의 고귀함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지주의자들은 육체를 천하게 여기면서 사유하지 못하는 피조물들을 하찮게 생각합니다. 정신도 신령한 지식을 온전하게 갖출수록 등급이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디오드레베를 말할 때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라고 부릅니다. 즉 디오드레베는 추측하건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신령한 지식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자랑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자기보다 깨달음이 더딘 사람들을 무지하다면서 무시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영지주의 사상에는 사람을 차별하는 의식이 생길 수 있고, 그런 맥락에서 낯선 이들을 받아들일 품을 갖출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가이오는 혈연, 학연, 지연을 가리지 않고, 자기에게 낯선 이방 선교사들도 잘 섬기고 보살폈습니다. 장로 요한은 바로 이렇게 할 때 진리에 협력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한국에는 정말 다양한 교파의 그리스도교가 있고, 같은 교단 안에서도 저마다 색깔과 분위기가 다른 교회도 존재하고, 또 같은 교회 안에서도 서로 다른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들이 넘쳐납니다. 교단이나 교회, 개(個) 교인들은 대체로 자신들이 믿는 믿음이 옳고 확실한 것이라고 여깁니다. 더군다나 현대는 저마다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다원적 사회이기 때문에 모두를 관통하는 보편적 진리를 말하는 것을 매우 조심스러워하고 또 꺼립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정치사회적으로 권력을 가진 자들이 말하는 것을 마치 보편적 진리인 양 여겨온 역사가 깊고, 목소리 큰 사람들로 인해 많은 이들이 억압받고 희생되어온 세월이 있었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다원적 상황은 자칫하면 우리를 잘못된 상대주의의 물결에 휩쓸리게 만듭니다. “다 거기서 거기지”라고 하면서 더 세밀한 분석이 필요한데도 하지 않고, 더 나은 것을 추구하려는 마음조차도 순식간에 짓뭉개버리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참과 거짓, 정의와 불의, 자유와 억압, 사랑과 혐오를 분명하게 나눠야 할 때에도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헷갈리게 만들 때도 많습니다.
이것은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니고, 손으로 잡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뿌리 깊은 신앙은 불확실성을 견디는 힘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악을 가지고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어서 나쁜 것이 나쁜 것만이 아니고, 좋은 것이 좋은 것만이 아닌 역설적 지혜도 갖춥니다. 그러나 이런 불확실성과 역설적 지혜가 때로 우리를 가치 혼란의 세계로 몰고 가기도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옳은 지 그른 지, 감을 잡지 못하는 일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나름의 기준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불의에 협력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에 협력하는 사람이 되려면 더욱 더 그러합니다. 오늘 가이오가 보여준 바대로 진리의 첫째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낯선 이들을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환대”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사랑의 환대 속에서 드러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사랑이 없다면, 나그네를 대접하고 고통당하는 이들의 아픔에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의 사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린 까닭은 그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불확실성의 한복판에서도 희망의 발걸음을 내딛었기 때문이지만, 거기에 더하여 바로 나그네를 환대하는 그의 성품과 멸망당할 위기에 놓인 도시를 두고 하나님과도 논쟁하고 씨름했던 사랑의 마음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다양한 모습 속에서 누가 “진정으로 진리에 협력하는 사람”인가를 보려면 혐오와 미움에 근거해 있는가, 아니면 사랑에 근거해 있는가를 살피면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사랑을 놓치면 신앙의 이름으로 온갖 폭력이 자행됩니다. 신의 이름으로 폭탄 테러가 자행되는 것을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숱하게 보아 왔고, 오늘날 뉴스에도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 신을 향한 절대 믿음이 타자를 품어주는 사랑의 마음을 잃어버리면 언제나 자기가 신이나 된 듯이 남을 억압하고 저주하고 심지어 죽이는 일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신앙의 이름으로 과도한 반공주의, 반이슬람주의, 타종교에 대한 테러, 성 소수자에 대한 혐오, 이주민 노동자들에게 대한 멸시와 무시가 있어 왔고 지금도 계속 됩니다. “하나님 믿으면 복 받는다.”는 번영 신학과 왜곡된 기복신앙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까지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게 했고, 불행과 고통을 마치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처럼 말하여 2차 3차 가해들을 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보면 가이오는 낯선 이들을 환대하고, 그 일로 인해 서로가 기쁘고 감동이 되는 장면이 연속되는데, 디오드레베는 악한 말로 다른 이들을 헐뜯고 사랑하고 환대하는 사람들을 도리어 방해하면서 내쫓기까지 합니다. 정반대의 모습이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진정으로 진리에 협력하는 교회인가를 보려면 무엇보다 서로 사랑 속에서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가 아니면 상호 비방과 헐뜯음 속에서 싸움과 다툼이 빈번한가를 살피면 되는 것입니다.
[전인적 구원과 균형 잡힌 신앙]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순복음 계열의 교인들이 아주 좋아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바로 2절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나는 그대의 영혼이 평안함과 같이, 그대에게 모든 일이 잘 되고, 그대가 건강하기를 빕니다.” 이 구절을 한글개역판 성경번역으로 읽어 보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입니다. 여기에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다는 말이 있어서 신앙이 좋으면 하는 일도 잘되고 몸도 건강하다는 ‘삼박자 구원론’이 나오기도 했지요. 조용기 목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삼박자 구원론이 교인들의 욕망을 자극해서 신앙을 사업 잘되고 몸이 건강하게 하는 수단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이야기하고, 조 목사를 옹호하려는 사람들은 내면의 신앙과 외적인 건강과 사업 모두를 포함한 전인적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논란은 사실 요한삼서 2절의 구절의 본 뜻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것에서 나온 혼란이자 오류입니다. 편지인 요한삼서 전체 맥락에서, 특히 앞부분 문안 인사에 등장하는 이 구절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이오, 믿음의 형제여! 당신 자신이 지금까지 주님의 뜻대로 잘 인도되고 있는 것처럼, 앞으로도 모든 일에서 계속 좋은 방향으로 바르고 건전하게 살아가기를 나는 진실로 원합니다.” 즉 가이오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교사들을 환대한 것처럼, 앞으로도 모든 일에서 그런 방식으로 건전하고 좋은 방향으로 지속되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뜻을 지닌 구절을 문자주의에 기대어 “영혼구원”, “만사형통”, “건강축복”으로 읽어내면서 기복신앙으로 잘못 흘러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편지의 주인공인 가이오처럼 정말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낯선 이들마저도 사랑으로 환대하고 살아가려면 우리의 정신과 육체가 모두 건강하고 온전해야 하는 것은 매우 지당한 말이라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정신이나 육체를 분리하지 않고, 전인적으로 생각하는 일원론적 신앙입니다. 하나님 머무시는 하늘과 사람들이 사는 이 땅을 나누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려고 하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죽어서 가는 저 세상보다는 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 모두가 함께 웃고 행복한 나라로 만드는 것이 더욱더 그리스도교의 본질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는 순간, 우리의 신앙은 잘못된 길로 접어듭니다. 삼박자 구원도 진정한 신앙의 핵심을 놓치고 세상적 성공에 대한 욕망과 몸의 건강이라는 이박자만 우선시하여 천박해졌듯이, 우리는 몸과 마음 모두, 조화와 균형을 갖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진리에 협력하는 사람으로 온전한 신앙에 이르려면 몸과 마음을 아우르는 전인적 영혼 구원과 함께 우리가 사는 사회를 좀 더 나은 사회로 만드는 것에 나서야 합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추구하는 신앙이 교회 생활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생활의 범위를 넘어서서 우리의 일상 전체를 구원하는 생활신앙이라면,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전 분야에 걸쳐서 배움에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말씀처럼 우리가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내려면 우리는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상만사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공감하는 영역에 대해서도 함께 나누지만, 전혀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도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건전하고 성숙한 시민으로서의 감각을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북대 강의와 작은 희망]
지난 주 수요일에 전북대학교에 가서 특강을 하고 왔습니다. 주제는 “한국 현대사 속 그리스도교의 명암”입니다. 1학년부터 4학년까지 학생들이 12회 동안 들어야 하는 교양수업에 강사로 간 것입니다. 2016년 세계 경제 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요구되는 개인적 능력을 열 가지로 제시한 적이 있습니다. “문제해결력, 비판적 사고력, 창의력, 인간관리, 공감과 협력, 감성지능, 판단과 의사결정력, 봉사정신, 협상력, 인지적 유연성” 전북대학교 학생들에게 이런 능력들을 함양시키고자 기획된 수업이었는데, 강의 제목들을 살피면 이렇습니다. “과학으로 본 진화와 생태”, “한국 현대사 속의 법과 정의”, “언어, 인간의 모든 것의 모든 것”, “경제로 본 중국과 동아시아”, “남극이 부른다.”, “연극: 무대 위의 인간” 등 정말 다채로운 기획인데, 저도 한 몫을 했지요.
출석 학생들은 한 100명가량 되었는데, 제 느낌에 반은 관심 있게 듣고, 나머지 반은 마지못해 듣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학생들 중에는 그리스도인들도 있고, 비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종교에 관심이 있는 친구도, 전혀 관심이 없는 친구도 있지요. 여러분이라면 그런 대학생들 앞에서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이 강의는 수업을 마치고 나면 학생들에게 소감문을 내게 합니다. 그 소감문들 중 일부를 여러분에게 읽어 드리겠습니다.
오늘의 강연은 정말 인상 깊었다. 강연 제목을 보고 종교에 관련된 이야기라 별로 재미없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비종교인들도 이렇게까지 재밌게 만들어 줄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현대사와 빗대어 말을 이어가시며 여러 사례와 역사적, 시대적 배경과 함께 들으니 정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특히 문익환 목사님의 연설을 듣는데 눈물이 날 정도로 가슴 아팠다. 난 늦봄 문익환 학교라는 대안학교를 나와 문익환 목사님의 삶과 얼을 받들어 그의 철학과 사상을 몸에 새겼다. 그래서인지 잠깐이지만 문 목사님의 업적과 일생을 들어 감명 깊었다.
다음 전태일 열사의 삶의 가치관을 배울 수 있었다. 전태일 열사가 기독교적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는 처음 알았다. 그리고 일기를 처음 보게 되어서 기억에 남는다. 그 외의 한국 개신교의 문제점과 사이비 종교의 치밀함과 가스라이팅, 카스파 하우저 증후군, 근본주의에 관심을 갖고 듣게 되었다.
오늘 처음 느낀 생각이 있다. 교수님의 도저함은 어떻게 만들어질까라는 생각이다. 오늘 강연에서 보인 한문덕 교수님은 역사부터 종교, 법, 이데올로기 등 여러 분야에 학식을 뽐내셨다. 덕분에 교수님, 선생님, 박사님들의 노력에 존경심을 갖게 되는 강연이었다. (주거환경학부 24학번 학생)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으로서, 오늘의 강의에서 어떻게 믿음이 생기는지, 한국에서 기독교가 왜 이리 성행하는지, 기독교의 특정 집단 혐오는 왜 생겨나는지를 간단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믿는다는 것과 안다는 것은 모두 무형의 개념이다. 이론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실체를 꺼내서 확인할 수 없고,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 중략 ~ 무언가를 믿기 위해서는, 그 영역에 대한 일정 수준의 앎이 필요하다. 어느 정도의 앎을 확보한 후에는 그것에 대해 믿음을 가질 것인가, 말 것인가를 판단해야 한다. 즉,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모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설명을 듣고 인간이 어떻게 신을 믿게 되었는가를 알게 되었다.
~ 중략 ~
문화와 가치관, 인식 등은 발전해 나가고 있다. 특히, 한국의 경우 흔히 MZ세대로 불리는 연령층에게는 뿌리 깊던 유교적 가치관이 빠르게 희미해지고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한국이 가지고 있던 종교적 특성이 희미해져 가고 있는데, 종교성은 유지될 수 있을까? 혹은, 그 단어가 바뀌어야 하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 중략 ~ 이제는 인간이 유한함을 인식하고, 무한함을 동경하는 욕망에 대해 새로운 말이 붙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심리학부 21학번 학생)
제가 여러 학교에서 젊은 학생들을 만나보면, 여전히 많은 학생이 진리에 목말라하고, 삶의 의미를 찾고 누리기 위해 애태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삶에서 진리를 얻고 깨달은 우리는 이런 이들을 찾아서 그들의 영적 굶주림과 진리의 목마름을 채워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하려면 많은 것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진리에 협력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가 해보지 않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전하고 깨닫게 해 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오늘날 세상은 정말로 빠르게 변하고 훨씬 복잡해집니다. 이런 세상에서 진리는 매번 맥락에 따라 재구성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리에 협력하는 사람이 되려면 정신을 차리고 늘 배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가이오처럼 우리가 낯선 이들도 기꺼이 받아 주고, 환대하려면 마음을 활짝 열고 새로운 진리를 향해 더욱 더 전진해야 할 것입니다. 저도 더 열심히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애써 주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열심히 노력할 때, 지금도 여전히 진리에 목마르고 굶주린 사람들이 우리에게로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에 협력하는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더욱 풍성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 모두가 진리 가운데 살고, 진리에 협력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진리는 세상의 지식을 많이 아는 것도, 성공을 위한 지름길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는 오히려 예수님의 사역에서 드러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우리에게 낯선 사람들까지고 끌어 안고 환영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우리의 삶이 늘 진리에 협력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소서.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진리에 목말라 합니다. 그들에게 생명수를 건넬 수 있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소서. 평소에 준비하게 하시고, 늘 배우는데 게으르지 않게 하소서.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 듣기를 원하는 이가 찾아 왔을 때, 언제 어디서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에게 지혜와 용기를 허락하소서. 우리의 친구이시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주님을 송축하고, 우리의 입술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방황을 이겨내게 하시고, 우리가 반항할 때에도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사랑할 사람들을 주시고, 아름다움은 누리게 하시며, 고요히 머물 장소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삶의 놀라운 선물들, 우리가 배운 진리와 성취할 수 있던 선한 일들에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시간 주님께 우리 자신을 드립니다. 받아 주소서. 오늘 예배를 통해 받은 천국의 기쁨을 간직하며 살아가겠습니다. 바쁜 세상에서도 주님께서 허락하신 평안을 누리며, 주님께서 감당하라 명하신 소명을 이어 나가겠습니다. 더욱더 평화의 아들딸로 살아가며, 한 형제자매, 한 겨레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진리에 협력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삶으로 주님께 찬양을 드리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진리 안에서 살아갑시다. 열린 마음으로 가슴을 활짝 펴고 진리를 찾아 생명사랑교회로 오는 모든 사람을 맞이합시다.
* 축도
거룩하신 성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지닌 것들을 굳건히 지켜주시고
거친 바다에서 여러분을 보호하시며
육지에서도 여러분을 지켜주시기를 원합니다.
사랑의 빛으로 가득하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서로 상대의 짐을 기꺼이 져 주고,
사랑하고 서로 아끼며 진리 안에서 살아가려는
여러분들의 발걸음을 이끌어주시며
언제나 진리에 협력하는 사람으로 서려는 여러분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참 평화의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