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덕 목사] 그 사람을 가졌는가 – 2024년 9월 8일
에베소서 1장 15-23절
[그 사람을 가졌는가]
1945년 8월 15일! 생각지도 못한 때에 급작스레 해방이 되고, 우리 사회는 한순간에 모든 시스템이 정지되고 권력도 일시에 사라지는 무주공산이 됩니다. 전쟁에 패배한 일본 사람들은 제 나라로 떠나고, 관공서는 텅텅 비고, 감옥에 갇혀 있던 애국지사들과 독립지사들은 모두 길거리로 쏟아져 나옵니다. 친일하던 사람들은 광복의 기쁨을 누리며 새 나라를 꿈꾸는 다수의 시민이 무서워 자기 집에 숨어 숨죽이고 있지요. 일본제국이 망했으니, 해방된 우리나라는 이제 스스로 서고 그야말로 광복에 걸맞게 다시 빛을 찾아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극심한 혼란에 빠져듭니다.
1945년을 기점으로 전 세계는 제국주의의 시대에서 냉전의 시대로 급격하게 바뀌고 있었습니다. 1,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과 일본이 물러간 자리에 미국과 소련이 세계의 주인 노릇을 하면서 전 세계는 국제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두 세력으로 나뉩니다.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벗어나 우리 힘으로 자주독립 국가를 세워야 했지만, 해방 이후 38선을 중심으로 미국과 소련이 주둔하면서 진정한 독립을 위해 건강하게 투쟁해 온 많은 이들이 바깥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1944년부터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조선건국동맹’이라는 비밀독립운동 조직을 이끌며 주권재민의 민주공화국을 꿈꾸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여운형은 해방 다음날인 8월 16일, 휘문중학교 운동장에서 이렇게 연설을 합니다. “이제 우리 민족은 새 역사의 제일보를 내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날의 아프고 쓰라린 것들을 이 자리에서 다 잊어버리고 이 땅에다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하여야 합니다. 이때는 개인의 영웅주의는 단연 없애 버리고 끝까지 집단적으로 일사불란한 단결로 나아갑시다.” 같은 해 10월 14일 평양에서 열린 ‘조선해방축하집회’에서 조만식의 소개로 나온 김일성은 7만 여명의 군중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돈 있는 자는 돈으로 지식 있는 자는 지식으로 노력을 가진 자는 노력으로 참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민주를 사랑하는 전민족이 완전히 대동단결하여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자”
그러나 여운형과 김일성의 이러한 이상과는 달리 해방 정국은 극도의 분열과 대립의 양상으로 흐릅니다. 45년 12월 한국민주당 당수인 송진우가 암살되고, 이어 47년 7월에는 여운형 암살, 47년 12월에는 한국민주당 정치부장 장덕수 피살되었고, 49년 6월 김구선생마저도 암살당하는 등 정치지도자들이 연이어 죽임을 당하고 각종 테러가 발생합니다.
이러한 혼돈의 해방공간에서 항일과 친일,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자유민주주의와 국제공산주의, 미국과 소련을 두고 온 국민이 갈팡질팡하며 과연 누구 편에 줄을 대야 하나를 두고 눈칫밥을 굴리고 있을 때, 함석헌 선생님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에게 애송되는 한 편의 시를 씁니다. 1947년 7월 20일이었습니다. 제목은 “그 사람을 가졌는가”입니다.
만리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救命帶)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不義)의 사형장(死刑場)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1947. 7. 20.)
<咸錫憲 全集 6: 詩集 水平線 너머>(한길사, 1988) 191-192.
[로마제국 치하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실 때 이스라엘도 혼란의 도가니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에게 식민 지배를 당한 지 거의 100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고, 헤롯 대왕과 그의 아들들의 폭력적 지배는 도를 넘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민중들은 로마와 헤롯 정부, 성전에까지 2중 3중으로 세금을 내야 했기에 늘 가난에 허덕였습니다. 특히 유일신 하나님만을 섬기는 신앙의 백성들이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온갖 제의와 이방신 축제에 동원될 때면 이들의 자존심은 땅에 떨어지곤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갈수록 흔들렸습니다.
사두개파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하면 신앙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성전의 고위 관료들인 제사장 그룹과 율법 학자들은 로마와 한패가 되어 백성들의 고혈을 빨고 있었고, 그 누구보다도 먼저 이방 문화에 물들어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일상에서 하나님의 계명인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하나님 백성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율법을 빌미로 일반 민중들을 이방인과 죄인 취급했습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 거룩함을 유지하겠다고 사막으로 나가서 따로 공동체를 만드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평범한 사람들이 모두 그들을 따라갈 수는 없었고, 또 강경파 일부는 로마에 저항하여 무장 폭동을 일으키고 독립운동을 하였지만, 이것이 실패할 때면 어김없이 더 잔인한 로마의 보복이 일반 백성들에게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혜성같이 한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요단강 근처 광야에 나타나 전 국민 회개 운동을 벌이면서 윤리적 갱신을 도모했는데, 그의 행실은 본받을 만하고, 사람들은 그에게서 작은 희망의 빛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했던 헤롯 안티파스는 곧바로 그를 잡아 처형해 버립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 나라의 희망은 또 다시 안개 속으로 사라집니다. 예나 지금이나 힘없고, 가난한 일반 서민들은 어디 하나 마음 둘 데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에서의 외로움]
그렇다면 과연 21세기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요?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 되어 이제는 먹고살 만하다고 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삶을 힘겹게 느끼는 사람들이 놀랍게 많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감정은 바로 “외로움”입니다. 영국의 저명한 정치경제학자 노리나 허츠는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를 ‘외로운 세기’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외로움은 단순히 어느 날 불쑥 찾아오는 문자 그대로의 외로운 느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외로움”은 산업혁명 이후, 대규모 인구 과잉 속에서 직장을 잃고 이 세상에서 자신이 있을 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느끼는 ‘뿌리뽑힘’과 ‘쓸모없음’의 느낌입니다. 이 사회가 더 이상 나를 찾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어렵고 힘들 때 나를 도와줄 만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아 이 세계에서 고립되고 버려졌다는 느낌이 들 때 바로 이것을 21세기의 “외로움”이라고 명명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실로 많은 사람이 이런 “외로움”을 호소하고 있는데, 외로움은 관계의 단절이 일어났다는 점에서는 “이웃”을 잃어버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다는 점에서는 “자기”를 잃어버리고, 세계 속에 존재하는 의미를 잃어버린다는 점에서는 “일상의 세계”를 상실하기 때문에 한 인간을 매우 위험한 지경으로 몰아넣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젊을수록, 혼자 살수록, 일정 소득 이하일수록’ 외로움을 많이 느낍니다. 즉 청년 세대가 적정한 소득 없이, 혼자 살면서 더욱더 외로워지는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상당수의 청년이 자발적으로 은둔하기도 하지만, 중요하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사람, 급한 일이 있거나, 개인적으로 돈을 빌려야 할 때 부탁할 수 있는 사람, 낙심하거나 우울할 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을 찾지 못하는 고립 상태에 6개월 이상 지속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사회가 젊은이들을 이렇게 급격한 외로움과 고립 상태로 몰아넣은 데에는 인공지능 AI로 대표되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능력주의’가 크게 한몫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기술은 서로를 언제 어디서든 연결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놀라운 기술인데, 역설적으로 이 기술을 잘 사용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간극을 너무 크게 벌려 놓습니다. 너무나 빠른 기술의 발전 속도와 고급 기술의 필요는 갈수록 외로운 인류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한편 능력 있는 사람이 많은 것을 소유하고 가져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능력주의는 우리 사회 구성원 전체를 경쟁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고 자기 능력을 증명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회의 밑바닥부터 고위층에 이르기까지 큰 차이가 없습니다. 능력을 증명해서 위로 올라가도 언제든 더 능력 있는 자에게 밀려날 수 있다는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입니다. 그래서 능력주의는 인간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전쟁터에 있는 느낌을 줍니다. 이 전쟁터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작은 전투에서 지기라도 한다면, 언제든 이 세계에서 쓸모없고 뿌리뽑힌 존재가 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지금까지 저는 80년 전 우리나라의 해방공간과 2000년전 로마제국 치하, 그리고 오늘 이 현대 사회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실로 많은 이들이 참된 안식이나 행복,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언제 어느 때 어떻게 닥칠지 모르는 비극적 사건 속에서 불안과 외로움에 떨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이든 생존의 위협을 받고, 우리네 일상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어느 때든 치고 들어오는 불안과 외로움, 두려움과 위험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함석헌 선생님은 “그 사람을 가졌는가”를 통해 참 구원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의 삶의 의미를 줄 수 있는 한 사람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고 함석헌 선생님은 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바로 함 선생님의 질문, “그 사람을 가졌냐”는 물음 앞에서 “그렇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는 종교입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실 그리스도교는 “예수”라는 인물로 인해 생겨난 종교입니다. 예수가 계시지 않으면 그리스도교가 생겨날 수 없고, 동시에 예수가 없는 그리스도교는 가짜 그리스도교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 즉 구원자라고 고백하는 종교가 그리스도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 서구 2000년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많은 교인은 예수님을 믿기보다는 로마 황제가 지니고 있던 그 “힘”을 믿었습니다. 어떤 교인은 모세가 전해 준 엄격한 “도덕 율법”을, “교리”를 맹종해 왔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교에서 우주를 돌아가게 하는 “철학적 원리”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한국으로 넘어와서는 또 많은 교인이 예수님을 “무당처럼 섬기며 복”을 빌거나, 예수님을 이용해 천국 가는 티켓을 얻는 것에만 관심을 두어 왔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아니라, 자기의 종교적 욕망을 채우는 것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로 장사를 해서 배를 불렸고, 지금도 예수를 따르기보다는 예수를 숭배하는 것에 만족하면서 소비 자본주의 사회의 논리를 더 추종하는 교회들이 가득합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예수를 제대로 믿고 구원을 받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그는 힘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대신 부드러우면서도 시원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처럼 참사랑과 올바름을 우리 가슴에 스며들게 합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에 마음을 두고, 꺼져 가는 등불을 보며 가슴 아파하는 사람,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으러 험하고 좁은 길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새벽 공기 가르며 홀로 하나님을 찾아 나서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십자가 죽음도 감당해 보겠다고 바보 같은 사람,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에게마저도 버림받는 그 철저한 외로움을 고독으로 승화시키며 감내하려는 사람입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며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이에게 하늘 양식을 먹이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빵 다섯 개를 가지고 모두가 둘러앉아 먹게 하고도 열두 바구니나 남게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찍어내는 사람에게도 향기를 피워내는 향나무처럼, 제자들의 배반과 사람들의 조롱과 지배자들의 폭력 앞에서도 용서를 말했던 사람, 가장 하찮아 보이는 사람에게서도 참으로 소중하고 고귀한 보물을 발견해 낸 사람, 수없는 실패 속에서도 결국은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확실하게 믿었던 사람입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에베소서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사람 가운데 살리셔서 예수님을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권 위에, 그리고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일컬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분이 되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을 자기 발아래 굴복시킬 권세를 지닌 분이시지만 그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이라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살아나려면, 우리의 신앙이 올바로 서려면, 우리는 바로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그에 대한 신뢰 속에서 그가 하신 사역을 회복하는 것에 더욱 집중해야 합니다.
1970년대 초 지명수배자가 되어 도망 다니던 시인 김지하가 쓴 희곡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김민기 선생이 만든 노래로 더 유명한 <금관의 예수>입니다. <금관의 예수>는 1973년 원주 가톨릭 회관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올려집니다. 연극에 등장하는 한센병 환자[당시 희곡에는 “문둥”으로 쓰여 있다.]는 술에 취해 금관을 쓰고 있는 예수상에 구토를 해 놓고, 신세 한탄을 하다가 예수상과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예수상이 갑자기 말을 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지만 이내 이 사람은 예수에게 끌려 그분의 말을 듣게 됩니다. 예수상이 말합니다.
[예수] “나는 너무나 오랜 세월을 이 세멘트 속에 갇히어 있었다. 답답하고 어둡고 적적한 이 세멘트의 감옥 속에. 나는 너처럼 착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었고, 또 함께 괴로움을 나누고 싶었느니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이 감옥에서 해방되는 날을, 해방되어 너희들 속에, 너희들의 그 불행 속에 내가 다시금 불꽃으로 살아 타오를 날을. 그런데 네가 왔다. 네가 가까이 와 내 입을 열었다. 내가 너에게 구원받았느니라.”
[한센인] “예수님, 누가 예수님을 감옥에 가두었읍니까? 그들이 누구입니까?”
[예수] “너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다. 오직 저희들만을 위하여, 저희들만의 신전에 나를 가두었다. 내가 너 같은 가난한 백성들에게로 가지 못하도록 그들은 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한다. 그러나 나의 이름으로 그들은 나를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는다. 그들은 나의 제자임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 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과 마찬가지로 이기적이고 의심이 많으며 의롭지 못하고 슬기롭지 못하다. 가난한 사람들의 굶주림을 외면하고, 박해받는 의로운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외침에 귀를 막는다. 그리고 그들은 세속의 안락과 부귀와 영예와 권세와 너무나 가까이 있다. 안락과 부귀와 영예와 권세에 너무나 가까이 있는 탓으로 그들의 귀에는 나의 말도, 너희들 가난한 백성의 외침도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들이 날 가두었다.”
[한센인] “예수님, 어찌하면 예수님이 해방될 수 있읍니까? 다시 살아나실 수 있읍니까? 어쩌하면 다시 살아나 저희들에게 오실 수 있겠습니까?”
[예수] “내 힘만으로는 안된다. 너희들이 나를 해방하지 않으면 안된다. 안락과 부귀와 영예와 권세를 가까이 하려는 자는 안된다. 저 홀로서만 천국에 들어가려는 자, 눈앞의 모든 백성들이 겪고 있는 비참한 불행을 외면하고 저 혼자서만 천국에 들어가려는 자는 안된다. 의롭지 못한 자도 안된다. 불의를 보고도 항거하지 않고, 오히려 불의에 몸을 굽히는 의롭지 못한 자는 안된다. 용기 없는 자는 안된다. 권력을 가진 악의 무리가 죄 없는 백성을 괴롭히고 착취하고 기만하고 억압하는데도 항거해 싸우지 못하는 용기 없는 자는 안된다. 기도만으로도 안된다. 기도와 함께 행동하지 않으면 안된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 그리고 너와 같이 가난하고 불쌍하고 핍박받으면서도 어진 사람들 밖엔 안된다. 네가 내 입을 열었다. 네가 내 머리에서 금관을 벗겨내는 순간 내 입이 열렸다. 네가 나를 해방하리라.”
[한센인] “예수님, 저는 힘이 없습니다. 제 몸 하나도 의탁할 곳이 없는 가련한 놈입니다. 제가 어떻게?”
[예수] “아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네가 할 수 있다. 너만이 날 해방하여 내가 너희들과 함께 이 세상에 하늘나라를 이룩하게 만들어 줄 사람이어라. 너의 그 가난, 너의 그 슬기와 어진 마음, 더욱이 불의에 대해 항거하려는 네 용기가 바로 그것이다. 자, 가까이 오라. 가까이 와, 네가 내 입을 열게 했듯이 내 몸을 자유롭게 하라. 이 세멘트를 벗겨내라. 내 머리 위엔 가시관으로 족하니라. 어리석고 탐욕한 자들이 외식을 즐기며 금으로 만든 관을 내 머리에 씌웠다. 금관이 속됨으로 나는 더럽혀지고 억눌리어 말조차 못하는 것을 네가 해방했다. 내겐 금이 필요 없고 네겐 금이 필요하다. 금은 네가 가져가 네 벗들과 함께 나누어라.”
사랑하는 생명 사랑 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과연 우리는 진정으로 예수를 믿고 따르고 있을까요? 제가 나이는 얼마 먹지 않았지만, 반백의 나이를 살면서 절대 후회하지 않는 저의 선택은 바로 예수님과 평생을 동행하기로 한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님이 제게 “그대는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정말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다”라고 대답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깊이 알고, 그분을 내 맘속에 모시고, 그분이 하신 일들을 해 나가고, 그분이 함께 했던 이들을 찾아가고, 그분이 친구 했던 이들과 친구가 된다면, 또 그분과 함께 하나님의 기적을 맛보고, 그분과 함께 십자가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걷는다면, 그러면 여러분은 확실하게 구원의 삶을 사시게 될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만이 진정한 삶에 이르는 참된 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붙드십시오. 예수님을 닮으십시오. 그래서 작은 예수가 되십시오. 더 깊이 더 깊이 자꾸만 예수님을 파고 들어가십시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십시오. 그렇게 하신다면 결코 후회 없는 삶이 여러분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사랑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고백이 진실한 고백이 되도록, 거짓과 속임수가 없도록 주님만을 참 스승이요, 구원자로 모시고 살게 하여 주소서. 예수께서 하셨던 일들을 우리가 이어가게 하소서. “내가 한 일도 할 뿐만 아니라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확실하게 붙들게 하소서. 용기를 가지고 모험하며, 담대한 마음으로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담을 만난다면 함께 손잡고 넘어가게 하소서. 서로가 서로를 이끌어 주고, 밀어주고, 격려하면서 나아가게 하소서.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 그 어떤 풍랑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친구이시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거룩하시고 좋으신 하나님! 이 좋은 가을의 문턱에서 우리 모두를 주님의 전에 불러 모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때로 배고픔을 느껴 겸손할 수 있는 마음 또한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영의 양식을 주시고, 우리 맘에 진리를 향한 갈망을 주셔서 또한 감사합니다. 우리가 깨어 있는 마음으로 보고, 느끼고, 듣고, 접촉하는 모든 것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 우리가 때때로 참 견디기 힘든 시간을 보낼 때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넘어져도 일어날 힘을 주소서.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아시고 모든 것을 허락하신 주의 은총에 감사하여 오늘 우리의 삶과 예물을 드립니다. 우리는 야훼 하나님만으로 충분합니다. 드려진 예물은 꼭 필요한 곳에 써 주소서. 아프고 힘들고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쓰이고,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에게 쓰이고, 나약하고 지친 이들에게 위로의 복음을 전하는 데 쓰이게 하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히브리서 3장 1절).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말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십시오.
* 축도
이제는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돌보시는
성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생명사랑 교우들에게
지금 이 시간 전국에서 주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성도들에게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을
온 우주의 빛을 비추시고, 영원한 사랑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