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성한 목사] 주님, 그 빵을 언제나 우리에게 주십시오. – 2024년 8월 4일
출애굽기 16장 9-15절, 요한복음서 6장 24-35절
[올림픽 정신– 평화와 화해]
하늘의 능력과 새로운 힘을 주시는 성령께서 장마와 더위로 지친 여러분의 삶을 위로하시고, 열정을 잃은 신앙과 믿음이 있다면 이 시간 뜨겁게 하시길 소망합니다.
매서웠던 장마가 지나갔습니다. 평년 강수량의 1.3배의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올해도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분들이 생기고, 삶의 터전에 큰 피해들이 있었습니다. 장마가 끝나니 앞으로 폭염이 이어진다고 합니다. 이전보다 더 뜨거운 날이 길게 계속되니 특별히 건강을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더불어 기후 붕괴의 시대에 우리보다 어려움을 먼저 겪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도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전 세계는 날씨뿐만 아니라 올림픽의 열기로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파리에서 열린 이번 올림픽에서도 우리나라 선수들은 구슬땀을 흘리며 선전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펜싱, 양궁, 탁구, 사격 몇 종목만 주목해서 보고 있는데 매번 영화 같은 멋진 장면이 펼쳐져서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한번 보기 시작하면 중간에 멈추기가 힘들어서 이번 설교를 준비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탁구 혼합 복식 시상식 장면이었습니다. 이번 올림픽 시상식에는 ‘빅토리 셀피’라는 순서가 있었는데, 메달을 딴 선수들이 함께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시간입니다. 동메달은 우리나라의 임종훈, 신유빈 선수가, 은메달은 북한의 이정식, 김금용 선수가 수상했는데, 이들이 시상식에서 웃으며 함께 사진 찍는 장면이 세계인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외신들은 남한과 북한 선수들이 함께 웃으며 사진을 찍는 모습에 크게 감동하며, 적대적인 한반도 상황을 넘어 평화와 화해라는 진정한 올림픽 정신을 보여주었다고 극찬했습니다.
올림픽이 열리면 전쟁을 중단하고, 스포츠 경기를 통해 평화와 화해를 도모하는 것이 올림픽의 근본정신이자 중요한 전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림픽 기간 동안은 일체의 적대 행위를 중단했던 고대 그리스 전통을 기념하기 위해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제안을 했고, 1994년 릴레함메르 올림픽 때부터 올림픽 기간에는 휴전하는 일들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지금 파리 올림픽이 진행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과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이 휴전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를 어떻게 믿느냐”고 하며 휴전을 즉각 거절했고, 러시아도 “우크라이나가 휴전 기간 동안 재무장할 수 있다”며 반대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마스와 이스라엘 전쟁도 마찬가지로 중동으로 확전되고 있습니다. 세계 각국의 분쟁들은 계속됩니다. 평화의 정신은 사라지고 상업적이고 경제적 득실로만 물들고 있는 올림픽 풍경 속에 남북 선수들의 미소가 함께 담긴 이 사진 한 장은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상기시켰습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함께 읽은 출애굽기 말씀도 우리에게 중요한 신앙의 가치 그 의미를 잊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하나님이 내려주신 하늘의 양식,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입니다. 모세의 인도 아래 애굽의 노예 생활에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길을 떠납니다. 물과 그늘이 있었던 엘림 지역을 떠나 신 광야에 이르게 되자 이들에게 다른 어려움이 닥칩니다. 낮에는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에 고통스럽고, 밤에는 매서운 추위가 몰아칩니다. 설상가상으로 먹을 음식마저 부족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먹을 양식이 없어 굶주리게 되자 원망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은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애굽에서 탈출하며 경험한 놀라운 이적들, 강한 오른팔로 이끄신 야웨 하나님의 능력을 보며 앞으로 펼쳐질 날들에 대한 희망과 꿈으로 부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대와 다르게 먹을 것이 없어 광야에서 굶어 죽게 생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차라리 노예였지만 ‘애굽의 고기 가마 곁에서 배불리 음식을 먹던 때’가 나았을 것이라고 불만을 토로합니다.(16:3) 물론 이들이 정말로 고기 가마 곁에서 배불리 먹을 정도로 풍요로운 생활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금의 허기짐도 견디기 힘든 우리는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원마오가 불평에 즉각 응답하십니다.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아침에는 만나를 내려주시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십니다. 민수기 11장 4절 이하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것을 요구하는 이야기가 똑같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민수기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고기를 먹고 싶어 불평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하나님은 그런 탐욕을 질타하시며 심판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민수기 본문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고, 불평하는 불신앙의 모습을 보인다면 정확한 심판이 있다는 의미를 전합니다. 그러나 오늘 출애굽기 본문에서 백성들의 불평에 하나님은 노하시거나 심판하시지 않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십니다.
오늘 본문 앞에는 마라의 쓴물 사건(15:21-27)이 있습니다. 수르 광야를 걷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어 불평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쓴물을 단물로 바꾸셨습니다. 이들은 이미 광야의 어려움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극복한 경험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배고픔이라는 어려움이 찾아오자 배려하고 돌보셨던 하나님을 생각하기는커녕 바로 망각하고 불평을 쏟아 놓았습니다. 오늘 출애굽기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은총을 금방 잊고 잦은 원망을 하더라도 야훼 하나님은 한없는 긍휼로 보살피시고 넘치는 은총을 내리시는 분임을 알려줍니다.
만나 이야기의 결론부인 출애굽기 16장 31절에서 36절에는 ‘만나 한 오멜을 주님 앞에 두어서, 대대로 간수하게 하라’는 모세의 요청으로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 광야에서 자신들을 먹이셨던 하나님을 대대로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의 핵심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은 일에 있지 않습니다. 하늘의 양식을 내리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 야훼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고 배려하시는 은총의 주님임을 어떤 어려운 순간에도 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을 따른다면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고 말합니다.
[껍데기를 향유하는 우리]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허락하신 주님을 잊고 중요하지 않거나 부차적인 것, 어쩌면 본질이 아닌 것만 기억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요한복음서 본문에서 오병이어 기적을 경험하고도 그 기적의 본질은 보지 못하고 그저 빵을 먹고 배불렀던 경험 때문에 예수님을 찾았던 이들처럼 말입니다. 깊은 뜻, 그 본질은 보지 못하고 껍데기만 누리는 것입니다.
볼링이라는 스포츠를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익숙한 이 볼링에 중요한 신앙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중세 유럽에서 볼링은 사제들과 수도사들이 하던 영성 훈련이자 종교적 의식이었습니다. 당시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지금은 볼링핀에 해당하는 케겔(곤봉)을 복도에 세워 놓고 둥근 나무 공을 굴려 쓰러트렸는데, 수도원에서는 케겔을 악마의 상징물로 삼았고 그것을 쓰러트리는 것을 사탄을 무찌르는 것으로 의미부여를 했던 것입니다. 볼링핀을 많이 쓰러뜨리는 사람은 신앙심이 좋고, 영성이 깊은 수도사로 평가되었습니다. 볼링이 신앙과 영성의 판단 기준이라면 아마 저는 목사로서 자격 미달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자녀들이 생긴 사제들은 어떻게 신앙을 계승할지 고민이 생겼고, 볼링을 통해 신앙을 계승합니다. 우리가 아는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볼링의 세부적인 규칙을 만든 사람입니다. 루터는 볼링핀 9개를 놓고, 공을 2번 굴리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성서와 전통으로 전해지는 사탄 이름들을 하나씩 볼링 핀에 적었고 사탄의 이런저런 유혹을 하나씩 설명하면서, 공을 굴려 쓰러트리는 교육한 것입니다.
유럽을 넘어 미국으로 볼링이 넘어갔을 때는 종교적 배경이나 볼링핀이 가진 의미, 유래 등은 다 사라집니다. 돈을 거는 사행성 게임으로 전락해 금지하는 일까지 생겨납니다. 하나의 종교적 행위가 세속화되고 타락의 길을 가게 된 것이죠. 볼링이 금지됐다가 새로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볼링핀이 10개로 바뀌고, 시간이 흘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볼링을 예로 들었지만, 우리가 본질을 보지 못하는 순간, 본말이 전도되는 일은 언제나 있습니다. 교회 출석, 예배, 기도와 같은 신앙의 형식적인 측면은 강조하지만, 진정한 신앙의 본질인 사랑, 자비, 용서, 겸손 등의 가치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그러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일주일에 한 번 예배에 출석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특정한 교리를 지나치게 내세우는 것, 기독교 신앙을 통해 물질적인 복을 누리는 것에 집착하는 것,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이 사회와 공동체의 어려움은 외면하는 것도 본질을 잊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 삶에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자 선물입니다. 우리가 입고 먹고 누리는 모든 것이 말이죠.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망각하고 먹고사는 문제에만 매몰됩니다. 썩지 않을 양식을 구할 때, 썩을 양식도 주어진다는 것이 우리 신앙의 본질이자 신비이지만 우리는 이것을 늘 놓칩니다.
[썩지 않을 양식을 위해 일하라!]
오늘 요한복음서 본문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이들은 빵을 기대합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경험하고, 아니 정확히는 배부름을 기억하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배고팠던 이들이 예수께서 베푸신 기적을 통해 만족함을 느꼈고 그래서 다시 찾아온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음식으로 배불렀던 경험을 넘어 진실을 보길 바라셨습니다. 외피가 아니라 속뜻을 제대로 깨닫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썩어 없어질 양식을 위해서 애쓰고 매달리기보다, 썩지 않을 양식! 세상에 참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에 주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먹고사는 문제를 가볍게 여기시거나, 썩을 양식이 필요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함께 먹고 사는 일에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언제나 먹고 마시는 잔치가 일어났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보다 더 중요한 것, 먹고 마시는 현상을 넘어서는 가치를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 다시 찾아온 이들에게 예수님은 기적을 한 번 더 베푸시어 굶주린 이들을 먹이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썩을 양식이 넘치게 만드는 일이 진정한 구원, 참 생명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의 세상은 어느 때보다 부유하고 풍요로운 시대입니다. 먹을 것이 넘쳐납니다. 아무리 경제가 어렵다고 해도 TV에 나오는 유명 맛집에는 줄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배부른 시대이지만 여전히 먹지 못해 죽는 이들이 있습니다. 식량농업기구(FAO) 등 유엔 5개 기관이 발표한 ‘2024년 세계 식량 안보 및 영양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에 약 7억 3340만 명이 기아로 고통받고 있다고 합니다. 전 세계 인구의 9.1%, 그러니까 11명 중 1명이 먹지 못해 목숨의 위험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절반은 왜 굶주리는가?>라는 책에서 장 지글러가 날카롭게 비판했던 현실은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120억명이 넘게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있음에도 하루에 10만 명이, 5초에 한 명의 어린이가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기아 인구는 2019년까지 줄어드는 듯했지만, 이후 매해 늘어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그리고 남수단, 예멘, 시리아, 아이티 등의 내전이 식량 불안에 처한 이들을 증가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이 진정 빵일까요? 어쩌면 이 세계가 고통 가운데 있는 것은 썩어 없어질 양식을 끊임없이 구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썩지 않을 양식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없고, 썩어버릴 것만을 구하는 이들이 늘어났기 때문은 아닐까요. 인도 켈거타에서 빈민과 병자, 고아, 그리고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친 빈자의 성녀 마더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굶주린 것은 먹을 식량이 없어서가 아니고 우리가 나누지 않아서이다.’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지금 필요한 것은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원히 사라지 않을 가치인 사랑입니다.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감각입니다. 예수께서 썩지 않을 양식을 위해 일하라는 것은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 우리가 이런 가치를 위해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사랑을 전하고, 생명의 가치를 일깨우는 삶을 살아간다면, 세상에 생명을 꽃피우는 동시에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며,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한다는 것을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그러나 오늘 요한복음서 본문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당신처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수천 명을 먹이는 일을 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내 삶을 너희가 그대로 받으라고 하십니다. 이들은 다시 묻습니다. 모세는 우리 조상에게 만나를 내리어 먹게 하였는데, 당신은 어떤 표징을 보여서 믿게 하겠냐는 것입니다. 이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속뜻을 보지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여전히 먹고 사는 문제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속뜻, 그 본질을 다시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만나를 내리신 분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예수께서 주고자 하시는 참 생명, 참 빵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말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생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기적이 아닌 것이 없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의 존재를 위해 수많은 생명이 지탱해주고 있고 다른 피조물들이 자신을 끊임없이 내어주고 있습니다. 끝을 알 수 없는 드넓은 우주 안에 내가 지금 없지 않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만 눈이 쏠려 정작 봐야 할 달은 못 보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가리키는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 내면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썩을 양식으로만 우리 안을 채우고 하나님은 비웠던 것입니다.
우리가 매주 모여 예배를 드리고 끊임없이 찬양하고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세상 속에서 어두워진 하나님을 향한 감각을 깨우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안을 끊임없이 비우고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주목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껍데기를 향유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 내면이 하나님으로 가득 차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참 생명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뜻으로 충만한 사람은 세상이 끊임없이 갈구하는 썩을 양식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짐처럼 느껴지고 목마르고 허기지던 존재가 가벼움과 충만함을 느낍니다. 예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우리 모두에게는 하늘에서 내려와 생명을 주는 참 빵이 필요합니다. 자기에게 집착하고, 근심이 많고, 교만하고, 분노하고, 반목하고, 폭력적인 우리에게는 사랑의 삶, 참된 생명이 필요합니다. 여전히 분단과 냉전을 이어가는 한반도에, 사람의 탐욕으로 부서진 지구와 기후 위기로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차별과 배제, 소외를 경험하는 약자와 소수자들에게, 불의한 권력에 생명을 빼앗긴 모든 이들에게 사랑과 생명을 주는 하늘의 빵이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우리가 눈을 떠 그 빵을 보고 믿으라고 하십니다.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시라고 하십니다. 우리 안을 비우고 하나님으로, 예수님의 삶으로 채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썩을 빵이 찾는 이들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이 되라고 하십니다.
수가 마을에서 주님께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샘물을 구했던 여인처럼(4:15) 오늘 예수님을 찾아온 이들도 자신들이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속뜻, 그 본질을 기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그분이 사셨던 그 삶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빵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함께 주님께 간절히 구합시다.
“주님, 그 빵을 언제나 우리에게 주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믿사오니, 내 안에 주님을 모시오니 영원히 주리지고, 목마르지도 않게 하옵소서.”
*설교 후 기도
기도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놀라운 사랑과 은총에 감사드리며, 우리의 삶 속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자주 본질을 잊고,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합니다. 우리 삶에 수많은 은총과 선물을 주신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주님, 우리를 깨우쳐 주시고 눈을 들게 하시어 주님만을 보게 하소서. 우리의 내면이 하나님의 뜻으로 가득 차 생명의 빵이신 예수처럼 우리도 세상의 생명을 주는 존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보냄의 말과 축도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우리 안을 하나님의 뜻으로, 예수님의 삶으로 가득 채웁시다. 그렇게 우리도 생명의 빵이 됩시다. 우리가 하늘의 생명으로서 살아갈 때만이 우리는 영원히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입니다.
축도하겠습니다.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거룩한 친교가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빵이 되고자 결단하는 생명사랑 교우들 위에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 감사기도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모두 다 주님의 것, 온 누리와 그 안에 살고 있는 것도 주님의 것이다(시24:1) 1장 찬송 부르며 주님께 봉헌하겠습니다.
저희를 푸른 풀밭과 맑은 시냇물로 인도하시어, 철따라 꼴과 시원한 물을 먹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으로 인해 저희가 생기를 얻습니다. 험악한 세상에서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우리를 지켜주심도 감사합니다. 주님으로 인해 오늘도 생명을 누립니다. 잘못된 길로 들어설 때, 목숨을 바치는 목자가 되어주시어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주님은 찬양받기 합당하시니 저희가 당신을 예배하는 자리에 섭니다. 저희의 평생에 주님의 선함과 인자하심이 함께 하시길 소망합니다. 주님 곁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게 하옵소서. 주님께 받은 이 모든 것에 감사드리며, 거두어 가신 것에도 감사드리며 예물을 드립니다. 주님 받아주시고, 주님 뜻을 위해 사용하옵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