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육성한 목사] 신뢰하는 삶 – 2022년 5월 1일 교회교육주일
역대지하 32장 1-8절, 시편 105편 1-5절, 누가복음서 16장 1-9절
[교회교육주일/어린이주일]
오늘은 우리 교단이 정한 ‘교회교육주일’입니다. 교회교육주일은 기장의 모든 교회와 교우들이 교회의 현재이자 미래인 어린이, 청소년, 청년을 신앙으로 양육하기 위해 함께 협력하고 기도하는 주일입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는 매년 어린이 주일로 지켜왔고 어린이들이 인도, 기도, 성경봉독, 특별순서 등을 맡아서 예배를 드립니다. 비록 어린이들이 중심이 되어 예배를 드리지만, 교육부에 속한 청소년, 청년들도 기억해주시고 모두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린이들이 장년 예배 시간에 함께 예배를 드리고, 또 앞에서 순서를 맡아 이끌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대견하고, 흐뭇하고, 때론 귀여움에 웃음 짓는 순간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어린이들이 이 자리에서 선 것은 아직 미성숙하지만, 특별한 기회를 얻어서라거나 교육의 일환으로서만 선 것은 아닙니다. 어린이들도 우리 어른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신앙의 주체로 인정하고 존중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어린이와 어른이 서로의 모습과 신앙에서 서로 배움을 얻고자 이 자리에 함께 모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특별히 예수께서 어린이들을 가리키며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런 이들의 것이다” 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어린이들의 모습 속에서 신앙의 모범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발견하시면 좋겠습니다.
[어린이에게서 배운다]
어느 시대나 사회에 상관없이 일반적으로 어린이는 늘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녀는 하나님의 큰 선물이자 축복, 약속의 증표로 여겨져 왔습니다. 어린이가 장차 야훼 하나님 신앙을 이어가야 했기에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일정한 시간을 내어 부지런히 하나님이 자신들을 이끌어 주신 역사와 말씀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또 자녀들을 통해 자신들의 이름과 역사가 이어지니 아이들이 복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축복하는 일도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어린이가 소중한 존재로 인식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동시에 늘 힘없는 가장 작은 자들이었습니다. 어린이들은 부모의 절대적인 권위 아래 엄격한 순종을 강요받거나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에 시달리기도 했고, 12세에 율법교육을 받기 전에는 종교적으로도 미성숙한 존재,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열등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지금은 어린이에 대한 인식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어린이는 열등함과 미성숙함의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요즘 자주 사용되는 신조어로 헬스 초보자를 ‘헬린이’, 주식 초보자를 ‘주린이’라고 부르곤 하는데, 어린이를 부족한 존재로만 규정하는 차별적 언어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제대로 존중받고 있지 못한 이런 어린이를 예수님은 아주 특별하게 대우했습니다. 어른들은 예수께 가까이 오는 어린이를 말씀을 들을 귀가 없다며 밀어내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어른들의 중심에 세우시고, 이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이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를 위대한 믿음의 선조들처럼 아주 중요한 신앙의 모범으로 제시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장 작은 자인 어린이를 하나님 나라 입구에 놓으시고, 신앙의 모범으로 제시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께 가졌던 온전한 신뢰를 어린이에게서 발견하셨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부모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세상에서 처음 마주하는 수많은 두려움을 극복합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낯설고 두려운 그 모든 것을 오로지 부모만 믿고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아이들이 부모에게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세상을 향해 도전하는 그 모습을 하나님을 믿는 어른들도 본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어린이와 같은 신뢰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세상을 향해 두려움 없이 자신을 내던지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신뢰로 세상 권력들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으시고 죽음을 수용하면서까지 세상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어린이와 함께 예배하는 이 시간 우리도 이 작은 아이들을 보며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회복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신뢰는 희망과 역동의 언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역대지하의 말씀에는 우리가 신앙의 모범으로 삼아야 할 또 다른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히스기야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히스기야가 통치하던 유다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당시 열방의 패권을 쥐고 있었던 앗시리아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남유다까지 점령하러 온 것입니다. 앗시리아의 왕 산헤립은 남유다의 요새들을 수많은 군대로 순식간에 둘러쌉니다. 히스기야는 예루살렘을 지켜내기 위해 서둘러 대응합니다. 외부로 노출된 수로나 샘들은 적에게 물을 공급해줄 뿐만 아니라, 적이 성안으로 들어오는 물을 오염시킬 우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샘줄기를 막고 땅속에 굴을 뚫어서 성 안으로 물을 끌어들입니다.(왕하20:20, 대하32:30) 또 성벽을 견고하게 하고 산헤립의 공격을 막아낼 만발의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과 동일하게 산헤립의 예루살렘 침략을 다루고 있는 다른 평행본문들인 열왕기하나 이사야서의 말씀을 보면 그 내용이 조금 더 복잡합니다. 히스기야가 전쟁을 준비하며 보여준 지략을 더 상세히 보도하기도 하고, 히스기야가 산헤립에게 조공을 바치는 내용(왕하18:13-16)과 이집트와 반앗시리아 동맹을 맺으려고 한 내용(사36:3-6)도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역대지하의 본문은 그런 내용을 모두 생략합니다. 히스기야가 오직 하나님만을 신실하게 신뢰하고 의지하고 있음을 간략하게 보도합니다. 역대기의 저자는 우리 삶에 훌륭한 지략이나 어떤 능력보다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백성들을 향해 말합니다. “굳세고 담대하여야 한다.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아라.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은 앗시리아의 왕과 함께 있는 자보다 더 크시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히스기야는 초강대국 앗시리아의 위협에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누가 보아도 절망하고 포기해야 할 상황입니다. 유다는 절대 앗시리아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좌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위협과 협박이 계속되어도 하나님을 모욕하고, 그분의 뜻을 거스르는 앗시리아에게 굴복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굳세고 담대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꿋꿋하게 해나갑니다.
종종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다는 말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말로 오해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실 것이니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신뢰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하나님께 떠넘기고 두 손을 놓고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불신과 절망을 닮아있습니다. 절망은 우리의 역동을 가로막고, 변화하고자 하는 열망이 사그라지게 만듭니다. 불의 앞에서도, 옳은 일 앞에서도 우리를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우리를 역동적으로 바꾸는 변화를 일으키는 희망의 언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 하시는 일에 귀를 기울이고 주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두고 하나님의 갈망과 나의 갈망을 일치시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그분이 하시는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길은 순탄치만은 않습니다. 절망과 어둠이 가득한 세상에서 빛을 선물하고 선으로 이끄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처한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더라고 그 희망의 몸짓을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승리의 삶, 참된 행복이 있음을 확실히 알기 때문입니다.
[최선의 삶]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지는 삶을 통해 드러납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가 누구를, 무엇을 신뢰하는지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 히스기야가 그러했듯이, 예수의 삶이 그러했듯이 우리 삶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는 표징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누가복음서 비유에 등장하는 청지기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가 살아야 하는 삶의 한 모범을 잘 보여줍니다. 오늘 누가복음서의 말씀은 ‘불의한 청지기 비유’로 잘 알려진 본문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 줄거리는 이러합니다.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으로 인해서 쫓겨나게 된 청지기가 주인과 채무 관계에 있는 이들을 불러서 빚문서를 고쳐 써 주며 주인에게 진 빚을 감면해 줍니다. 그리고 이어서 주인이 나타나 이 청지기를 칭찬합니다.
여기서 잠깐 해석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청지기를 칭찬하는 주인은 헬라어 원어로 ‘퀴리오스’, 즉 ‘주님’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사람을 부자 주인이 아니라 주님이신 예수님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이 청지기의 행동을 칭찬하셨다는 것이 됩니다. 이 비유를 들은 당시 청중들은, 그리고 우리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봐도 부도덕한 일을 한 청지기가 칭찬을 받고, 하나의 모범으로 제시되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 생각하면 청지기가 저지른 행동은 사문서 위조, 사기, 재산권 침해 등의 심각한 범죄입니다. 그런데 과연 자신이 살아남고자 이런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예수님이 칭찬하신게 맞을까요? 칭찬하신게 맞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먼저 부자 주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고대에 한 개인이 엄청난 빚놀이를 할 정도로 부자가 되었다는 것은 결코 개인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의 부에는 수많은 이들의 부당한 희생이 담겨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 9절에서 예수님이 부자의 재물을 불의한 재물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볼 때, 부자 주인의 재물은 부정한 수단에 의해서 쌓은 부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청지기의 행동을 다시 보게 됩니다. 청지기는 지금 불의한 재물로 생겨난 불의한 채무 관계에 흠을 내고자 합니다. 함께 상생하는 삶이 아니라 누군가의 피로 한 사람이 배부르게 되는 잘못된 구조와 맞서 싸우고자 합니다. 불의한 재물을 처분함으로 올바른 인간관계를 되돌리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청지기를 칭찬하신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청기지의 행동을 보며 주인의 재산에 큰 손해를 끼치고 그래서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엄청난 일을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청지기가 감면해 준 기름 오십 말과 밀 이십 섬은 이자에 해당하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두 명의 채무자만 불러 이 일을 진행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청지기가 엄청나게 큰 일을 했다기보다는 해고당하는 처지에서 주인에게 걸리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삶이 꼭 엄청난 변혁을 이루고, 무언가 큰일을 해야 하는 삶은 아닙니다. 오늘 부자 주인의 불의한 재물에 작은 흠을 낸 청지기처럼 우리는 우리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이루고자 하시는 그 뜻이 무엇인지 알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내면 그것만으로도 예수님께 칭찬을 들을 정도로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해나가고 있습니다. 예배드리고, 말씀을 배우는 일뿐만 아니라, 교우들이 함께 중랑천에서 쓰레기를 주우며 산책을 한 일,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며 금식을 하고 모은 헌금으로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한 일, 우크라이나와 산불 피해를 위해 모금을 한 일, <돈룩업>이라는 영화를 보고 환경 문제로 토론을 한 일 등 최근만 보더라도 작지만 귀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우ㅎ리는 앞으로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작은 일들을 계속해나갈 것입니다.
누군가는 그런 일들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냐고, 세상을 구원하겠냐고 말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해내고 주님께 맡기는 일, 내 그릇 크기가 작다면 작은 대로 최선을 다해보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도 캘커타의 마더 테레사 수녀님에게 어느 유럽의 신문기자가 물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님, 수녀님의 헌신적인 봉사에 깊은 존경을 표합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서 수녀님의 이런 구제봉사 활동을 통해서 거대한 인도 사회의 비참한 현실이 바뀔까요?” 마더 테레사가 조용히 대답합니다. “옳아요. 기자님의 말씀이 백번 옳지요. 그러한 능력과 자질과 은사를 받은 많은 사람이 사회를 구조적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에 나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나는 쓰다 남은 작은 몽땅연필,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작은 몽땅연필입니다. 나와 몇 사람, 수녀들의 작은 봉사가 인도 사회를 변화시키지는 못해요. 그러나 한 방울의 물방울일지라도 부족하면, 그만큼 갠지스 강과 큰 바닷물도 한 방울 물이 부족한 강과 바다가 되겠지요”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우리를 붙잡고 계신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오늘 시편 저자가 노래하는 것처럼 주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을 기억해볼 때, 내리신 판단을 생각할 때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붙드시고 인도하는 하나님께 우리를 온전히 내어드리며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해나갑니다. 우리가 멋진 만연필이던지 작디 작은 몽땅 연필이던지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우리를 선한 길로 이끄실 것이라고 믿으며 우리를 쓰시는 대로, 우리가 그분의 뜻을 아는 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최선의 삶을 살면 된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하나님, 갓난아이가 부모를 신뢰하듯 저희도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게 하소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우리가 세상에서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소서. 비록 작더라고, 흔들리더라도, 주님을 신뢰하며 함께 걷는 길을 포기하지 않게 하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신 모든 것으로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한 주간 저희를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맡은 일을 잘 감당하게 도와주신 것도 감사드립니다. 닥쳐온 시험과 시련에 이길 힘을 견딜 힘을 주셨으니 감사드립니다. 삶 속에서 받았던 친절, 도움, 따뜻한 마음, 자연의 내어줌으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그 속에서 주님의 사랑과 온기를 느낍니다. 주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우리의 감각을 깨워주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일상 속에서 다가오는 모든 순간에서 주님의 손길을 느끼게 하시고,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일에서 주님의 계획을 알게 하소서. 그렇게 주님과 함께 사는 삶에서 행복과 즐거움을 느끼게 하시고 감사의 마음이 더욱 피어나게 하소서. 주님을 향한 넘치는 감격과 감사의 마음으로 이 예물을 드립니다. 주님 받아주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우리 주님만을 신뢰합시다. 세상이 믿는 돈이나 권력이 아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줍시다. 절망 가득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들의 희망의 몸짓을 보여줍시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거룩한 친교가 하나님만 신뢰하며 세상을 담대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생명사랑교우들과 함께 예배하는 모든 이들 위에, 푸르게 자라나고 있는 세상의 모든 어린이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