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육성한 목사] 지혜의 자녀들 – 2022년 3월 27일
역대지하 7장 11-20절, 시편 78편 1-8절, 누가복음서 7장 28-35절
[변화가 필요해]
개신교 목사가 길을 가던 중 한 아이에게 우체국으로 가는 길을 물었습니다. 다행히 그 아이는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줍니다. 고마움을 느낀 목사는 자신도 무언가 도움을 주고 싶어 말은 건넵니다. “너 정말 친절한 아이구나, 내가 특별히 천국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 줄 테니 우리 교회로 설교를 들으러 오지 않으래?” 고개를 갸우뚱하던 아이가 대답합니다. “에이~ 농담하지 마세요. 아저씨는 우체국 가는 길도 모르잖아요.”
교회와 관련한 가벼운 유머이지만, 목사로서 뼈를 맞은 듯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체국 가는 길을 모른다고 해서 천국 가는 길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그냥 가볍게 넘길 수 없었던 이유는 교회에 그 어떤 기대도 없는 오늘날 많은 이들의 정서가 그대로 반영된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까지 더는 교회에 어떤 희망도 품지 못하고 떠나가는 것이 이제 익숙한 일입니다. 코로나 19 이후로 그 속도는 빨라집니다. 탈교회화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삶을 억압하고 괴롭게 했던 이들에게는 교회를 떠나는 것 자체가 참 자유를 주기도 합니다. 또 진지하게 신앙의 길을 가고 싶었던 이들에게는 교회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 다시 한번 진지하게 물을 기회가 되고, 더 나은 신앙을 위해 적극적으로 대안을 찾는 사람들도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우려되는 부분이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목회자 입장에서 앞으로 교회 자체가 존립할 수 있을지가 현실적으로 가장 큰 걱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걱정되는 것은 제 주변만 봐도 요즘 젊은 세대가 교회뿐만이 아니라 종교 가치에 대한 관심이 전무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회가 도덕이나, 윤리적 기준, 시대의 정신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종교적 가치, 그리스도교의 가치가 아주 버려지고 그저 돈이나 권력, 명예를 궁극적 관심으로 매달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듭니다.
사실 이러한 현실은 지금까지 한국 교회가 만들어 온 결과라는 것을 부정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교회가 정말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이고, 그리스도교의 가치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민주화와 같은 우리 시대의 굵직한 역사적 사건이나, 다양한 사회 현장에서 그리스도교의 참면목을 보여준 훌륭한 신앙인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한국 교인과 목회자들은 세상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거나 오히려 세상에 실망을 안겨주는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곤 했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행적과 그가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미래의 세대에게 전하여 줄 것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세대가 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신앙을 후대에 전하고 이어나가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믿음을 이어나가고자 애쓰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교를 달가워하지 우리 사회에서 신앙을 전하고 이어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받은 신앙의 유산을 전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어떤 변화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신앙의 방향]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역대지하의 말씀은 솔로몬이 주님의 성전과 왕궁을 성공적으로 완성하고,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이 성전을 받겠다는 응답을 주시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간구대로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완성한 성전을 제사를 받을 곳으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곳에서 드리는 기도를 귀담아 들어주시고, 이곳을 거룩하게 하시고, 주님의 눈길과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에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당부와 경고의 말씀도 함께 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변하여 주님의 율례와 계명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겨 숭배하면, 주님께서 친히 거룩하게 구별한 성전일지라도 가차 없이 버리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역대지하 말씀은 성전의 중요성과 당위성을 강조하면서도 아무리 성전이 중요할지라도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율례와 계명, 그리고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이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온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거처이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 성전과 같은 집은 필요가 없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과 관계 맺고 소통하길 원하는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끊고자 할 때,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저버릴 때, 화려하고 멋지게 지어진 성전일지라도,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하셨을지라도 더 이상 쓸모가 없어져 버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윌리엄 스트링펠로우는 <사적이며 공적인 신앙>이라는 책에서 “종교는 하느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실제 삶과도 거의 관련이 없다. 종교와 관련이 있는 것은 오직 종교뿐이다…. 교회들, 특히 개신교 교회들은 복음보다는 종교에 몰두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삶의 구체적인 영역, 그리고 공적인 영역까지 확대되어야 하는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교회 안에서 자취를 감추고 교회가 그저 축복을 빌어주고, 종교적 감수성만 충족시켜주는 기능만 하고 있다는 비판합니다. 소명을 잃은 교회, 복음의 능력을 상실한 많은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처럼 세상 사람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우리 사회에서 달가운 존재로 다시 거듭나려면, 세상으로부터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려면, 그리스도교 신앙 전해지려면 우리 신앙의 방향 바꿔야 합니다. 지금까지 많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자신과 교회를 향해 있었습니다. 신앙이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으로 국한되었고,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거나, 자신의 교회를 유지하는 역할 정도만 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분명 우리의 신앙이 교회 안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나 하나 편하고, 복 받고, 만족하는 신앙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으로 어떻게 세상을 살릴 수 있을까를 더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방향은 이제 안이 아니라 밖을 향해야 합니다.
[신앙이 자리]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서 본문은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 대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고 말씀하시며 그를 높이십니다. 요한이 펼친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옳으심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했던 사역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분으로 곧 오실 것이니, 세례를 통해 죄를 회개하고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합법적으로 죄 사함을 받는 희생 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용서받고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의 세례 운동은 바로 이것을 무너뜨립니다. 가난한 사람도, 힘이 없는 사람도, 임박한 하나님의 통치를 맞을 준비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 누구나 요단강에서 몸을 씻는 행위를 통해 깨끗하게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 운동의 새롭고 위대한 지점이었습니다.
또 백성들은 광야로 나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다시 유대 땅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요단강을 건너 약속으로 땅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불의한 세상이 전복될 것이라는 꿈을 꾸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의 식민지배 속에서 좌절과 절망에 빠져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한의 세례 운동은 한 줄기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는 이러한 요한의 운동을 거부합니다. 이들은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며 경건한 자로 여겨지던 사람이었습니다. 일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율법에 관련해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고 여겨지는 이들임에도, 새롭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참뜻에는 무감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세례 요한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거부하며 비난합니다. 요한에게는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 그는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합니다. 또 예수께는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합니다.
이 반대자들의 비난은 모두 식사 관습과 연결됩니다. 당시 식사 관습은 아주 일상적이지만, 동시에 한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같은 계층끼리 식사를 했기에 누구와 식사를 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계급과 배경 등이 명확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식사를 거부합니다. 이것은 유대 사회의 계급과 질서에서 자신을 스스로 제외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뜻을 담보하지 못한 권력자들에 의해서 구성되고 제단 된 계급 질서를 거부하고 이제 곧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과 통치, 그리고 새로운 질서를 기다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처럼 식사 자리를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아주 차원이 다른 식탁 교재를 여십니다. 율법에 의해 교제가 허용되지 않는 그런 이들을 초대하신 것입니다. 이는 유대 사회의 거룩하고 신성한 구별을 깨뜨린 것입니다. 세리도, 성 노동자도, 장애인도, 질병에 시달리는 이들도, 어린이까지도 누구나 잔치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고 경험하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는 서로 사랑하는 사회, 부자도 없고, 가난한 삶도 없고, 계층이나 지위의 구분도 없는 평등한 공동체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평등하고, 서로서로 돌보는 공동체 경험으로 인간의 선한 본성을 일으키시고, 탐욕, 시기심, 증오의 문제까지도 해결하고자 하십니다. 예수께서 마련한 개방된 식사 자리에서 그렇게 하나님 나라는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운동은 당시 유대 사회에 큰 균열을 가져옵니다. 율법을 근거로 오랫동안 철저하게 견고하게 유지되고 경계 지어졌던 계급과 질서가 흔들립니다. 거대한 계급 질서의 전환이 시작된 것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예수를 향해 명예와 수치도 모르는 자라고 비난합니다. 사회에서 배제된 이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는 것은 명예가 실추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명예와 수치는 몰랐어도,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과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의 자리를 발견합니다. 신앙의 자리는 우리가 믿는 바를 실천할 수 있는 자리를 말합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서신 신앙의 자리는 사회의 주변부였습니다. 요한과 예수님은 그곳에서 각자의 신앙, 그 믿음을 실천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가 세상에서 의미있는 존재로 거듭나려면 세상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주변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 신앙의 자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요한은 죄 사함을 받을 수 없었던 주변부의 사람들을 죄사함의 자리로 초대해 그들에게 희망을 선물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개방된 식사로 이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나고 쫓겨난 이들을 초대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잘못된 질서와 경계를 무너트려야 할 곳, 자유와 해방을 이루어야 할 곳은 우리 사회와 일상에 너무나 많습니다.
지난 금요일(25일) 아침 지하철 출근길에선 장애인 단체(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의 이동권 투쟁이 진행되었습니다. 지하철역에서 매번 목숨을 걸어야 하는 리프트가 아닌 엘리베이터로 ‘안전하게 이동할 권리를 달라’는 요구입니다. 이를 위해 장애인 이동권을 위한 정확한 예산 편성도 촉구하였습니다. 지하철 엘리베이터 설치는 2002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요구해오고 있고, 100%로 설치를 매번 약속받지만 20년에 이르도록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매년 리프트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는 사고가 생기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장애인 이동권은 비주류, 주변부, 부차적인 사안일 뿐입니다. 그들이 투쟁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시위를 할 때마다 매번 수많은 모욕과 심한 욕설에 시달리는데, 어제는 정당의 대표라는 사람은 이들이 “서울 시민의 출퇴근을 볼모로 잡는다며” 시위를 폄하합니다.
우리 사회 주변부, 낮은 곳에서는 여전히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우리가 눈을 들어, 감각을 깨워 볼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낮은 곳을 향하는 감각]
오늘 누가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지 못하는 이들을 장터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았고, 애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 어린이들에 비유하십니다. 부모님과 함께 장터에 나온 아이들은 부모가 장을 보는 동안 아이들끼리 장터에 모여서 놀이를 합니다. 자기들끼리 결혼식 놀이도 하고 장례식 놀이도 합니다. 놀이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은 아이가 피리를 불면 나머지 아이들은 춤을 춥니다. 반대로 슬피 울면 나머지 아이들은 가슴을 치면서 함께 슬퍼합니다. 간단한 놀이입니다.
그런데 피리를 불어도 아이들이 춤을 추지 않습니다. 울어도 울며 가슴을 치지 않습니다. 적절한 반응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요한의 세례 운동과 예수님의 사역에서 낮은 곳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하고, 이 신앙에 동참하지 못하는 무감각한 이들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에서 함께 예배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계획은 지금도 지혜의 자녀들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주변부, 낮고 낮은 곳, 진정으로 복음이 필요한 곳으로 시선을 돌려 보십시오. 우리는 그곳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의 감각을 깨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 더욱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시선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곳에서 우리가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을 살리는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이 사회의 그늘에서 겸손히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나씩 하나씩 해나갈 때, 우리가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지혜의 자녀들이 될 때, 우리의 믿음과 신앙은 멈추거나 끊기지 않고, 세상 속에서 영원히 이어질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하나님, 저희가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우리의 신앙이 교회 안에 매몰되지 않게 하시고 세상을 향에 뻗어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하소서. 돈과 권력이 지배하는 질서 속에서 순응하고 쫓아 살기보다, 주변부로 밀려나고 쫓겨난 이들을 바라보게 하소서. 예수께서 낮은 곳에서 당신의 믿음을 보여주셨으니, 저희도 그렇게 낮은 곳에서 믿음의 능력을, 복음의 능력을 보일 수 있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우리의 믿음은 교회 안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향해, 낮고 낮은 곳을 향해 우리의 믿음을 당당히 보여줍시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거룩한 친교가 우리의 믿음을 이 세상 낮은 곳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생명사랑교우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모든 이들 위에, 이 세상 그늘에서 고통받는 모든 이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 감사기도
은혜의 주님, 이 시간 정성을 모아 귀한 예물을 드립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며,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저희 삶에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니 넘치는 감사를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으로부터 온 충만함과 감격으로 저희도 주님께 기쁨으로 드리게 하여 주소서. 저희가 세상의 헛된 욕망과 욕심을 버리고 주님 주신 것에 주목하며 늘 만족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가질 때 보다 이웃과 나눌 때 더 큰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안의 감사와 기쁨으로 더욱 신실한 믿음직한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소서. 물질뿐만 아니라 삶으로 드리는 저희의 예물도 온전히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게 하여 주소서.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을 기억하고 감사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