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이상중 목사] 환대의 공동체 – 2025년 3월 2일

누가복음서 7장 36-50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성도는 내면에서 경험할 수 있는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평안하지 못할 때, 우리의 모든 판단과 삶이 흔들리기에, 헛된 방향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릇된 욕망에 이끌려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안에 ‘평안’이 주어졌습니다. 이 평안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올바른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성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말씀을 통해 ‘천국 잔치’, 즉 하나님 나라는 멀리 있지 않고 지금, 이곳에서 경험되어야 할 사건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다만,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이 천국 잔치인지 구별할 수 있고, 참여할 수 있으려면 시간, 물질 등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들의 실제적인 포기가 이루어질 때 누릴 수 있습니다. 내 것 무엇 하나 손해 보지 않고, 챙길 것 다 챙기면서 지금, 이곳에서 열리는 천국 잔치까지 누리는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 잔치는 공동체적으로도 경험되지만, 개인적으로도 경험됩니다. 주중에 경험한 이상중 목사의 천국 잔치 자리는 세종호텔 해고 노동자들이 복직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명동의 한 야외 장소였습니다. 노조 지부장인 고진수씨는 10미터 높이의 도로시설 구조물 위에서 농성하고 있었고, 다른 분들은 인도 한쪽에서 노숙하며 3년에 가까운 야외 투쟁을 이어가고 계셨습니다.

여전히 추운 날씨에 바람까지 불어서 야외에서 무언가를 하기 쉽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노동자들을 응원하고 위로하며 예배드리기 위해 모였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이고 낯선 사람들 틈에 있었지만, 사람들로부터는 환대를, 예배를 통해서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고통은 여전히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고,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그 장소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신비이기도 합니다.

불의한 일을 바로잡기 위해,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어울려 예배드린 그곳이 저에게 천국 잔치였습니다. 꼭 투쟁 현장이 아니어도 우리가 머문 곳을 천국 잔치 자리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어떤 마음과 어떤 태도로 머물고 있느냐에 따라 천국 잔치 자리는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주중에 성도님들의 삶에서 이미 베풀어진 천국 잔치를 찾으셨습니까? 그리고 천국 잔치를 경험하셨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천국 잔치는 언젠가 찾아오는 미래의 일이나 아직 열리지 않은 어떤 일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 곁에 와있습니다. 그렇기에 발견하고 경험하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환대의 공동체’입니다. ‘환대하는 공동체가 됩시다.’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생명사랑 공동체는 이미 환대가 몸에 배어 있어서 따로 더 환대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릴 필요가 제 눈에는 없어 보입니다. 맞습니까?

다만, 우리의 환대가 얼마나 큰 힘과 영향력이 있는지를 오늘 본문과 이상중 목사의 경험을 통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제가 또는 성도님들이 생각하시는 것 보다 환대의 힘과 영향력이 크기 때문입니다.

공동의회가 통과되기 전 처음 성도님들과 만나 간담회를 하면서 말씀드리기도 했는데요. 2009년 1월에 용산 재개발로 인한 철거민과 경찰의 대치가 있었고, 경찰의 무리한 진압으로 철거민들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었습니다. 이 참사에 대한 책임자 처벌과 철저한 조사를 위해 많은 시민사회와 종교계가 움직였습니다.

이런 움직임 속에 기독교 대책위에서 예배와 성찬을 드렸는데요. 성찬 집례 위원 중 한 분이 “이 성찬을 받기 원하시는 분은 누구라도 나오십시오.”라고 말씀하셨고, 이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도 나와 성찬을 받는 놀라운 풍경이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다녀도 세례를 받지 않으면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교회들도 많은데, 그 현장에서는 ‘누구나’ 성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풍경이 너무나 압도적이었고, 지금까지도 그때 경험한 성찬이 저에게 가장 전율을 일으키고, 은혜가 되었던 성찬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 성찬의 현장을 저는 ‘환대’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말로는 후한 대접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스어로 환대는 ‘필로제노스(φιλόξενος, philoxenos)’라는 말에서 유래했는데요. 우정 또는 사랑을 뜻하는 ‘필로스(philos)’와 이방인을 뜻하는 ‘제노스(xenos)’가 합쳐져 ‘이방인을 사랑하라’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나, 우리 바깥에 있는 낯선 존재인 이방인을 구분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 환대입니다.

후한 대접, 서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행위인 이 환대가 당시 용산참사 현장에서 성찬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날, “이 성찬을 받기 원하시는 분은 누구라도 나오십시오.”라고 말씀하신 목사님이 당시 청파감리교회의 담임하셨던 지금은 은퇴하신 김기석 목사님이셨습니다.

제가 고성에서 떠나기 일주일 전에 김기석 목사님과 숨빛청파교회 담임을 하고 계신 손성현 목사님과 함께 저희 집에 오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겪었던 이 성찬에 관한 이야기를 말씀드렸더니, 김기석 목사님이 해외에서 수도원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수도원에서 천주교 신자도 아닌 자신을 성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환대해 준 경험을 말씀하시면서, 그 환대로 인해 당시 용산참사 현장에서와 같은 성찬을 할 수 있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천주교 수도원에서 보여준 한 수도사의 환대가 어떤 영향력을 미쳤습니까? ‘너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니까 안돼’라고 했다면 제가 경험한 성찬이 가능했을까요? ‘나와 너를 나누지 않고 이방인을 받아들이고 사랑한 경험’이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는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이고 대단한 환대의 경험은 아니지만, 환대의 파장은 때로 엄청나게 커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환대는 다양한 형태로 나눌 수 있고, 경험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환대의 모습을 오늘 본문을 통해 보고자 합니다. 바리새파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환대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당시 관습에 따라 유명 인사를 집으로 초대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무명의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해 놓고도 거리를 두었습니다. 예수님이 집으로 오셨을 때 손님에게 해야 할 당연한 행동을 바리새인이 하지 않은 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신 집주인이 해야 할 행동을 동네에서 죄인이라고 알려진 여성이 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성이 자신에게 한 행동을 빗대어 주인인 바리새인에게는 너는 발 씻을 물, 입을 맞추는 일 등을 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재미있는 장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36-39절까지는 집 주인인 바리새인은 아직 무명입니다. 그가 어떤 이름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40절에서 예수님은 무명이었던 바리새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시몬’이라고 말입니다.

바리새인인 시몬의 행동도 재미있습니다. 시몬은 죄인이라고 불리는 여성이 자신에게 향유를 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지하지 않은 예수님을 두고 ‘이 사람’이라고 불렀던 바리새인입니다. “39 예수를 초대한 바리새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혼자 중얼거렸다. “이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저 여자가 누구이며, 어떠한 여자인지 알았을 터인데! 그 여자는 죄인인데!””

그런데 예수님이 ‘시몬’이라고 부르자 시몬이라 불리는 바리새인이 예수님에게 어떻게 대답합니까? ‘선생님’이라고 대답합니다. “40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네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말했다. “선생님, 말씀하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사람’에서 ‘선생님’으로 호칭이 변화되었습니다. 물론 속으로는 ‘이 사람’이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보는 자리이기에 예의상 손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이름을 부르는 것의 의미와 호칭이 변하게 된 앞 구절과 연관 지어 살펴보았을 때 집주인인 바리새인에게 변화가 생겨 ‘선생님’이라 불렀으리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을 때는 단순히 호칭이 아니라 이름에 담긴 의미, 그의 정체성을 호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단순한 호칭으로서 이름을 부르지 않으시고, 정체성으로 그리고 변화될 존재로서의 이름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존귀한 아버지’인 아브람에서 ‘열국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으로(창 17:5) ‘속이는 자’인 야곱에서 ‘하나님과 겨룬 자’라는 이스라엘로(창 32:28) ‘듣는 자’인 시몬에서 ‘반석’인 베드로로(마 16:18) 이름이 바뀝니다. 이들은 이름이 바뀌면서 삶도 변화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이름은 그들의 사명과 정체성을 반영하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서 예수님이 세리 삭개오를 부르시는 장면도 그렇습니다. ‘삭개오’ 이름의 뜻은 ‘순전한 자, 의로운 자’입니다. 당시 세리라는 직업 자체는 사람들에게 결코 의롭게 여겨질 수 없었습니다. ‘짜내는 사람’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제국에게 세금을 내기 위해 동족을 짜내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동족에게는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많은 세리가 있었을텐데, 예수님은 뽕나무에 올라가 있는 세리를 보고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라는 이름, 더 정확히는 그렇게 불릴 수 없었던 그의 정체성, 또는 그가 잃어버렸던 정체성을 불러주셨습니다.

이름을 불러주심으로, ‘깨끗한 자, 의로운 자’라는 자신의 이름처럼 살지 못한 삭개오의 정체성을 다시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존재의 변화가 일어났기에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서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눅 19:8)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이런 삭개오를 보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눅 19:9)라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오늘 바리새인 시몬의 경우가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이상하게 여겼고, 혼자 중얼거리며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중얼거리는 바리새인에게 ‘시몬’이라 하셨습니다. 시몬의 이름 뜻은 공교롭게도 ‘응답하셨다.’, ‘들으셨다.’입니다.

시몬의 이름 뜻을 확인하고서는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야말로 이름을 부르신 것일까요? 아니면 ‘네가 중얼거리는 말 내가 다 들었다.’라는 의미의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시몬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시몬아’라고 했을 때, 자신이 중얼거렸던 말을 예수님에게 들켰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타인에게 뭔가 부끄럽게 여겨질 속마음을 들키게 되면 어떤 행동을 하십니까? 부인하거나,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시몬은 예수님에게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님께 겸손해졌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겠다고 하신 이후부터 시몬은 더 이상 드러나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존경해서 쓰는 호칭이었던 ‘선생님’을 시몬도 쓸 따름이었습니다. 저는 시몬이 예수님을 ‘이 사람’에서 ‘선생님’이라고 부른 호칭의 변화로부터 삭개오와 같은 삶의 변화가 일어났으리라 믿습니다.

예수를 집에 초대했음에도 어정쩡한 위치에 있었던 바리새인 시몬은 그의 이름의 의미처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 응답받지 못하는 자, 하나님이 듣지 않으시는 자가 아닙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환대입니다. 존재의 변화를 일으키는 환대입니다. 나는 더 이상 깨끗한 자, 의로운 자가 아니었는데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너는 원래 ‘깨끗한 자, 의로운 자’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성경을 보면 바리새인의 초대에 예수님이 응하셨을 때, 그 모임의 결과가 좋지 않을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초대에 계속해서 응하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차별하지 않고 그들을 받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환대’입니다. 어느 자리에서건, 그가 누구이건 예수님은 ‘사랑의 존재’로 계셔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예수님에게 반응한 이들은 놀라운 변화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함께 계시고, 그의 이름을 불러주신 것이 전부이지만,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는 큰 사건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태도는 ‘오냐, 나를 제대로 대접하지 않았어? 아주 혼꾸녕을 내주마!’ 이런 태도가 아니셨습니다. 자신을 비난하는 이들이고, 차별적으로 대하고 때로는 폭력을 가하려 하고, 생명을 위협하는 이들이었지만, 가난한 이들을 대하듯, 자신에게 향유를 부은 여성을 대하듯 바리새인들을 그리고 시몬을 대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태도가 존재의 변화를 일으키는 놀라운 사건으로 커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기 때문에’ 존재의 변화라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타인을 향한 우리의 환대도 이런 힘이 있고, 영향력이 있습니다. 낯선 이, 타인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그에게 사랑을 베풀 때면 언제라도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존재의 변화는 예수님만 일으키는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한 환대의 행동이 이런 사건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환대하는 삶을 사십시오. 그의 진정한 이름, 그의 존재의 참 된 모습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십시오. 낯선이들, 우리를 미워하는 이들까지 차별 없이 대하며 받아들이십시오.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사랑의 존재로 함께 하십시오. 우리가 할 일을 하면, 변화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