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최민지 성도] 사랑의 증인이 되어서 – 2022년 7월 31일

사도행전 26장 12-18절

안녕하세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이렇게 단상에 나와 ‘설교’라는 것을 하려고 보니 준비의 과정부터 지금까지 어느 한 순간도 마음을 쉬이 먹을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매주 이 자리에서 성경 말씀을 전하고, 한 주 동안 말씀을 토대로 살아낸 삶의 내용을 긍정과 희망의 언어로 선포하는 것을 ‘설교’라 부른다면, 설교는 언제나 조금은 무겁고 어려운 일이겠거니 하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은 언제나 가깝고도 먼 애증의 대상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은 참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론 한없이 무거운 이름표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탓에 설교를 준비하다 문득문득 느닷없이 찾아오는 ‘나는 잘 살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도무지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에 빠져 한참 동안을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설교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다 괜히 부담스러운 마음이 찾아 올 때면 ‘그래, 삶을 나누고 오자’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설교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내려 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설교는 제 자신의 삶, 그 이상의 것을 전할 수 없을 테니 그저 진실하게 마음을 나누고 오자는 생각으로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다마스쿠스로 향하던 바울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두려움에 떨며 ‘주님, 누구십니까?’하고 묻는 바울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나타나신 이유를 설명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나타난 목적은, 너를 일꾼으로 삼아서, 네가 나를 본 것과 내가 장차 네게 보여 줄 일의 증인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처음 이 구절을 읽었을 때 저는 자연스레 ‘증인’이라는 단어에 눈길이 갔습니다. 증인이란 무엇일까요? 어떤 삶을 사는 것이 증인의 삶이 될 수 있을까요? 이어서 본문 18절은 이렇게 전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눈을 열어 주어서, 그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서고,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며, 또 그들이 죄사함을 받아서 나에 대한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들게 하려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저는 증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이 구절을 읽을 때면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오르곤 했습니다. 먼저는 증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열정이었으나 곧 뒤를 이어 ‘무겁다’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의 눈을 열어주고,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서도록 돕고,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며, 죄사함을 받아 거룩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로 들게 한다는 증인의 소명이 여전히 왜 이렇게까지 무겁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입니다.

증인으로서의 삶이 기쁘게 여겨질 땐 마음을 정돈하고, 남에게 친절을 베풀며, 누군가에게 내 것을 양보하고, 세상에 크게 욕심내지 않으며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마음이 풍족할 땐 이 모든 것들이 쉬이 가능했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이 증인의 삶이라는 것에 한 걸음 가까워진 듯 안전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언가를 행하거나 자격을 갖추어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언제나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인격적으로 성장시켜가고 싶은 욕망을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마음이 강퍅해지는 날이 찾아오거나 스스로에게 한없이 실망할 때면 증인으로서의 삶은 고사하고 모든 신경이 오로지 하나, 제 자아와 제 삶에 집중되곤 했습니다. 나는 내 자신 하나도, 나에게 주어진 이 삶조차도 온전히 책임지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거룩’이라는 말과 나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금방이라도 증인의 삶을 내려놓고 진정한 나 자신을 찾아 떠나고 싶은 마음에 휩싸이곤 했습니다. 나는 아직 나 자신조차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납득하지 않고서 내가 전하는 복음은 거추장스럽고 거짓된 것이 될지도 모른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알아가려는 시간은 대개 너무나 지난했고 고민하면 할수록 답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하나의 질문 앞에 무릎을 꿇고 절망하고 있을 때 예수님의 말씀이 다시 눈에 들어왔습니다. 오늘 본문 26장 16절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일어나서, 발을 딛고 서라.’

  •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거룩하고 성스러운 증인의 삶이 그저 큰 벽처럼 느껴질 때 절망에 좌절하지 않고 발을 딛고 서기 위해 저는 있는 그대로의 제 자신을 마주해보자고 다짐했습니다. 치장하지 않는 나, 부자연스럽게 애쓰지 않는 나. 그러나 그런 제 자신이 에고로 똘똘 뭉친, 하나님을 까맣게 잊고 사는 약하고 악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이 아닌, 예수님께서 나를 품어주셨던 한없이 부족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어느 한순간도 소중하지 않은 적 없던, 불가해한 사랑으로 풍요로운 제 자신을 돌아보기를 원했습니다. 진정으로 자유한 제 자신을, 제게 허락된 모든 자유 속에서도 제 영혼의 이끌림은 오직 한 분,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임을 신뢰하면서 말입니다.

영국 캔터베리대성당의 대주교이자 위대한 신학자인 로완 윌리엄스의 <인간이 된다는 것>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 자신 곧 내가 누구이고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더 깊이 파고 들수록, 나는 이미 파악되고, 호명되며, 관여되어 있음을 더 깊이 깨닫습니다. 내 자신 속을 아무리 깊이 파고든다 하더라도, 관계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추상적 자아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나는 비세상적이고 비역사적인 영원한 관심과 사랑,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

증인으로서의 삶은, 하나님의 복음과 나의 믿음을 누군가에게 전하기에 앞서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으로서 이 세상을 딛고 일어서는데서 시작됩니다. 어느 누구도 증인으로서의 나의 삶을 대신할 수 없으며 주님께서 우리가 살길 원하는 삶이란, 억지 친절과 텅 빈 언어, 무거운 억압과 거짓 자유와는 거리가 먼, 진짜 나 자신이 베푸는 진정한 사랑, 진실 된 언어, 한계 없는 자유 속에서 한없이 기쁨을 누리고 행복해 하는 삶일 것입니다.

그것은 애써 내가 지어낸 사랑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온, 영원히 고갈되지 않는, 어느 한 순간도 나를 메마르게 하지 않는 주님의 사랑으로 가능한 충만하고 복된 삶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일은 하나님과 분리된 내 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 아닌 내 존재 저 뿌리 깊은 곳에서부터 연결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는 일입니다. 이 길의 끝에서 우리는 마침내 내 영혼의 안전함을 느끼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안식할 수 있게 됩니다. 자아를 찾아가는 일은 내 존재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나의 시작과 끝에 모두 계신 주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안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위스의 소설가인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 누구도 내가 되기를, 나는 원하지 않는다. 오직 나만이 나를 견뎌낼 수 있기에. 그토록 많은 것을 알고, 그토록 많은 것을 보았으나 그토록 아무것도, 아무 것도 할 말이 없음이여.”

증인으로서의 삶은 먼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 자신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직시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들여다보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쉴 새 없이 악하고 한없이 연약한 나 자신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벌거벗은 채로, 아무 것도 없이 주님께 나아갑니다. 내 존재의 미약함을 바로 알고 주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증인의 삶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바로 그 곳, 그 순간에 시작됩니다.

  •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나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는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갑니다. 나의 결핍과 갈증이 해소된 뒤에 우리의 눈은 점차 밖을 향하게 됩니다. 내가 주님으로부터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졌듯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자 하는 마음이 내면의 저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옵니다. 이 때 우리의 마음은 애써서 나를 깎아가며 힘들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마를 새 없이 흘러나와 내가 아닌 누군가를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됩니다.

진정한 사랑은 어디서부터 시작될까요? 어떤 사랑을 경험할 때 우리는 안전함을 느끼나요?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님 앞에서 무언가가 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나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조건적이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내가 받아들여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시작이자 또 전부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처음 주님을 만나던 순간을 떠올려봅니다. 그것은 내 존재의 온전한 ‘받아들여짐’이 아니었나 짐작해봅니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던 내 내면의 깊은 상처와 치부까지 전부 들여다보시는 주님, 나조차 알 수 없던 나를 발견하고 어루만져 주시는 주님. 그 한없는 사랑 앞에 우리는 영혼의 안식을 찾고 그 사랑에 감사하며 증인의 삶을 살기로 다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받은 사랑을 어딘가에 전하고 싶어집니다. 그렇게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고, 나의 삶과 타인의 삶 모두에 깊이 관여하시는 주님을 느끼며, 우리 모두가 보이지 않는 주님의 사랑으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서로의 삶에 증인이 되어줍니다. 사랑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걷는 삶, 예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삶, 그것은 깊고 진실한 사랑의 삶입니다. 우리가 증인의 삶을 생각할 때 쉬이 떠올리는 어둠과 빛, 죄사함, 거룩과 같은 무겁고 진중한 언어 이전에 우리는 사랑의 증인이 되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주는 사랑. 우리가 경험했던 그 사랑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우리 모두가 그 사랑 안에 있으며,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주님의 사랑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매순간 기억하며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삶을 긍정하고 신뢰하기

세상은 온통 불확실한 것들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매일 불안정합니다. 오늘 진실이라 믿었던 것이 내일이 되면 거짓으로 밝혀지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고, 오늘 내 곁을 지키던 사람이 내일이면 세상에서 가장 먼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고 약속할 수 없는 곳에서 우리는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진리, 예수님의 사랑을 따라 살기로 결단함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증인으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 살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것들을 하며 살아야 할지 막막해질 때, 오늘 내가 굳게 믿었던 것이 돌연 내일이면 예측할 수 없는 거짓으로 드러날까 두려울 때, 그래서 딱딱하게 마음이 굳어 나 자신도, 타인도, 세상도 사랑하기 어려워질 때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증인으로 사는 삶이 막막하고 버겁게 느껴질 때나 성스럽고 거룩한 것들이 내게서 너무 멀게만 느껴질 때 우린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스위스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이자 저명한 신학자인 한스 큉은 <나는 무엇을 믿는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 홀연히 나에게 명료해진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이 삶의 문제에서는 근본적인 모험이, 신뢰라는 모험이 나에게 요구된다는 것이었다. 그건 느닷없는 도발이었다. 긍정을 감행하라! 허무주의나 냉소주의의 옷을 걸친 바닥 모를 불신 대신 이 삶, 이 현실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를 감행하라! 삶에 대한 불신 대신 삶에 대한 신뢰를 감행하라. 너 자신에 대한, 다른 인간들에 대한, 세상에 대한, 불확실한 현실 전반에 대한 원칙적 신뢰!”

우리는 끊임없이 나 자신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싶어 합니다. 믿어지지 않는 상태와 알 수 없는 현실을 견디기 힘들어 하며 계속해서 질문하지만 끝끝내 우리가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실망하고 좌절하며 회의와 냉소에 빠지기도 합니다.

증인으로 사는 삶이란 이 모든 불확실함 속에서도 신뢰를 잃지 않는 삶입니다. 확실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불확실성 앞에서도 나는 당신을 신뢰하고 당신께로 나아간다는 고백이 증인된 삶을 사는 우리의 결단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리스도인은 온통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합니다. 증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증인이 되려고 합니다. 이 이상하고 납득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확신하는 삶, 증인이 된 우리는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아가기로 매순간 결단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서로의 증인이 되어주며,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마치며

설교를 맺겠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이 마냥 쉬웠던 적은 한순간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내가 믿는 것을 옳은 것이라 믿게 되는 무지를 두려워하고, 결코 다가갈 수 없을 것 같은 하나님의 전능함이 우리 삶의 작은 부분까지 파고들 수 있을까 의심하며, 여전히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만, 우리는 모두 언젠가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을 고백했던 순간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설사 죽는 날까지 끊임없이 노력하고 좌절해야 하는 삶일지언정 증인으로서의 삶을 결코 포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증인으로서의 삶은 하나님과 연결된 나의 존재를 마주하는 삶이고, 나아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이며, 신뢰를 가지고 나에게 주어진 인생에 대한 긍정을 감행하는 삶입니다. 삶의 모든 순간 구석구석에서 나와 타인, 그리고 이 세상 전부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삶, 그것이 바로 증인으로서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