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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성한 목사] 연약함이 들려주는 구원의 속삭임 – 2024년 12월 25일 성탄절

누가복음서 2장 1-12절

[성탄절 인사]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누가복음서 2장 14절)

성탄의 날이 밝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여러분의 삶과 어둡고 그늘진 곳에 기쁨의 소식이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의 세계, 특별히 지금 한국 사회의 현실은 어둡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둠을 뚫고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아무리 깜깜한 밤일지라도 아침은 밝아 오듯 이 세계의 어둠이 그 위세를 아무리 떨친다 하여도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고, 우리 주님께서 변치 않고 영원히 비추시는 빛 아래 결국 굴복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꺼져가는 희망은 다시 일어날 것이며, 회색빛 세상은 다시 아름다운 제 색을 찾을 것이고, 침울한 적요는 깨지고 기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올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함께 환한 웃음으로 서로 인사합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성탄절은 꿈과 소망이 가득한 시간입니다. 어린이들은 그동안 쉽게 가질 수 없었던 선물을 산타 할아버지에게 받기도 하고, 도시 곳곳을 장식한 크리스마스 트리에는 소원을 적은 종이가 주렁주렁 걸립니다. 여러분은 반짝반짝 빛나는 트리에 어떤 소원을 적어 달고 싶으신가요? 그런데 이런 풍경은 부처님 오신 날이나 성탄절이나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힘은 언제나 바라는 것에 비해 작고, 그래서 이루기 힘든 소원을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존재에게 빌어보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라는 존재, 그 이름은 모자란 힘을 충족시켜주고,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대상이 된 것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칭송하며 ‘전능하신 분’, 우리의 ‘구주’라고 부르지만, 이것은 어쩌면 힘을 숭배하는 것과 크게 달라 보이진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서의 말씀에서 주님의 천사는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목자들에게 전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 ‘주님’은 우리의 입에 붙은 자연스러운 수식어지만, 1세기 사람들에게는 매우 특별하고 한편으로는 등골이 오싹하는 단어였습니다. 오늘 1절에 등장하는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칭호였기 때문입니다. 또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을 잉태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며 했던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는 말도 ‘신의 아들’, 로마 황제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누가복음서는 천사의 입을 빌려서 바로 그리스도, 주님, 신의 아들이라는 강력한 힘을 상징하는 호칭을 예수에게로 가져옵니다. 이것은 당대에 매우 위험한 도발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서가 예수님에게 이 칭호들을 부여함으로 예수께서 로마의 황제와 같은 존재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야말로, 예수께서는 로마의 황제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진 분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 구유에 누이신 연약한 아기의 모습을 하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구유에 누인 그리스도]

오늘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예수님을 숭배하고 싶은 이들에게는 걸림돌이 됩니다. 적어도 마태복음서에서는 동박 박사로 불리는 동방 제국의 왕실 점성술사들이 하늘에 뜬 밝은 별을 보고 새롭게 탄생할 세계의 왕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께 좀 더 맞는 탄생 이야기를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 탄생 이야기는 온통 비천하고 초라한 것 투성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로마 황제의 통치 아래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임신한 채로 황제가 내린 호적 조사에 동참하려고 먼 길을 여행합니다. 해산할 때가 되었지만, 몸 누일 마땅한 방을 찾지 못했습니다. 화려한 조명들로 치장된 도시, 연말의 즐거운 약속들로 손님들이 꽉 차 빈 방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시골 마을에 번듯한 여관이 얼마나 있었겠습니다. 호적 조사로 내려온 사람들로 붐비는 마을, 그저 몸 누일 수 있는 곳이라곤 평범한 이들의 집에 딸린 외양간 뿐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아기 예수는 바로 그곳에서 태어났고, 짐승들이 분비물이 잔뜩 묻은 여물통에 누여집니다. 이 소식을 첫 번째로 듣는 존재도 당시 무시 받고 변두리로 쫓겨나 사는 이들인 목자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낭만적인 성탄절 분위기 속에 이 이야기를 읽어왔기에 우리는 구유에 나신 예수님을 보며 목가적인 분위기 속에 따뜻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조금의 온기도 없고, 찬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는 냉혹한 현실이 깃들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호적 조사를 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마리아와 요셉도 이 호적 조사 때문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올라갔던 것이죠.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과 정확히 부합하지는 않을지라도 예수님 당시, 로마가 지배하던 당시 유대 땅의 현실을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거의 백 년 동안 지속된 로마 제국의 사회적 혼란과 20년 동안 계속된 내전을 끝내고, 로마의 평화를 가져왔던 인물입니다. 원래 이름은 옥타비아누스였지만, 악티움 전투를 끝으로 로마의 전쟁을 종식 시키고, ‘존귀한 자’라는 아우구스투스라는 호칭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누구도 해낼 수 없었던 일을 해낸 그를 향해 ‘신의 아들’이라고 칭송합니다.

그러나 그가 가져왔던 평화는 힘을 통한 평화, 전쟁, 즉 폭력으로 이룬 평화였습니다. 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학살이 계속되었고, 가난한 이들은 한 줌뿐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중 삼중 세금을 바쳐야만 했습니다. 호적 조사는 바로 세금을 걷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로마의 평화는 식민지 지배를 당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착취와 폭력일 뿐이었습니다.

오늘 누가복음서 말씀은 우리의 구주, 구원자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런 가난과 폭력에 시달리는 이들 속에서 아주 연약한 모습으로 태어났다고 선포합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 다른 이의 도움의 손길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아주 연약한 모습이 어떻게 구원의 표징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귀여운 것이 세상을 구한다]

“귀여운 것이 세상을 구한다!”라는 말을 아시나요? 작고 아기자기한 소품이나 귀여운 캐릭터들을 좋아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퍼진 말입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도 이 말에 공감하곤 합니다. 누군가는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 여전히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동글동글하고 알록달록한 색상의 캐릭터가 들어간 소품들을 좋아한다고 흉을 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들은 동그랗고, 보드랍고, 품에 안고 싶은 귀여운 것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귀여운 것을 보고 만질 때 찾아오는 행복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귀여운 게 세상을 구한다는 말에 동의하시나요? 저는 지난주일 우리 교우들의 눈빛을 보면서 이 말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교육부 아이들이 예배 시간에 앞에 나와서 성탄 전야 발표를 할 때, 여러분들의 눈빛과 얼굴은 무장해제 그 자체였습니다. 특히 유아부 아이들이 나올 때는 이 아이들에게 무엇이라도 다 해 줄 수 있는 그런 표정들이셨습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이 아이들을 바라볼 때의 그 선한 눈빛이 정말 좋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이것을 분명 느낄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귀여움, 다른 말로 연약해 보이는 존재를 마주할 때, 우리 안에 잠들어 있던 참 인간성이 드러납니다. 작고 보드라운 살갗을 가진 존재를 보면 자연스럽게 따스하게 대하고 싶고, 활짝 웃게 하고 싶고, 사랑을 주고 싶은 감정이 자신도 모르게 떠오릅니다. 바로 이 감정이 우리를 참사람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여기서 구원의 속삭임이 들리기 시작하고, 평화는 움틉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선은 언제나 저 높은 곳을 바라봅니다. 하늘이 아닙니다. 날카롭게 솟은 빌딩, 높은 자리를 동경하고 그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기를 즐깁니다. 우리를 견고하게 지켜줄 강한 것을 추구합니다. 세계는 언제나 평화를 갈망하지만, 그 어느 국가도 먼저 군비를 줄일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이를 반증합니다. 오늘 누가복음서는 바로 이러한 힘의 지배로는, 폭력으로는 진정한 구원, 참 평화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구유에 누인 아주 작고 여린, 냉담하고 척박한 현실 속에 태어난 한 아기를 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연약함을 바라보는 지금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바로 그것, 우리로 하여금 따뜻하고 선한 행동을 추동하게 하는 그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이라고 말씀합니다.

[연약함이 들려주는 구원의 속삭임]

우리는 이 진리를 너무 선명하게 마주하고 있습니다. 탄핵 정국의 우리 국민이 보여준 아름다운 모습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중 많은 사람이 감동한 것 중 하나는 선결제와 나눔 문화였습니다. 추운 날씨에 집회에 참여하느라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주변 카페나 식당에 수십 수백개의 음료나 음식을 먼저 결재를 해놓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와서 몸을 녹이고 허기를 달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또 어려움을 직면 이들을 향해 망설임 없이 달려가는 모습들도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지난 21일 남태령에서 농민들로 구성된 정봉준 투쟁단의 트렉터 행진이 막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남태령으로 달려가 또 응원봉을 들고 밤새 곁을 지켰다는 얘기는 참 감동이었습니다. 수많은 이들의 연대로 경찰의 차 벽은 열렸고, 행진을 끝까지 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이들이 추위를 견디던 남태령역에는 또 어김없이 수많은 핫팩과 간식들이 쌓였습니다.

매년 대학교수들이 그 해의 사자성어를 뽑는데, 2024년 올해 교수들이 선택한 사자성어는 ‘도량발호(跳梁跋扈)’입니다. 뛸 도(跳), 들보 량(梁), 밟을 발(跋), 뒤따를 호(扈)로 이루어진 이 사자성어의 뜻은 ‘권력이나 세력을 제멋대로 부리며 함부로 날뛰는 행동이 만연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의 권력 잡은 이들이 자신의 힘만 믿고, 날뛰며 폭력으로 우리의 평화를 앗아갔지만, 우리 시민들, 민중들은 서로의 연약함에 주목하고 보듬으며 어둠 속에서 폭력 속에서 참된 인간성을 발현시키고 진정한 평화를 이루어 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구유,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셨습니다. 포대기에 쌓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충만한 이 아침 포대기에 쌓여 구유에 누이신 그 연약한 아기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의 굳고, 날 서고, 거친 마음과 행동을 모두 내려놓으십시오. 여러분 안에서 일렁이고 속삭이는 연민의 마음, 따스한 손길을 건네고 싶은 마음, 내 것을 기꺼이 내어주고 싶은 마음, 부드럽고 말랑한 마음, 그 사랑에 주목하십시오. 우리의 구원, 평화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놀라운 사랑의 하나님, 높은 하늘의 영광을 뒤로하시고 가장 낮고 연약한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를 바라볼 때, 우리의 굳어진 마음은 부드러워지고, 차가운 손끝은 따스해지며, 분노와 슬픔으로 얼룩진 이 땅에 희미한 빛의 속삭임이 들려옵니다. 주님, 그 연약함 속에서 평화의 씨앗을 심으셨으니, 우리의 마음밭에도 그 씨앗을 뿌려주소서. 굳은 마음을 옥토로 갈아엎게 하시고, 서로를 귀하게 여기며, 작고 여린 생명을 돌보게 하소서. 저 높은 권력과 힘의 숭배가 세상을 구원하지 못함을 알게 하셨으니, 우리도 낮아지게 하시고, 연약함 속에서 강함을 찾는 믿음을 주소서. 약한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감사기도

거룩한 하나님, 가장 낮은 곳에 오셔서 우리의 연약함과 어둠을 품으신 주님,이 아침, 우리의 손과 마음을 모아 당신께 봉헌의 예물을 드립니다.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를 기억하며 작고 소중한 것을 드립니다. 이 예물이 세상의 슬픔을 위로하고,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평화의 속삭임이 되게 하소서. 우리의 삶을 담아 바칩니다. 이 작은 헌신이 당신의 사랑으로 물들어 희망의 빛을 밝히고 기쁨의 노래가 되게 하소서. 하늘에는 영광을, 땅에는 평화를 드러내시는 성탄의 기적 속에, 우리의 마음도 구유처럼 낮아지고 사랑으로 가득 차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연약함에서 들려오는 구원의 속삭임을 들으십시오.

부드러운 살과 같은 그 마음이

여러분의 삶을 새롭게 하고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될 것입니다.

*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연약한 아기 예수의 모습에서 참구원과 평화를 발견하고자하는

생명사랑교우들 위에, 함께 예배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려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