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이영미 목사] 100개의 기도, 우리가 구할 것은? – 2024년 11월 3일 추수감사주일

신명기 11장 8-15절, 마태복음서 6장 31-33절

  1. 들어가는 말

오늘은 창조절 열째주이면서 추수감사예배 주일입니다. 교회마다 추수감사예배는 전통이나 교회력 등을 따라 지키는 시기가 조금씩 다르지만, 농촌교회도, 어촌교회도, 도시교회도 추수감사예배 때면 강단을 추수한 농작물로 장식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촌교회에서는 창의력을 발휘해서 건어물로 강단을 꾸며보는 것을 생각해본 적도 있습니다. 그 교회 교인들이 농사를 짓고, 안 짓고를 떠나서, 추수감사예배의 강단을 땅의 수확물로 장식하는 점은 인간의 생명이 땅에 의존하고 있다는 근본적인 진리를 보여줍니다. 21세기 최첨단 문명의 발전에도 우리는 땅이 제공하는 먹거리와 물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의 창조 본문은 땅과 인간의 상호적 관계를 잘 보여주는데, 인류는 창세기 1:28의 “땅을 정복하라”는 문구 하나를 뻥튀겨가며 인간의 땅에 대한 주도권을 과장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땅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은 땅에 의존된 아니 종속된 존재입니다. 인간이 땅으로부터 만들어졌고, 땅이 내는 소산물로 생명을 이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땅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느냐는 생존 그 자체와 삶의 행복도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문제입니다.

  1. 욕망의 땅 vs 약속의 땅 (신명기 11:10-12)

오늘의 구약 본문은 이스라엘이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탈출하여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 그 곳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이 어떠한 곳인지, 그리고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설교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두 개의 땅을 비교합니다.

이집트 땅

약속의 땅

10 당신들이 들어가서 차지할 땅은 당신들이 나온 이집트 땅과는 다릅니다. 이집트에서는 채소밭에 물을 줄 때처럼, 씨를 뿌린 뒤에 발로 물을 댔지만,

11 당신들이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는 산과 골짜기가 많아서, 하늘에서 내린 빗물로 밭에 물을 댑니다. 12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몸소 돌보시는 땅이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눈길이 해마다 정초부터 섣달 그믐날까지 늘 보살펴 주시는 땅입니다.

두 땅이 대비되는 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집트 땅은 발로 물을 대지만, 가나안 땅은 하늘에서 내린 빗물로 물을 댑니다. 둘째, 직접적인 대조는 안 나오지만, 이집트 땅은 파라오 왕이 노예노동을 통해 관리하는 땅이라면, 약속의 땅은 하나님이 몸소 돌보시는 땅입니다.

여기서 대조되는 초점은 무엇일까? 얼핏 보면 이집트 땅은 평지이고, 나일강의 퇴적물을 바탕으로 한 옥토이고, 가나안 땅은 산과 골짜기인데다가 비도 많이 내리지도 않고,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물을 담아둘 수 없는 척박한 땅이라는 자연환경 조건이 대비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약속의 땅을 더 좋은 곳으로 묘사하려는 목적이 있음을 고려한다면 자연환경이 대조의 초점은 아닐 것입니다.

모세가 말하는 실제적인 대조의 초점은 농업환경이 아니라 그 땅을 살아가는 사람과 땅의 관계입니다. 요약해서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한 곳은 욕망과 독재의 땅에서 인간이 착취당하는 곳이요, 다른 한 곳은 언약이 기초가 된, 모두가 배부른 평등의 땅입니다. 욕망은 소유와 경쟁을 통해 쟁취되지만, 약속은 책임과 절제를 통해 지켜집니다. 이집트 땅은 옥토에서 농사를 지어 풍성하지만, 인간의 탐욕으로 부가 왕과 귀족에게 집중된 억압과 착취의 제국의 땅입니다. 가나안 땅은 척박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의(계명)를 중심으로 살아가기를 약속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돌보아 주시는 축복의 땅입니다. 모세는 성장과 번영에 초점이 맞춰진 욕망의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모든 이들이 차별받지 않고 존중받는 평화의 땅이 바로 약속된 축복의 땅이며, 그 약속의 땅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들어가는 너희가 하나님과의 약속(계명)을 지킴으로써 만들어가라고 선포합니다. 그 약속은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12지파가 서로의 영역이나 성과를 독점하지 않고 분배정의를 이루겠다는 평등부족공동체의 형성으로 이어졌습니다.

3천여 년 전 선포된 모세의 설교가 농사를 짓지 않는 교인이 대다수인 생명사랑교회와 같은 현대 도시교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저는 모세가 제시한 두 땅의 대조를 통해 복음의 씨앗을 품은 땅으로서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자세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1. 1027 광화문 집회와 100개의 기도(1027의 기도 vs 여성들의 기도)

지난 주일은 제 507회기 종교개혁주일이었습니다. 교회개혁은 마침표가 찍혀진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계속된다는 의미로 507주년이 아닌 507회기로 표현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개혁의 주체인 개신교인은 끊임없이 회개하고 저항하는 자, ‘프로테스탄트’로 살아가야 할 것임을 다짐하는 날이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는 참된 자세일 것입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2024년의 종교개혁주일에는 광화문에서 한국교회총연합, 한국장로교총연합회 등 주요 연합기관과 여의도순복음교회, 사랑의 교회 등 대형교회가 주도한 2백만 연합집회가 ‘예배’라는 이름으로 열렸습니다.

1027 집회를 위해 작성된 <대한민국 복음의 역전을 이루는 연합예배를 위한 100대 기도제목>의 시작은 1. “1027 한국교회 연합예배 밑 큰 기도회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모든 성도가 한마음 한뜻으로 모일 때에 건강한 가정이 회복되고 거룩한 나라가 재건되게 하옵소서.”입니다. 첫 번째 기도 제목은 이 대회가 추구하는 모토가 ‘건강한 가정, 거룩한 나라’로 표방된 점과도 일치합니다. 남녀의 결혼과 자녀가 있는 가정을 소위 건강한 가정의 기준으로 삼아 이어지는 ‘100개 기도 제목’의 절반 이상이 여성과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페미니즘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담고 있습니다. 페미니즘을 악한 사상으로 단죄하는 대목에서는 참담함을 느꼈습니다. 차별금지법을 악법으로 규정하면서 “17. 하나님 앞에서의 평등이 아닌 서로가 모두 똑같아야 한다는 평등 실현의 환상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전체주의적 발상”이라고 비판하는 대목에서는 뭥미?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성평등과 생명, 평화를 위해 살도록 나를 일깨워졌던 그 페미니즘을 이분들은 한 자라고 읽어본 걸까? 전체주의의 뜻을 제대로 알고 있는걸까? 의구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한 미러링으로 발표된 <대한민국 페미니즘의 역전을 이루는 평등세상을 위한 100대 기도>는 1. 하나님! “큰 기도회, 큰 교회”만을 바라는 우리의 욕망을 좇느라, 하나님의 소중한 존재들을 잊어버린 교회가 된 것은 아닌지 살피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한 사람 한 존재, 모두가 서로 다르더라도 같은 ‘하나님’을 부르며, 하나님 뜻을 헤아리는 겸손한 모임으로 교회되게 하옵소서. 상처 난 이들의 마음을 감싸고, 깃들 곳 없는 이들이 찾을 수 있는 건강한 교회로 한국교회를 회복하게 해달라는 호소로 시작됩니다.

한신대학교 신학과 명예교수이신 김경재 교수님은 “종교 신앙에서 가장 나쁜 것은 위선, 신성모독, 그리고 동료 인간 고통에 둔감한 권력욕과 재물욕과 명예욕이다.”고 지적하시며 1027 광화문 집회는 “속화와 마성화의 단면”을 보여준 사례라고 평가합니다. <에큐메니안>에 나온 글의 일부를 인용합니다.

교회가 참된 십자가 보혈 신앙으로서 살아있을 때, 봄 계절에 새싹이 해마다 돋아나듯이 언제나 파릇파릇하고 싱그럽다. 포도나무 둥지에 연결되어 있어서 포도송이를 탐스럽게 영글게 한다. 그런데 교회가 굳어지고, 타성화되고 종교 단체가 되고, 세상의 권력과 돈맛을 알기 시작하면 타락하여 속화(俗化)된다. 기독교라는 종교 단체나 연합 기구가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신한다고 자기를 스스로 신격화하면서 마성적(魔性的) 성격마저 드러내 놓는다. 10월 27일 보수적 기독교 특히 대형교회 지도자들의 모습이 속화와 마성화의 단면을 보여준다. 종교개혁 정신이란 그것을 깨부수고 참된 순수 갈릴리 예수 복음으로 환원하자는 운동이었던 것이다.

이집트 제국의 땅과 같이 욕망이 극대화되고 스스로를 신격화하는 마성의 굳어진 땅이 되어버린 한국교회의 민낯이 드러난 대형집회였습니다. 저는 예배라는 표현을 쓰고 싶지 않을뿐더러, 쓸 수 없는 집회라고 봅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생명선교연대는 성명서를 통해 “지금은 골방에서 가슴치며 참회할 때”(마태복음 6:6)라고 한국교회의 회개를 촉구하면서, 이번 10.27의 기도제목은 “종교의 외피를 두르고 기도의 명목을 내세워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 욕망을 실현하려는 위선의 기도”라고 평가하였습니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겸손과 헌신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혐오와 상대에 대한 단죄가 아니라 “공존과 상생”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1.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마태복음 6:31-33)

저에게 100이란 100만 장자, 100억 등을 떠오르게 하는, 욕망의 극대화를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이번 광화문 집회가 기도의 숫자를 100대 선정한 것도혐오를 기반으로 얻고 싶은 일부 교회와 목회자의 욕망을 표출해주는 단면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100개의 기도 제목을 보면서 제가 회개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개혁의 시초가 된 루터의 반박문도 95개 조였는데, 100개까지 기도 제목을 만들어 기도하는 열심이었습니다.

제 507회기 종교개혁주일을 한 주 지나면서, 내가 추수할 복음의 열매를 생각하면서 감사절을 오늘 보내면서, 저는 각자, 아니면 생명사랑교회의 100대 기도 제목을 적어보기 권고합니다. 기도의 첫 시작은 기도자의 신앙의 출발점과 지향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심사숙고해서 작성해야 합니다. 기도 제목을 나열하다 보면 내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걱정하는 게 드러나게 됩니다. 만일 여러분의 기도 제목이 “주님, 000 주십시오”로 일관된다면 그 순간에 머물면서 오늘의 복음서 본문을 깊이 묵상해보시길 원합니다.

31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32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모세는 신명기 11장 18절에서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의를 따르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면 그 땅에서 배부를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아시며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란 단어를 세 번이나 반복하면서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필요를 아신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예수님 믿으시죠? 그러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경애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오늘의 설교 제목이기도 한 저의 질문, 100개의 기도, 우리가 구할 것은?에 대한 여러분의 답변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는 내가 정하는 ‘거룩’에 동의하는 사람만 모아서 이룩하는 폐쇄적 공동체가 아니라, 모두를 위해 열려있는 우주적인 사랑의 열린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 이 땅에서 실현될 것입니다. 우리가 거하는 이 땅이 욕망으로 타인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제국의 땅이 아니라, 작지만 건강한 서로의 생명을 돌보는 정의와 평화의 땅이 되도록 함께 힘쓰기를 원합니다. 아멘.

침묵으로 잠시 말씀을 묵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