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한문덕 목사] 소중한 인생 – 2021년 7월 11일
전도서 3장 11-15절, 22절, 시편 8편 3-9절, 마태복음서 5장 17-20절
[도(道)를 아십니까?]
길을 지나가다 보면 내 인상이 좋아 보인다면서 잠깐 시간을 내어 얘기를 하자며 “도를 아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분들과 단 한 번도 진지한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 이들이 어떤 도를 전하려고 하는지는 잘 모릅니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길을 묻길래 성실히 가르쳐 주었는데 곧바로 이어서 또 “도를 아시냐”고 물으면서 계속 이야기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 때 저는 무척 화가 났습니다. 길을 묻는 척 하면서 그것을 빌미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그 사람의 태도가 매우 안 좋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통 같으면 그냥 지나가지만 그 날에는 내가 그 사람에게 한 소리 했습니다. “당신이 내게 전하려는 도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 도를 전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면 당신이 전하려는 그 도의 진정성이 훼손되는 것이다. 당신이 진정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참된 도를 전하려고 한다면, 다시는 이런 방식을 사용하지 말라”고 호되게 말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갈 길을 갔습니다.
하루 종일 그 일로 기분이 안 좋았는데, 그러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동안 한국교회가 전도한다면서 한 일들이 이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 개신교가 시작된 초기에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많은 구제와 선교, 봉사를 했습니다. 교육과 의료 분야에서 큰 성과를 거두고, 평등 정신을 통해 여성과 아이들의 인권을 회복하였으며, 성경을 전국에 보급하면서 문맹타파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이런 모든 활동이 그 자체로 그리스도교 복음을 전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랑으로 섬기었고,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삶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 주었습니다.
[잊어서는 안 되는 선교사 헐버트와 진짜 선교]
안중근 의사가 뤼순(旅順)감옥에 있을 때, 일본 경찰에게 “한국인이라면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라고 말했던 선교사가 있습니다. 바로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입니다. 헐버트는 미들베리 대학교(Middlebury College) 총장을 지낸 목사 아버지와 다트머스 대학교(Dartmouth College) 창립자의 증손녀이자 인도 파송 선교사의 딸이었던 어머니 밑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충만한 이 가정의 가훈은 ‘인격이 승리보다 중요하다(Character is more fundamental than victory)’였습니다.
그는 1886년 유니언 신학대학 2학년에 재학 중 학교를 그만두고 조선과 미국이 국교 수립 후 양반집 자제와 관리들에게 서양식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의 교사가 되기 위해 조선으로 향합니다. 영어, 자연과학, 수학, 지리, 각국의 역사와 정치 등을 가르치는 육영고원에서 헐버트는 ‘양반과 평민 모두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란 뜻으로 ‘사민필지'(士民必知)라는 한글 교재를 만듭니다.
조선 사람들에게 서양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우리말을 배우다가 한글의 우수성에 매료돼 1892년 1월 한국 최초의 영문 월간지인 ‘한국 소식’(The Korean Repository) 창간호에 ‘한국의 알파벳’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해 한글의 독창성, 과학성, 간편성을 알립니다. 1907년 황태자 순종의 결혼식 축하 사절로 참석한 일본의 궁내부대신 다나카 미쓰야키(田中光顯)가 개성 경천사 터에서 10층석탑을 무단으로 해체해 도쿄의 자기 집 뜰에 갖다 놓자 헐버트는 반출 현장 사진을 찍고 주민 증언을 수집해 일본 영어신문 ‘재팬 크로니클’(The Japan chronicle)에 폭로했고, ‘뉴욕타임스’ 등 해외 언론도 “야만적인 문화재 약탈”이라는 내용의 비판 기사를 실어 1918년 돌려받을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민요 ‘아리랑’을 서양식 음계로 처음 채보하였고,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할 때도 인쇄시설과 관련된 지식 등을 제공하고 사실상 편집인 역할도 할 뿐만 아니라, 영국의 ‘The Times’와 미국 AP통신 객원 특파원으로도 활동하면서 한국의 식민지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립니다. 또한 그는 1905년 10월 고종의 친서를 품고 미국 특사로 파견돼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역설했고, 11월 체결 뒤에는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 넘겼다”며 자신 모국의 태도를 거세게 비난합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릴 때에도 이상설·이준·이위종 특사와는 별개로 고종 밀사로 파견돼 각국 대표들에게 일제의 침략 야욕을 폭로하였습니다.
헐버트는 1886년 7월 4일 조선 땅 제물포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20여 년 동안 한국에 살면서 교육자, 한글학자, 역사학자, 언론인, 선교사, 독립운동가로서 한국의 문명화와 주권 수호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웨스트민스터사원보다는 한국 땅에 묻히기 원한다”는 자신의 유언에 따라 지금은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혀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헐버트에게 1950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을 추서합니다. 1893년 동대문교회 담임목사를 지냈고, 1906년 노량진교회 설립 예배를 인도하면서 노량진 상수원 근처에 살던 무당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켰던 헐버트는 삶으로 전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해받는 한국인들을 돕는 것이 참 선교”라는 그의 말은 진정한 전도와 선교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한국 개신교회는 구제와 봉사, 선교와 전도활동을 교회로 사람을 불러 모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긍휼하심과 하나님의 사랑과 연민으로 어렵고 힘든 이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자기 교회 교인 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그런 일들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복음 전파가 지향하는 궁극적 목적은 구원의 말씀을 듣고 변화를 받아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인데, 그 모든 것을 자기 교회에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로만 평가하였습니다. 사람과 세상의 변화가 아니라 교회 성장만을 목적으로 삼아 다른 모든 활동을 수단화하였고, 그런 상황에서 많은 비그리스도인들이 저처럼 매우 기분 나쁜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왜곡된 전도활동 때문에 부작용이 있다 하더라도 “참된 도를 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마다 자신이 걸어왔던 길이 있고, 지금도 자신만의 길이 있으며, 앞으로도 걸어갈 길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길을 가지만, 그 길 가운데는 모든 사람이 함께 걸어도 좋은 길이 있습니다. 아니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길도 있습니다. 그것을 한자로 도(道)라고 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태복음서의 본문에는 저자가 마태복음서 독자에게, 또는 예수께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하신 매우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도(道)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약에 나와 있는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것이었습니다. 613가지의 율법조문들 뿐만이 아니라 그 조문을 해석하면서 전해져 오는 구전율법까지도 일상생활에서 지켜가려고 했습니다. 이들의 이런 삶의 자세는 당대 평범한 유대인들에게 매우 존경받을 만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매년 새해가 되면 사람들이 새해 계획을 세우고 며칠 동안은 열심히 하지만 작심삼일이 되거나 한 달도 가지 못해 계획이 어그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성실하게 그것을 해 낸다면 그 성실성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경 받게 됩니다. 또 성실한 사람은 신뢰할 수 있기 때문에 신뢰가 중요한 이 사회 곳곳에서 쓸모 있는 사람으로 모셔가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이라면 바로 이런 사람들보다 훨씬 더 올바르고 정의로워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날로 바꿔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은 비그리스도인들보다 훨씬 더 도덕적이고 성실하며 믿을 만하며 품이 넓고 배울 것이 많은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에 충실했던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보다 더 나은 의를 보여주어야 했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또한 세상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은 도덕성과 실력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지식 정보의 양에 있어서도 더 나아야 하지만, 진지한 삶의 태도와 성실함, 그리고 고통과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 지혜롭게 대처하는 법, 감정을 절제하며 위기를 잘 극복하는 법에 있어서도 더 나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드러날 때 자연스럽게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말이 아니라 삶 자체가 도를 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동시에 삶 자체가 전도라면 전도를 목적으로 수단이 되어버리는 교회 활동은 잘못된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활동 자체가 전도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로만 율법을 외치던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을 때때로 꾸짖으며 그들은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늘나라의 문을 닫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면서 개종자를 만들어 배나 더 못된 지옥 자식으로 만든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마태 23:13-15). 오늘날 그리스도교인들이 하나님 믿는 것을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면서 사람들을 데려다가 더 큰 욕망을 부추기는 욕망의 화신으로 만들어 놓는 것과 매우 비슷합니다. 따라서 전도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남에게 말하기 전에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가, 자신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도(道)를 전하는 책]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구약성서는 “도를 전하는 책”이라는 뜻을 지닌 전도서입니다. 과연 전도서는 우리에게 어떤 길을 보여 주려고 할까요? 전도서가 전하는 도가 과연 오늘 우리의 삶에 의미가 있을까요?
전도서를 펼치면 바로 이런 구절이 등장합니다. “전도자가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헛되다는 말을 다섯 번이나 말하고 있는데, 히브리어 ‘헤벨’의 번역어인 헛되다는 말을 영어 성경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안 되는(absurd)” “쓸 데 없는, 소용없는(useless)” “텅 빈(vanity), 무의미한(meaningless)” 등으로 번역을 합니다. 그러나 ‘헤벨’은 원래 입김이나 수증기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입김이나 수증기의 특성입니다. 즉 헤벨은 “태고” “영원” 등 아주 오랜 시간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올람’의 반대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형 가인에 의해 죽임을 당해 잠깐의 삶만을 누린 아벨의 이름이 바로 이 헤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헤벨을 말이 안 되거나 쓸데없고 무의미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헤벨은 가치를 지닌 말이 아니라 현상을 묘사하는 말일 뿐입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진다 해도 그것이 무의미하고 쓸모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전도서의 저자가 헤벨을 다섯 번이나 외친 이유는 이 땅에 잠깐 왔다가 사라지는 존재인 인간이 영원하신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운영하시는 그 영원한 원리와 패턴에 어떤 흔적을 남기거나, 기념할 만한 위대한 것을 남기거나, 새롭게 하거나, 창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의 눈에서 볼 때 인류야말로 찬란한 문명을 만들었다고 자부할 수 있겠지만, 전도서의 저자는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어느 한 개인의 노력은 하나님의 놀랍고 위대하신 우주적 사역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결국 세상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지,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인간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혹 인류 전체의 입장에서 인간이 해낸 것을 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 개인의 입장에서는 전도서의 말을 깊이 새겨볼 만합니다. 전도서는 그 저자를 왕으로 상정하는데 그 이유는 왕이야말로 그 누구보다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서의 저자인 왕은 자신이 이전에 있던 사람들보다 더 지혜롭고 더 많은 지식을 만나 보았으며(1:16), 최대한의 즐거움도 누려보았고(2:1-3), 포도원과 삼림을 가꾸는 사업을 크게 했었고(2:4-6), 남들보다 더 많은 소유를 누리기도 했다(2:7-8)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 인간이 아무리 많은 경험과 소유를 하고, 즐거움을 누린다 해도 그것이 전 우주적 차원과 시간적 차원에서 보자면 매우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대로 우리 인간이 과거와 미래를 생각해 본다 해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거나 깨달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전도서의 핵심은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 인간의 지식이라는 것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것이요, 하나님의 지혜에 비춰보면 인간의 앎은 매우 작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잘 모른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깊이 아는 것”이 바로 전도서가 우리에게 주려는 지혜입니다.
모름에 대해서도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다 안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외쳤습니다. 모름의 두 번째 단계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 이제부터 배우기 시작하여 모름이 점점 줄어드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배우다 보면 어떤 것은 앎과 모름의 경계가 모호하여 도대체 어디까지 알아야 다 안 것인지를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고, 상대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어디까지를 알아야 다 안 것인지 애매합니다. 또 어떤 것은 앎이 늘어갈수록 모름 또한 커지는 것이 있습니다. 지식은 확충되지만, 지식이 늘어가면서 무한대로 넓은 세상에 모름이 가득 차 있다는 것도 깨닫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바로 이 둘째 단계를 통해서 우리는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즉 우리가 얼마나 모르는지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첫단계가 무지(無知)의 단계, 즉 앎이 없음이라면, 둘째 단계는 앎을 확충하는 단계이고, 셋째 단계는 무지의 무지, 즉 ‘얼마나 모르는지’를 모르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단계에서는 지식이 의미가 있었지만, 이 단계에 오면 지식이 큰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아무리 배워도 모르는 것이 훨씬 더 거대하기 때문입니다. 이 단계부터는 그래서 지혜가 작동합니다. 지식은 정답을 얻으려고 하지만, 지혜는 그저 추구해 갑니다. 물음을 묻는 것입니다. 지식이 이미 있는 것을 얻는 것이라면, 지혜는 아직 오지 않은 것, 즉 모르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지식의 확장으로 통해 정답을 알려고 하는 둘째 단계에서는 정답을 모르면 불안하지만, 얼마나 모르는지도 모르는 셋째 단계에 접어들면 정답이라는 것 자체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불안은 자유가 됩니다. 그래서 자유로운 인간이 된 지혜자는 불안에 떨지 않으며 모험하는 삶을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전도서의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애쓴다고 해서, 이런 일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 그리하여 나는, 사람에게는 자기가 하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을 주셨지만, 우리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는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모르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살고 있는데도, 지금까지 무탈하게 살아내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참으로 감사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각해 주시는 그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힐끗 보여주신 지식으로도 우리가 세상을 다스리고, 지구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은총이 정말로 크고 놀랍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 저자는 감사의 찬양을 드린 것입니다.
[소중한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법]
세상 모든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우리네 삶은 행복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무지하고 과도한 욕심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무지한데다가 자기 이익을 따라 어떤 사안에 집착하고 욕심을 부리면 반드시 고통이 찾아옵니다. 이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열심히 배워서 미래를 예측하고 다가오는 불행을 막아보려고 하지만, 그것 또한 부질없는 짓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 싼 세계는 너무나 광대하여 오히려 알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럴 때는 되도 않는 일을 가지고 애써 노력하고 몸까지 망치며 집착할 것이 아닙니다. 해 내지 못할 일에 안달하며 불안에 떨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이미 내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매 순간을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철학자들은 늘 물어왔습니다. 왜 모든 것이 없지 않고 있는가? 이 물음을 우리 자신에게도 물어야 합니다. 왜 우리는 없지 않고 있는가? 우리가 존재할 필연적 이유라도 있는가? 사실은 없습니다. 비신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우연히 이 세상에 태어나 세상으로 던져진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데 존재할 필연적 이유가 없음에도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은총이요 선물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소중한 시간을 아껴 쓰면서 향유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바로 여기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전도서 저자가 말한 대로 주어진 시간을 기뻐하며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을 때 우리들 대부분은 매우 큰 행복을 느낍니다. 그렇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영복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나의 삶과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에 계신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인생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주어진 시간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매 순간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보람차게 살아가십시오. 다가오는 일주일도 여러분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시고, 또 좋은 사람들 만나서 맛있는 음식을 드시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생명의 하나님! 우리들에게 삶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허락하신 소중한 인생을 허투루 살지 않게 하여 주소서. 주님 앞에서 우리들은 한없이 작고 약한 존재이지만, 우리가 있어야 할 필연적 이유도 없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깊이 생각하여 주시고,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우리들의 삶이 사랑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게 하시고, 우리들의 말과 행동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어내어 바리새파나 율법학자들, 세상의 어떤 사람들보다 더 정의롭게 하여 주소서. 우리가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또 좋은 사람들을 만나 함께 일을 도모함으로써 우리들의 삶과 세상을 더 아름답게 가꾸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주님이시며 참된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거룩하시고 좋으신 하나님! 이 좋은 날 우리 모두를 주님 앞에 불러 모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이 예배하게 하신 은혜 감사합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주님의 따뜻한 빛을 쪼이니 지난 삶의 구김살들이 살살 펴지고, 주님의 자애로움과 미소로 우리의 굳어진 마음이 부드럽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지의 구름이 걷히고, 우리의 모든 이웃이 주님의 향기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은총에 감사하여 오늘 우리의 삶과 예물을 드립니다. 꼭 필요한 곳에 써 주소서.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곳에, 생명을 살리고 복음의 소식을 전하는 곳에 쓰이게 하소서. 생명사랑교회의 모든 사역을 통하여 우리가 날마다 진보하게 하시고, 더욱 더 주님과 가까워지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귀한 시간들을 소중하게 여기십시오. 늘 기뻐하며, 더 좋은 일들을 해 나가십시오. 그리하여 언제나 행복한 삶을 누리십시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의 거룩한 친교가 자신의 삶에 만족하여 주님의 은총에 늘 감사하는 생명사랑교우들과 이 시간 전국에서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