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한문덕 목사] 마땅히 해야할 일 – 2020년 11월 1일
욥기 29장 21절-30장 1절, 시편 115편 3-11절, 누가 17장 7-10절
[욥이 던지는 삶의 문제]
우리는 올해부터 3년 동안 구약성서는 한 번, 신약성서는 두 번, 시편은 여섯 번을 읽는 과정으로 매일 성경을 읽습니다. 구약성서는 지금 욥기를 읽고 있는데, 욥기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문제를 제기합니다. 여호수아서에서부터 열왕기서에 이르는 역사서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신실하게 지켰을 때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나라가 부강하고, 율법을 거역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저주가 임한 것을 기록하고 있고, 많은 유대인들은 이런 신명기 역사관에 따라 계명의 준수와 풍요로운 삶, 행복한 삶을 연결 지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올바르게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셔서 삶이 풍족하고 하는 일마다 잘 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이 내려 불행과 고통이 찾아온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욥기의 주인공 욥은 정말 그런가를 묻습니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과 엄청난 고통 속에서 신음하면서 정말 자기가 잘못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과거의 일들을 하나씩 떠올려 봅니다. 과거에 욥은 엄청난 부자로 모든 것이 풍족했습니다. 올리브 기름은 강물처럼 흘러 나왔고, 젖소와 양들에게서 나오는 젖이 자신의 발목을 적실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모든 이웃 사람들은 욥을 매우 존경하였습니다. 욥이 어느 것 하나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사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욥의 이야기를 잠깐 들어 보겠습니다.
“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내가 한 일을 칭찬하고, 나를 직접 본 사람들은 내가 한 일을 기꺼이 자랑하고 다녔다. 내게 도움을 청한 가난한 사람들을 내가 어떻게 구해 주었는지, 의지할 데가 없는 고아를 내가 어떻게 잘 보살펴 주었는지를 자랑하고 다녔다. 비참하게 죽어 가는 사람들도, 내가 베푼 자선을 기억하고 나를 축복해 주었다. 과부들의 마음도 즐겁게 해주었다. 나는 늘 정의를 실천하고, 매사를 공평하게 처리하였다. 나는 앞을 못 보는 이에게는 눈이 되어 주고, 발을 저는 이에게는 발이 되어 주었다. 궁핍한 사람들에게는 아버지가 되어 주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하소연도 살펴보고서 처리해 주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의 턱뼈를 으스러뜨리고, 그들에게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빼내어 주었다.”(욥기 29:11-17)
욥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풍족한 삶을 살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은 이유는 바로 욥의 삶이 매우 도덕적이고 윤리적일 뿐만 아니라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늘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악한 이들을 물리치고,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구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욥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면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은 불사조처럼 오래오래 살며, 사람들은 자신을 계속 칭찬하고, 또 자신의 지혜로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절처럼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제부터 욥의 입에서는 한탄과 탄식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제는 나보다 어린 것들까지 나를 조롱하는구나. 내 양 떼를 지키는 개들 축에도 끼지 못하는 쓸모가 없는 자들의 자식들까지 나를 조롱한다.”(욥기 30:1)
욥기를 읽어보면 구구절절 욥이 얼마나 큰 고통과 괴로움에 시달리는지 알 수 있습니다. 고통의 바다 한 가운데서 욥은 묻습니다. 왜 나에게 불행과 고통이 찾아오는가?
[완벽한 사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매 순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욥처럼 고통이 연속적으로 찾아온다면 그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때에도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신앙이란 정말 무엇일까요? 정말 어려운 물음입니다. 쉽게 답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오늘 우리들의 삶의 뜻을 두고 진지하게 묻는 욥의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욥기를 읽어가면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성서는 욥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우스라는 곳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욥에 대한 이 소개는 하나님의 입을 통해서도 확증됩니다. “너는 내 종 욥을 잘 살펴보았느냐? 이 세상에는 그 사람만큼 흠이 없고 정직한 사람,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없다.”
욥기 29장을 보면 이러한 소개처럼 욥 스스로 말하는 자신의 행실은 정말로 완벽해 보입니다. 누구에게나 존경 받을 만합니다. 제가 욥에 대한 소개와 욥의 행실에 대한 묘사를 들으며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사실 이런 사람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그래서 성인의 반열에 들 법한 사람도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는 존재이고, 사람은 욕망의 노예이며,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를 범하는 존재입니다. 욥이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훌륭한 점이 있었을 것입니다만 절대적으로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완전이라는 말은 온전히 하나님께만 가능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른 사람과의 비교 속에서 상대적으로 뛰어난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절대화합니다. 오늘 욥도 자신은 불사조처럼 오래오래 살 것이고, 자신의 정력은 쇠하지 않으며, 사람마다 자신을 칭찬하고 뿌리가 물가로 뻗은 나무처럼 언제나 푸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완벽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을 때, 엄청난 불행이 찾아온 것입니다. 완전할 것 같은, 완벽해 보이는 그 인생에 균열이 갔을 때, 그 좌절과 고통, 실망과 슬픔, 괴로움이 얼마나 클까요? 오늘 저는 욥기를 읽으면서 자신은 실수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역설적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욥기가 그리는 욥의 모습은 너무나 완벽합니다. 저는 이게 자꾸 마음에 걸립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나처럼 괜찮은 사람이 어디 있나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빨리 꿈에서 깨어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삽니다. 아무리 변변치 못한 외모를 타고난 사람도 거울을 열심히 들여다보며 자신의 멋진 모습을 찾아내고, 그래서 쉬지 않고 열심히 셀카를 찍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정말 사랑하며 일정 부분 자기에 도취한 나르시시스트입니다.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분도 계실 수 있습니다. 나는 내가 부족하고 내가 잘못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실수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도 실제로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느끼면, 자신도 모르게 무척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자신이 실수하는 존재라는 것을 정확히 알면 실수하더라도 시도하고 도전해 볼 만한데, 실수할까 두려워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자신이 틀렸거나 잘못한다는 것을 못 견디는 것입니다. 그래서 확실하게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자신의 잘못을 거의 인정하지도 않고, 내가 틀릴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누구나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신인 것처럼, 완벽한 사람이나 되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래서 실수를 인정하기도 어렵고, 또 실수를 깨달았을 때 큰 부끄러움이나 자괴감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욥은 자신이 실제로 너무 뛰어났기 때문에 지금의 고통을 더 참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자기처럼 살았던 사람이 없는데,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오는가? 그런데 욥이 미처 몰랐던 것은 행복이 바로 불행일 수 있다는 것, 자신에 대한 타자의 존경심이 자기와 남 사이에 구별과 거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더 완벽한 사람이 되고자 하고, 저 또한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 실수를 줄이고 더 많은 것을 해내는 능력을 갖추고자 하지만, 바로 그것이 나를 옭아매는 족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더 잘되고 숙련된 기술과 정확하고도 충분한 정보와 지식을 얻어갈 때, 가장 주의하고 경계해야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 완벽하다는 착각이며, 자신이 옳다는 고집입니다.
오늘 욥기가 욥의 이야기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깨우쳐주려고 하는 것 중에 가장 핵심적인 것은 세상이 꼭 인과응보의 원리대로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만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밀을 뿌렸지만 가라지가 언제나 섞여 있기 마련이고, 선한 이에게도 불행이 찾아오며,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죽음은 예외 없이 찾아온다는 그 사실에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깊이 뿌리내린 허무와 불안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윤리의 문제를 뛰어 넘는다는 것을, 우리의 삶에 정답이란 것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살아가야할 이유도 잘 모르지만, 그렇게 잘 모르면서도 그냥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자! 여기에서 우리는 또 다른 질문에 봉착합니다.
[인과응보식의 신앙에서 벗어나라]
만약에 콩을 심어도 콩이 나지 않는다면, 콩을 심었는데 엉뚱하게 팥이 나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불의한 사람에게나 의로운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과 비를 내려주신다는 데, 그러면 꼭 의를 행하며 살아야 할까요? 선한 행위가 선한 결과를 보장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것이 나의 행복을 확실하게 보장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율법을 거슬러도 벌을 받지 않는다면, 그럴 때에도 나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믿어도 세상이 말하는 경제적 부와 사회적 지위를 얻지 못하고 변변치 못한 삶을 살아간다 해도 그래도 하나님을 믿으시렵니까? 오늘 욥기는 우리의 신앙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깊이 묻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이유는 무엇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진정한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을 인과응보의 논리에 얹혀 놓으면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잇속을 차리려는 장사치의 관계가 됩니다. 그동안 한국의 많은 신앙인들이 사실 이런 잘못을 저질러 왔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주고받는 관계로 인식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무엇이라도 드리면 하나님이 그것을 되갚으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드리지 않으면 벌을 내리시는 분으로 생각하고, 그 벌이 두려워서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많은 목사들이 이런 인과응보적 논리를 들먹이면서 사람들이 지닌 불안한 마음을 자극했습니다. 네가 지금 당하는 불행은 하나님께 잘못했기 때문이라며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고, 각종 종교 행위들을 강요해 왔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아낌없이 주시는 무조건적 사랑에 대한 감사와 기쁨, 즐거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닥칠 불행을 피하기 위해, 아니면 더 많은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 되어 버렸던 것이 지난 세월 수많은 교인들의 믿음과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방식, 즉 인과응보식의 믿음에서 깨어났고, 그러자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벌 받지 않으려고 교회생활을 열심히 했는데, 주일성수를 하지 않아도, 헌금을 내지 않아도, 열심히 성서를 읽지 않아도, 기도를 하지 않아도 사실은 우리의 삶이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고, 또 벌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자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과응보식의 신앙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부인 줄 아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신앙마저도 떠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인과응보의 논리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마치 연인의 관계처럼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관계입니다. 때로 주고 받는 것이 있지만, 때로는 그냥 주고만 싶은 그런 관계입니다. 상대가 하는 것에 따라 나도 똑같이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하지 않아도 나의 사랑은 변치 않는 그런 관계입니다.
[종의 비유와 마땅히 할 일]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하나의 비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어느 날 제자들에게 죄를 지은 형제자매에 대해 용서할 것과 믿음의 능력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바로 우리가 오늘 함께 읽은 누가복음서입니다.
오늘날은 주인과 종이라는 계급적 질서가 없지만, 고대 사회에서 종은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먼저 자기 자신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식탁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주인의 발을 씻기고 주인이 드실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종의 일이었습니다. 종은 모두 그렇게 했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칭찬을 받거나 주인이 고마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종의 의무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종의 비유를 드시면서 이렇게 제자들에게 충고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우리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해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여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과응보의 논리를 깹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여기에 토대를 두어야 합니다. 무엇을 얻기 위해, 아니면 벌을 받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함으로 사는 것입니다.
정말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은 무엇일까요? 세상에는 많은 직업군이 있고, 그런 직업은 저마다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의사는 병을 고치고, 판사는 법에 따라 재판을 하고, 교사는 마땅히 가르쳐야 합니다. 환경미화원은 청소를 해야 하고, 요리사는 요리를 해야 합니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나서 따르는 보상이나 칭찬에 감사할 수 있지만, 보상이나 칭찬, 또는 하지 않았을 때의 벌이나 피해를 생각하면서 일을 한다면 그 일 자체에서 얻는 기쁨과 즐거움, 일 자체에서 얻는 보람은 모두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이 혼란스럽고 세상이 안 좋아진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다른 것에 마음이 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고 돈에만 관심이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계속 환자들이 병원으로 와야 하기에 빨리 낫지 않게 하는 것, 아니 오히려 병을 만드는 것이 유리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많은 교회가 바로 이런 방식으로 목회를 해 왔고,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130년의 역사 속에서 성숙하지 못하고 유치한 신앙에만 머물렀던 것입니다.
목사가 목회를 하다보면 교인들에게 사랑도 받고, 때로 미움도 삽니다. 그런데 그 때 교인들의 반응에 목사가 흔들리면 목회는 뒤죽박죽이 됩니다. 목회자는 목회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 됩니다. 그것은 말씀을 전하는 일에 충실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건강하게 유지하며,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 모두는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갑자기 성공한 목회, 실패한 목회라는 말이 교계에 떠돌아다니며 교회의 양적 성장이 하나의 기준이 되고, 거기에 엄청 많은 목회자들이 휘둘렸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목회만 충실하게 하면 되는데, 그러다가 교회가 사라질 수도 있고, 또 교회가 더 커질 수도 있는 것인데, 마땅히 해야 할 목회를 한 것으로도 충분하건만, 세상의 방식으로 남에게 보이려고 목회를 하는 일들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길에 목회자와 교인들이 발을 디뎠기에 그동안 한국교회는 덩치만 커진 골칫덩이가 된 것입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오늘 시편 기자가 말한 대로 우리는 잘못된 우상 숭배로부터 빠져 나와야 합니다. 진실 되게 하나님만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은 모두 주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보상이나 바라고 교회에 다닌다면 차라리 그냥 세상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 좋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하느니 교회에 다니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더 좋은 일일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무서워서 억지로 교회에 나온다면 그런 인생이야말로 불쌍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창조주이신 하나님 품에 있을 때, 참으로 인간다울 수 있고, 또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마땅히 따를 때 자신의 본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본래 주어진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그 길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그냥 하면 됩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오늘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에는 매우 엄청난 역설이 들어 있습니다.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하면서도 “저는 쓸모없는 종일 뿐입니다”라고 고백할 때, 정말 그 종이 쓸모 있는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충실히 해 나갈 때 바로 거기에서 엄청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고, 그것이 진짜 실력을 키워 주며, 그것 자체로 큰 행복이 됩니다. 칭찬이나 비판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그것에 신경 쓸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그저 할 때, 그것도 성실하게 꾸준히 할 때, 그러면서도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할 때, 믿음의 능력이 발휘되고,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몸된 교회로서 주님의 가르침과 삶을 재현하고, 그것으로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의 선교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그 일들을 그냥 하면 됩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서 주인이 고마워하지도 않고, 칭찬할 것도 아니지만, 마땅히 해야 할 그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 자체가 기쁨이고, 그것을 해 내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보람이며 삶의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교회가 되길 빕니다. 우리 교회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마땅히 하고 해야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이들로 가득하면 좋겠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하고 “우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우리가 고백할 때만이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참된 교회가 될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온 세상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 우리를 주님의 일군으로 세우셨으니,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부족한 종이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에 감사하면서 주어진 소명을 이루도록 애써 노력하게 하여 주소서. 보상을 바라고, 벌을 피하기 위해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운 마음으로 주님의 일에 나서게 하여 주소서. 마땅히 할 일들을 해 나갈 때, 주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하여 드러나길 원합니다.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주님의 명예가 드높여지길 원합니다. 거룩하신 주님! 우리 생명사랑교회를 사용하여 주시고, 모든 피조물들에게서 영광 받으소서. 영원한 사랑 가운데 우리를 자유로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자비하신 하나님! 우리가 주님을 송축하고, 우리의 입술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10월 마지막 주를 보내며 올 한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한없는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겪는 어려움들을 이겨내게 하시고, 우리가 때로 주님께 소홀할 때에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새 시대에 적응하며 또 다른 내일을 다시 꿈꾸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배 공간을 이전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새 공간을 허락해 주심에 감사하고, 그곳에도 하나님 나라 선교를 잘 감당하게 하여 주소서. 이 시간 주님께 예물과 함께 우리 자신을 드립니다. 받아 주소서. 오늘 예배를 통해 천국의 기쁨을 누리고 저 세상으로 나아가 주님께서 감당하라 명하신 소명을 이어나가겠습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해 나갑시다. 지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해 냅시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거룩한 친교가 주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여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감당하려는 생명사랑 교우들과 지금 이 시간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