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한문덕 목사] 일어나서 걸어가거라 – 2022년 1월 23일
이사야서 40장 12-17절, 시편 9편 7-12절, 요한복음서 5장 1-9절
[인류에게 빛이 되는 위대한 고전과 성경읽기]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저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태동고전연구소라는 곳에서 3년 동안 사서삼경을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1학년 때 논어․대학․중용․맹자를 배우는데, 사서(四書)는 책을 보지 않고 외워야 2학년으로 진급할 수 있습니다. 논어의 경우는 모두 20편인데, 매주 한 편씩 배우고 그 다음 주 수업 시작 전에 한 편을 외운 다음 수업을 진행합니다. 열 편을 다 배우고 나면 중간강이라 하여, 열 편을 다 외우고, 논어 20편을 다 배우면 또 그것을 다 외웁니다. 대체로 소리 내서 읽다 보면 저절로 외워지는데, 사람에 따라서 약간의 편차는 있습니다만, 한 100번 정도 읽으면 대체로 외워집니다. 이렇게 경전을 외울 때의 장점은 어떤 상황이 되었을 때, 그 경전의 구절이 문득문득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독서가 단순히 정보 습득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지혜로 일상에서 녹아든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편의 말씀에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라는 구절(2절)이 나오는데, 이 또한 끊임없이 입으로 되뇌며 읊조리던 고대의 독서 방식을 뜻합니다. 책이 무척 귀하던 시절, 종이도 없고 갈대 잎이나 양가죽에 글을 써야 하던 시절의 공부 방법은 전부 소리 내어 반복해서 읽고 암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지식정보가 몸에 익숙한 지혜가 되도록 하는 암기는 오늘날의 공부에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동서양 고전을 공부하면서 얻은 또 하나의 깨달음은 오늘날 수시로 출간되는 자기 계발서 100권을 읽느니, 수많은 인류에게 감동을 주었던 위대한 고전 한 권을 반복해서 읽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두고 다양한 시대와 지역을 거쳐 가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감동과 깨달음을 준 책이 바로 고전이기 때문입니다. 읽을 때는 달지만 쉽게 잊히고 마는 오늘날의 책들과 달리 고전의 구절들은 가슴 속에 오래 남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들의 상상력을 자극함으로써 자신의 깊은 내면으로부터 생수가 솟아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얻을 수 있는 축복 중 하나는 우리들이 가진 성경이 바로 그러한 인류의 위대한 고전이요, 자산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2년간 매일 성경을 읽어왔고, 올해 3년차로 구약성서 1독, 신약성서 2독, 시편 6독을 마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혜가 늘고, 삶이 더욱 풍성해지리라 생각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 따라 열매를 맺고 시들지 않는 삶이 될 것입니다.
과거 신앙인들은 소리 내어 읽기와 암기가 핵심적 읽기였다면, 오늘날 성서 읽기에는 다양한 해석 방법론을 사용합니다. 그 때 거기에서 쓰인 성경을 지금 여기에서 읽는 일이 만만한 일이 아니고, 다양한 문학적 기술방식으로 쓰이는 데다가, 독자들이 쓰인 글을 읽고 무엇을 느끼고 깨닫느냐도 저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작품을 두고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여러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그렇게 이런 저런 관점에서 살펴보고,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얻어갈 수 있다면, 그만큼 큰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치유와 안식일 논쟁]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복음서의 이야기 또한 5장 전체를 읽으면서 살펴보면 수많은 사유의 보석들이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요한복음서 5장은 네 단락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1-9절), 마침 이 날이 안식일이었기에 발생한 유대 사람들과의 논쟁(10-18절), 야훼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과의 관계 설명(19-29절),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30-47절)입니다.
큰 틀에서 보면 요한복음서 5장의 이야기는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한 예수를 두고 이 분이 과연 어떤 분인가를 설명하고 알리는 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로 아버지의 뜻에 따라 당시 유대법인 안식일 계명을 어기고 병자를 고칩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 문제가 되었고, 이어서 예수님은 자신의 치유 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이 드러났기 때문에 자신이 정당하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과 하나님을 언급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과 구약성서의 구절들을 예로 들면서 자신을 증명하십니다.
요한복음서 5장이 이렇게 구성된 것은 이제 막 생겨나는 그리스도교가 이미 존재하고 있던 유대교와 갈등하면서 자신들의 자리를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며, 자신들의 신앙의 탁월함을 설명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첫 교인들은 안식일 계명으로 대표되는 율법이 더 이상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선언한 것이며, 38년이나 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드러난 것처럼 자신들은 예수님의 활동과 가르침, 그분의 삶을 따르는 것을 통해 참된 자유와 해방, 온전한 삶을 누린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런 초기 교회의 주장은 타당한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은 유대 랍비들의 해석에 따라 매우 구체적으로 실행되었습니다. 서기 200년경에 구전되어 내려오는 율법들을 집대성하여 만든 미쉬나에 보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서른아홉가지의 일이 나옵니다. 1. 씨 뿌리는 일, 2. 밭가는 일, 3. 수확하는 일, 4. 곡식단 묶는 일, 5. 타작하는 일, 6. 키질하는 일, 7. 곡식 고르는 일, 8. 맷돌질, 9. 체질하는 일, 10. 반죽하는 일, 11. 빵 만드는 일, 12. 양털 깎는 일, 13. 표백하는 일, 14. 짐승털 다듬는 일, 15. 염색하는 일, 16. 물레 돌리는 일, 17. 끈으로 고쳐 매는 일, 18. 바늘귀 꿰는 일, 19. 모직물 직조하는 일, 20. 분류하는 일, 21. 끈 매는 일, 22. 푸는 일, 23. 바느질 하는 일, 24. 찧는 일, 25. 사냥하는 일, 26, 짐승을 잡는 일, 27. 가죽 벗기는 일, 28. 고기를 소금에 절이는 일, 29. 가죽 처리하는 일, 30. 닦는 일, 31. 자르는 일, 32. 글씨 쓰는 일, 33. 지우는 일, 34. 건축하는 일, 35. 허무는 일, 36. 짐 나르는 일, 37. 불 켜는 일, 38. 불 끄는 일, 39. 안식일 전에 시작했던 일을 끝마치는 일입니다.
이 모든 일을 다 외우기도 쉽지 않은데, 당장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살아야 하는 일반 서민들이 이 모든 것을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이 중에 하나라도 어기면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죄인으로 불리는 순간 사회생활에 제약을 받았기에 유대교의 율법이 당시 서민들에게는 자유가 아닌 억압으로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 베드자다 연못가에 치유 받기 위해 모인 병자들을 나열하면서 눈먼 사람들, 다리 저는 사람들, 중풍병자들을 언급하는데, 이들의 특징은 모두 죽음에 이르지는 않지만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데는 매우 커다란 불편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율법에 맞춰 사는 것은 당시 평범한 서민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큰 불편을 끼치는 것이며 장애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서 5장 1절에는 유대 사람의 명절과 예루살렘을 언급하고, 9절에는 또 안식일을 언급하고 있는데, 예수님 당시 일반 서민들은 안식일에 참다운 안식을 누릴 수 없었고,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에서 진정한 평화를 느낄 수 없었으며, 유대인의 명절에도 축제를 즐기지 못하고 오히려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안식일 계명을 어겨가며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이야기는 누가 진정한 구원을 가져다주는가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말로 ‘베드자다’라고 명시한 연못의 이름은 원래 “물줄기의 집”이라는 뜻의 ‘베트 에쉬다’에서 온 것이지만, 그 발음은 ‘베트 헤세드’의 줄임말로 들릴 수 있었고, 그렇다면 그 뜻은 ‘자비의 집’이 됩니다. 자비가 베풀어져야 하는 공간, 생명의 물줄기가 솟아나야 하는 공간, 베드자다에서 진정으로 누가 구원을 베푸는지를 지금 요한복음서 저자는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안식일을 어겼다고 트집 잡는 유대인들과 예수를 박해하는 그 대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17절) 이 말은 유대인들에게 더욱 큰 분노를 일으키는데, 왜냐하면 예수가 야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은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언제나 일하시듯, 지금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초대 교인들은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하시고 계신다는 사실과 율법이 무엇이 올바른지를 알려 줄 수는 있지만 구원의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기 보다는 교리에 얽매여 있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이미지로 지옥에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여 있기도 합니다. 제가 상담을 해 보면 여전히 많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참다운 자유를 제공하기보다는, 교회를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해 교인들을 옭아매는 여러 장치들을 만듭니다. 안식일보다 사람이 귀하다고 하신 예수님을 따르기 보다는 율법 조문과 꽉 막힌 신념체계, 그리고 또 다른 종류의 욕망의 노예가 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베드자다 연못가의 한 병자 이야기 : 학습된 무력감]
요한복음서 5장 전체는 이러하지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예수님과 38년 동안 병을 앓고 있는 사람과의 만남과 대화, 치유가 핵심 내용입니다. 예수님과 병자의 대화를 가만히 살펴 보면 우리는 또 다른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주목하게 되는 한 마디는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물으신 물음입니다. “낫고 싶으냐?” 저는 오늘의 본문을 읽을 때마다 이 부분이 정말 낯설게 다가옵니다. 아픈 사람의 가장 큰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병이 낫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환자에게 묻습니다. “낫고 싶으냐?”
예수님이 이렇게 물으신 이유는 이 병이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병이 들어서 38년이나 앓고 있다면, 과연 그 때에도 계속해서 병을 고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요? 이 사람이 어떤 병이 걸렸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앞에 나열된 다른 환자들을 보아서 이 사람도 눈이 멀거나, 다리를 절거나, 중풍병이거나 아니면 또 다른 병일 것입니다. 연못이 간헐천이어서 가끔씩 생수가 솟아날 때 물이 움직이곤 했는데, 그 때 가장 먼저 들어간 자가 병이 낫는다는 속설을 믿고 들어가려 했지만 갈 수 없는 형편이라면 매우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심각한 장애 상태가 만약 38년이나 지속되고 있었다면 저와 여러분은 낫기를 기대했을까요? 아니면 그냥 이런 상태로 살다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우리는 일제 식민지를 35년이나 겪었습니다. 그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나섰지만 한편으로 자신의 기득권과 이익을 위해 친일파가 된 이들도 있었습니다. 초기에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나중에는 친일파로 변절한 자들도 매우 많았습니다. 친일행각을 한 자들과 변절한 자들에게 왜 그랬는지를 물으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배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35년을 보냈을 뿐인데도 벌써 이렇게 거기에 안주하고 거기에서 적응하는 인간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편하고 삶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38년이나 된 병자 또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연못가 주랑에 나와 있지만 실제로 자기의 병이 나을 가망성에 대해서 얼마나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신명기 2장 14절에 의하면 38년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바네아를 떠나 세렛 개울을 건너기까지 광야에서 보낸 시간이었습니다. 광야 40년의 세월 동안 약속의 땅에 대한 희망을 잃고 불평 불만을 늘어놓던 사람들은 전부 죽고야 말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38년이나 고통 속에 있다면 그 때에도 여전히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요?
윈스턴 처질이 말하기를 “성공이란 열정을 잃지 않고 실패를 거듭할 수 있는 능력”(Success is the ability to go from one failure to another with no loss of enthusiasm.)이라는데 과연 38년 동안 열정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요? 발명왕 에디슨이 말하기를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 중 다수는 성공을 목전에 두고도 모른 채 포기한 이들”(Many of life’s failures are people who did not realize how close they were to success when they gave up.)이라는데, 과연 누가 38년이나 고통 속에 있다가 낫게 될 줄을 알 수 있을까요? 오늘 예수님을 만난 이 병자는 어제까지도 자신이 낫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낫고 싶으냐?”라고 물었을 때, 이 사람의 귀에는 “왜 낫질 못했냐?”로 들렸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서 대답합니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어떤 병에 걸렸는지 자세히 모릅니다. 이 사람도 아마 처음 몇 년 간은 자기의 병을 고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이 사람도 자신의 병을 나으려고 물이 움직일 때에 연못으로 갔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기보다 먼저 갔습니다. 그래서 매번 실패하고 이 실패의 연속은 이 사람을 절망의 늪에 빠지게 합니다. 이 사람은 이제 무기력을 학습하게 됩니다. 피할 수 없는 힘든 상황을 반복적으로 겪게 되면 그 상황을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오더라도 극복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자포자기하는 현상을 학습된 무력감이라고 부르는데, 그런 처지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 사람을 학습된 무력감에 빠지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바로 경쟁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많은 환자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님의 천사가 때때로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데, 물이 움직인 뒤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나았기 때문이다.” 이 묘사에서 주목할 단어는 “맨 먼저”와 “무슨 병에 걸렸든지”입니다. 맨 먼저 들어가면 무슨 병이든 낫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가 인류에게 제시하는 일종의 망상이자 마약입니다. 네가 1등만 한다면 무엇이든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1등만 기억하는 세상에서는 1등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패배자요, 실격자가 되고 맙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학습된 무력감에 빠지고, 우울과 불안을 겪으며 자신도 모르게 좌절 속에서 마지못해 살아가게 됩니다.
게다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남이 나를 도와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늘 이 환자는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 주는 사람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경쟁 사회에서 흙수저로 태어난 사람이 겪는 일입니다. 스스로는 할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정부가 도와주거나 누군가 나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 지금의 비참한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비트 코인이나 로또 당첨이라는 운에 자신을 맡깁니다. 끝내 희망을 저버릴 수는 없어서 연못가에 남아 있지만 누군가 자기를 들어서 제일 먼저 연못에 넣어 주기만을 생각하고 있는 이 사람처럼, 자본주의의 사회가 제시하는 논리와 가치관에 따르는 순간 우리 모두의 삶은 바로 끌려다니는 노예의 삶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해결책 :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오늘 예수님은 다른 방법을 제시합니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매우 간단하지만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남들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은 경쟁에 뛰어들어서 연못에 제일 먼저 도달하는 자가 승리한다는 것이었지만, 오늘 예수님은 다른 것을 말합니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 때문에 아프고 병들고 괴롭습니까? 우리를 옭죄고,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부과하고, 우리의 삶에 고통을 주는 것은 진정으로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떤 가치관에 매여 있기에 우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까? 세상의 가치에 잘 적응하여 기득권이 된 사람은 지금 세상에서도 아픈 이들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픈 이들을 찾으시는 예수님의 마음과는 거리가 멉니다.
한편 이 세상의 방식 때문에 아파하면서도 여전히 이 세상의 방식으로 자신의 병을 고치려는 우리들의 모습도 또한 예수님의 길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통하여 전혀 새로운 길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낫고 싶은 것일까요?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정말 깨어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은가? 우리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냥 침대에 누워 마냥 그 안락함 속에 안주하고 싶지 않을까요? 불의한 세상에, 하나님을 거역하는 세상에서 깨어 있다는 것은 어쩌면 그 자체로 힘든 길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깨어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점잖은 어른이 아들의 방에 가서 문을 두드립니다. “얘야, 일어나거라!” “일어나고 싶지 않아요. 아버지.” 아버지가 소리칩니다. “일어나. 학교 가야지.”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아요.” “왜 싫어?”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에요. 첫째, 거긴 너무 시시하고, 둘째, 아이들이 성가시고, 셋째, 전 학교가 싫어요.” 그러나 아버지가 말씀하십니다. “그래, 그럼 난 네가 왜 반드시 학교에 가야 하는지 세 가지 이유를 말해 주마, 첫째, 그건 네 의무고, 둘째, 네 나이가 마흔다섯 살이고, 셋째, 넌 교장이기 때문이다.”(앤소니 드 멜로 <깨어나십시오> 11-12쪽)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우리는 이미 성인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깨어나십시오!
“낫고 싶으냐?”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우리는 이 물음에 수많은 변명을 늘어놓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지쳤다고, 너무 긴 시간이 흘러 버렸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 남 탓으로 돌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사야의 말씀을 들으시고, 시편의 말씀에도 귀를 기울이십시오. 주님은 억울한 자들이 피할 요새이시며, 고난받을 때에 피신할 견고한 성이십니다. 주님은 억울하게 죽어 간 사람들을 기억하시며, 고난 받는 사람의 부르짖음을 모르는 체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바닷물을 손바닥으로 떠서 헤아리시며, 뼘으로 하늘에 재어 보시는 분입니다. 산들을 어깨 저울로 달아 보고, 언덕들을 손저울로 달아 보시고, 섬들도 먼지 들어 올리듯 가볍게 들어 올리시는 분입니다. 이런 주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정말 진지하게 생명을 찾으십시오. 예수의 길에서 자유의 복음을 만나십시오. 여러분이 정말 낫고 싶거든, 여러분 스스로 일어나서 여러분이 지금 안주하려는 그 자리를 걷어가지고 걸어가십시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생명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넘치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풍요로움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낫고 싶으냐?”라고 물으시는 주님께 나를 도와주는 다른 이가 없다고 핑계하지 말고, 주님과 동행하여 우리의 삶을 회복하게 하소서. 세상 풍조에 휘둘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우리의 삶 전체를 산 제사로 드리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과거의 어둔 자리를 걷어내고 희망의 새 아침을 기대하는 우리가 되게 하시고, 말씀에 우뚝 서서 당당히 걸어가게 하소서. 힘 주시고 위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 올 한해, 우리의 삶이 분주할 지라도 사랑을 위하여 늘 기도하게 하소서. 자신의 일에 취하여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거나 세상이란 벽에 자신을 걸어 놓고 불안에 빠져 있지 않게 하소서. 시간을 내어 대화하며 건강한 사랑을 만들게 하소서. 삶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을 함께 나누어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임을 더 깊이 깨닫게 하시고, 서로의 만남을 감사하게 하소서.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늘 행복하게 하시고, 우리의 사랑이 힘 있고 아름답게 피게 하소서. 오늘 우리는 주님의 은총을 기억하며, 우리의 전 삶과 모든 것을 바친다는 의미로 예물을 드립니다. 이 예물을 받아주소서. 움켜쥔 손을 펴게 하시고,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을 서둘게 하소서. 아픔과 고통이 있는 곳에서 부를 때에, 달려 나가게 하소서. 우리의 삶이 거룩한 산 제사가 되길 바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고통이 여러분의 삶을 망치지 않도록, 인생의 하강곡선에서도 퇴행하지 않는 품위를 지켜 가십시오.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거룩한 친교가 건강한 정신과 건강한 몸으로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들과 이 시간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아픈 세상에서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