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중 목사] 포기하는 공동체 – 2025년 2월 23일
누가복음서 14장 15-24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이 질문은 나를 불편하게 하거나 나를 힘들게 하는 일 없이 한 주간을 보내셨냐는 의도의 질문이 아닙니다. 여러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내 안에 주어진 ‘평안’을 선택하여 평안한 마음을 누리며 살다가 오셨냐는 의도의 질문입니다.
내가 겪고 있는 일들이 해결됨으로 얻어지는 평안은 잠시 경험되는 불완전한 평안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해결해야 할 또 다른 일들이 매번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나의 바깥, 즉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의 해결을 통해서는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외부로 향했던 시선을 나와 함께 하시는 성령께 돌려 ‘평안 누리기를 원합니다.’라고 말씀하십시오. 아무것도 변한 것 없고, 모든 것이 그대로일지라도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주어진 이 평안을 날마다 다시 선택하고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난 주일 설교의 제목은 ‘허무는 공동체’였습니다. 자기만족을 위해 또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무언가를 하지 않고, 우리 각자가 세운 기준 등을 허물어 내고 기다릴 때 비로소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주일 말씀을 듣고 한 주간 어떤 삶을 살다가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내가 허물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셨습니까? 성도는 날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지난 수요일 떼제기도회를 마치고 떼제기도회 중에 읽은 말씀과 부른 찬양을 통해 느끼거나 깨달은 바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 시간에 김학로 장로님께서 귀한 고백을 해주셨습니다. 작년 12월 3일 내란 수괴 윤석렬과 그 일당으로부터 벌어진 불법 계엄 소식을 처음 본인이 속하신 카톡 방에서 소식을 접했을 때, 소식을 접하고 바로 국회의사당으로 달려가지 못함에 대한 돌아봄의 고백이셨습니다.
누군가는 불법 계엄 소식을 듣고 국회의사당으로 갈 생각을 하고 또 실행하기도 했는데, 왜 나는 국회의사당으로 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까. 하나님의 명령은 가까운 곳에 있고 또 실천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신명기 30:11-14), 나는 왜 그 명령을 듣지 못했을까? 라고 말씀하시며 깊은 한숨을 쉬셨습니다.
다시는 불법 계엄과 같은 일이 반복되지는 않겠지만, 아마도 이런 후회와 자기 자신을 늘 갱신하기 위해 분투하는 성도라면 다음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명령을 깨닫고 움직이게 되리라 믿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나와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 갱신되기를 바라며 허물어 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기를 갈망하면 결국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경험과 지식으로 무언가를 날마다 쌓고 세우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경험과 지식을 내려놓음으로 결국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는 생명사랑 공동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포기하는 공동체’입니다. 공동체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일할 때 성도는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옵니다. 각자가 희생하지 못하면 공동체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도 그 뜻을 행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포기해야 하는 것이 시간이 될 수도 있고, 물질이 될 수도 있고, 중요하게 여겼던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결단해야 할 어떤 순간에 무엇보다 하나님을 택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의 ‘큰 잔치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라는 말 때문에, 예수님은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를 들려주는 대상이 명확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라고 말 한 사람과 이 사람과 함께 있는 이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대체 누구이기에 또 이 사람의 말을 어떤 의도로 받아들이셨기에 비유의 말씀을 전하게 되셨을까요? 누구인지는 누가복음 14장 1절과 3절 전반 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의 지도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의 집에 음식을 잡수시러 들어가셨는데, 사람들이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께서 율법교사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물으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구는 바로 율법교사, 바리새파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어떤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과 함께 하는 율법교사,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비유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율법학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말씀에 정통한 사람들, 스스로가 의에 가득 찬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학자, 바리새파 사람들과의 식사는 누가복음 14장이 처음은 아닙니다. 누가복음 11장에도 이들과 함께 식사하며 나눈 이야기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가 정확하게 드러납니다.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님을 집으로 초청해 음식을 대접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잡수시기 전에 손을 씻지 않으신 것을 본 바리새파 사람이 이 모습을 이상히 여겼습니다. 자신을 이상히 여긴 바리새파 사람을 보시고 예수님은 이런 말씀들을 쏟아 내셨습니다.
“지금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 어리석은 사람들아, 겉을 만드신 분이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 속에 있는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해질 것이다.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정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소홀히 한다! 그런 것들도 반드시 행해야 하지만, 이런 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야 하였다.”(누가복음 11:39b-42)
자신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며 말씀대로 산다고 생각했지만, 이들이야 말로 예수님의 눈에 의롭지 못한 이들, 외식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불의한 이들임에도 자신들은 당연하게 하나님 나라에서 음식을 먹으며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기에 예수님은 오늘 비유의 말씀을 전한 까닭입니다.
우리도 혹시나 이런 바리새파, 율법학자와 같이 말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이런 태도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나 정도면’이라고 여기며 “맞죠, 예수님! 하나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은 복이 있죠.”라고 대답하는 사람 말입니다.
오늘 잔치 비유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말씀입니다. “1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17 잔치 시간이 되어, 그는 자기 종을 보내서 ‘준비가 다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말하게 하였다.”
잔치를 베푼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세례 요한과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을 통해 초대장은 이미 유대인들에게, 바리새인에게, 율법학자들에게 보내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초대장을 미리 받은 사람들은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예수님에게로 와서 말씀을 듣고 회개하라는 메시지의 초대장은 전달되었지만. 이들 중 아무도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자신들의 밥벌이를 위협하기에, 자신들의 주장을 허무는 사람이기에(사실은 완성하는 사람이지만) 없애려고만 했습니다. 듣기는 하였지만, 아무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초대는 받았지만 아무도 응하지 않았습니다.
18절에서 20절의 말씀입니다. “18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핑계를 대기 시작하였다. 한 사람은 그에게 말하기를 ‘내가 밭을 샀는데, 가서 보아야 하겠소. 부디 양해해 주기 바라오’ 하였다. 19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시험하러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기 바라오’ 하고 말하였다. 20 또 다른 사람은 ‘내가 장가를 들어서, 아내를 맞이하였소. 그러니 가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본문에는 세 가지의 핑계가 나옵니다. 밭을 사서 밭을 보아야 하는 핑계, 겨릿소 다섯 쌍을 사서 시험해야 하는 핑계, 장가를 들어 아내를 맞이해 아내를 보아야 하는 핑계입니다.
이 핑계는 지난주 창세기 11장에도 나온 인간의 정착하려는 욕망처럼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요구처럼 보입니다. 잔치를 거절한 이유 들이 도대체 뭐가 그렇게 잘 못 되었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이번에도 이들이 틀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잔치,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에게 상식적으로 여겨지는 이유,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지는 일보다 더 우선 하여 참여할 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말 한 이유는 ‘핑계’에 불과하게 되었습니다. 잔치 자리는 이런 이유들보다 우선해서 참여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21 그 종이 돌아와서, 이것을 그대로 자기 주인에게 일렀다.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더러 말하기를 ‘어서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을 이리로 데려 오너라’ 하였다. 22 그렇게 한 뒤에 종이 말하였다. ‘주인님, 분부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23 주인이 종에게 말하였다. ‘큰길과 산울타리로 나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워라.”
이제 주인은 초대장을 다시 올 만 한 사람들에게 보내지 않습니다. 종에게 시켜 시내의 거리와 골목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 눈먼 사람, 다리 저는 사람’을 데려오라고 말합니다.
주인이 데려오라고 말 한 이 사람들은 정확하게 예수님이 사역하시면서 관심 있게 만난 사람들이며, 예수님을 만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잔치 자리에 참여하여 풍성한 기쁨을 누린 사람들입니다.
잔치 자리,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즉각적으로 응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잔치 자리는 먼 미래에 펼쳐질 축제가 아닙니다. 바로 오늘도 우리 안에,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입니다.
15절에서 이 바리새파 사람은 하나님 나라가 멀리 있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상식적이고 지극히 당연한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포기한 이들만이 참여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도 빈자리가 있다고 종이 말하자 주인은 다시 말합니다. ‘큰길과 산울타리로 나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워라.’ 이 구절은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에게까지 미칠 복음의 사역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자신들의 소유라고 여겼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은 당연하고 이방인들은 결코 누릴 수 없는 것이라 여겼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너희들이 무시하는 바로 그들의 것이라고 역으로 선포하고 계십니다. 어떤 권리도 누리지 못하는 이들, 차별받는 이들,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이야말로 잔치를 누릴,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초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는, 아무도 나의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오늘이 총회가 제정한 3.1절 기념주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정의를 위해 희생한 이들이 있습니다. 상식적이고 당연한 이유들을 뒤로하고 정의, 평화라는 하나님 나라, 잔치 자리 초대에 기꺼이 응한 분들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땅에서 경험해야 할 축제의 자리, 잔치 자리, 하나님 나라는 아직은 이상적인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이들과 차별받는 이들, 고통받고 있는 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함께 정의를 세우고 평화를 이루고 생명을 살리는 일이 바로 잔치 자리이며,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순간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이 자리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이유들로 이 자리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바리새파 사람처럼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처럼, 천국 잔치를 맛볼 수 있는 사람처럼 여유 있게 웃으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저와 성도님들에게, 우리 생명사랑 공동체에 보내시는 초대장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그 자리가 어디인지 알았을 때 바로 응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나의 것, 우리의 것을 포기하지 않고는 응할 수 없는 자리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포기함으로 하나님 나라가 주는 더 큰 기쁨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