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한문덕 목사] 잘하는 일과 나무랄 것 – 2024년 6월 23일

요한계시록 2장 1-7절

[설교 계획]

2022년 6개월의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와서 성경의 순서대로 창세기부터 성서 본문을 정해서 설교를 해 왔는데, 벌써 요한계시록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서 본문은 올해 우리 교회가 정한 표어인 “첫 사랑을 마음에 품고 새 걸음으로”의 주제 본문이기도 합니다. 올해 첫 주일인 새해 주일에 이 본문으로 설교했지만, 오늘은 성서 본문 내용에 집중하여 더 충실하게 다루고자 합니다. 앞으로 요한계시록의 첫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들을 하나씩 살펴보려고 하는데, 오늘은 그 첫 순서로 에베소 교회입니다.

그동안 한국교회에서 요한계시록은, 세상의 종말을 예언하는 책으로 잘못 읽혀 왔습니다. 한국의 거의 모든 이단 사설은 요한계시록을 잘못 읽고 해석했기 때문에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단 사설이 아니어도 요한계시록에 대한 교인들의 무지와 오해가 사실 심각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로마의 11대 황제인 도미티아누스 시절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세속 문화에 맞서 싸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희망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 지구 종말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게 되리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통해 진정으로 고민하고 깨달아야 하는 것은 세상의 종말이 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대에 즉, 세상 사람들이 멸망의 길을 자초하는 시절에, 그렇게 여기저기에서 정말로 흉흉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때에, 어떻게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도 참으로 좋았던 처음의 창조 세계를 회복할 것인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세상 문화에 맞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어떻게 지켜내며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길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봐야 하고, 또 어떤 관점에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수요사경회 140강부터 146강까지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오늘은 곧바로 에베소 교회에 관한 편지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런데 이 편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우선 에베소라는 도시를 알아야 합니다.

[아시아의 빛 에베소]

에베소는 기원전 9-10세기 경에 아테네의 식민 도시로 건설되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부터 이미 발달된 도시였다는 것입니다. 기원전 3세기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더 큰 도시로 확장되었는데, AD 17년에 큰 지진이 일어났고, 그 이후 다시 도시 재개발이 진행됩니다. 요한계시록이 95년경에 쓰였으니 당시 에베소는 로마제국에서 몇 안 되는 신도시였던 것이지요.

에베소는 소아시아 지역 전체의 수도로 로마의 총독부가 있는 정치와 상업,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에서 로마,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였고, 한창 번성할 때 인구가 20만명이 넘었으며(조선 시대 한양이 10만), “아시아의 빛”으로 불려서 당시 사람들이 소아시아 지역을 갈 때면 반드시 한번은 가보고 싶은 도시였습니다. 2만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극장이 있었고, 4-5층짜리 대(大)저택들도 많이 보유하고 있었으며, 켈수스 도서관은 1만 2천 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1천 5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극장도 있었고, 공동목욕탕과 공동화장실(50명이 동시 사용하는)도 있는데, 이것은 뛰어난 상하수도 시설을 갖추고 있다는 이야기이고, 그만큼 발달한 문명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계획된 도시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에베소는 항구도시로 고대의 가장 중요한 길인 바닷길과 육로를 이어주는 핵심적 도시였고, 배에서 내리면 육지와 연결되는 아주 넓고 긴 도로가 있었습니다. 그 도로 양옆에는 온갖 장사치들이 장사진(長蛇陣)을 이루고 있었지요. 고대 도시의 전통을 간직한 데다가 새롭게 재개발된 것에 대한 기대로 전 세계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래서 이곳은 언제나 시끌벅적하고, 온갖 경쟁과 이권 관계가 얽히고설키면서 매우 다양한 욕망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에베소 안에는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을 비롯해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로마 여신을 위한 신전, 도미티아누스 신전도 있었습니다. 한편 에베소는 귀신을 쫓는 주술과 미신으로도 유명해서, “에베소의 문자”(Ephesia grammata)라는 부적을 소지한 사람은 신의 행운과 보호를 받는다는 이야기가 퍼져 있었고, 아르테미스 여신상과 신전 모형물을 파는 가게가 곳곳에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는 바울 사도가 아르테미스 여신상과 신전 모형물을 파는 상인 조합과 갈등을 빚는 장면들이 묘사됩니다. 제가 일부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 무렵에 주님의 ‘도’ 때문에 적지 않은 소동이 일어났다. 데메드리오라고 하는 은장이가 은으로 아데미 여신의 모형 신전들을 만들어서,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돈벌이를 시켜주었다. 그가 직공들과 이런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말하였다. ‘여러분,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는 이 사업으로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보고 듣는 대로, 바울이라는 이 사람이 에베소에서뿐만 아니라, 거의 온 아시아에 걸쳐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은 신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많은 사람을 설득해서 마음을 돌려놓았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이 사업이 명성을 잃을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아데미 여신의 신전도 무시당하고, 또 나아가서는 온 아시아와 온 세계가 숭배하는 이 여신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말 위험이 있습니다.’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격분해서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 여신은 위대하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23-28절)

여기에 위대한 아데미 여신이라는 말이 여러 번 등장하지요. 아데미가 바로 아르테미스입니다. 이렇게 에베소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들이 아르테미스의 신전 지기(temple keeper)라고 하면서, 자기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높았고, 아르테미스 여신이 자기를 지켜 준다고 믿었습니다. 기원전 356년 아르테미스 신전이 정신병에 걸린 사람에 의해서 불탄 적이 있는데, 신전 재건을 위해 에베소의 모든 여성이 자기가 지닌 귀금속을 자발적으로 바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당시 에베소는 로마로부터 특권을 입고 있던 도시였고, 그것이 에베소 시민들에게는 엄청난 자랑거리요, 권리요, 힘으로 작동했던 것입니다.

종교와 문화, 정치와 경제, 상업 행위와 삶의 모든 방식들이 로마와 로마의 신들을 중심으로 철저하게 재편되어 운영되던 곳이 바로 에베소였던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

이런 에베소에 교회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요? 사도행전 19장 앞부분은 이렇게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는 동안에, 바울은 높은 지역들을 거쳐서, 에베소에 이르렀다. 거기서 그는 몇몇 제자를 만나서,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바울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슨 세례를 받았습니까?’ 그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고 대답하니 바울이 말하였다. ‘요한은 백성들에게 자기 뒤에 오시는 이 곧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면서, 회개의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바울이 그들에게 손을 얹으니, 성령이 그들에게 내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방언으로 말하고 예언을 했는데,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다.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서,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강론하고 권면하면서, 담대하게 말하였다. 그러나 몇몇 사람은, 마음이 완고하게 되어서 믿으려 하지 않고, 온 회중 앞에서 이 ‘도’를 비난하므로, 바울은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나가서, 날마다 두란노 학당에서 강론하였다. 이런 일을 이태 동안 하였다. 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은,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모두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1-10절)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던 이들에게 바울은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베풀었고, 성령을 받은 이들이 제자가 되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는 일이 생기면서 교회가 탄생합니다. 바울은 이 사람들을 중심으로 에베소에 있는 유대교 회당을 돌면서 석 달 동안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그것이 여의지 않자 그리스도인들만 따로 모아서 두란노 학당에서 날마다 강론을 했는데, 그 햇수가 2년이 넘었다고 성경은 보도합니다. 이러다가 바로 아르테미스 여신 조각상과 신전 모형을 만들어 파는 상인 조합과 마찰이 생겨 바울은 에베소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온 것은 3차 전도여행 시기였으니, 53년에서 57년 사이일 것입니다. 이때 에베소에 교회가 생겼고, 이후 이 교회는 로마제국 내 가장 활발한 도시 한복판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 엄청 노력했을 것입니다. 기원 후 66년부터 70년에 이르기까지 로마와 유대가 전쟁을 벌였고, 전쟁으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었을 때, 그리스도교회의 첫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는 힘을 잃고 맙니다. 사실 예수님 돌아가시고 로마의 3대 황제인 칼리굴라 시절 예루살렘 교회도 큰 박해에 직면해서 한번 휘청거렸는데, 로마 유대 전쟁으로 인해 완전히 힘을 잃게 된 것입니다. 이후 안디옥 교회가 그리스도교의 중심교회로 부상하고 이어서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교회, 로마교회가 새로운 신앙의 중심지가 되는데, 소아시아 지역에서는 바로 에베소 교회가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다른 도시들의 어머니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잘하는 일]

오늘 에베소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몇 가지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2-3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나는 네가 한 일과 네 수고와 인내를 알고 있다. 또 나는, 네가 악한 자들을 참고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과,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밝혀 낸 것도, 알고 있다. 너는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견디어 냈으며, 낙심한 적이 없다.”

첫째 주님은 에베소 교회가 한 일들 중에 수고했던 것과 인내한 것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수고했고 어떤 인내를 한 것일까요? 수고는 복음의 불모지에서 복음을 지켜내고 교회를 착실하게 안착시킨 것입니다. 로마 사회는 철저하게 계급과 신분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입니다. 로마제국에서 로마 시민이 제일 높은 위치에 있지요. 다음은 로마로부터 혜택을 받은 도시 시민들이 있고, 그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한 이들이 있습니다. 계급 구조 속에서 높은 자리에 있지 못한 식민지 백성들은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콜레기아라고 불리는 조합 같은 것이 다양하게 생성됩니다. 출신 지역에 따라서, 아니면 함께 종사하는 직업에 따라서, 또는 종교에 따라서 다양한 모임들이 구성되고, 이들이 세력을 규합하여 계급과 신분 질서 사회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확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르테미스 신전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축제를 비롯해서 다양한 로마 신들의 축제, 그리고 신으로 떠받들어지는 전현직 황제들에 대한 숭배는 매우 일상적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로마 신들의 축제에도 참석하지 않고, 세속적 욕망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에베소는 로마의 특권을 입었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특권을 입은 존재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세상의 경쟁과 욕망을 분출하는 문화에 젖어 들지 않았던 것이지요.

특별히 네 수고와 인내를 안다고 주님께서 칭찬하시는데 여기에서 수고는 복음의 증언을 위해 흘리는 피와 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내는 억압과 불의, 박해를 수동적으로 참고 견디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참는 것을 넘어 거기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후 위기 속에서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개인적 노력으로 채식을 택한 분들은 고기가 먹고 싶어도 참겠지요.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라 채식주의 자체가 육식을 유지하기 위해서 훼손되는 전 세계의 산림과 잘못된 방식의 축산업에 맞서는 것이기도 하지요. 때때로 시위도 벌이고, 각종 캠페인도 합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오늘 요한계시록에서 인내를 말한 것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세속적 로마문화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세상의 악이 교회에 스며들지 않도록 싸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인들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니 악한 자들을 내버려 두지 않았고,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을 거짓말쟁이임을 밝혀냈습니다. 악한 자들과 거짓 사도들은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 것일까요?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에 위협이 되었던 거짓 가르침은 크게 몇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유대교 율법으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주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할례를 하고, 음식법을 지키고, 모든 율법 규정들을 준수해야만 한다고 하는 주장들입니다. 이것은 과거로 퇴행하는 것이고, 율법을 지킬 수 없던 사람들, 또는 지킬 필요가 없던 사람들까지도 모두 죄인으로 낙인을 찍는 나쁜 일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 중 하나는 자유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오히려 억압과 정죄로 왜곡된 것입니다.

또 다른 한편에는 그리스도의 자유를 빌미로 방종을 일삼는 자들이 있습니다. 신령한 지식, 즉 정신만 중요하고 육체는 함부로 해도 되고, 더 나아가 이 세상의 삶과 규칙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면서 일상의 도덕과 관습을 함부로 무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어차피 몸은 더러운 것이라 여기고, 이교 축제에서 진탕 먹고 마시는 향락을 거리낌 하나 없이 즐기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향락 추구는 사람들을 결국 이기주의적 삶의 형태로 몰아갑니다. 즉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으로 서로 돌보며 자율적이면서도 매우 고귀한 도덕성을 지키려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흐려 놓는 악한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거짓 사도에 대해서는 1세기 시리아 지역의 교회 규범서인 디다케에 아주 잘 나옵니다.

“여러분에게 오는 모든 사도는 마치 주님처럼 영접받을 일입니다. 그는 그러나 하루만 머물러야 합니다. 그렇지만 필요하다면, 이틀을 머물러도 됩니다. 만일 사흘을 머물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사도가 떠날 때에는 (다른 곳에) 유숙할 때까지 (필요한) 빵 외에 (다른 것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그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디다케 26장 4-6절)

“영으로 말하는 모든 예언자를 여러분은 시험하거나 판단하지 마시오. 사실 모든 죄가 용서받겠지만, 그런 죄는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영으로 말한다고 해서 다 예언자가 아니고 오직 주님의 생활 태도를 지녀야만 예언자입니다. 거짓 예언자와 (참) 예언자는 그 생활 태도로써 밝혀질 것입니다. 식탁을 (마련하라고) 영으로 명하는 모든 예언자는 바로 그 식탁에서는 먹지 않습니다. 만일 먹는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진리를 가르치는 모든 예언자가 만일 가르치는 것들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디다케 27장 7-10)

거짓 사도와 거짓 예언자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먹고 사는 일에 더 큰 관심을 두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한 말과 그들의 행동이 다를 경우 바로 그가 거짓 예언자이지요. 에베소 교인들은 이런 자들을 발본색원해서 찾아내고 추방했다는 것입니다.

잘하는 일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했다는 것이고, 주님께서도 거기에 동의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니골라당이 어떤 사람들이고 무엇을 했는지는 알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니골라당이라는 표현 자체가 성서 전체를 통틀어 요한계시록에만 두 번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니골라당이라는 헬라어 니콜라이테스를 분석해 보면 “승리”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니코스와 “사람들”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라오스가 결합되어 “승리의 사람들”(니콜라이테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로 유추하여 보면 니골라당은 아마도 그리스도인들이면서도 로마의 제국주의가 가지고 있는 우상 숭배적 사회문화에 순응하고 적응함으로서 사회적인 지위와 경제적인 이익을 얻는 데 성공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니골라당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면서도 로마의 신전에서 개최되는 상인 조합 연례 회의와 친교 모임에 참석하고 조합원들과 함께 신전의 식당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 부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이런 것을 행하면서도 어떤 거리낌도 갖지 않았고, 에베소 문화에 동화되어 정치적 상업적 이익을 최대한 누리면서도 그리스도교 복음이 지향하는 바,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고 그들과 연대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교회를 타락시키고 교회의 하나님 나라 선교를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들의 행위는 귀족적이고 엘리트적인 계급 질서만을 옹호하는 로마의 황제 숭배에 맞서 고난과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순교마저 감수했던 교인들의 삶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에베소 교인들이 고난을 견디어 내면서도 낙심한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위의 상황들을 살펴보면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의 단단함과 불굴의 투지가 정말 느껴집니다.

[나무랄 것]

그런데 에베소 교회에도 나무랄 것이 있다고 주님은 말합니다. 에베소 교인들이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이란 아들 예수를 보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하나님 사랑, 아버지에게 순명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내놓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주님의 몸 된 성령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지향하는 아가페적 사랑은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 당대 이웃에 포함되기 어려웠던 사회적 약자들,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에 더 고난이 많았고, 고통과 불행에 취약했던 이들을 품어 안으려는 사랑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들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저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있으니 용서해 달라”는 예수님의 기도를 본받아, 무지로 인해 발생하는 온갖 고통의 현장에서 사랑으로 그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하려고 했던 모든 노력과 수고를 말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과 악한 행위를 하는 이들과 싸우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아가페 사랑의 마음이 사그라진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 정의와 평화를 위해 불의에 맞서 싸우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분노의 감정에 휩싸이고, 평화를 외치면서 전쟁을 일으키는 일들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문제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비판, 그에 대한 개선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러는 사이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우리는 명심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 내서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에베소 교인은 차분히 지난 시간 자신의 활동을 되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잘못된 지점들을 찾아내 다시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서로 사랑하고, 고통당하는 이들의 참된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박해를 받거나, 무시를 당하거나, 조롱을 당할 때, 억울하고 화가 나고 속상할 때에는 주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며 풀어내야 합니다. 원수 갚는 일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심판자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명하신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예수의 제자임이 증명되는 것이고,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할 때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확인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주님은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경고하십니다. 교회가 자신의 본질인 사랑을 상실하고 회개하지 않으며 자신을 개혁하지 않으면 주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주님께서 모른다고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 우리 생명사랑교회도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얻는 길]

오늘 성서 본문에서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에게 하시는 마지막 말씀은 이것입니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열매를 주어서 먹게 하겠다.” 승리에 도취한 니골라당을 미워한 것을 칭찬한 주님이 “이기는 사람”이라는 경쟁의 용어를 쓴다는 것이 다소 모순적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진짜 이긴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승리하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진짜로 이기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열매를 주어서 먹게 하겠다고 우리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무엇과 싸워서 이겨야 할까요? 에베소 교회의 모습을 오늘날의 상황으로 재해석해 보자면 바로 이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작은 교회입니다. 크고 세고 많고 높은 것을 숭상하는 문화에서 보자면 정말 보잘것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가 자본주의적 경쟁과 승리주의에 물들지 않으면서, 순수한 복음을 지켜내고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데, 참으로 애쓰고 수고합니다. 가진 자들이 카르텔을 형성하여 돈과 힘으로 교회를 경영하는 방식의 기업적 대형교회와도 맞섰고, 작은 교회를 끊임없이 지향하면서 작은 교회들끼리의 연합을 통해 낮은 자, 약한 자들을 돕는 선교를 했던 것이지요. 나중에 나오지만 버가모 교회는 니골라당을 따르는데, 에베소는 기득권자들인 니골라당을 미워하며 끝까지 작은 교회로, 약자들과 연대하는 교회로 남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지치고 힘들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낙심한 적이 없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적이고, 개인적인 이기주의가 만연한 시대에 돈의 올바른 쓰임을 강조하고, 불의한 재물을 거부하며 공동체적인 삶과 약자를 향한 무한한 애정을 표현하려는 이들은 사회에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주식이나 비트 코인 열광처럼, 너나 할 것 없이 금융자본에 의한 단기간의 수익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을 때, 하나님의 거룩한 가치를 얘기하는 사람은 너무나 쉽게 왕따가 됩니다. 그러나 한편 사회의 이런 전반적인 흐름 때문에 사회적 빈부격차는 심해지고, 사회적 약자들은 소리 없이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불안과 분노, 우울증과 스트레스 지수는 높아지고 이것이 또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사회적 문제를 풀어보려고, 신음하는 이들이 바라는 구원을 실현하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게 마련입니다. 외롭고 힘든 길을 가게 됩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도 복음의 깊이를 추구하려는 이들이 별난 사람으로, 잘난 체하는 사람으로 오해되곤 합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극복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생명 나무의 열매를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한 일, 수고와 인내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참고,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견디어 내고, 낙심하지 않으면서 진실을 향해, 참된 신앙과 삶을 위해 애쓴 것을 우리 주님이 아십니다. 우리가 처음 사랑을 유지하며 승자독식의 문화와 맞서 싸울 때 승리한다면 저와 여러분에게 생명 나무의 열매가 주어질 것입니다. 모두 생명나무의 열매를 얻으시는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하나님! 오늘 우리는 에베소 교인들의 믿음과 삶을 살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은 로마제국의 이교문화 속에서 굳건하게 자신의 신앙을 지켰습니다. 승자독식의 문화에 맞서고, 거짓 예언자들을 물리쳤습니다. 로마의 특권을 입은 거대 도시의 화려함 속에 감추어진 사회적 약자들의 고난과 어려움, 그들의 탄식에 나 몰라라 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참고 견디면서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을 주소서. 인내하는 힘과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지혜, 불의한 세력과 맞서는 용기를 허락하여 주소서.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도 가득하게 하여 주소서. 주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함으로서 이 시대를 밝히는 하나의 작은 촛불이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친구이시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주님께만 영광을 드립니다. 주님의 사랑을 노래하며, 입술로 찬양하며 마음을 드립니다. 세상의 온갖 유혹과 돈의 덫, 권력의 마수에서 자유롭게 하신 것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온전히 주님만 섬기기를 다짐하며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들고 나옵니다. 우리를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받으시고, 우리가 정성껏 준비하여 드리는 예물 또한 받아 주소서. 이 예물을 통하여 주님 영광 받으시고, 한 민족 모든 동포에게 하늘의 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으로 새롭게 힘을 얻고 활기를 얻게 하시고, 새로운 비전과 에너지와 충족함을 가지고 세상으로 기쁘게 나아가게 하여 주소서. 주님의 몸인 우리 생명사랑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사역인 생명, 평화, 정의의 삶을 감당하게 하시고, 늘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며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주님 나라를 위해 애쓰십시오. 하나님 나라를 위하는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주실 생명나무의 열매를 얻기 위해 늘 힘쓰십시오.

* 축도

지금은 산 자에게 사랑을, 죽은 이에게는 평화를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와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과 성령의 거룩한 사귐, 애틋한 위로가 사랑과 지혜의 영, 거룩한 영의 가르침에 따라 오늘도 변함없이 하나님 나라 사역을 위해 수고하고 인내하는 생명사랑 교우들 위에, 거룩한 영을 힘입어 주님의 자녀로 평화를 일구는 전국의 모든 성도들 위에,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고 있는 북녘의 동포들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