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한문덕 목사]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 2020년 9월 13일
신명기 24장 10-15절, 시편 73편 1-3절, 누가복음서 3장 7-14절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 속에서]
최근에 연이어 불어온 태풍으로 인해 부산과 울산, 포항, 경주 등 경상남도와 강원도 지역, 그리고 울릉도에 큰 피해가 있었습니다. 마이삭과 하이선의 위력은 정말 대단하였습니다. 지붕이 통째로 날아가고, 트럭이 바람에 넘어지고, 거센 파도에 방파제가 무너지고, 도로 유실에 산 사태까지. 긴 장마에 이은 태풍이었기에 더더욱 많은 시설 파손과 경제적 손실을 끼쳤습니다. 따뜻한 공기를 가득 담은 저기압 대와 차고 건조한 공기를 가두고 있는 고기압 대, 그리고 남쪽 열대지방으로부터 습기를 가득 몰고 달려온 태풍이 서로 만나서 일반 태풍보다 훨씬 강한 초강력 태풍이 만들어질 때, 그것을 “퍼펙트 스톰”이라고 부르는데, 마이삭과 하이선은 강풍과 폭우를 동반하고, 해일까지 일으키는 “퍼펙트 스톰”에 비견할 만 했습니다.
그런데 “퍼펙트 스톰”이라는 기상 용어는 정치와 사회, 경제 전반에 사용됩니다. 특별히 여러 악재들이 한꺼번에 겹쳐서 상황을 더더욱 어렵게 만들 때 종종 사용합니다. 지금의 우리 사회를 보면 장기화 되고 있는 코로나 19와 긴 장마와 태풍의 피해, 의사들의 파업과 8.15 광화문 집회발 코로나 재확산 등 이중 삼중의 위기가 겹치는 퍼펙트 스톰과 매우 비슷한 상황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의 이런 상황들이 하루아침에 어느 날 갑자기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이하 IPCC)는 지난 30여년 동안 지구 보고서를 통해서 전 세계 정책결정자들과 시민들에게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에 대한 위기를 끊임없이 경고해 왔고, 인간이 지구 전체 면적의 14%의 땅만을 사용하던 1900년대와 달리, 77%나 사용하고 있는 지금 인수공통감염병이 급속하게 증가할 것임을 오래전부터 예측해 왔습니다. 코로나 19 백신과 치료제가 나와도, 다시 이전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이유는 바로, 지금의 모든 위기 상황이 지구온난화에 의한 기후변화가 근저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구온난화는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무분별한 산업문명 발달에 따른 것입니다.
인구가 대폭 줄고, 인류가 서식하는 생활반경을 1900년 초로 되돌리고, 모든 산업의 환경을 생태친화적으로 만들지 않는 한, 지금과 같은 기후재앙과 바이러스 감염병은 모습을 달리하며 계속 반복된다는 것이 학자와 전문가들의 이야기입니다. 이집트의 나일강이 범람하고, 폭염과 산불, 쌍둥이 허리케인으로 몸살을 앓는 미국의 콜로라도의 덴버는 38도를 전후한 폭염이 사나흘 계속 되다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영하 2.2도가 되는 이전에 볼 수 없던 기상이변이 발생했습니다. 이런 기후재앙들은 전 세계에 경제적 불황을 불러올 것이고, 그것은 또 가난한 국가들과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장 먼저 큰 타격을 주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방역 모범국가도 몇 차에 걸쳐 추경을 하고 재난지원금을 지급해야만 지금의 경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2.5단계로 올리자 취약한 소상공인들의 삶은 하루아침에 곤두박칠 칩니다. 코로나 19의 장기화는 젊은이들의 심리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고, 평소에 내성적인 사람은 그나마 잘 견디고 있지만, 외향적인 사람은 코로나 블루에 이어 분노마저 생기는 코로나 앵그리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학교에 가지 못하는 학생들, 하루 종일 아이를 보아야하는 가정주부들, 계속되는 업무에 시달리는 의료진들은 갈수록 지쳐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들을 하나씩 보고 있노라면 앞이 그저 막막합니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이 재앙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며, 또 더 시급하게 해야만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세례 요한의 충고]
2천년 전에 우리보다 훨씬 더 먼저 이런 물음을 물었던 이들이 있습니다. 로마제국 치하에서 절망적인 삶을 이어가던 유대 백성들입니다. 이들에게 한 명의 예언자가 나타납니다. 그는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하여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산과 언덕을 깎고 골짜기를 채워 평탄한 길을 만들어낸다는 이사야의 말씀은 기존의 모든 계급 질서를 뒤엎고 새로운 평등 세상을 만든다는 하나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기존의 질서가 무너져 혼돈과 무질서의 세계로 빠져 든다는 신호이기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유대 백성들에게 닥쳐올 진노에 대해 선포합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러 오기만을 기다렸던 백성들에게, 야훼의 날이 오히려 심판의 날이 될 것이라는 예언자들의 외침이 요한의 입을 통해 다시 울려 퍼집니다.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욕을 하며 맹공격을 퍼 붓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모두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돌들 가지고도 아브라함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하나님의 심판의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실 것이다.” 예언자의 추상(秋霜) 같은 포효가 사람들의 양심을 일깨웠고, 그래서 사람들은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세례요한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 무리에게 한 충고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서로 나누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지난 주일 설교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화산 폭발과 1,000년 넘게 이어진 빙하기의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살아남은 인류의 생존법은 바로 협력이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똑같은 말을 합니다. 서로 나누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나에게’가 아니라 ‘우리에게’입니다. 일용할 양식보다 더 많은 사람은 오늘 일용할 양식이 없는 이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위기에 처할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생존만을 추구하기 쉽습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하려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히려 함께 나눌 때에만 모두가 살 수 있습니다. 인류가 지금의 위기를 겪으며 깨달아야 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구의 모든 존재들과 함께 나누는 삶을 살지 않고, 자신의 이익이나 자기 집단만을 위해 살아온 습관들이 지금의 파국을 불러 왔음을 빨리 깨우쳐야 합니다. 남을 살릴 때 자기도 삽니다.
코로나 19 상황에서 새롭게 부상하는 직업들이 있고, 훨씬 더 잘 되는 사업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에겐 지금의 위기가 곧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먼저 잡은 사람들은 그것으로 인해 얻는 많은 이익을 어려움을 겪고 생계가 막막한 이들을 위해 내어 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 모든 인류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나눌 줄만 알아도 굶주림 문제는 해결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헛된 욕망을 절제하고, 소박한 삶에 자족하며 즐길 줄만 알아도 이 세상은 훨씬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ngland Premier League) 리버풀에서 활약하는 세네갈 출신의 사디오 마네라는 선수가 있습니다. 이 선수의 연봉은 1020만불, 우리나라 돈으로 120억이 넘습니다. 그런데 그는 액정이 깨진 손 전화를 바꾸지 않고 계속 가지고 다녔는데, 이 점을 의아해 하던 팬들이 계속 물었습니다. 왜 깨진 액정을 바꾸지 않느냐고. 이것이 화제가 되자 사디오 마네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내가 왜 열 대의 페라리, 20개의 다이아몬드 시계, 두 대의 전용기를 가져야 하나요? 그게 세상에 무슨 도움이 될까요? 과거에 나는 배고팠고, 농장에서 일했고 맨발로 뛰어 놀았고, 학교에 다니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나는 학교를 짓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과 옷을 나누어 주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 동안 여러 학교를 지었고 경기장도 하나 지었습니다. 우리는 극도의 가난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옷과 신발 그리고 음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 매달 70유로(약10만원)씩을 매우 가난한 세네갈 사람들, 지역의 모든 사람들에게 생활비 지원 차원에서 주고 있습니다. 나는 값비싼 고급차들과 고급 저택과 여행 그리고 심지어 비행기까지 떠벌리고 자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그저 내 나라 사람들이 삶이 내게 준 것들 가운데 조금이라도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들은 무엇을 하면 좋겠냐고 묻는 세리와 군인에게 계속 답변을 해 줍니다. “정해 준 것 외에는 더 받지 말아라.”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요한은 모든 백성에게는 서로 나눌 것을 그리고 특별한 직업을 가진 이들에게는 공정함을 지키고 법을 준수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미 높은 자리에 올랐고 많은 것을 가지고 있기에 이미 모든 경쟁에서 유리합니다. 거기에 더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이용해서 속이고, 거짓 뉴스들을 만들며, 협박하여 더 뜯어내려고 합니다. 요한은 바로 그런 짓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세례요한은 당시 사람들의 삶의 양식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닥친 기후 변화에 따른 재앙을 해결하는 길도 결국은 우리의 삶을 어떻게 꾸리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당하는 천재지변도 있지만,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상처를 주고 모욕을 느끼게 하고 삶을 힘들게 하는 것은 거의 대부분 우리들의 삶의 방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코로나 19도 마찬가지입니다. 답은 뻔합니다. 마스크 쓰고, 모임을 자제하고, 손을 잘 씻어서 현재 우리가 가진 의료시스템 내에서 관리하면 됩니다. 계속 발생하는 바이러스, 박테리아에 의한 전염병을 줄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욕망을 줄여서 더 이상 다른 생명체들의 서식지를 빼앗지 않으면 됩니다. 세례 요한이 군인에게 충고했던 것처럼 우리가 더 이상 자연을 겁박하고 억지로 빼앗지만 않는다면, 주어진 세계 안에서 만족하는 법을 배우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세례요한은 야훼 하나님이 오시는 날이 심판의 날이 아니라 구원의 날이 되기 위해서는 모두가 먼저 사회적 약자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경제적 빈곤층을 줄이고, 고단하고 힘든 삶을 이어가는 소외계층들의 복지를 향상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불평등을 줄이고 함께 잘 사는 일은 이미 충분히 소유하고 누리는 이들의 절제와 기부, 나눔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정신혁명을 요청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돈을 잘 버는 이들 중에 어떤 이는 통장에 쌓아 둘 때 행복을 느끼고, 어떤 이는 고가의 물품들을 사는 맛에 살고, 어떤 이는 그것을 가지고 잘난 체를 하며 존재감을 느끼지만, 어떤 이는 그것을 모두와 함께 나누며 행복을 만들기도 합니다. 어떤 인간이 참된 인간이며, 어떤 삶이 참으로 고귀한가, 지금 우리가 겪는 위기의 극복에는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적인 깨달음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약자보호법과 인간의 양심]
구약성경에는 과부와 고아, 나그네를 돌아보라는 말씀이 수두룩하게 나옵니다. 과부와 고아, 나그네는 어디에도 기댈 수 없는, 비빌 언덕이 없는 사회적 약자의 대명사입니다. 이들에게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질적 수준이 판명됩니다. 성경은 어디에도 의지할 것 없는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서 율법을 제정하셨다고 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재판하는 이들은 이 법들을 통해 사회적 약자를 우선적으로 돌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연과 지연, 혈연에 의지할 수 없는 이들, 예를 들면 북한 이탈 주민, 난민들은 어디에 기댈 수 있을까요? 악덕 기업주에게 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 오랜 세월 다수에게 혐오의 대상이 된 성소수자들, 소상공인들과 영세 자영업자들은 누구에게 기대어 살아갈 수 있을까요? 법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법은 이들에게 가장 공평하고 올바르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가요? 과연 법이 정말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위해 잘 사용되나요?
법을 이용해서 더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 자신에게 유리한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그래서 법을 잘 만들고 준수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에 이미 존재하는 참된 인간성을 기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핀 구약성서는 빚진 사람에게 담보물을 가지러 갈 때 집 안까지 들어가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최소한의 인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빚쟁이들이 몰려와 마구 험한 말을 하고,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일들이 비일비재한 오늘의 모습을 보면 과연 현대인들이 과연 옛 사람들보다 진보한 문명인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낯선 땅에 와서 품팔이 하는 외국 사람들에게 억울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 품삯은 반드시 그날 주라는 말씀은 인간으로서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보호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들이 지닌 그 깊은 뜻을 이해하고 마음에 새기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물건 취급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오늘 시편의 말씀은 우리의 참된 인간성이 어떻게 타락하는지 한 사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건만, 나는 그 확신을 잃고 넘어질 뻔했구나, 그 믿음을 버리고 미끄러질 뻔했구나. 그것은, 내가 거만한 자를 시샘하고,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부러워했기 때문이다.”
오늘의 시를 쓴 시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정직해야 하고 정결한 마음을 지녀야 함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던 그가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신앙인이 지녀야 할 가치관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미끄러질 뻔 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두 가지를 말하는데 첫째는 거만한 이를 시샘한 것, 둘째는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부러워한 것입니다.
구약성경 신명기 역사가의 가치관에 따르면 선을 행하면 주님께로부터 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주님께 벌을 받습니다. 그런데 여기 한 사람이 주님의 말씀과 규례에 순종했음에도 번영이 온 것이 아니라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 마음에 의심이 들었습니다. 왜 악인들이 형통하며 그런 인간들이 저렇게 뻐기는가? 그런 인간들의 으스대는 모습이 눈꼴사나웠으면서도 그들이 누리는 평안과 성취는 자신도 모르게 부럽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마음이 우리를 참 사람됨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속에도 남들 앞에서 으스대고 싶은,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좀 넉넉하게 살면서 평안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이런 자연스런 마음들이 과도하게 되면 남을 지배하려들고, 내 평안을 위해 남의 것을 빼앗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렇게 자기 욕망의 성취가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되는 순간, 우리는 자신 아닌 다른 이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물건 보듯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하면 모욕감을 느끼게 되고, 자신도 똑같이 상대에게 모욕감을 주려고 합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지요.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고 물건 대하듯 하는 이들이 많아지면, 그 사회는 점점 타락하고 불안하고 나쁜 세상이 됩니다. 신뢰가 무너진 세상에서는 살 수 없는 법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타락을 막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구원하려는 사람들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무시하고 모욕할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모욕감을 극복하면서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기고 상대가 참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도우려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교회 이전 때문에 대출을 알아보려고 우리가 거래하는 국민은행에 갔더니, 교인 500명 이하는 심사대상에조차 오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돈이 기준이기 때문에 은행도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양을 측정하는 것이지요. ‘작지만 건강한 교회’라는 우리의 표어는 때때로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 무력하고 무능력한 것으로 비추기 쉽습니다. 그럴 때에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우리들의 믿음이요, 우리들의 비전이요, 우리들의 새로운 안목입니다.
사람을 돈으로만 보지 않고, 사람을 학벌이나 능력, 학연이나 지연에 따라 평가하지 않고, 우선적으로 사람 그 자체로 존중할 줄 아는 이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이들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코로나 19로 답답하고, 많은 이들이 우울증과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이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스스로 물어 본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람의 본문을 잊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존중 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쓴다. 우리는 모든 생명이 저마다 주어진 삶을 풍성히 누리도록 돕는다.”라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하고, 실제로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잘못된 신념 속에서 교회를 오염시키고, 세상을 위태롭게 하는 이들 때문에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세상의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비난과 멸시가 오히려 우리 한국 개신교, 한국 교회가 새롭게 거듭나고 정결한 마음을 회복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생명 사랑 교우 여러분! 오늘 예배에 함께 참여하고 계신 성도 여러분!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본래 그 자리를 충실히 지키는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우리가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주님 주신 새 계명에 따라 서로 사랑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지금 당장 무엇 하나라도 실천한다면 코로나의 종식이 앞당겨 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그 자리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주님께 예배하며 우리의 삶과 이 사회의 모습, 주님의 백성 된 이들의 신앙을 되돌아봅니다. 신앙의 본질을 가리고, 모든 고통을 가져온 욕망과 무지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절망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으며, 핍박 속에서도 자유를 지키며 저항하는 참된 복음의 힘으로 우리 삶을 변화시켜 주소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하시고, 특별히 약한 이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데 헌신하게 하여 주소서. 말씀 속에서 주님을 만나 내면의 힘을 기르며, 주님 앞에 기도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다듬고, 주님의 거룩한 백성의 일원임을 다시금 일깨우게 하여 주소서. 언제나 주님의 사역에 동참할 것을 다짐하며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자비하신 하나님! 우리가 주님을 송축하고, 우리의 입술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지난 8년의 세월을 지켜 주시고,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한없는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방황을 이겨내게 하시고, 우리가 주님께 거역하고 반항할 때에도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사랑할 사람들을 주시고, 진정한 아름다움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골방에 들어가 숨어 계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며 주님께서 주신 삶의 놀라운 선물들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배운 진리와 성취할 수 있던 선한 일들을 보며 감격하며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시간 주님께 예물과 함께 우리 자신을 드립니다. 받아 주소서. 오늘 예배를 통해 받은 천국의 기쁨을 잘 간직하겠습니다. 바쁜 세상에서도 주님께서 허락하신 평안을 누리며, 주님께서 감당하라 명하신 소명을 이어나가겠습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