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한문덕 목사] 무엇이 두려운가! – 2022년 12월 4일
민수기 14장 1-10절
[삶의 터전을 옮긴다는 것]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2020년 12월에 지금의 예배 공간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새로운 예배 처소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많은 논의를 했습니다. 여러 차례 공청회를 통해 기존의 예배 장소로부터 차로 30분 이내의 거리에 있는 곳, 즉 서쪽으로는 쌍문, 동쪽으로는 의정부까지 공간을 물색하기로 하고, 주차 시설과 화장실, 엘리베이터, 아이들의 놀이 공간이 함께 확보되면 좋겠다는 의견을 모았습니다. 이런 장소를 찾는 일부터 구입 자금과 인테리어 비용을 마련하는 일, 예배 처소를 어떻게 꾸밀 것인지, 또 누구에게 맡길 것인지, 누가 감독을 하며 챙길 것인지, 이사할 때 어떤 물건을 가지고 가고, 어떤 물건을 두고 갈 것인지 등등 그 모든 과정이 쉽지 않았습니다.
물론 새 예배 처소 위원회를 꾸리고, 당회원들을 비롯해 서로 역할을 맡아 각각 필요한 것들을 담당했지만, 전체 교인의 의중을 잘 모아내는 일 또한 만만치 않은 작업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지하 공간이 갈수록 냄새도 나고 못 쓰게 되었기에 지상으로 옮기는 것이 매우 절실했고, 다행히 온 교우들의 기도와 열심 있는 분들의 솔선수범을 통해 우리는 작지만 아늑하고 세련된 공간을 만들어냈고, 그것도 월세 안 내는 우리 소유의 안정된 예배 처소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쫓겨날 걱정이나, 월세를 올려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없습니다. 우리 젊은 부교역자들이 햇빛 들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사역할 수 있고, 어느 누가 방문해도 감탄을 하며 참 예쁘고 좋은 공간이라는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만족스러울 수는 없는 법! 공간이 작아져서 교육부의 신앙 활동에 어려움이 있고, 함께 식사하는 것도 큰 제약이 생겼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코로나로 인해 예배 환경과 목회 활동에도 적잖은 변화가 있는데, 여기에 잘 적응하는 교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도 있습니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아도, 여전히 옛날이 더 좋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고, 이사를 하는 과정에서 서로 감정이 상한 일들도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이 늘 밝고 맑고 행복하고 기쁘기만 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만은 없습니다. 함께 사는 세상은 서로 다른 의견과 취향과 삶의 방식으로 인해 티격태격하고, 상처를 주고 또 상처를 받고, 타이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곳입니다.
100명 남짓한 교인들이 이사하는 일도 이렇게 복잡하고 쉽지 않은데, 애굽을 나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새로운 나라를 세운 이스라엘 백성은 과연 어떤 과정을 겪었을까요? 모세와 아론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백성이 적게는 수천 명에서 많게는 수십만 명에 이릅니다. 여러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1년 정도 걸려서 그 모든 과정을 겪었지만, 성서의 백성들은 무려 40년의 세월을 겪게 됩니다. 그것도 광야에서 이전 세대가 죽고 새로운 세대가 주역이 되는 시간을 보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출애굽 한 지 1년쯤 되었고, 눈앞에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있는 어느 시점의 이야기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앞에 두고]
광야의 온갖 험난한 여정을 지나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려는 참입니다. 모세는 각 지파에서 대표를 뽑아 가나안 땅 구석구석을 살펴보게 합니다. 성서는 뽑힌 사람들이 전부 이스라엘 자손의 우두머리였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이름을 전부 호명합니다. 르우벤 지파의 삼무아, 시므온 지파의 사밧, 유다 지파의 갈렙, 잇사갈 지파의 이갈, 에브라임 지파의 호세아, 베냐민 지파의 발디, 스불론 지파의 갓디엘, 요셉 지파 곧 므낫세 지파의 갓디, 아셀 지파의 스둘, 납달리 지파의 나비, 갓 지파의 그우엘입니다.(민수기 13:1-15). 이 이름 중에 왜 여호수아가 나오지 않는가 하고 생각한 분이 계시겠지만 에브라임 지파의 호세아가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호세아’와 ‘여호수아’는 같은 이름의 두 형태로서 모두 “야훼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지도자인 모세는 레위 지파이고, 요셉 지파가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로 나뉘어서 모두 열세 지파인데, 모세를 제외한 열두 지파의 우두머리들이 가나안 정탐꾼으로 선출되어 파견된 것입니다. 모세는 이들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너희는 저기 네겝 지방에도 올라가 보고, 산간지방에도 올라가 보아라. 그 땅이 어떠한지 탐지하여라. 그 땅에 사는 백성이 강한지 약한지, 적은지 많은지를 살펴보아라. 그리고 그들이 사는 그 땅이 좋은지 나쁜지, 그들이 사는 마을들은 장막촌인지 요새화된 성읍인지, 토지는 어떠한지, 기름진지 메마른지, 거기에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보아라. 담대하게 행동하여라. 그리고 그 땅의 과일을 가져오너라.”(민수기 13:17-20)
정탐꾼들은 40일 동안 가나안 온 땅을 둘러보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고 합니다.
“우리에게 가라고 하신 그 땅에, 우리가 갔었습니다. 그곳은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곳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땅에서 난 과일입니다. 그렇지만 그 땅에 살고있는 백성은 강하고, 성읍들은 견고한 요새처럼 되어 있고, 매우 큽니다. 또한 거기에서 우리는 아낙 자손도 보았습니다. 아말렉 사람은 네겝 지방에 살고 있고, 헷 사람과 여부스 사람과 아모리 사람은 산악지대에 살고 있습니다. 가나안 사람은 바닷가와 요단 강 가에 살고 있습니다.”(민수기 13:27-29)
이 보고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담고 있는 사실 언어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동시에 성읍들은 매우 견고한 요새 같았고, 백성들은 강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이제 두 가지 판단이 부딪힙니다. 첫번째 판단은 유다 지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판단입니다.
“올라갑시다. 올라가서 그 땅을 점령합시다. 우리는 반드시 그 땅을 점령할 수 있습니다.”(13:30)
두번째 판단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지파 대표들의 판단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그 백성에게로 쳐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 백성은 우리보다 더 강합니다.”(13:31)
자!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이스라엘 자손들이라면 이 두 판단 중 어느 판단에 동조하시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가장 최악의 선택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유다 지파니까 우리의 대표인 갈렙의 말을 무조건 따르자” 이것은 정확하게 편 가르기인데, “우리가 남이가”하면서 내 편과 네 편을 나눕니다. 이런 편가르기식의 판단과 결정은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신앙의 눈도 닫아 버리게 합니다. 순전히 인간적인 정에 끌려서, 관계의 친소에 따라 결정하기 때문에 중요한 일을 그르치게 만드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모든 공동체가 당면한 문제를 풀어갈 때, 사태에 집중하여 분석하지 않고 내 편인가, 네 편인가를 나누고 그에 따라 결정하고 선택할 때, 결국 서로 비방하며 상처를 주고 분열에 이르게 됩니다.
[판단의 근거, 신앙인가? 두려움인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 본문을 보니 대다수의 회중은 열 지파 대표의 판단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다수결의 원칙에서 보아도 10대 2로 의견이 다르니 말입니다. 그래서 온 회중이 소리 높여 아우성치고, 백성은 밤새도록 통곡했다고 성서는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온 이스라엘 자손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단지 원망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이들은 서로 말합니다.
“우두머리를 세우자. 그리고 이집트로 돌아가자.”
이들의 기세가 얼마나 셌는지, 모세와 아론은 겁에 질린 나머지 이스라엘 온 회중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납작 엎드립니다. 정말 굴욕적인 장면이지요. 이때, 다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너무 슬픈 나머지 자신들의 옷을 찢고 통탄하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가 탐지하려고 두루 다녀 본 그 땅은 매우 좋은 땅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그 땅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다만 여러분은 주님을 거역하지만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그들의 방어력은 사라졌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소용없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군중은 이제 돌을 들어 여호수아와 갈렙마저도 쳐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자 야훼 하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여기에서 끝이 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여러분이라면 과연 어떤 판단을 내리시겠습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은 무엇에 근거해서 들어가자는 것이고, 회중은 무엇에 근거하여 이렇게 대성통곡하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또 하나의 비밀이 있습니다. 민수기 13장 32절부터 33절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명의 정탐꾼이 어떤 짓을 했는지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면서 그 탐지한 땅에 대하여 나쁜 소문을 퍼뜨렸다.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 땅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탐지하려고 두루 다녀 본 그 땅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삼키는 땅이다. 또한 우리가 그 땅에서 본 백성은, 키가 장대 같은 사람들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또 네피림 자손을 보았다. 아낙 자손은 네피림의 한 분파다. 우리는 스스로가 보기에도 메뚜기 같았지만, 그들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열 지파의 대표들은 백성들이 자신들의 판단에 동조하게 하려고 나쁜 소문을 퍼뜨리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발생할 수 있는 효과 중 주로 부정적인 것만을 더 부각하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땅이 사람을 삼킨다는 둥, 스스로 보았을 때 우리 자신이 메뚜기처럼 느껴졌는데 그들도 우리를 그렇게 평가할 것이고, 거인족인 그들에게 우리는 분명히 당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선동에 대중은 넘어갔고, 그래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날도 온갖 거짓 뉴스와 사기꾼들, 나쁜 정치인들의 선동에 많은 사람이 속아 넘어갑니다. 휘몰아치는 군중심리는 위대한 지도자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숙고하면서 냉정하게 판단하는 능력은 온데간데없고, 두려움과 공포심에 휘둘린 격한 감정만이 들끓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두려움과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망각]
자! 정신을 차리고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에 주목해 봅시다.
“우리가 탐지하려고 두루 다녀 본 그 땅은 매우 좋은 땅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그 땅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다만 여러분은 주님을 거역하지만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그들의 방어력은 사라졌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14:7-9)
지금 여호수아와 갈렙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사랑하시지 않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땅과 거기 사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우리는 그 사랑에 응답해서 어떤 결정을 해야 하는지를 살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거역하지만 마십시오! ~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정말 중요한 한 마디입니다. 여러분! 우리 함께 차분히 생각을 해 봅시다. 이스라엘 회중 전체는, 각 지파의 모든 우두머리들을 포함하여 자기들의 눈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애굽에 재앙들을 내리셨는지, 어떻게 고대 세계의 가장 막강하고 가장 오래 지속된 제국을 무릎 꿇게 하셨는지를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애굽 군대의 최신 무기들과 말이 끄는 전차들이 홍해에 빠지는 것을 보았고, 자신들은 맨땅을 걸어서 홍해를 건넜습니다. 애굽은 가나안 족속, 브리스 족속, 여부스 족속, 그리고 가나안 땅의 작은 부족들보다 훨씬 막강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옛날의 기억이 아닙니다. 고작 1년 전에 벌어졌던 일들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그 땅의 백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세가 불렀던 바다의 노래를 함께 부르면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여러 민족이 두려워서 떱니다. 블레셋 주민이 겁에 질려 있습니다. 에돔의 지도자들이 놀라고, 모압의 권력자들도 무서워서 떨며, 가나안의 모든 주민도 낙담합니다. 그들이 모두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출애 15:14-16a)
여기서 이 이야기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회중을 애굽에서 어떻게 건져내셨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가나안 땅의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했습니다. 이것이 정확한 사실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메뚜기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온 회중은 이런 모든 기억을 잊고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은 채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지도자를 죽이고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한 다음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도 이런 모습은 아닌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숱하게 많은 기적과 표적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보호해 주셨건만 우리는 이런 모든 경험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당장 벌어진 사태 앞에서 두려워 떠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했던 것인가요? 아니 실제로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나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몸도 둘 다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지금 이스라엘 회중은 하나님보다 가나안 땅 사람들을 더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이 “여러분은 주님을 거역하지만 마십시오.”라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님 아닌 것을 두려워하면서 주님을 거역하기 때문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을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또 다른 종류의 두려움]
이스라엘 회중은 그렇다고 칩시다. 그런데 열 지파의 우두머리들은 왜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이들도 분명히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과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이들은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우두머리들이고, 쉽게 두려움에 사로잡힐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들은 왜 나쁜 소문까지 퍼뜨리면서 백성들을 선동하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했던 것일까요? 이들도 백성들과 똑같이 겁을 잔뜩 집어먹은 것일까요? 여기에 대하여 우리가 생각 못했던 놀라운 해석 하나가 있어서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오늘의 설교를 마칠까 합니다.
유대인 랍비 므나헴 멘델 슈니어슨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열 지파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나안 땅에 진입하는 것이 성공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어떻게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국가를 세웠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분분합니다. 과거에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무력으로 가나안을 모두 다 정복했다는 설이 우세했지만, 오늘날 그렇게 믿는 학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가설이 제시되었는데, 하나는 가나안 땅의 산악지대 즉 가나안 원주민이 살기 어려운 지역으로 조금씩 조금씩 이주했다는 설입니다. 또 하나는 가나안의 농민들과 애굽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힘을 모아 혁명을 일으키고 새로 국가를 세운 것이라는 가설도 있습니다. 더 획기적인 것은 가나안에 대한 애굽의 영향력이 약화 되었을 때, 사회 저변에 깔려 있던 하층 계급들이 서로 연대하여 가나안 봉건 제후에게 대항하였고, 여기에 많은 이들이 함께하여 가나안 사회가 열두 부족 체제로 재조합되었다는 설입니다. 3,000년 전에 역사적으로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가를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나의 국가가 새롭게 세워지는 일은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교 랍비 므나헴의 신앙적 안목은 바로 여기에서 빛이 납니다.
열 지파의 우두머리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싫어했던 것은 오히려 광야가 좋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만 있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막을 중심으로 하나님과 가까이 지낼 수 있습니다. 다른 족속들을 크게 신경 쓸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로 자신의 백성을 먹이시고, 바위로부터 솟아나는 기적적인 샘물을 마시게 하시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자신의 백성을 돌보시고 지키십니다. 이스라엘 회중과 지도자들은 그저 하나님에게 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랍비 므나헴은 바로 열 지파의 우두머리들이 이런 방식에 머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들은 전투를 치러야 하고, 군대를 유지해야 하고, 경제를 창조하고, 땅을 경작해야 하고, 비가 올지 안 올지 걱정해야 합니다. 신경 쓸 일들이 수만 가지나 됩니다. 이스라엘 회중이 가나안 종교에 물들 수도 있고, 세상의 물질적 추구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 있으면 아무것도 없는 듯 보여도 하나님이 다 해 주시니 얼마나 편합니까? 하나님의 광채를 받으며 하나님이 내려주신 십계명을 비롯해 율법을 공부하며 하나님께만 전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면 수많은 민족 사이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다방면에 걸쳐 있는 문제들과 엮이게 될 것입니다.
랍비 므나헴이 지적하고 싶은 것은 바로 열 지파의 우두머리들이 하나님하고만 함께 하고 세상과는 엮이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일에 실패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가나안에 들어가는 성공이 더 두려웠다는 것이고, 그렇기때문에 일부러 나쁜 소문도 내고 백성들에게 겁을 주었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저는 매우 통찰력 있는 해석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마주하고 삽니다. 우리는 세상 앞에서 두려워 떨며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너무 좋은 나머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신뢰하는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의 하나님은 언제나 산 밑의 세상에서 자신의 거처를 찾으시는 분입니다. 많은 종교가 사람들을 하늘로 들어 올리는 것을 추구하지만, 유대-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늘을 가지고 땅으로 내려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당신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나라가 모든 세상이 따라야 할 모델이 되게 하려고 하십니다.
사람이 노예 취급을 당하지 않고, 통치자들을 신처럼 숭배하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고, 아무도 가난한 상태에 처하지 않고, 아무도 고립되어 방치되지 않고, 법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 없고, 늘 진실하고 아름답고 선한 것이 통용되는 하나의 모델 사회를 만들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이 하늘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땅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병자를 치유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고, 모든 능력으로 불의와 싸우고, 보편적 교육을 통해 무지와 싸우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이웃들과 낯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유대-그리스도교 신앙이 말하는 영성은 삶 자체의 한복판에서, 사회생활과 그 제도들 한복판에서 펼쳐집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위험을 무릅씁니다. 믿음은 확실성이 아닙니다. 믿음은 오히려 불확실성과 더불어 살아가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나만 존재하는 광야를 떠나 온갖 종류의 사람들, 다양한 가치관과 다채로운 취향과 저마다의 주장이 난무하는 세상으로 들어가, 그 모든 시험과 유혹에 맞선다는 것은 큰 도전입니다. 그러나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있기를 원하시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영으로 우리의 경제 운영 방식, 복지 체제, 사법 체제, 건강 서비스, 안보와 교육 시스템을 운영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의 상처 난 부분을 치유하고, 어둠 속에 감추어진 장소들에 하나님의 빛을 비추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이 두려운 것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세상입니까? 우리 생명사랑교회의 혁명은 바로 세상 속에서 더 고귀한 일상을 창출하는 것이고, 더 고유한 인격을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옛이야기 중에 호랑이와 곶감 이야기가 있습니다. 배가 고파 마을로 내려온 호랑이 한 마리가 있었는데,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집으로 가게 됩니다. 아이가 왜 우나 궁금했던 호랑이는 담벼락 아래 숨어서 아이와 엄마의 대화를 몰래 듣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이렇게 말을 하지요. “아이구, 이를 어째! 네가 큰 소리로 우니깐 밖에 호랑이가 왔잖니. 자꾸 울면 호랑이한테 잡아먹으라고 할 거야.” 물론 엄마는 밖에 진짜 호랑이가 온 줄 모르고 장난으로 한 말이었지만, 호랑이는 자신이 있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나 싶어 당황하면서도 동시에 먹을 것이 생겼다고 좋아라 기다리는데, 아이는 여전히 자지러지게 웁니다. 그러자 엄마는 곧 이어 “아이구, 그래그래. 엄마가 장난쳐서 미안해. 여기 곶감 있으니까 이제 그만 울려무나.”하고 말하며 아이에게 곶감을 주자 신기하게도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칩니다. 이때부터 호랑이는 곶감을 무척 무서워하게 되지요.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왜 호랑이는 곶감을 무서워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곶감이 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이 두려우십니까? 여러분이 두렵다면 그건 여러분이 하나님도 모르고 세상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말 좋은 영화는 영화가 끝나는 순간부터 나만의 영화가 시작되도록 만들어 줍니다. 마찬가지로 정말 좋은 신앙인은 하나님께서 멈추실 때, 바로 그때부터 활약을 펼칩니다. 저 하늘이 아니라, 교회 안의 울타리에서만이 아니라, 바로 세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된 자로 그렇게 하나님의 신뢰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펼쳐나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모두 그런 믿음의 소유자가 되길 빕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능력의 하나님!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만 경외하게 하여 주소서. 하나님만이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주님 안에서만 우리 몸과 영혼은 참된 삶의 의미를 얻고 안식을 얻습니다. 주님을 신뢰하여 세상을 두려워하는 일이 없게 하여 주소서. 하나님! 또한 우리가 안주하지 않게 하여 주소서. 하늘의 시민임을 알지만, 이 땅에 주님의 나라를 세워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기억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 곁에 장막을 치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님을 따라 우리가 우리의 형제와 자매, 이웃들 곁으로 나아가게 하여 주소서.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로서 맡겨진 일을 충직하게 감당하게 하여 주소서. 주님이 함께 하시니 우리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참 좋으신 하나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지으시고 “참 좋았다”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앞에 나와 주님께 예배하는 이 시간, 우리 모두 “참 좋았다”라고 말하게 하여 주소서. 모든 것을 맑은 눈으로 아름답게 바라보게 하시고,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붙들게 하여 주소서. 희망이 있기에 삶이 이어지고, 살아가기만 한다면 희망이 존재합니다. 사랑하는 생명 사랑 식구들이 주님의 은총을 입어 주님 전에 나올 때마다 “아멘”으로 응답하게 하여 주소서. 주님 앞에서는 언제나 “예”라고 답하게 하여 주소서. 예. 우리 주님께 우리의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예. 우리의 물질도 주님의 것입니다. 예. 우리의 사랑, 우리의 기쁨 모두 주님과 함께 하겠습니다. 예. 우리는 약하지만 주님과 함께라면 언제나 강합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마음과 예물을 받으시고, 우리의 삶이 주님의 약속 안에서 늘 자라나길 원합니다. 우리의 입술에서 감사가 끊이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품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생명이 온전히 주님께 달려 있음을 믿으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주님이 여러분 편입니다. 불안에 떨지 마십시오. 창조주 하나님과 부활의 예수님과 능력의 영께서 여러분을 이끄십니다.
* 축도
여러분의 귓가에 성령의 속삭임이 들리기를,
여러분의 입술에 창조의 말씀이 임하시기를,
여러분의 손길에 능력의 영이 함께 하시기를,
여러분의 발길에 복음의 소식이 붙어 있기를,
여러분의 숨결에 생기가 넘치고,
여러분의 마음에 하늘을 담아내기를 빕니다.
이제는 지난 10년의 세월을 지켜 주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총이, 주님의 사랑으로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려는 생명사랑 모든 믿음의 지체들 위에, 함께 예배하고 선교하는 전국의 모든 성도 위에,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길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