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한문덕 목사] 교회를 다시 생각하다. – 2021년 6월 27일
열왕기상 18장 17-21절, 시편 141편 3-5절, 요한계시록 3장 1-6절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사람인가?]
오늘 우리가 읽은 열왕기상의 본문에는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사람인가를 놓고 아합 왕과 엘리야가 논쟁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아합 왕은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망친다고 말하고 있고, 엘리야는 아합 왕과 아합왕의 아버지인 오므리 왕의 가문이 이스라엘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간다고 말합니다. 엘리야는 지금 아합 왕이 주님의 계명을 버리고 바알 신을 섬긴다고 대놓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온 이스라엘 백성을 갈멜 산으로 모아달라고 하면서 아합 왕과 그의 부인 이세벨 왕비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바알 예언자들과 아세라 예언자들도 함께 불러달라고 요청합니다. 엘리야가 바알신을 섬기는 세력들과 한판 붙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갈멜 산으로 모인 백성들 앞에서 엘리야는 연설을 하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고 있을 것입니까? 야훼가 하나님이면 야훼를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나 백성들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였다고 오늘 성경은 전합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시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여러분은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다. 아합 왕일까요? 아니면 엘리야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누구를 더 지지할까요?
이스라엘이 왕정을 택한 이후 사울과 다윗, 솔로몬으로 이어지면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 공동체가 꿈꾸었던 평등의 이상이 위협받게 됩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평등보다는 강압과 독재 정치에 의한 국가적 발전을 도모합니다. 야훼 하나님 신앙에 따라 평등 정신을 지키려고 했던 실로 계열의 예언자 아히야는 에브라임 출신인 여로보암과 함께 군주를 두더라도 평등을 실현할 수 있는 체제를 꿈꾸며 르호보암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고, 10지파와 함께 북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됩니다. 그런데 평등의 이상이란 왕을 세우는 군주제와는 계속 불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잘 조율해서 국가를 이끄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들고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 매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갈라진 이후에 양 나라는 저마다 왕정을 포기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절대 왕권에 기초한 자국의 번영과 발전을 꾀하였습니다.
따라서 북이스라엘도 점점 강력한 군주의 힘이 작용하는 나라가 되어가고, 왕의 권력을 얻기 위한 계속되는 쿠데타로 인해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디브니 세력과 4년에 걸쳐 내전을 벌인 뒤에 왕에 오른 사람은 오므리였습니다. 그런데 오므리는 비이스라엘 계열의 용병출신 군 사령관으로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고, 왕 위에 오르자마자 야훼 하나님의 평등 정신을 단호하게 포기합니다. 그는 수도를 이즈르엘에서 사마리아로 옮기면서 사마리아 땅의 상당부분을 자신의 개인 사유지로 삼고 거기에서 나오는 생산력과 노동력으로 강력한 개인 부대를 양성합니다(왕상 16:21-24).
이런 방식으로 그는 영토 확장에 나서고, 페니키아 여러 성읍들과 상업동맹을 맺으며 강력한 힘으로 남왕국 유다마저 예속국으로 삼습니다(왕상 22:4). 이렇게 국제 무역에 참여하게 된 북이스라엘은 오므리 왕조 때에 막대한 부를 창출할 수 있었고, 평등주의 정신을 지닌 야훼 예언자들을 통제하고 왕권친화적인 바알 신앙을 백성들에게 주입하는 정책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런 정책은 일찍부터 어느 사회보다도 효과적으로 사유재산에 기초한 귀족체계를 만들고 활발한 국제 교류를 통해 부를 창출했던 페니키아에서 배운 것이었습니다.
오늘 열왕기상에 등장하는 인물인 아합이 바로 이 오므리의 아들이었고, 그의 아내는 페니키아 연합 왕국의 공주인 이세벨입니다. 아합은 아버지에 이어 왕이 된 후 겉으로는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 전통인 평등을 존중하는 것처럼 하면서도 실제로는 바알 신앙과의 혼합주의를 택하였습니다. 자신의 아들 이름을 여호람이라고 지음으로써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꾸미고, 야훼의 예언자들을 왕궁에서 지원하여 국사에도 참여하게 했습니다(왕상 22:5-12). 그러나 아내 이세벨은 적극적으로 귀족적이고 국제질서에 편승하는 바알주의 정책을 폅니다. 나봇의 포도원 사건은 바로 이런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회정치, 경제적 상황 속에서 오늘 엘리야는 아합왕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가 부강해지고, 국제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잘 사는 나라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바알 종교는 가진 자와 더 많이 가진 자를 대변하는 체제를 지원하였기에, 이스라엘 사회는 사회적 불평등과 갈등이 심화되었던 것입니다. 가뭄이 들자 사르밧의 과부의 집에는 밀가루 한 줌과 기름 몇 방울 남은 것이 전부가 되었다는 보도(왕상 17:8-12)는 겉으로 화려한 아합 왕의 통치가 당시 가난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치명적이었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르밧 과부의 딱한 사정을 목도한 엘리야는 아합 정권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아합에게 엘리야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야훼 신앙을 가진 이스라엘 전통 때문에 예언자를 함부로 죽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내버려 둘 수도 없었지요. 그래서 오늘 엘리야를 불러다가 이스라엘을 괴롭히지 말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예언자답게 오히려 아합 왕과 오므리 왕조 가문이 이스라엘을 망치고 있다고, 야훼 하나님을 저버리고 바알 신앙을 섬긴다고 비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아합 왕의 정책에 물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확하게 야훼 하나님을 택할 것인지, 바알을 택할 것인지 결단을 내리라고 질책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야훼 하나님을 따르는가? 아니면 바알을 따르는가?]
지금 전 세계적 역병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제사회 질서가 재편되는 가운데 우리나라도 상당히 영향력을 소유한 나라로 탈바꿈하고 있습니다. 경제 동물이라 불렸던 일본이 쇠락하면서 전 세계에 뻗어 있던 일본 기업들이 속속들이 철수하고, 그 빈자리를 메꾸는 과정에서 한국의 기업과 국가가 나서 주기를 바라는 나라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최초로 미국의 국가수반인 바이든 대통령이 문 대통령에게 국제 문제들을 함께 풀어가자고 제안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G7 정상회담에 참여하고, 이후 다양한 나라들의 정상들과 만나면서 우리나라의 국가 위상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코로나 정국은 세계적으로 빈부의 격차를 더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재난을 극복하고자 각 나라들은 돈을 풀었는데, 그 돈들이 골고루 가지 못하고 한쪽으로 쏠리는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들도 국제적 위상이 바뀌는가 하면 4차 산업혁명의 가속화로 인해 시대적 흐름에 올라탈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나뉘고 있습니다. 1, 2, 3차 산업혁명이 일어났을 때에는 기존의 1, 2차 산업과 직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기술을 배워 다른 직업군으로 편입될 수 있었지만, 이제 3차에서 4차로 접어드는 혁명은 기존처럼 직업의 이동이 쉽지 않습니다. 더 고차원적인 기술과 상당한 지식이 필요하고, 이 지식과 기술을 얻고 익숙하게 하려면 오랜 시간의 노력과 비용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사회는 가면 갈수록 소수가 모든 것을 쥐고 누리면서 다수를 지배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이런 시대에 교회는 어느 편에 손을 들어 주어야 할까요? 또 이런 시대에 교회는 어떤 목소리를 내고, 무엇을 해야 할까요? 교회가 바알 신앙에 손을 들어 주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의 세속주의에 물든 교회들은 교회의 성장과 대형화에만 몰두하겠지만, 그것은 분명 야훼 하나님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바알 신앙을 따르는 것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서야 하고, 평등 정신을 확고하게 지켜야 하고, 부의 편중을 막고, 모두가 상생하는 세상을 꿈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드는 사역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동안 한국교회가 야훼 하나님 신앙을 지켜내지 못하고 바알 신앙을 교회 안으로 끌고 들어왔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주님,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어울려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않게 해주십시오. 의인이 사랑의 매로 나를 쳐서, 나를 꾸짖게 해주시고, 악인들에게 대접을 받는 일이 없게 해주십시오. 나는 언제나 그들의 악행을 고발하는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시편 기자는 악한 사람들의 대접을 받아서 그들과 더불어 진수성찬을 먹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간구할 뿐만 아니라 악한 이들의 악행을 고발하는 기도를 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지향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과연 우리가 악한 이들의 악행을 제대로 고발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나요? 우리들도 진수성찬을 꿈꾸며 악한 것에 눈감아 준 것은 아닌지요?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대체로 자신의 평안과 안녕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에 물들게 됩니다. 자신의 안녕과 평안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잘못하는 이들에 대해서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이란 야훼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아끼시고 살피시는 이들을 돌보기 위해 위험도 감수하면서 모험의 길을 걷는 것이지만, 자신의 안녕과 평안만을 추구하는 이들은 절대로 그 길로 가지 않습니다. 자신이 손해 보려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위대한 사역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진정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기초로 하여 갈수록 심해지는 양극화를 막아내고, 제도적으로 정치적으로 좀 더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을 위한 세상을 만드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도 앞으로는 훨씬 더 적극적으로 선교활동을 해야 합니다.
선교하면 해외 선교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제가 말하는 선교란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난민을 주제로 하여 평신도 설교와 더불어서 생사썰전까지 했습니다. 여기에 참여하신 에코팜므 한 활동가는 그동안 자신들이 애써서 수고한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느낌을 받았다고 술회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환대와 관심이 사회 곳곳에서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돕고 격려하고 힘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선교하는 공동체가 되려면 그 전에 먼저 정말 예수님을 닮은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닮은 공동체가 되려면 예수님처럼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겠다는 다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짐과 결단 없이 신앙 공동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교회의 결정은 모두 성서와 교회 전통,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교인들의 신중한 고려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한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정말 우리가 결정하고 실행하는 일들이 성서적인가? 교회 전통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인가? 그리스도교 신앙에 기초해서 우리 전교우가 흔쾌히 동의한 일인가를 물어가며 교회의 사역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도 가끔은 살아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 같은 믿음, 실제로 움직이지 않고 잠자고 있는 믿음들이 있습니다. 장로 요한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깨어나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신앙공동체로 함께 살아가려면 함께 살아가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다시 생각한다]
오늘 설교 제목을 두고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우리 스스로 생각하는 교회는 또 어떤 모습인가요? 지난 주에 하나의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제목은 “안녕히 계세요, 하나님”입니다. 교회를 떠난 15세에서 23세의 청소년, 청년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었습니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오늘 설교 제목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동안 교회를 매우 긍정적으로, 좋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목사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를 본 이후 정말 교회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큐에 등장하는 어떤 청년의 한 발언이 제 마음을 깊이 울렁이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저도 어느 순간인가부터 심각한 고민거리로 제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청년이 말하기를 “하나님을 떠날 수 없어서 교회를 떠납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 만나러 교회 온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린이 청소년 청년들이 하나님을 떠날 수가 없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겠다는 것입니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사례들이 등장합니다. 그 사례들은 전부 교회 안에서 같은 교인들과 목회자들에게 받았던 상처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죽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숱한 사람들이 교회에서 자신의 입술에 파수꾼이나 문지기를 세우지 못하고, 신앙의 이름으로, 때때로 자신이 가진 편견과 왜곡된 열정으로 툭툭 던진 말들 때문에, 교인들을 대하는 잘못된 태도들 때문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 중에 일부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뭐라고 해야지, 교회 내에서는~~ 서열, 싸움, 계급 뭐 이런 게 없어야 하는데 그게 있는 게 너무 싫었어요. 왜냐하면 보통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근데 뭔가 이 교회에서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 더 가기 싫었어요.”
“교회는 사람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남을 잘 챙겨주고, 이렇게 가르치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교회도 똑같구나.”
“그러니까, 제가 교회를 떠나려고 마음먹었던 순간이 여러 번 있었어요. 특히 혼자 교회를 다니는 입장이다 보니까, 성탄 예배 같은 가족 행사나 예배가 있을 때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혼자 복도나 빈 예배당에 들어가 있었던 거로 기억해요. 저의 존재를 모두가 아는데, 그렇다고 제가 낄 수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분들은 보통 다 5년 이상 함께한 사람들이었고, 누구의 딸, 누구의 집사님이시고. 뭐 이런 식으로 뭔가 계속 얽혀 있는 혈연관계이다 보니까 제가 감히 그 사이에 낄 수가 없더라고요. 함께 있는데도 외로운 곳이라면 더 이상 거기 있고 싶지 않았어요”
“뭐 그냥 집에 있으면, 거의 모든 장로님들 아들분의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거든요. 정말 안부를 안 물어도 어떻게 살고 있는지 다 알게 되고, 그러면서 좀 비교를 당할 때가 많았죠. 너희 아버지가 장로님인데 그렇게 살아도 되냐? 엄마가 열심히 그렇게 교회를 다니는데 네가 이렇게 행동하면 되냐? 그런 말이 좀 제일 듣기 싫고, 교회가 확 싫어진 순간인 것 같고,”
“아마 사역을 제일 많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게, 반주를 했거든요. 제가. 그래서 교회의 모든 대예배 반주는 제가 맡고 있었고, 전화해서 ‘잠깐 와 줄 수 있니?’라고 하면, 또 ‘너밖에 없다’고 꼭 그 말을 붙이세요. 반주할 사람이 지금 너무 없어서, ‘너밖에 없어’라고 말을 하면 제가 또 어른들 부탁인데 거절하기도 힘들고,”
“아이돌들이 보면 자기 의지대로 맡는 스케줄이 거의 없잖아요. 저희도 거의 똑같았어요. 저희 의지대로 하는 사역이 없었고, 아이돌을 휘두르는 소속사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올 해 겨울 수련회에서도 저랑 친구 두 명이서, 중고등부의 모든 짐을 다 날랐거든요. 드럼이랑 키보드 그런 걸 날라서 설치를 했었는데, 그 때 저랑 친구가 손목이랑 허리가 안 좋은 상태였는데, 저희에게 맡기신 거예요. ‘무조건 이거 해, 무조건 이거 해’ 그런 게 많아서 그런 게 조금 강압적으로 느껴 진 것 같아요. 저희들끼리 속된 말로 인력사무소라고 불러요. 교회에서 저희를 착취한다는 느낌밖에 안 들었던 것 같아요.”
“무언가 많이 하고 있으면 신앙이 좋은 레벨처럼 그려져 있고, 아니면 낮은 레벨로 되어 있는. 사실 그렇게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이 되는 거잖아요. 잠시 삐긋하면 나는 그냥 레벨 낮아지는 거구나.”
“교회가 아니고 이벤트 회사에 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춤추고 워십하고 뮤지컬도 하고 이런 게 되게 많았었어요. 그 때마다 이제 이벤트. 진짜 이벤트 회사처럼 뭔가 준비를 하게 되고, 9시 예배에 찬양단, 방송부 하고, 11시 예배엔 주일학교 들어가서 교사하고, 저녁 예배땐 찬양단의 워십팀 하고, 당시에 저 스스로 온전히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 없었어요. 그게 하나님의 영광을 받는 거고, 다 나중에 하나님이 갚아 주실 거고, 다 네가 하늘의 상급 쌓는 거고, 그런 게 다 부질없다고 느껴졌었어요. 더 이상은 교회에 있고 싶지 않았어요.”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신앙공동체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유와 평등, 상호 배려와 존중,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그리고 가장 약하고 소외 받는 이들을 향한 자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덧 교회가 마치 세상의 회사처럼, 상처 주는 말이 무성한 곳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런 일들이 자행되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과연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 모두가 행복할 뿐만 아니라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떤 모습을 지닐 때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함께 와서 삶을 나누고 쉼을 얻고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요? 우리 교회가 우리들 자신에게 힘을 주고, 또 세상의 희망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 늘 ‘교회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도 함께 고민해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되고, 진정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고 애써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주님의 몸된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바른 신앙 위에 굳게 서게 하여 주소서. 교회의 모든 예배와 사역이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증거 하게 하여 주소서. 생명을 살리고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우리 교회에 드나드는 모든 교우들과 방문자들이 생기를 얻게 하시고, 삶의 희망과 활력을 되찾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입술에 파수꾼과 문지기를 세워 주셔서 사랑을 담아 아름답고 정확하게 말하게 하소서. 뒤에서 수군거리거나 흘기는 눈이 사라지게 하시고, 주님의 거룩한 영으로 깨끗해진 마음들만이 살아남게 하여 주소서. 하늘 위에 하늘이라도 주님을 모실 수는 없지만, 정성으로 예배하고 주님을 섬기려는 우리들 곁에 항상 함께 하여 주소서. 우리의 주님이시며 참된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주님을 송축하고, 우리의 입술로 당신을 찬양합니다. 세상의 온갖 유혹과 덫에서 자유롭게 하신 것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들고 나옵니다. 우리를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받으시고, 우리가 정성껏 준비하여 드리는 예물 또한 받아 주소서. 이 예물을 통하여 주님 영광 받으시고, 우리에게 하늘의 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새롭게 힘을 얻고 활기를 얻어 새로운 비전과 에너지와 충족함을 가지고 세상으로 기쁘게 나아가게 하여 주소서. 주님의 몸인 우리 생명사랑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사역인 생명, 평화, 정의의 삶을 감당하게 하시고, 늘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며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깨어나십시오. 악한 자들의 식탁에 함께 하지 마시고, 믿음을 굳게 지켜 야훼 하나님 편에 언제나 서십시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의 거룩한 친교가 참된 신앙공동체를 꾸려가려는 생명사랑교우들과 이 시간 전국에서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