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덕 목사] 새 길을 내는 사람들 – 2024년 2월 11일 신학교육주일/설주일
빌립보서 1장 1-11절
[설 잘 쇠셨나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설을 잘 쇠셨는지요? “쇠다”라는 말은 명절이나 생일, 기념일 같은 날을 맞이하여 지내는 것을 말합니다. “설 잘 쇠셨나요?”라고 묻는 인사말에는 설날과 같은 명절에도 넉넉하지 못하여 차례 상도 차리지 못하고, 쉬지 못하고 일해야 하는 이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녹아 있고, 다른 한편으로 새해를 여는 첫날을 잘 맞이하고 잘 보내야 일 년 내내 평안하다는 민간의 신앙도 스며있습니다.
설날은 음력 1월 1일인 정월 초하루이고, 음력을 사용하던 우리 조상들에게는 민족 최대의 명절이었습니다. 1896년 고종황제가 태양력을 수용했을 때도 설날은 면면히 이어졌는데,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여 전통문화 말살정책을 쓰면서, 설날을 ‘구정(舊正)’이라고 부르게 됐고, 해방 후에도 양력이 우세하여 1949년에는 양력 1월 1일부터 3일간을 설 연휴로 썼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야 정부는 음력 정월 초하루를 공휴일로 지정하면서 ‘민속의 날’이라 불렀는데, 1989년에 다시 설날로 복원되면서 지금처럼 3일의 설 연휴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어렵게 되찾은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설날 풍경도 세월이 흐르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설날이 되면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고 조부모, 부모, 친지에게 세배(歲拜, New Year’s bow)를 할 뿐만 아니라, 동네 어르신들에게도 세배하러 다녔습니다. 세배에는 오랜 세월을 사신 어른의 삶을 존경하는 뜻이 있고, 또 새해를 맞이하여 올해도 건강하시고, 장수하시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배하는 사람은 어른의 장수와 건강을 비는 말씀을 드리고, 세배 받는 어른들은 세배하는 사람들의 신상과 소망에 맞는 덕담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의 설날은 명절이 아닌 휴일로 여기는 경향이 대세이고, 가족이 꼭 모이지 않아도 된다는 의견이 10명 중 7명에 이릅니다. 조상 제사를 지내는 대신 온 가족이 여행을 떠나고, 차례상도 간소화되고, 바쁜 현대인들과 일인 가구에 특화된 배달로 차리는 차례상과 일인 가구용 ‘밀 키트’ 간단 차례상이 히트 상품이 되었습니다.
설날에 대한 옛 전통을 맛보고 소중히 생각하는 저로서는 설 주일을 맞이할 때마다 새해의 소망을 함께 나누는 덕담으로 시를 한 편씩 들려 드리곤 했습니다. 세배와 덕담의 문화는 계속 이어가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예배 직후에 어린이 청소년들이 어른들께 세배도 하고, 오늘 설 주일 설교에서도 여러분과 아주 간단한 시 하나로 덕담을 나누려고 합니다. 함동진 시인의 ‘복주머니’라는 시입니다.
설날 아침/ 엄마 아빠께서 주신 덕담/
네 마음속에/ 평생 사랑주머니 달고 다녀라/
언제나 따스한 사랑 가득 채우고/
사랑에 주린 사람 만나거든/ 나누어 주거라/ 어디서든.
올 해 우리 생명사랑 교회의 표어에도 “첫 사랑을 마음에 품고”라는 구절이 들어가니, 여러분도 올 한 해 동안 함동진 시인의 조언처럼 사랑주머니 가득 사랑 담고 사랑 나누는 삶을 사시면 좋겠습니다.
[생명사랑교회가 정한 3대 목표의 관계]
지난 주 설교에서는 우리교회의 첫째 목표인 ‘작으나 건강한 교회’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둘째 목표인 ‘평신도 중심의 사역’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평신도 중심의 사역은 ‘작으나 건강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선교 사명에 충실한 교회’가 되기 위한 핵심적 사역입니다. 목회자와 평신도가 함께 책임을 지고 사역을 감당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울 때만이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고, 평신도 전체가 선교 사역에 주체적으로 나설 때에만이 선교 사명에 충실한 교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생명사랑교회의 첫째 목표와 셋째 목표의 달성은 둘째 목표를 얼마나 제대로 수행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 면에서 보자면, 우리 교회의 세 가지 목표 중에 가장 밑바탕이 되는 것은 바로 둘째 목표인 ‘평신도 중심의 사역’입니다.
‘평신도 중심의 사역’이라는 표어가 생긴 배경에는 교회의 모든 사역의 결정과 실행에 있어서 목회자 중심으로 치우쳐 있는 한국교회의 현실이 있습니다. 그래서 평신도 중심의 사역이라는 말은 목회자를 배제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 사역에 있어 목회자와 평신도가 함께 모두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평신도 사역의 중요성]
많은 교인이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님의 사역을 칭찬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 목사님은 열정이 넘쳐! 참 열심이야!” 그런데 이렇게 목사님의 사역을 칭찬하고 위로하는 말이, 자칫하면 평신도들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사역마저도 목회자에게 떠넘겨지고, 그래서 목회자 혼자서 목회와 사역의 모든 멍에를 짊어지는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평신도의 역할은 적고, 목회자에게만 과도하게 책임과 역할이 주어질 경우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에게 큰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우선 목회자의 경우 처음에는 교회가 아직 약하고 일꾼도 부족하니 자신이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너무 과중한 사역에 대한 심리적 중압감으로 지치게 되고, 교인에 대한 불신이 싹트고, 때로는 자괴감과 분노마저 들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 교회를 떠나는 일이 생기지요.
목회자의 사역 과중은 평신도들에게도 상처를 줍니다. 교인들이 처음에는 “우리 교회는 목사님이 다 알아서 하시니 나까지 나설 필요가 있나? 괜히 나섰다가 긁어 부스럼 만드느니 가만히 있자. 굳이 내가 할 일도 아닌데 뭐.”라고 생각하지만 목회자에 대해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평신도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자치권도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에 상처받고 때로 좌절하며 화가 날 수 있습니다. 결국은 “우리 목사님은 독재자야! 자기 생각대로만 하려고 하거든!” 하면서 역시 목회자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늘어나게 됩니다.
교회의 목회와 사역과 선교를 하는데 있어서 목회자나 평신도 사이에 심각한 불균형이 생기면 영혼을 돌보고 영적인 성장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목사가 너무 일이 많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말씀 연구와 깊은 기도, 쉼과 건강관리 등에 문제가 발생하고, 이것은 곧바로 다시 목회와 교인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영적인 자기 돌봄이 잘 되지 않는 목회자는 심신의 탈진 현상(burn-out)이 오거나, 정반대로 억압된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돌출하고,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는 등의 문제를 낳습니다. 교인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하지 않으면서 목회자에게 지나친 기대와 요구를 하면 목회자와 교인 사이에는 종속적 관계가 만들어지고, 목사를 절대 권력자의 자리에 올려놓게 됩니다.
오늘은 신학 교육 주일이기도 합니다. 좋은 목회자를 길러내도록 온 교회가 함께 관심을 가지는 주일인 것이지요. 좋은 목회자는 어떤 목회자일까요? 첫째는 신학적 목회적 전문성을 지녀야 합니다. 신학교는 목회의 전문성을 길러내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지요. 그런데 진짜 실력 있는 목회자는 평신도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일군으로 설 수 있도록 돕는 목회자입니다. 평신도들의 장점과 은사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평신도들에게 맡기려면 목회자 스스로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교회의 목회는 성령께서 이끌어 가신다는 생각을 분명하게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평신도 중심의 사역을 지향하는 교회로서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교회 운영에 관한 의사결정과정을 민주적으로 하도록 되어 있고, 그래서 당회와 제직회 외에도 목회운영위원회를 두고 한 달에 한 번씩 교회의 모든 사역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목회운영위원회가 매달의 목회사역과 선교활동을 결정했다면 그것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것도 역시 평신도와 목회자가 나누어서 골고루 담당하게 하지요. 이것은 참 잘하는 일입니다.
[평신도 지도력 강화]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염두에 두고 함께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평신도가 각종 목회와 선교 사역을 감당할만한 능력을 갖추게 하는 일입니다. 평신도 중심의 사역을 지향한다고 할 때, 평신도 사역이 단순히 교회 내 봉사와 활동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교인들은 교회에 출석하는 것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 나아가서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직장과 동호회, 각종 모임의 일원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퍼뜨려야 하는 세상 선교사, 일상 목회자가 바로 평신도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교회는 노회에 소속되어 있고, 총회라고 하는 넓은 연대조직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의 선교사역을 감당할 뿐만 아니라, 세상 한복판에서 다양한 기구들과 함께 협력해서 선교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선교 사역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진행하려면 민주적 의사소통과 양보하고 서로 배려하는 태도와 자세가 몸에 익어야 합니다. 적절하게 자기 의사를 표현할 줄도 알고, 남의 이야기도 들을 줄 알고, 결정된 것에는 따르고, 약속은 지키고, 맡겨진 것은 책임 있게 해 내야지요. 어떤 경우는 사태를 풀어갈 정책들을 만들고 제안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얽히고설킨 문제들을 살살 풀어가는 화해의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평신도 중심의 사역을 지향한다고 할 때, 우리 모두는 바로 이런 모든 것들을 도전해 보겠다고, 잘 해내기 위해서 배우고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평신도 중심의 사역이 다른 면에서 새롭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심각하게 목회자가 되겠다는 사람이 매우 큰 폭으로 줄고 있습니다. 단순히 개신교만의 문제는 아니고, 가톨릭도 불교도 성직자가 되려는 젊은이를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입니다. 한국교회에 전반에서는 부교역자 사역 기피 현상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우리교단은 아예 신학생 자체가 줄어든다는 데에 그 심각성이 있습니다. 참고로 작년 목사고시 합격자는 48명이었습니다. 1998년에는 185명이었고, 2018년에는 99명이었는데,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올해 1월 목사고시 합격자는 10명인데 2차 합격자까지 합한다 해도 작년보다 더 줄어들 것 같습니다. 이런 현실로 인해 목회자를 구할 수 없으니 다시 평신도 지도력을 길러내는 것이 시급하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앞으로 목회와 선교 사역에 있어서 평신도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평신도 중심의 사역을 위해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할까요? 평신도 목회가 성공하려면 어떤 평신도들이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골로새서의 말씀을 한 번 봅시다. 바울 사도께서 골로새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조언합니다.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거기에는 그리스인과 유대인도, 할례 받은 자와 할례받지 않은 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자! 우선 우리가 평신도 사역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진실했는가를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거짓말로 속여서는 안 됩니다. 거짓말은 의도를 가지고 하는 경우도 있고, 의도하지 않으면서도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맹세해서도 안 되고, 자신의 깜냥을 알면서 사역을 해야 하기도 하지요. 하나님의 백성이고 예수님의 제자이면서 어떤 사역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거짓말 하는 자가 되는 것이고, 자신의 능력을 잘 모르고 하겠다고 해놓고 하지 않는 것도 거짓말이 됩니다.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하나님의 형상으로 거듭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이들을 멸시하거나 무시하거나 배제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모두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가 누군가를 얕잡아 보고, 그에 대해 험담을 하고 차별을 했다면 그런 옛 사람을 행실과 함께 벗어던지고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 묵상, 교육 훈련은 모두 이것을 하려고 필요했던 것입니다. 계속 바울 사도의 말씀을 들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랑 받는 거룩한 사람답게, 동정심과 친절함과 겸손함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는 띠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할 윤리 덕목을 하나하나 자신에게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랑 받는 거룩한 사람답게, 어진 마음을 지녔는가? 친절했는가? 겸손함과 온유함을 유지했는가? 오래 참아 주었는가? 불평 할만 했지만 그럼에도 용납하고 용서했는가?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했는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려고 애썼는가? 사랑에 실패했는가, 아니면 성공했는가? 우리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남 얘기 할 필요 없습니다. 평신도 중심의 사역을 주체적으로 하려는 내 자신이 나에게만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모든 것을 완전하게 묶어 내려고 노력하는 이에게 바울 사도가 또 조언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이 평화를 누리도록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여러분은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히 살아 있게 하십시오. 온갖 지혜로 서로 가르치고 권고하십시오. 감사한 마음으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여러분의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십시오. 그리고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에게서 힘을 얻어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이 말씀도 마찬가지이지요. 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 읽어가면서 주님 앞에서 나는 과연 어떠한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내 마음을 지배하는가? 아니면 세상의 걱정, 이웃집 사람의 말 한마디가 나를 지배하는가? 과거의 상처, 미래의 불안에게 나를 내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과연 나는 감사하며 살아가는가? 아니면 불평과 불만과 짜증 섞인 목소리로 살아가는가? 지혜를 얻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가? 하나님을 찬양하는가? 우리의 모든 말과 일거수일투족이 과연 주 예수의 이름으로 되어 지는가?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 힘을 얻어서 살고 있는가?
[더 깊은 신앙의 바다로 나아가라]
바울 사도의 마지막 조언들은 매우 깊은 경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평신도 중심의 사역이 가능하려면, 정말로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다짐이 필요하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예수의 제자로 살겠다는 신앙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한국사회는 참된 신앙을 지닐 수 없게 만드는 너무나 많은 요소들로 가득합니다. 오늘날은 시대정신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저마다 제 소견이 옳다고 하는 사사 시대를 닮아 있고, 신자유주의적 사고가 한참 전 세계를 지배하다가, 경제적 부익부 빈익빈의 사태만 남겨 놓은 채 갈 길 몰라 방황하고 있는 것이 현대의 모습입니다. 기후재앙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안을 잠재우고 싶은 이들이 선택하는 극우적 정치 성향들은 우리의 삶을 더욱더 위태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스승, 주님, 구원자가 계시다는 것은 진실로 희망이고 삶을 버티게 해 주는 기둥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세기 갈릴리에서 어부와 농부, 세리와 창녀, 눈 먼 자와 다리가 불편한 자들, 중풍병에 걸린 사람과 손이 오그라든 사람들, 갈 곳 없고 그 누구도 일군으로 써주지 않던 사람들, 죄인이요 야만인들이라고 불린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서 새 사람이 되고, 예수님을 따라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돈과 권력에 눈 어두운 사람들, 남에게 인정받기 위한 욕망에 도리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이들, 남 밑에서 눈치 보며 살면서 뒤에서 험담하는 사람들, 헛된 욕망에 취한 사람들, 정직하게 자신의 삶을 대면하지 못하고 술과 마약, 쇼핑으로 회피하는 이들 가운데서 휘둘리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새로운 길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은 역시 예수를 제대로 따르는 이들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전구의 성도 여러분!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참 신앙인의 삶을 살자고 다짐합시다. 평신도이든 목회자이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께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올 한해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그 길이 우리 모두를 구원으로 이끌 것입니다.
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생명의 하나님! 우리 한민족을 사랑하셔서 복음을 들려주시고, 민족의 명절에 온 가정이 함께 모이게 하신 은혜 감사드립니다. 두 번째 새해를 맞이하면서 다시 한번 우리 삶을 되돌아보고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합니다. 올 한 해도 우리 생명 사랑 교우들과 전국에서 함께 목회하고 선교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주님을 따라 새로운 길들을 만드는 사역을 잘 감당하게 하소서. 평신도 중심의 사역을 지향하는 교회답게,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책임 있는 자세로 주체적인 신앙을 갖게 하소서. 교회 내 봉사와 활동, 교회밖 선교와 전도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상을 지내는 모든 삶의 터전에서 생활 목회자로, 세상의 선교사로 살아가게 하여 주소서. 우리가 가는 길이 방황하고 헤매며 길 잃은 이들에게 하나의 빛줄기가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하나님!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한 해도 주님의 은총을 누렸사오니 올 한 해도 감사가 넘치는 한 해가 되길 빕니다. 주님 올 한해, 우리의 삶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첫사랑을 회복하기 위하여 늘 기도하길 원합니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지혜로운 방식으로 서로를 돌보게 하시고, 삶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을 서로 도우며 함께 헤쳐 나가게 하여 주소서. 동시에 우리의 내면을 풍성하게 하는 일에도 힘쓰게 하여 주소서. 무엇보다 믿음으로 마음의 근육을 키우게 하시고, 어둠 속에서도 감춰진 빛을 바라보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성실한 사랑이 더욱 힘 있고 아름답게 피어나게 하소서. 오늘 우리는 우리의 전 삶과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을 기억하며 우리 자신을 주님께 예물로 드립니다. 곳곳에서 일어나는 하나님 나라 운동에 이 귀한 예물들이 쓰이게 하여 주소서. 무엇보다 우리가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소서. 주님께서 부르실 때, 언제라도 달려 나가는 제자가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삶이 거룩한 산 제사가 되길 바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만들어 가십시오. 그 길에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 하실 것입니다.
* 축도
2024년 새해에는
여러분 손에 언제나 할 일이 있기를,
여러분 지갑에 언제나 한, 두 장의 5만원권 지폐가 남아 있기를
여러분 발 앞에 언제나 길이 나타나기를,
바람은 언제나 여러분의 등 뒤에서 불고
여러분의 얼굴에는 태양이 비치기를
가끔 여러분의 길에 비가 내리더라도 곧 무지개가 뜨기를,
불행에 대해선 가난하고,
축복에 대해선 부자가 되기를,
적(敵)을 만드는 것에는 느리고 친구를 만드는 데에는 빠르기를,
이웃들은 여러분을 존경하고,
불행은 여러분을 아는 체도 안 하기를
여러분이 죽을 것을 악마가 알기 30분전에
여러분은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기를
앞으로 겪을 가장 슬픈 날이,
지금까지 겪은 가장 행복한 날보다 더 나은 날이기를
그리고 하나님께서 늘 당신 곁에 함께 계시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