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육성한 전도사] 우리가 설 자리 – 2021년 3월 28일 종려주일 / 제주 4.3 기념주일
신명기32장 36–39절, 시편 31편 14-19절, 누가복음서 23장 1-12절
[봄, 그리고 사순절]
봄이 오는 것을 시샘하듯 여전히 찬 바람이 불지만, 이곳저곳에서 단단함을 뚫고 올라오는 꽃봉오리를 볼 때면 확실히 이제 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얇아진 겉옷과 함께 거리를 나서는 발걸음도 가벼워집니다. 한해를 겨울로 시작해서 이제 벌써 4월을 바라보고 있지만, 겨울을 보내고 이제 활짝 피어날 준비를 하는 피조물들을 보니 우리의 마음도 새 출발을 하는 듯 기대와 설렘이 우리를 간지럽힙니다.
꽃피는 3월, 일상적인 삶의 흐름에서 조금 가벼워질지 몰라도 그리스도인들의 달력인 교회력에 따르면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사랑과 희생을 기억하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사순절의 절정으로 향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억하는 주일이고, 오늘부터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을 깊이 묵상하는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이야기로 만들어 낸 교회력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이 봄이라는 계절이 마냥 가볍게만 느껴질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봄을 어떻게 보내고 계시는지요. 사순절의 끝을 향하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돌아볼 때, 여러분은 2021년 사순절을 어떻게 보내셨나요? 매년 찾아오는 잠시 슬퍼하는 절기 정도로 보내셨나요?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마음속 깊이 새기는 의미 있는 절기로 보내고 계시는가요.
많은 교회가 사순절에 금식과 절제, 회개를 중점으로 개인 신앙 훈련에 집중합니다. 반면에 제가 생명사랑교회에 와서 처음 경험했던 사순절은 조금 달랐습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절기였고, 사순절을 기간에 했던 우리의 활동은 매우 역동적이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위한 정기 수요시위(17.3.22.)에 참여했고, 대학강사 교원 지위 개선을 위한 장기 노숙 농성장(17.3.30.)에 방문하고, 팽목항(17.4.8.)을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고자 금식과 절제, 금욕 등으로 개인 경건 훈련을 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이 땅에 소외되고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셨던 예수님의 삶에 더 깊이 참여하기 위해 현장을 찾고 연대했던 경험은 사순절의 의미를 더 풍성하게 했습니다.
코로나 19와 함께 겪는 두 번째 사순절입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우리가 직접 아픔의 현장으로 찾아가 예수님의 삶과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어려운 현실입니다. 그래도 올해도 사순절 매일 아침 묵상을 통해 40일의 여정 동안 말씀을 묵상할 수 있고, 생명사랑 씨ᄋᆞᆯ미션에 동참하신 분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한 뼘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사순절은 교회 전통에서 부활절에 있을 세례를 위한 신앙교육 기간, 즉 그리스도인이 되는 준비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이 의미도 함께 생각해보시며, 남은 사순절 동안 그리스도교 신앙에 더 깊이 뿌리내리고 성장하는 기회로 삼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에는 매년 해오던 것처럼 릴레이 금식기도를 함께 합니다. 각자 정한 시간에 금식을 하고, 그 식사비용을 헌금해 미얀마 민주화 운동과 북한을 돕는 일에 사용합니다. 주님께서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 받는 사람을 놓아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굶주린 사람에게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7)는 말씀을 기억하며, 또 금식의 목적은 고난을 겪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께서 가련한 이들을 위해 품을 내어주셨듯 우리도 그 삶에 참여하기 위함임을 마음에 새기며 모두 릴레이 금식기도에도 동참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깊이 새기고 내적 성숙과 이웃을 위한 내어줌의 시간으로 보낸다면 곧 다가올 부활의 기쁨은 더 커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가 선 자리, 우리가 설 자리]
우리 교회가 따르고 있는 교회력은 성경순서에 따라 매일 읽을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의 순서를 따라가며 읽지만, 중요한 절기에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해당하는 절기에 읽어왔던 본문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들은 종려주일, 그리고 고난주간을 시작하며 교회 전통에서 꾸준히 묵상해왔던 본문 중 하나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체포되어 심문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고난주간을 앞둔 우리는 심판대 앞에 선 예수님을 통해 무엇을 보고, 또 어떤 의미를 삶으로 가져야 할까요?
오늘 누가복음서에서는 온 무리가 일어나 예수님을 빌라도 앞으로 끌고 가 고발을 합니다. 예수가 이스라엘 민족을 오도하고,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하고, 자칭 그리스도 곧 왕이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약간의 사실이 담긴 거짓말이 더 효과가 있듯이, 예수를 고발하는 이들은 빌라도가 유대인의 문제나, 종교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고 로마의 통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인물로 예수님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니지만, 사실 틀린 말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회질서를 뒤흔든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이스라엘이 로마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되길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은 힘으로 로마를 끌어내고 유대인 통치자가 그 자리에 앉는 그런 혁명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이스라엘이 변화되길 바라셨습니다. 이 세상 모든 문제의 근본에는 사랑과 연민의 결여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로마가 통치자의 자리에서 내려가더라도 지금도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는 유대 기득권 세력이 그 자리에 앉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돈과 명예, 파벌과 권력이라는 가치에 물들어 있다면, 가난한 자들의 고통은 계속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근본부터 고치고자 하셨습니다.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회복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 복음을 믿어라.”(막1:15)라는 예수님의 첫 선포는 바로 사랑과 연민, 정의가 없는 즉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로 돌아가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이웃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만이 이 세계에 만연한 폭력과 억압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무상으로 병든 이들을 치유하고,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죄인이라 여겨지는 이들에게 친구가 되어주고, 로마의 압제를 비판하면서도 오히려 자신들이 더 악독하게 가난한 이들을 억누르는 유대 지도자들과 성전권력을 비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분명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맛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의 사역은 당시 유대 사회, 특히 유대 기득권 세력의 모순을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율법 뒤에 숨어서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고, 그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이들이 수면 위로 드러났습니다. 자신들의 그릇된 욕망과 어둠,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유대 기득권 세력은 예수를 살려둘 수 없었고, 결국 심판대에 세웠습니다.
예수님을 심판대에 세운 사람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삶과 신념을 지키고자 예수를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자신들이 만들고 지탱해온 사회가, 그 질서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인해 흔들리고, 불안해지니 그 불안의 원인을 계속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안전한 삶을 원합니다. 안정적이길 바랍니다. 내가 보호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길 원합니다. 안정적인 삶에 대한 욕구 자체가 죄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안전에 대한, 보호에 대한 욕구는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힘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안전을 욕망할 때, 우리는 내 주변을 통제하길 원합니다. 내가 가진 힘의 크기를 측정하고 시험합니다. 내 안전을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지난 16일에 미국 애틀랜타에서 벌어진 아시아인들을 향한 총격 사건은 모두를 충격에 빠지게 했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아시안, 특히 아시아 여성을 향한 혐오범죄 사건입니다. 실제로 코로나 19 이후로 아시아인들을 향한 혐오범죄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혐오라는 감정의 근저에는 두려움, 즉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안전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혐오의 감정을 아무런 성찰과 통제 없이 받아들이고, 두려움을 없애고자 주변을 힘과 폭력의 방식으로 통제하려고 할 때 이런 참혹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사람의 이상행동, 비행으로만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끊임없이 코로나의 책임을 특정 나라로 돌리며 아시아인들 혐오를 부추겼던 한 지도자와 자신들의 안전만을 욕망하는 그 사회에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누가복음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안전만을 욕망하는 자리가 바로 예수를 고발하는 자들이 서 있는 자리라고 말합니다. 무고한 사람을 심판대에 세우는 이들의 자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리를 떠나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고 있는 그 자리에 서도록 초대합니다. 나의 안전만을 추구하는 자리가 아니라, 예수께서 그러하셨듯이 세상 모든 이들의 안전을 위한 자리, 그중에서도 가련한 이들이 안전할 수 있는 자리에 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느 자리에 서 있을까요? 자신만의 안녕을 위해 예수를 고발하는 이들의 자리, 아니면 사랑과 희생으로 모두의 안녕을 꿈꿨던 이의 자리. 심판대 앞에 선 예수님을 보며 우리가 진지하게 물어야 할 첫 번째 질문입니다.
[힘과 결별한 사람]
오늘 예수님은 유대 사회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 앞에 섭니다. 바로 빌라도입니다. 빌라도는 예수께 묻습니다.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이 말의 의도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실제로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와 같은 일종의 조롱에 가깝습니다. 변두리 갈릴리 출신인 네가, 소작농인 네가, 지금 유대인들에게 매를 받고 멸시를 당하며 서 있는 네가, 유대인들의 왕이냐고 조롱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질문에 대답합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소” 다시 말해보자면 “네가 그렇게 말했다”, 즉 예수님은 빌라도가 했던 것처럼 “네가”라고 말씀하시며 똑같이 조롱 조의 말로 되돌려주십니다.
권력자 앞에서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태도는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빌라도를 식민지 종주국 로마의 총독이었지만 예수님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온화한 인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외의 역사자료를 보면 빌라도는 독재와 약탈, 폭행과 끊임없는 처형을 자행하는 잔혹하기 그지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바로 그런 빌라도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려는 어떤 일말의 태도도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권력을 가진 이들, 힘으로 통치하려는 이들과 경쟁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앉은 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권위에 의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보호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경쟁과 방어 기제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빌라도마저도 당황하게 했습니다.
헤롯 앞에서도 예수님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께서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이 문제를 갈릴리 지역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티파스에게 떠넘기고자 합니다. 헤롯은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합니다. 그는 예수가 어떤 기적을 일으키는지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러 말로 물어보는 헤롯에게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헤롯의 말에 전혀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너희 힘과 능력을 드러내 보라는 헤롯의 요청에도,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의 고발에도, 모욕과 조롱에도 그저 침묵으로만 답하실 뿐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힘으로 세상을 통치하려는 이들과 철저하게 결별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이 꿈꾸셨던 하나님 나라는 결코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은 오직 사랑, 사랑에 기반한 정의, 그리고 연민의 마음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침묵은 이 세상의 아픔을 외면하는 침묵도, 불의 앞에서의 침묵도 아니었습니다. 힘과 폭력이 아니라 오직 사랑과 연민만이, 비폭력만이 이 세상의 모든 악의 고리를 끊어 낼 수 있음을, 힘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권력자들의 앞에서 당당하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오늘 누가복음서는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서로 원수였으나, 바로 그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12절)고 합니다.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리던 갈릴리 지역은 빈번히 조세 저항운동과 정치적 소요가 일어나던 곳이었습니다. 또한 헤롯은 언제나 자신이 이스라엘 전 지역을 통치하고 싶다는 야망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빌라도는 그런 헤롯을 무시했지만, 로마 제국의 총독으로서 식민지 지역 치안을 담당하는 입장에서 갈릴리 지역은 늘 신경이 쓰이는 지역이었습니다. 이 둘 사이는 결코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이 둘이 왜 친구가 되었는지 명확히 밝히고 있진 않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심문의 과정에서,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과정에서 이 둘은 그냥 이 예수를 소요를 잠잠하게 하는 희생양으로 쓰는 것이 더 좋겠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악을 위해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 친구가 되었습니다. 적이었지만 힘으로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는 그들은 결국 서로 닮아갑니다. 여러분은 지금은 누구를 닮아가고 계시는가요. 한국교회는 지금 누구를 닮아있을까요? 힘으로 세상을 다스리려는 자, 그리고 그들과 결별하고자 하는 예수.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어떻게 설 수 있는가?]
미얀마의 상황이 여전히 심각합니다. 군부의 만행은 계속되고 있고, 민주화를 위해 시위를 하다 목숨을 잃는 시민들이 늘어만 갑니다. 유엔 인권 이사회에서 미얀마 군부의 인권 침해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국제 사회의 연대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군부의 기세는 꺾이지 않고 있습니다. 국제 사회 연대의 확대와 시민 간의 소통과 지원이 더 활발하게 이뤄져야 할 것 같습니다.
몇 주 전 SNS에 올라온 미얀마의 한 수녀님의 사진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사진 속 수녀님은 중무장한 경찰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사진의 주인공인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수녀원 소속 안 로사 누 타웅 수녀는 진압대를 향해서 사격하지 말라고 눈물로 호소하고 있었고, 원한다면 시위대가 아니라 자신을 쏘라고까지 하며 필사적으로 총을 겨누고 있는 경찰들을 막아섰습니다. 누 타웅 수녀님의 용기있는 행동 덕분에 100여 명의 시위대는 체포되지 않았고, 생명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누 타웅 수녀는 “나는 교회와 사람들, 이 나라를 위해 내 삶을 바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전하며 앞으로도 온몸으로 군경의 진압을 막아설 것이라는 의지를 내비쳤습니다.
누 타웅 수녀님이 진압대 앞에 용기 내어 설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목숨까지 내어놓을 수 있었던 그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오늘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예수님께는 흔들리지 않는 자기 확신과 용기가 있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에게는 두려움이란 없습니다. 악평도 추문도, 조롱도, 심지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시편의 저자는 하나님에 대한 강한 신뢰를 보여줍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주님만 의지하며,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것입니다.”(14절) 또한 “오만한 자세로, 경멸하는 태도로, 의로운 사람을 거슬러서 함부로 말하는 거짓말쟁이들의 입을 막아 주십시오.”(18절)라고 노래하며 자신의 삶에 대한 확신과 악인 앞에서의 당당함을 드러냅니다. 분명 고난 중에 있으나 궁극적으로 구원과 승리로 이끄실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그의 삶을 당당함과 용기로 이끄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기 있게 힘과 권력 앞에 서려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향한 단단한 신뢰 위에 서야 합니다. 서 있는 자리가 하나님의 편에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힘과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 사랑과 연민의 능력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뢰, 힘과 권력을 넘어서는 사랑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우리가 세상의 흐름에 이리저리 떠밀려 가는 것입니다.
[심판대에 선 우리]
한국교회도,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지금 하나님과 세상 앞에 심문을 받는 중이 아닌가 싶습니다. 재판과 심문의 목적은 그 존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듯 지금 우리들의 실체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드러나고 있는 한국교회,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돈과 권력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 오로지 자신의 안전에만 목메는 사람들, 오늘 헤롯처럼 참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기적에나 관심이 있는 사람들, 힘없고 가련한 소수자들을 사회질서를 어지럽힌다고 고발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누가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심판을 받는 자리와 지금 한국교회가 심판을 받는 자리는 너무나 다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재판하고, 고발하는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를 고발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편에 서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신명기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이상 버틸 힘이 남지 않았을 때, 당신의 백성들을 심판하시고, 종들을 불쌍히 여기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활동하시는 그 때에는 그들이 의지하고, 피난처로 삼았던 이방 신들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피난처로 삼은 사람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지만, 끝까지 다른 신들을 의지한 사람들은 의지할 곳이 없어 무너지거나 심판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고, 세상의 방식, 힘의 방식을 고집한다면, 사랑과 연민으로 세상의 변혁을 꿈꾸는 자리에 서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이제 고난주간을 앞두고 있습니다. 사순절의 마지막, 고난주간에 참여하시면서, 그리고 심판대에 선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가 어떤 자리에 서야 하는지 깊이 묵상하게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서야 할 자리는 나의 안전을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안전을 위한 자리입니다. 특별히 힘없고 가련한 이들의 안전을 위한 자리입니다. 가장 연약한 이들이 안전할 수 있을 때, 우리 모두가 안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과 연민으로 세상을 변혁시키려고 할 때, “네가?”라는 조롱 섞인 질문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멸시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힘과 권력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이들을 닮아가려는 유혹과도 마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맙시다. 용기를 잃지 맙시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우리의 편이 되어 심판하실 하나님을 믿으며, 사랑과 연민의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며 나아갑시다. 예수님이 서신 자리, 하나님 계신 그 자리를 떠나지 맙시다.
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께서 서신 곳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여전히 홀로 서 계신 주님을 보게 됩니다. 저희의 연약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사순절 기간 동안 주님의 사랑과 희생을 깊이 묵상하고 새기며, 우리가 주님께서 계신 그 자리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게 하소서. 우리에게 신뢰와 용기를 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여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