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성한 목사] 그리스도인의 존재 방식 – 2024년 10월20일
이사야서 53장 4-12절, 마가복음서 10장 35-45절
[소유냐 존재냐]
지난 목요일(17일) 슈퍼문(supermoon)이라고 불리는 아주 큰 보름달이 떴습니다. 올해 뜬 달 중에 지구와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달이었다고 합니다. 퇴근길 상계교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중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정말 크고 예쁜 달인 선명하게 떠 있었습니다.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려다가 그저 달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비록 파란불 신호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환한 달의 아름다움을 느끼다 집으로 향했습니다. 우리는 특별하게 느껴지는 순간을 기록하려고 사진을 찍습니다. 그러나 어떨 때는 사진을 찍느라 바빠서 정작 아름다운 순간을 충분히 향유하지 못하고 흘려보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멋진 순간을 오래 소유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정작 내 앞에 있는 그 순간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올해 우리는 “생명사랑 기초신앙도서”를 정했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책들을 교역실에서 정해서 공유했습니다. 한 달에 한 권씩 소개하고 <명랑책방>에서 책의 내용과 읽은 소감, 느낌 등을 교우들과 공유하고 있습니다. 10월 추천도서는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입니다. 정말 유명한 책이고, 많은 분의 사랑을 받아서 읽어보신 분이 많을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이 책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가치 체계를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제목대로 “소유냐, 존재냐”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현대 사회가 “소유”를 중심으로 삶을 추구하고 있는 것을 비판하며 “존재” 중심으로 삶을 전환한 것을 요청합니다.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된 우리 사회는 더 많은 것을 소비하고, 소유하게 합니다. 그런데 프롬은 이렇게 소유함으로 욕망을 충족하는 것이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가를 묻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소유 중심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곧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이라고 인식합니다. 무언가를 소유하는 데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지요. 내가 지금 무엇을 가졌는지가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소유 중심의 가치관으로 제가 저라는 존재를 설명한다면 저는 신학석사 학위를 가지고 있고, 목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고, 준준형 승용차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할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가진 사회적 지위, 재산 등으로 나의 존재를 규정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 체계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소유가 사라졌을 때, 동시에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소유는 영원할 수 없고, 만족감도 일시적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소비하고 소유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무한정으로 소유할 수 없고 언제가 그것을 잃을 가능성이 있기에 소유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은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존재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은 소유와 상관없이 자신의 존재 그 자체에 가치를 부여합니다. 타인과 관계를 맺고 소통하며 진정한 자아를 찾아갑니다. 내면 성장과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실현하는 데서 기쁨을 누립니다. 존재 중심의 삶은 나와 너를 경계 짓지 않습니다.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나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 애쓰지 않습니다. 타인과 관계하고, 사랑하고, 창의적으로 무언가를 하고, 다양한 경험을 하며 자신의 존재를 고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넓혀 나갑니다. 존재 중심인 사람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현재를 누리려고 합니다. 제가 달을 보고 사진을 찍어 소유하려고 한 것이 소유 중심의 삶이라면, 지금 떠 있는 달을 보며 충분히 느끼고 즐기려고 했던 것은 존재 중심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롬은 이러한 존재적 삶의 방식을 통해 사람들이 물질적 소유나 외부적 성공에 의존하지 않고, 내면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소유하지 않는 신앙]
소유냐 존재냐 라는 질문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앙에 있어서도 중요한 물음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가복음서 본문은 우리 신앙에서도 소유 중심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한 과제임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요청으로 시작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요청한 것은 장차 예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될 때,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해달라는 요구였습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 무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길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사역이 이스라엘의 핵심부인 예루살렘에서 펼쳐지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아임이 곧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급한 마음이 생겼는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을 통치하는 자리에 함께 앉게 될 때, 자신들이 그 오른팔과 왼팔이 되게 해달라는 은밀한 소원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어쩌면 솔직해 보이는 이 요구는 예수님과 함께한 지난 시간을 생각할 때, 한심하고 터무니없는 요구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로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 번째이자, 마지막 수난 예고(막10:32-34)를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이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에게 넘어가고, 사형 선고를 받아 이방인들에게 죽게 된다고 말씀하신 직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의 어떤 말씀에도 귀 기울여 듣지 않았습니다. 아니 들었더라도 그 말씀이 자신들은 아무런 관련 없는 것처럼 여깁니다.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소원, 세상 권력을 가지고자 하는 욕망을 예수님을 통해 실현하고자 할 뿐입니다.
프롬이 얘기한 소유 중심의 삶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을 고정해놓고, 경계를 그어놓고, 어떤 대상을 자기 경계 안으로 가져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유 중심의 삶은 무언가를 배울 때, 그저 지식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목적이지, 배운 것이 자신의 삶이나 존재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누군가와 관계할 때, 타자와 소통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주장은 소유물이기 때문에 이것을 결코 포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타자와 관계하면서도 자신의 생각과 입장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사랑할 때도 그 대상을 구속하고 통제하며, 지배하려고 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 곁에서 배웠음에도, 함께 동고동락했음에도 지금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와 요구 사항을 볼 때 그저 예수님을 소유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런 존재가 됩니다. 신앙의 연수가 쌓일수록 하나님께 속 깊은 간구를 아뢰는 시간이 늘어나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소원을 하나님께 털어놓는 것입니다. 종교적 인간의 당연한 욕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동시에 우리가 성찰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진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나의 요구를 들어주는 존재, 전적으로 나의 편을 들어주는 존재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그릇된 욕망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하는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는 독백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털어놓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나의 소원을 하나님 앞에 성찰하고, 내 삶에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고 듣는, 즉 하나님께 온전히 나를 여는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앙의 태도는 하나님을 소유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상 안에 가두고 필요할 때마다 사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도록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 방식]
예수님을 소유하고,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하려고 했던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은 새로운 방향을 보도록 하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이들은 냉큼 할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저 예수님이 마시는 잔과 받는 세례를 영광의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하는 수단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잔과 세례는 예수님이 받을 고난을 상징했습니다. 이 세상을 섬기다 못해, 목숨까지 내어주어야 하는 예수님의 삶을 가리켰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높은 자리, 영광, 명예, 권력을 소유하길 원하는 제자들에게 세상을 위한 섬김과 희생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소유 중심을 벗어나 예수의 제자로,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는 방식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다른 열 명의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한 요청을 듣고 화를 냅니다. 먼저 그 선수 친 이들이 얄미워 보였을까요. 다른 제자들 마음속에도 내심 으뜸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마 먼저 찾아와 요구했던 야고보와 요한이나 이것을 듣고 분개한 나머지 열 명의 제자나 매한가지로 여기셨을 것입니다. 그 깊은 속의 욕망은 같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의 일반적인 통치 방식,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로마의 고관들의 모습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힘으로 내리누르는 방식으로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너희가 그토록 미워하는 로마의 지배자들, 유대 정치종교 권력자들이 행하는 모습과 너희가 속의 품고 있는 욕망이 결코 다르지 않다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실 하나님의 말씀에 영향을 받은 모습보다 세상의 가치관대로 살아갈 때가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아무리 해도 쉽게 변하지 않는 우리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 사역에 동참했지만,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욕망은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달았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소유하고자 한 것은 세상 권력의 다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한 말씀으로 제자들과 우리의 환상을 깨십니다. “나는 너희가 탐하는 섬김을 받는 삶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 생명을 내어주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구원과 우리의 자유 위해]
우리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 방식은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종이 되어 섬기는 삶, 많은 사람을 위하여 생명을 내어주는 삶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눈으로도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하는 솔직한 우리의 마음으로도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쓰디쓴 약을 억지로 먹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몇 번은 어떻게 먹겠지만, 도통 즐거운 마음으로 먹기는 버거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길을 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사야서 53장은 고난받는 종의 노래로 알려진 4개의 노래 중에 마지막 노래입니다. 예수님을 떠올리게 하는 내용 때문에 종의 노래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본문입니다. 이사야서 53장은 암울한 바벨론 포로기 한복판에서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말씀하시며 주님께서 부르시고 세우신 하나님의 종에 대해 노래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읽는 독자는 당혹스러움을 느낍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위해 세워진 하나님의 종은 너무나 초라하고, 그가 감당해야 하는 직무과 사명이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53장은 “주님의 능력(개역개정: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정말 볼품없고, 미약하고, 초라하게 표현합니다. 주님의 능력과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겪고, 병치레를 날마다 합니다. 그러나 이 종이 이토록 고난을 겪는 이유는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종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지금 이 본문을 읽는 우리가 되어도 무방합니다.
오늘 이사야서가 보여주는 고난받는 종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살았던 이들을 상징합니다. 구약 성서의 예언자들은 대부분 극심한 고난을 겪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했을 뿐이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고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선포했지만, 이들에게는 온갖 조롱과 수치, 고난이 찾아옵니다. 특히 예언자 예레미야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겪는 고초로 인해 이렇게 한탄합니다.
“내가 태어난 날이 저주를 받았어야 했는데. 어머니가 나를 낳은 날이 복된 날이 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중략) 어찌하여 이 몸이 모태에서 나와서, 이처럼 고난과 고통을 겪고, 나의 생애를 마치는 날까지 이러한 수모를 받는가!”(렘20:14,18)
예언자들의 고통은 자신들의 죄악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이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고통을 묵묵히 견뎌내고, 백성들의 죄악을 끌어안으며 끝까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내합니다. 결국 이들을 통해 어두운 역사에 구원의 빛이 드리웁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처럼 이 종은 고난 뒤에 생명의 빛을 봅니다.
우리가 소유 중심의 삶과 신앙을 내려놓고, 섬김과 희생의 삶을 택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존재 방식에 세상의 구원이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속 이들이 메시아를 고대했듯이 사람들은 늘 영웅적인 존재를 기대합니다. 다양한 영웅의 모습이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영웅의 역할은 사람들에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기대하게 만드는 사람이고 그것을 이루어 주는 사람입니다. 또 평범한 이들의 갈망과 결핍을 채워주는 존재, 즉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게 해주는 힘있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이만열 작가의 소설 제목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리고 기대하는 영웅은 일그러진 영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돈과 명예, 권력을 갈구하는 이들이 그리는 영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꾸만 어리석은 지도자를 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대하는 삶이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를 가만히 돌아보면 오늘의 세상이 멸망하지 않고 지속될 수 있었던 까닭은 결국 세상의 죄악을 자기 안에 고스란히 품어냈던 이들, 세상의 죄악으로 인한 고통을 묵묵히 감내하며 생명을 내어놓았던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투신했던 이들,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과 희생의 삶을 고스란히 재현하고자 했던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구원할 빛은 우리가 그리는 일그러진 영웅들에게서 아니라,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들, 묵묵히 섬김의 삶을 사는 이들을 통해서 비추어지는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묵묵히 순종하는 길, 섬김과 희생의 길에서 생명의 빛, 참된 자유를 만나게 됩니다. 이 길에서 우리가 그토록 꽉 움켜쥐고 놓치 못했던 우리의 소유를 내려놓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욕심과 세상으로부터 심어진 욕망을 더 큰 가치와 소명 앞에 이제 포기하게 됨으로써 참된 생명,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고난받는 종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이 오해하듯, 이 말씀의 의미를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고 십자가에서 고통을 겪으시며 죽으셨다는 대속의 의미로만 축소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오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섬기며 목숨을 내어주는 삶, 그리고 고난받는 종이 보여주는 삶은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하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어진 것으로 이해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2장 21절에서 오늘 이사야서의 본문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우리는 우리를 위해 고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야 합니다. 세상을 섬기며 묵묵히 고난을 견디는 삶,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존재 방식입니다. 우리 함께 소유 중심의 삶과 신앙에서 벗어나 우리 주님께서 이끄시는 이 길로 나아갑시다.
그러나 거창하고 특별한 일을 생각하기보다 먼저 우리가 삶의 작은 부분에서부터 시작해봅시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존하는 작은 실천들을 묵묵히 해내는 일, 돈이 신이 되는 세상에서 돈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선택해보는 일, 소비와 소유를 강요하는 세상에서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꾸려보는 일, 내가 이해할 수 없고, 나와 다르다고 여겨지는 이웃을 한번 품어보는 일. 이같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씩 해나가며 주님께 순종해봅시다. 먼저 작은 고난부터 견디어 봅시다. 분명 주님께서는 이런 우리의 모습도 칭찬하시며 더 큰 주님의 길로 나아갈 힘과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이 시간 우리 마음 속에 당신의 빛을 비추소서. 소유가 아닌 존재로서 우리의 삶을 가꾸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존재를 새롭게 하소서. 높은 자리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우리가 꽉 쥔 손을 펴고, 헛된 욕망을 포기하며 섬김과 희생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보여주신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우리의 존재가 다른 이들에게 구원의 빛이 되게 하시고, 우리 또한 그 길에서 생명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