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한문덕 목사] 아주 담대하게 – 2021년 2월 7일 설주일
사무엘상 10장 17-27절, 시편 30편 4-5절, 사도행전 28장 23-31절
[설교 준비의 어려움과 설교의 목적]
우리 교단 헌법 정치편 19조에는 목사의 직무가 나와 있고, 그 첫 번째 항목은 “목사와 예배”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습니다. “목사에게는 노회의 권한으로 목사에게만 주어진 책임이 있다. 그것은 예배 시에 사용할 찬송, 시편, 성경 구절의 선택과 목회 기도와 설교 및 축도의 책임이다.” 저는 이 항목이 목사의 배타적인 권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설교의 경우에도 누구나 충분한 훈련 속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말씀을 증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구약에도 예언자 학교가 따로 존재했지만, 드고아의 목자 아모스처럼 주님께 부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예언자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의 말씀을 읽으시고 설교를 하셨을 때에도 제사장이나 회당장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날 누구나 성경을 읽고 깨달은 바를 함께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막상 설교를 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설교 한 편을 제대로 준비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와 오늘날 상황을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진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설교문을 작성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글쓰기와 연설 능력이 필요하지요. 성경은 고대 문헌이기 때문에, 그 때 거기에서 벌어진 성경의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 것도 만만치 않고, 그 말씀으로 지금 여기에 사는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고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든다는 것은 정말 많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선포한대로 살아야한다는 것은 정말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기에 설교자는 참으로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 훈련을 받은 목회자들조차도 매주 설교를 하면서도 매우 힘들어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매번 넘어야 할 큰 산을 앞에 두고 있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저는 원칙적으로 누구나 설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아무나 설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한 번은 제가 좋아하는 젊은 역사학도가 페이스북에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정확한 문구는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만, 내용인즉슨 많은 목사들의 설교를 들어 봤는데 진짜 성경을 잘 풀어주는 설교가 거의 없더라는 것입니다. 설교가 목사의 체험담을 늘어놓고, 설교자의 가치관을 주입하며, 시시콜콜한 가십거리나 만담, 또는 정치적 선동이나 우스운 이야기로 전락해 버린 현실을 매섭게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설교자로 살아야 하는 제 자신의 설교를 깊이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설교 한 편을 제대로 준비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2020년부터 3년 성서통독을 하기로 하고, 지난 간 주간의 성경구절에서 설교본문을 찾기 때문에 더 어렵기도 합니다. 성서 전체가 다 설교하기 좋은 본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하고 설교 하고 싶은 주제에 맞게 본문을 찾다보면 인용되는 성서본문이 편중되기 싶고, 자칫하면 하나님의 말씀보다 목회자의 주장이 더 드러나는 설교가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런 잘못을 줄이고자 정해진 성서 일과를 따르기도 하고, 또 우리 교회처럼 성경전체를 통독하면서 그 안에서 성서본문을 정하는데, 이렇게 할수록 설교를 준비하기가 더욱 힘들어집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이런 과정이 우리 모두의 신앙을 성숙시키리라 생각합니다. 설교자나 청중이나 성서 전체를 보는 훈련을 하기 때문이고, 그냥 넘겼던 부분까지도 다시 한 번 살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학자들은 설교를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 하나님 나라 선교에 동참하도록 이끄는 설교, 교인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설교,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을 잘 가르치는 설교 등으로 구분하고,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은 설교를 통해 위로도 받고 힘도 얻고 지혜도 얻고 삶을 살아갈 용기도 얻습니다. 그런데 제가 설교할 때 마음속에 가장 크게 두는 것은 바로 디모데후서 3장 17절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고, 그에게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통해서 설교자나 청중들이 하나님의 선교 사역을 감당하는데 유능하게 되고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를 가장 바라고 있습니다. 설교가 지친 삶에 위로가 되는 것도 좋지만,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딸이자 하나님의 백성으로 더 유능하게 되는 것은 더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5년이 넘는 세월 저는 매주 설교를 했고, 그 모두가 원고 설교이기 때문에 생명사랑교회 다음 카페에 들어가 보면 설교 전문과 음성을 전부 다시 읽을 수 있고 들을 수 있습니다. 지난 5년이 넘는 세월동안, 설교를 들으신 여러분이 과거보다 더 유능한 사람이 되어 있고, 더 많은 선한 일들을 하고 계시다면 제 설교는 목적을 달성한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제 설교는 울리는 꽹과리였고, 허공에서 흩어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오늘의 제 설교가 과연 또 울리는 꽹과리가 될지, 아니면 작은 씨앗이 되어 열매를 맺을지 또 두려운 마음으로 강단에 섭니다.
[변화 한복판에서]
코로나가 터지기 전부터 저는 계속 세상이 바뀐다고 얘기해 왔습니다. 최근 몇 십년의 변화는 과거 수십만년 수백만년의 변화보다 더 급격하고 큽니다. 코로나로 인해 변화의 속도도 빨라지고 그만큼 혼란도 가중되었습니다. 변화에 적응하면 생존하고, 적응하지 못하면 힘들어지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변화 속에서 우리가 또 깊이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변화는 반드시 불편함을 양산하고, 불편함은 갈등을 불러 온다는 것입니다. 갈등은 변화 속에서 불가피한 현상이며, 이 갈등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개인과 공동체, 조직은 성장하고 성숙할 수도 있고, 쪼그라들고 파멸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몸 된 공동체인 교회를 살리고 성장시켜야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갈등을 다루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또 예수님의 말씀처럼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수 있기에 그리스도인들이 갈등을 조절하고 풀어가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은 그리스도교가 가장 핵심적으로 추구하는 생명과 사랑이 넘치는 삶을 완성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훈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사무엘상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의 변화가 불러온 갈등의 한 장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매우 긴 세월동안 노예 노동을 해야 했던 히브리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서는 계급 질서가 없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오직 왕이시라는 신앙 고백의 터 위에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는 그런 새로운 평등사회를 이루고자 매우 오랜 세월 왕 없는 지파 연합공동체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파 연합공동체는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특히 왕정체제가 아닌 지파들의 연합은 주변 강대국의 침입이라는 위기에 긴급하게 대처하는 것에는 매우 취약했습니다. 오늘날도 비슷합니다. 민주주의 제도는 그야말로 귀한 것이고, 어느 집단이든지 일을 처리할 때 구성원 전체의 의견을 골고루 수렴해서 가장 좋은 방안을 택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실제로 일을 처리하다보면 때때로 시급성을 요하는 일이 있고, 다수의 의견보다 전문가의 의견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전쟁이라고 하는 상황에서는 유능한 장군이 필요한데, 유능한 장군을 투표로 뽑을 수는 없습니다. 장군은 실제 전장에서 싸울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자격이 갖추어지지 않은 사람을 투표로 뽑으면 생사의 갈림길에서 모두가 파멸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활약한 장군을 세습 가능한 왕으로 세운다면 그것은 애굽에서 겪었던 불합리한 제도를 반복하게 만드는 일이 됩니다. 계급질서가 생기고, 지배자는 다스리며 대다수의 백성들은 다시 억압 속에서 노예의 삶을 살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는 나을 수 있기 때문에 오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왕을 세워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왕을 세워달라는 백성들의 요구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왔고, 내가 너희를 이집트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던 모든 나라의 손에서 건져 내었다. 그러나 오늘날 너희는 너희를 모든 환난과 고난 속에서 건져 낸 너희 하나님을 버리고, 너희에게 왕을 세워 달라고 나에게 요구하였다. 좋다. 이제 너희는 지파와 집안별로, 나 주 앞에 나와 서거라!”
하나님은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서 베냐민 지파, 마드리의 집안, 기스의 아들 사울을 왕으로 세워 줍니다. 그러나 이렇게 왕을 세워 주시면서도 하나님은 서운한 자신의 속내를 다 드러내십니다. “너희가 그동안 내가 베푼 구원의 은총을 다 무시하면서 이제 나를 버리고 너희들이 섬길 왕을 세워 달라고 하는구나!” 저는 이 부분이 매우 인상 깊게 다가 왔습니다.
삶을 살다가 개인 간에 또는 개인과 집단 간에, 또는 집단과 집단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그것을 푸는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 중에 하나는 갈등의 당사자가 충분히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계약에는 없었던 새로운 왕정제도 도입이라는 변화 속에서 발생한 갈등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속내를 있는 그대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구절을 어떻게 읽으셨는지 모르지만, 저는 이 부분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갈등이 생기고 그것을 풀려고 하면 당사자들 사이의 진정한 대화가 필요하고, 그것을 누구나 아는데 실제로 대화의 자리에 나오는 것이 너무나 힘듭니다. 그래서 “대화 그 자체가 진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보통 갈등 상황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이미 상처를 주고받았기 때문에 갈등 당사자들은 서로 피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세월이 가기만을 기다립니다. 이것도 나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갈등을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그래서 갈등을 푸는 가장 바람직한 방식은 갈등 당사자가 서로 대화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지킬 수 있고 양쪽 모두가 인정하는 합의안을 도출하는 것입니다. 관계를 회복하고 피해나 부정적 영향을 주는 일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서로 노력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보통 갈등이 생기면 어느 한편이 힘으로 내리누르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그렇지 않으면 외부의 힘을 빌려 판결을 내리는 방식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다 보니 갈등이 종결된 것처럼 보여도 보복하는 일이 반복되고, 서로 충분히 만족하지 못하고 앙금이 남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변하는 세월 속에서 발생하는 불편함과 갈등을 지혜롭게 풀어가는 것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이 되어야 합니다. 외부의 힘이나 판단에 맡기지 않고 갈등 당사자들이 문제를 풀어가야 하는데 이런 과정을 돕기 위해 중재자를 둘 수 있습니다. 저도 시간 날 때마다 갈등전환, 회복적 정의를 위한 대화 모임에 대해 배웠고, 지금도 꾸준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갈등중재자의 가장 큰 역할 중에 하나는 바로 갈등 당사자들이 충분히 자신의 얘기를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고, 서로에게 생긴 오해를 줄이고, 날선 단어들을 바꾸어 주면서 상대의 상황과 의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런 과정을 진행하다보면 저를 포함하여 우리들 자신이 평소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정말로 경청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상대의 얘기를 내 생각과 내 맘대로 듣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즉 이해가 아니라 오해하고, 오해를 고착화한 상태에서 상대를 낙인찍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얘기하면 할수록 감정의 골이 깊어집니다. 그래서 대화가 생산적이지 못하고 실패하는 경험이 거듭되기에 또 대화모임을 하기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방법은 역시 당사자들이 모여서 잘 대화를 나누는 것밖에 없습니다. 갈등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확인하고 인정하면서, 그런 과정에서 발생한 감정의 서운함들을 잘 표현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상대방의 마음들을 이해할 수 있을 때, 갈등해소의 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가해와 피해가 생겼을 경우에는 가해자의 적절한 사과와 책임 지는 행동, 피해자의 용서와 재발이 되지 않게 하는 후속 조치가 이뤄져야 하는데, 이것 또한 갈등 당사자들의 합의를 통해서 약속들을 결정해야 하고 지켜야 합니다. 갈등 당사자들이 개인 대 개인일 수도 있고, 개인 대 집단일 수도 있고, 집단 대 집단일수도 있어서, 분쟁을 조정하고 갈등을 풀어가는 일들은 정말 많은 배움과 오랜 훈련이 필요합니다.
오늘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왕을 세우겠다는 이스라엘 자손들과 그것이 서운한 하나님 사이의 갈등은 우선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사울을 왕으로 세워 주는 것으로 결론을 맺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하나님도 자신이 서운하다는 것을 충분히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재미있게도 사울왕을 세웠을 때, 대다수의 백성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임금님 만세를 외치며 기뻐했지만 몇몇은 사울을 업신여기고 그를 추종하지도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변화는 갈등을 부르고 갈등의 해소는 또 다른 변화의 씨앗이 되며, 그러면 또 다른 갈등의 불씨가 피어오른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계속되는 갈등과 불편함을 그저 꾸준히 고쳐 가는 것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성숙할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아주 담대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코로나 19로 인해 아니 그 전부터 우리 사회는, 그리고 교계의 상황은 계속 변해왔고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불편을 느끼고, 불평이 생기고, 갈등도 발생합니다. 그런 것들을 잘 다룰 줄 알면 그것이 성숙하고 성장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서 우리는 점점 하나님의 일을 잘 해내는 유능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
코로나 19로 모두가 어렵습니다. 제가 지난 주에 교역자 워크샵을 하면서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스님을 만났는데, 불교계 또한 지금의 상황에 적응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불교계나 가톨릭의 경우는 성직자로 지원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없어서 매우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개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학령 인구가 줄 뿐만 아니라, 어린이 청소년, 청년 신자들이 줄고, 그러한 영향 속에서 신학을 전공하겠다는 사람 또한 계속 줄어들고 있습니다. 앞으로 교회도 점점 사라지겠지만 목회자 또한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목회의 방식도 전혀 새롭게 바뀌고 있습니다. 올해 말까지 코로나가 지속되고, 아니 더 힘들게는 또 다른 바이러스가 주기적으로 찾아올 가능성이 있다고 할 때, 기존의 목회는 분명 바뀌어야 합니다. 이렇게 바뀌는 과정이 영 불편하고 힘들고, 그것이 또 갈등을 불러 올 수 있습니다. 당장 우리 권사님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고, 그 기간이 너무 길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들에 잘 대처하는 능력을 반드시 키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사도행전의 말씀은 로마에서 바울의 마지막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꼼꼼하게 비평하자면 아마도 바울은 로마에서 순교를 당했을 것입니다. 순교를 당하기 전까지 감옥에 있었을 것이 거의 분명합니다. 감옥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가르치고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행전은 바울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으면서 자신이 얻은 셋집에서 아주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을 가르쳤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역사적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진실한 증언으로는 옳은 말씀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있든 다른 곳에 있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은 널리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을 높이지 않습니다. 바울의 순교를 찬양하지도 않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 하나님 나라가 담대하게 전해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이 학습되고 있다는 사실만을 말합니다. 바울의 숙소로 찾아 온 사람들에게 바울은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님에 관하여 그들을 설득하고 자신의 속내를 다 털어 놓습니다. 더러는 바울의 말을 받아 들였지만, 더러는 믿지 않았습니다. 바울도 성공만 한 것이 아닙니다. 실패도 있었고, 큰 고난도 당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끊임없이 선교하고 가르치고 하나님 나라를 증언합니다.
지금 교회는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 시기가 계속 될수록 지치고 힘들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담대하게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사역을 증언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지난 주 금요일 우리 생명사랑교회에서 동방정교회 영성의 보고인 필로칼리아에 대해서 최대형 장로님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온라인을 통해 영성수련을 하는 한 과정이고 우리 교회의 시스템과 전도사님들의 수고로 할 수 있었습니다. 온라인으로 하기 때문에 예전보다 더 많은 인원이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올해와 내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종교간 대화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합니다. 다종교 사회에서 그리스도교를 증언하고 이웃 종교들과 함께 어떻게 대화하고 협력하여 하나님의 선교사역을 펼칠 것인가를 다루는 종교신학 분야에서 제가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그것을 잘 아시는 우리 교단 총무님께서 NCCK에 파견해 주셨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기에 봉사하고 섬기려고 합니다. 온라인으로 예배하고 교육하다보니 전국의 많은 분들이 신앙적인 질문과 상담을 요청하고 계시고, 또 이런 사역들을 통해 우리 생명사랑교회의 목회활동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 상황이라서 어렵고 힘들고 지치고, 때때로 무력감에 휩싸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주님의 말씀은 전 세계로 퍼져야 하고,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이들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여전히 일군을 부르시고 찾으십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아주 담대하게 마음을 먹읍시다. 아주 담대하게 나아갑시다. 주눅 들지 맙시다. 몇몇 미꾸라지들이 복음의 호수를 진흙탕으로 만들고 있지만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견디면 맑고 투명한 호수를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한바탕 휘저어야 더러운 것들을 찾아서 씻어낼 수 있습니다. 밤새 눈물을 흘린다 해도 새벽이 오면 우리 모두는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진노는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영원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주 담대하게 세상으로 나아가시는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영원한 은총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코로나로 지친 우리 영혼을 위로해 주소서. 코로나가 길어질수록 더 힘들어지는 이들을 어루만지시고, 이 환란의 시간이 속히 지나가게 하여 주소서.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소서. 절망 속에서 헤매지 말고 인내하면서 단련된 인격이 되도록 더 노력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소서. 눈물의 밤을 보내고 기쁨의 새벽을 맞이할 때는 한껏 성숙한 신앙인으로 거듭나게 하여 주소서.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일들을 감당할 능력을 주시고, 거짓 선동과 헛된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여 주소서. 지혜를 주셔서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도 주님의 뜻을 잘 분별하게 하시고, 올곧게 주님 향한 길, 주님과 동행하며 걷게 하여 주소서. 거룩한 주일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음을 감사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어려울 때일수록 용기를 가지고 힘을 내십시오. 아주 담대하게 주님과 함께 살아가십시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거룩한 친교가 주님의 증언자로 아주 담대하게 나서는 생명사랑교우들과 이 시간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아픈 세상에서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