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이정훈 목사] 너희는 이웃을 찾아라, 그리하면 살리라 – 2022년 6월 19일

누가복음서 15장 25-37절

한국 사회와 교회의 접점이 거의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전처럼 ‘민주화’니 ‘계급해방’이니 하는 의제를 놓고 사회와 교회가 함께 고민하는 시대가 지나갔다는 뜻입니다. 속된 말로 사회와 교회가 서로의 갈 길이 다르고 제각기 길을 걸어가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그러던 중 접점이 아니라 첨예한 대척점이 생기는 사안이 발생했습니다. 차별금지법을 둘러싸고 일어난 현상입니다. ‘일부’라고 하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아서 이런 단어조차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요, 사회 대다수의 사람들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찬성하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한국 교회 대다수는 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한국 교계에서 소위 신앙심 깊고 투철하기로 소문난 몇 개 교단이 연합해서 기자회견까지 열고 반대의 목소리를 분명히 했습니다.

왜 이럴까 하는 분석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속만 답답해지니 그렇습니다. 다만 한 가지 재미있다고 해야 하나, 그런 현상이 하나 있는데,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잘 들어보면, 이 차별금지법을 동성애와 곧바로 연결시킨다는 점입니다. 즉 “차별금지법은 동성애 찬성법이다.” 하는 식입니다. 차별금지법의 내용을 모르고 그러는 것인지 알면서도 정치적 효과를 위해 저러는 것인지 알송달송 합니다.

인터넷 검색만 해봐도 차별금지법이 동성애 찬성법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을 텐데 왜 그럴까, 왜 저렇게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을 펼칠까 하는 의문만 쌓여 갑니다. 짧게나마 말씀드리자면, 차별금지법은 저 같은 장애인, 즉, 그것이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어떤 것으로 인해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차별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분명한 선언입니다. 만연해 있는 차별을 해소하는 방법을 개개인의 양심이나 품성에 맡겨두지 않고 법제화 하는 작업입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자 교계와 사회 중간 어디쯤 존재하는 신문사의 편집장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저는 고민할 수밖에 없는 부분입니다. 고민한다고 뾰족한 해결책이 보이는 것도 아니지만 고민의 끈을 놓을 수 없습니다. 그런 고민의 연장선에서 교회의 부르심을 받아 설교해야 하는 상황이라 오늘 본문을 선택했습니다.

함께 고민할 누가복음 10,25-37 말씀은 너무도 유명한 본문입니다. 이른바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라고 일컬어집니다. 다만 요한복음서를 제외하고 공관복음서에서 비유가 대부분 ‘하나님 나라’와 관련되어 등장하는 것에 비해 이 사마리아 사람 비유는 하나님 나라라는 문구가 없어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예화’라고 부르자고 합니다. 그래서 저도 이번에는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어쨌든 이 본문은 내용 자체가 어렵지도 않고 메시지도 분명해 보입니다. 특히 ‘새번역’으로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여라”는 37절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실천까지 명령하고 있어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불끈하게 만드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그래 저렇게 살아야지 하는 굳은 결심을 하게 만듭니다.

이런 본문에 대해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싶기도 하지만 설교 본문을 정하고 고민하다가 이 본문에 대한 설명보다 이 누가복음 본문을 우리 시대에 다시 쓴다면 어떻게 쓸 수 있을까 하는 얼토당토 안 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각색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차별금지법, 더 좁게는 동성애자로 지칭되는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극심한 한국 교회 상황을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러고 나니 분문을 쉽게 다시 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설교문을 거의 다 써놓고 제 설교가 이상한 점은 없나 하는 마음에 여러 책들을 참고하고 보니 특이한 책이 두 권 보였습니다. 첫 번째 책은 스승님께서 저술하신 책인데 스승님께서도 이 본문을 각색하셨습니다. 스승님은 ‘율법교사’를 그 옛날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렸다.’고 하는 ‘안기부 요원’으로 각색하셔서 웃었습니다.

또 한 권의 책은 1960년대 말 ‘클라렌스 조던’(Clarence Jordan)이라는 한 미국 신학자가 자신의 책, 『The Cotton Patch Version of Luke and Acts』, 즉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면화 농장 번역본” 쯤으로 번역할 수 있는 책에서 사마리안 사람을 흑인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책이 1969년도에 출간되었으니, 이 책은 60년대 미국 남부 지방의 흑인 노예 노동의 대표적 공간이었던 면화 농장을 중심으로 사회 곳곳에 광범위 하고 뿌리 깊게 퍼져 있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상황을 배경으로 각색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두 책을 참고하고 나니 제가 아주 이상한 일을 한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습니다.

어쨌든 설교를 녹화하고 있으니 제가 각색한 본문을 영상 편집자께서 화면에 띄워주시리라 믿고 제가 천천히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5 신학대학교에서 구약성서를 가르치는 한 교수가 선생을 시험하기 위해 일어나 말하였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그리스도인들이 받기로 되어 있는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26 선생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구약에는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교수님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습니까?”

27 그가 대답하였다. “‘아하브타 에트 아도나이 엘로헤이카 베콜-레바브카 우베콜-나프쉐카 우베콜-메오데카’라고 하였고, 또 ‘아하브타 레레아카 카모카 아니 아도나이’라고 하였습니다.”

28 선생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역시 구약을 가르치는 교수님이라 히브리어를 잘 아시는군요. 교수님의 대답이 옳습니다. 그대로 행하십시오. 그러면 살 것입니다.”

29 그런데 그 구약 교수가 땅에 떨어진 자신의 명예를 되찾고 자기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선생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30 선생께서 응답하여 말씀하셨다. “한 도시에서 퀴어축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 축제는 저녁이 다 되도록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가까운 여러 교회들의 교인들이 퀴어축제에 반대해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도로 사거리에서 서로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화가 난 교회들의 교인들이 퀴어축제 차량을 막아서고 심지어 어떤 교인은 축제 차량의 바퀴 아래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순식간에 도로 사거리는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경찰들이 제지에 나섰지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던 중 한 교인이 인파에 밀려 골목 한 쪽까지 휩쓸려갔고 사람들에게 밟히고 쓰려졌습니다.

31 마침 어둑어둑해지는 시간에 퀴어축제 반대 기도회를 인도했던 목사가 자신의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쓰러진 사람을 보았지만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 목사는 속으로 ‘저 사람은 퀴어축제에 참여한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2 이와 같이, 쓰러진 교인을 태우고 왔던 교회 승합차가 지나가는데 그 승합차 안의 모든 교인들도 쓰러진 그 사람을 보았습니다. 승합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자신의 교회 교인인지 알아보지 못했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33 그러나 퀴어 축제에 참여했던 한 트렌스젠더 남자가 자신의 차를 타고 가다가, 그 교인이 쓰러져 있는 곳에 이르러, 쓰러진 그 교인을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34 그 트렌스젠더 남자는 차에 있던 구급상자를 가지고 내려, 상처가 난 곳에 소독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여 주고, 자기 차에 태워, 가까운 모텔로 데리고 갔습니다. 퀴어축제에서 일어난 충돌로 그 도시의 병원 응급실마다 가득찼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라 급한 마음에 친구인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 쓰러진 교인을 살펴보라고 부탁했습니다. 트렌스젠더 남자의 친구인 산부인과 의사는 큰 부상은 없는 것 같지만 내일까지 지켜봐야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35 다음날 트렌스젠더 남자는 출장을 가야했고 그의 친구 산부인과 의사는 출근을 해야 했던 터라 그 트렌스젠더 남자는 모텔 주인에게 오일치 숙박비를 계산하고, 말하기를 ‘이 사람이 깨어날 때까지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하였습니다.

36 교수님은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다친 교인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십니까?”

37 그가 대답하였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선생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셔서, 교수님도 그와 같이 하시면 됩니다.”

* 트렌스젠더 남자는 출장을 떠났고 그의 친구 산부인과 의사도 출근하고 난 후 점심 때가 넘어 쓰러졌던 교인이 일어났다.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주위를 둘러보다가 자신이 모텔 방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속히 옷을 챙겨 입고 모텔 주인을 찾아가 물었다.

“사장님, 저를 이곳까지 데리고 온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아, 이 동네에서 착하기로 소문난 트렌스젠더 남자에요. 어제 병원 응급실마다 가득차서 그 트렌스젠더 남자가 자신의 친구인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 상처를 보도록 해주었지요. 그리고 숙박비를 오일치나 주고 갔죠. 부족하면 출장에서 돌아오면서 더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상처 입은 교인은 망연자실해 했다.

성서 본문을 그대로 인용한 부분은 헬라어 단어 원뜻을 충실하게 살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나머지는 상상력을 동원했습니다. 이렇게 각색해서 읽어보면 이야기의 원래 뜻과 같이 ‘성소수자도 이웃이다. 자비를 베풀어라.’, ‘성소수자를 차별하지 마라.’는 뜻으로 읽을지 모르겠습니다. 윤리적 문제와 그 실천으로 직결되어 보입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본문에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이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의 시작점 자체가 윤리를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왜 이 이야기가 등장하게 되었을까 하는 점을 생각해 보면 윤리적 관심과 실천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촉발시킨 것은 율법교사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는 질문이었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그 질문에 직설적으로 답변하지 않고 되질문한 것을 율법교사가 자문자답 하면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가 등장했다는 점입니다.

이 율법교사의 질문에서 눈여겨봐야 할 단어가 두 개 있습니다. 먼저는 한글 성서의 “얻겠습니까”라고 번역된 단어입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영어로 잘 번역했다고 칭찬 받는 영어 성서인 NASB, NIV, NRSV 뿐만 아니라 가장 최근 번역 성서인 ESV까지 이 단어를 모두 ‘inherit’라고 번역했습니다. 헬라어 ‘클레로노메소(κληρονομήσω)’의 번역어로 ‘inherit’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클레로노메소’ 뿐만 아니라 영어 단어 ‘inherit’는 ‘유업이나 유산을 받는다’는 개념입니다. 부모나 조부모 혹은 집안대대로 내려져 오는 어떤 것을 자신이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집안사람도 아닌데 누군가 그 집안의 유산을 받는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됐다가는 막장 드라마가 됩니다. 즉 율법교사가 이야기 한 ‘영생을 얻는다’는 개념은 이미 유대 사람이라는 범위 안에서 사고되고 있다는 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는 것이 성립됩니다. 요즘 말로 ‘답정남’이 답을 이미 손에 들고 있고 ‘어떻게 대답하나 보자’ 하는 심보로 물어본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예수님이 되물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답 잘못하면 돌 맞아 죽을지도 모를 상황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이야, 저게 뭘 좀 아는 줄 알았는데 아무 것도 모르는 인간이네. 그리고 율법도 모르는 인간이네.’ 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영생”(ζωὴν αἰώνιον), 즉 ‘조엔 아이오니온’입니다. 우선 신약성서를 제외하고 구약성서의 영생 의미를 살펴보면, 좁게는 ‘장수’의 의미와 넓게는 ‘죽음을 겪지 않는 생명’입니다. 시편 21,4과 61,6절에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또 한편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경지에 있는 복(福)이며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시편 133,3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약 개념에 더해 팔레스타인 지역 외에 그리스 문화권 아래 있던 다른 지역의 헬라적 유대교에서는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 영혼불멸에 대한 신앙으로 발전합니다. 종전에는 죽음 후에 부활로서 영생이 시작되었다면, 이제는 죽지 않는 영혼이 죽을 육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부터 영생이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개신교나 가톨릭에서나 모두 경전으로 여기지 않는 ‘마카베오 4서’ 15,3; 16,25; 17,12; 18,19에 나타납니다.

이런 헬라적 유대교의 영생 개념은 팔레스타인 유대교에서도 종종 부분적으로 발견됩니다. 즉 의로운 자의 영혼은 죽음과 함께 동시에 천상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고 그 중간에 영생을 이미 얻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이에 육체는 여전히 무덤에서 쉬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날에 무덤에 머물러 있던 모든 육체들은 깨어나게 되고 영생의 완전한 행복을 경험하기 위해 영혼과 다시 결합하게 된다고 여겼습니다. 사도 바울의 개념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구약성서와 예수 시대 사이에 영생 혹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율법에 순종하고 혹은 도덕적인 삶을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에게 미래의 영생이 선물로 주어지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율법에 충실한 사람들이자 율법을 성실하게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개념으로 가득 차 있던 율법교사는 그래서 무엇을 ‘해야’(ποιήσας) 영생을 얻을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영생을 얻는다는 것 자체에 영생을 얻는 행동 혹은 실천의 의미가 이미 내포된 개념입니다. 율법의 준수가 영생의 길이라는 점을 율법교사는 분명했습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예수님도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저 ‘옳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전제들이 있어야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가 충격일 수 있습니다. 유대 사람과 사마리안 사람 사이의 역사적 적대 감정만으로는 풀어낼 수 없는 부분입니다. 영생은 유대 사람이 율법을 충실하게 실천해야만 받는 것인데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도 영생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놀람과 충격이 가해지는 것입니다. 그것도 ‘야웨 신앙도 모르고 유대 사람도 아닌 원수 같은 천한 사마리아 것들이?’ 하는 격정적인 감정까지 올라올 수 있는 부분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영생이 아브라함 자손도 아니고 야웨 신앙 없이도 원수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면 가능하다는 거야?’ 하는 거대한 물음까지 동반하게 됩니다. 이에 대한 대답에 예수님의 답변을 고려한다면 적어도 그렇다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족보니 준비된 유산이니 이런 거 다 소용없다는 말과도 등치 관계에 놓입니다.

또 하나, 누가복음에 전혀 언급도 없고 그렇게 각색할만한 실마리도 없는데 제가 사족처럼 달아놓은 부분에 대한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부분은 그야말로 소설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 트렌스젠더 남자는 출장을 떠났고 그의 친구 산부인과 의사도 출근하고 난 후 점심 때가 넘어 쓰러졌던 교인이 일어났다.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주위를 둘러보다가 자신이 모텔 방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속히 옷을 챙겨 입고 모텔 주인을 찾아가 물었다.

“사장님, 저를 이곳까지 데리고 온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아, 이 동네에서 착하기로 소문난 트렌스젠더 남자에요. 어제 병원 응급실마다 가득차서 그 트렌스젠더 남자가 자신의 친구인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 상처를 보도록 해주었지요. 그리고 숙박비를 오일치나 주고 갔죠. 부족하면 출장에서 돌아오면서 더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상처 입은 교인은 망연자실해 했다.

저는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읽으며 늘 상상했던 것은 강도당해 쓰려졌다가 여관에서 깨어났을 때 그 강도당한 사람은 어떻게 느꼈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예수 시대에 여관은 현재의 모텔과 같은 곳은 절대 아닙니다. 어떤 학자는 “늘 몸을 팔 준비가 되어 있는 여성들이 득실거리는 ‘사창가’”라고 서술한 주석도 보았습니다. 어쨌든 깨어나 보니 여관이었고 자신이 도대체 어떻게 여기에 와 있는지, 누가 데리고 왔는지, 상처에 포도주를 발라주고 싸매준 사람이 누구였는지 대해 궁금해 하지 않았을까요. 저라면 신세 갚고 싶어서라도 여관 주인에게 물어봤을 것 같습니다.

예수 시대의 사회상을 재구성했던 학자들에 의하면 유대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얼굴 생김새부터 옷차림까지 다 달랐다고 합니다. 학자들의 이런 이론뿐만 아니라 복음서 곳곳에 이런 언급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여관 주인은 실신한 사람을 나귀에 태우고 온 장본인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봤을 것이고 실신해 있었던 사람은 유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깨어난 강도 만났던 사람이 여관 주인에게 누가 자신을 여기까지 데리고 왔냐고 물었을 때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상상해 보면 강도 만났던 사람은 얼마나 충격이었을까요. ‘원수 같은 사마리아 출신 인간이?’ 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저는 강도 만났던 유대 사람은 이후에 사마리아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을까 하는 부분도 늘 궁금해서 상상을 하곤 했습니다. 즉 강도 만났던 유대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웃으로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제 개인적인 상상이지만, 저는 강도 만났던 유대 사람은 이후로도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속된 말로 이런 것입니다. ‘생명을 구해줘서 고맙기는 한데 그래도 이웃으로 생각할 수는 없지.’ 했을 것 같습니다. 혹시나 강도 만났던 유대 사람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그래, 어디 가서 사마리아 사람이 구해줬다고 말은 못해도, 대놓고 고마워하거나 이웃으로 지내지는 못해도, 나를 돌봐줬던 사마리아 사람이 같은 처지에 있게 된다면 나도 그와 같이 해주기는 해야겠다.’ 하지 않을까요. 정말 개과천선 한다면 말입니다.

강도 만났다가 깨어난 유대 사람에 대한 과도하고 못된 상상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강도당하는 사건은 흔한 일이었으니 아마도 실존 인물이었을지도 모를 저 유대 사람은 어쩌면 깨어나 큰 깨달음을 얻고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웃으로 생각하며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랬기를 속으로 응원합니다.

저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고 성소수자에 대해 차별과 혐오를 드러내는 한국 교회 교인들이 개과천선 하지 못한, 제 상상 속의 유대 사람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구해줘서 고맙기는 한데 동성애자가 내 이웃은 아니지’ 하는 모습 말입니다. 이 역시도 과도한 상상일지도 모르지만 현재 한국 교회 현상만 살펴보면 그렇게 과도해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성소수자와 관련해 ‘그들의 영생에 대해 우리가 이러쿵저렁쿵 해봐야 그거 다 우리 생각이지 하나님의 생각과는 다르다.’입니다. 속된 말로 원수 같고 더러운 죄인인 성소수자들이 영생을 받지 못한다고 우리가 아무리 떠들어봐야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코웃음치실지도 모릅니다.

요나서 4장 10-11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하시면 아무리 악다구니를 써봤자 소용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결론까지 이르고 보면 몇 가지 반론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럼 행위로 영생을 받을 수 있다는 거야?’ 하는 반론 말입니다. ‘그건 가톨릭에서나 하는 말이지’ 하는 이야기까지 나올 수도 있겠네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이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영생을 받는 거지, 무슨 행위로 영생을 받는 데?!’ 하는 목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영생 받는데 있어 또 하나의 필수적인 요소에 대한 부분은 이어서 등장하는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라고 주석가들은 주장합니다. 율법교사가 제기한 질문에 대해 자문자답적인 1차적 결론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라는 구절에서 ‘이웃 사랑’에 대한 모범이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이고 ‘하나님 사랑’에 대한 예는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만약,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를 ‘하나님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읽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한 결론에 이를지도 모릅니다. 본문이 시작된 영생 문제의 해답이 이웃 사랑 실천으로 끝나버리고 마니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이웃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이라고 환원시키면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를 하나님 사랑의 예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읽지 않는다면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는 너무 뜬금없는 본문이 되어 버립니다.

이 부분은 담임 목사님과 교우 여러분들의 몫으로 남겨 둡니다.

이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한계와 범위를 넘어서는 이웃 사랑 실천은 영생을 얻기 위한 필수적인 길임을 기억하시는 교우 여러분이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