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규식 목사] 오늘 여기에서 예수의 길을 묻다 – 2024년 12월 8일 주일예배
시편 85장 1-13절, 로마서 13장 8-14절
인사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기다리는 자에게 그분 자신을 주시는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가 생명사랑교회 교우분들과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는 모든 분들에게 이 시간 함께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이면서 우리 교단에서 정한 인권주일과 성서주일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특별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가지지 않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시간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바로 교회력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력을 통해서 자신이 기억해야 할 이야기 그리고 들어야 할 이야기 안에 자기 삶을 위치시킵니다. 우리는 같은 시간을 살아도 다른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야기 속에서 위기와 혼란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지도자의 위법적이고 반민주적인 비상계엄 선포란 오만한 행위를 명백히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처벌할 수 없는 현실에 실망스럽고 분하고 슬픕니다.
어제 많은 시민들이 여의도에 모여 늦은 밤까지 윤석열 탄핵을 위한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그곳에 계셨던 여러 성도님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왜 이런 일은 늘 추운 겨울에 일어나는지. ㄴ저는 2016년 겨울 탄핵을 위해 광화문에 시위하러 나갔을 때가 기억납니다. 몹시 추었던 그 해 겨울 어느 늦은 밤 광화문에서 시민들이 한목소리로 부르는 아리랑을 들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목소리였습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인들, 우리 민중들 참 불쌍하다. 슬프다. 늘 아프고 고된 짐을 지는 것은 민중들 몫이구나.’ 우리 나라 역사를 보면 우리 나라를 지킨 것도 민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고난과 아픔의 짐을 지는 것도 민중이었습니다. 고난과 아픔 속에서 우리는 역사의 진보를, 자유의 해방, 정의의 구현을 늘 꿈꾸어오고 기다려왔습니다. 이런 우리들의 이야기는 이천 년 전 유대인들의 이야기와 중첩됩니다.
구원자 메시아를 기다리다
예수님이 활동하던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폭압 속에서 식민지인으로 살았습니다. 로마 제국는 폭력으로 자신이 정복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을 겁박하고 짖밟아 칼과 창으로 기만적인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로마의 평화 곧 팍스 로마나였습니다. 이런 기만적인 평화 속에서 유대인들은 온갖 수탈을 당했습니다. 로마 제국은 유대인 지배층들에게 많은 세금을 부과했고, 이들을 다시 자기 보다 힘없는 소작농들을 착취하여 그 짐을 전가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농민들이 그 세금과 부역의 짐을 감당하지 못해 밭을 팔고, 집도 팔고, 급기자 자기 자신을 노예로 팔기도 했습니다.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들은 침묵하거나 권력과 결탁해서 이들의 수탈을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서로의 이익을 공유했습니다. 이제 가난하고 힘없는 유대인들에게 남은 것은 이런 상황을 뒤집어 엎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구원자인 메시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언제부터인가 아마도 아주 오래전 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던 그 때부터 이 구원자 곧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의 열망이 커졌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시편 85편은 그러한 기대와 기다림의 열망을 표현합니다. 1절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주님의 땅에 은혜를 베푸시어, 포로가 된 야곱 자손을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7절입니다. “주님,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보여 주십시오. 우리에게 주님의 구원을 베풀어 주십시오.” 처음에 유대인들이 간절히 기다렸던 이는 자기 민족을 해방시켜주고 이방인들의 압제로부터 구원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줄 민족 해방의 메시아였습니다. 그런데 포로 생활이 끝난 이후에도 메시아를 향한 그 기다림의 열망은 식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들이 기다리는 구원자 곧 메시아는 유대 민족 뿐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정복해서 다스리는 온 세계의 통치자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자 유대인들은 이제 그 구원자는 이 세계를 넘어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구원할 우주적 메시아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민족의 구원자에서 온 세계의 통치자로 그리고 더 나아가 온 우주의 메시아로, 이처럼 유대인들의 메시아를 향한 기다림은 이들이 겪은 고통과 슬픔의 시간이 깊었던 만큼 더 크고 간절해졌습니다. 이들에게는 메시아가 곧 하나님의 구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자신들의 자신들이 처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구원이어야 했습니다. 로마의 황제보다 더 힘이 센 구원자, 이교도들의 신들을 무릎꿇게 하는 더 영광스런 구원자. 이 구원자만 오면 과거의 화려했던 다윗과 솔로몬의 치세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 믿었습니다.
예수의 길
하지만 신약성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보낸 구원자인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그런 종류의 구원자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는 나사렛 출신이고, 마리아의 아들이자 목수였습니다. 예수님은 적어도 보통 사람들이 구원을 가져다주기 위해 필요한 요소 곧 질서를 가져다 주는 강력한 힘도 없었고, 자신의 존재를 비범하게 만들 신적 권위를 증명하는 카리스마와 퍼포먼스도 거창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는 영광과 아우라를 가지고 역사의 중앙에 등장하지 않았고, 오히려 의도적으로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바처럼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거부하셨던 것이 바로 힘과 권위 그리고 영광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구했던 바로 이 세 가지 힘과 권위와 영광이 예수에게는 없다는 것, 적어도 예수가 말한 하나님 나라와 구원이 이런 것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을 때, 제자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심한 배신감에 분노했고, 예수를 십자가로 내몰고, 결국 그를 떠났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기다렸지만 정작 그들이 기다렸던 예수가 주고자 한 것을 그들은 거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님은 무엇을 위해 오셨던 것일까요? 그분이 주고자 한 구원이란 무엇이었을까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현실적인 구원이 필요했습니다. 배고팠고, 빼앗겼고, 억울했고, 아팠습니다. 어쩌면 유대인들이 로마 황제보다 강력한 전능한 왕으로서 구원자를 기다리고 기대했던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길은 정치적 혁명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고자 했던 젤롯당의 길도 아니었고, 세상을 등지고 광야로 피해 은둔하며 구원을 기다렸던 엣세네파의 길도 아니었습니다. 예수가 보여준 구원의 길은 우리와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근원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질문하고 변화와 회개를 촉구하는 길이었습니다. 예수의 길은 힘과 권위와 영광과 같은 세계의 가치를 동일하게 추구하는 제국의 질서가 아닌 전혀 다른 새로운 질서 곧 사랑의 법에 기초한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길이었습니다.
12.3 비상계엄 시국에 대해
그렇다면 예수의 길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번 주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대림절, 아기 예수를 기다리자라는 말랑말랑한 설교를 준비했다가 비상계엄이 내려졌을 때, 내용을 수정해야 했고, 탄핵이 곧 이루어지는 분위기 속에서 다시 한 번 수정했고, 탄핵이 부결된 상황에서 또 수정해야 했습니다. 실컷 비난하고 욕을 하는 설교를 할까, 아니면 지속적인 저항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전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지만 저는 우리 사회가 가진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예수님의 길을 통해 되짚어 보고 싶었고, 앞으로 우리가 가야할 예수님의 길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지난 12월 3일 10시 23분 경 윤석열 대통령은 대통령실 내 브리핑룸에서 ‘비상계엄 선포 긴급 담화문’을 발표함으로써 비상계엄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오후 11시 계엄사령부 포고령 제1호가 발표되고 김용현 국방장관이 전군 비상경계 및 대비태세 강화 지시를 내렸으며 곧이어 12월 4일 오후 12시 7분 계엄군이 국회 경내 진입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오후 12시 49분 국회 보회의 개의·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만장일치 가결되고, 오전 1시 1분에 계엄령 선포 무효를 선언합니다. 그리고 약 3시간이 지난 뒤인 오전 4시 27분 윤대통령은 생중계 담화를 통해서 비상계엄선포를 해제하고 군설치 계엄사령부를 해체하였습니다. 이에 정부는 국무회의를 열어 계엄 해제안 의결을 발표함으로써 계엄상황은 해제되었습니다.
우리나라 헌법 77조 1항은 계엄 선포의 요건을 이렇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대통령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 윤대통령은 “종북세력으로 인해 공공의 안녕질서가 위협받았다”는 이유로, 그리고 “북한 공산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 종북 반국가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윤대통령은 계엄의 요건을 갖추지도 않았고, 자의적인 판단 하에 합법적 절차도 명분도 없이 위법적으로 반민주적으로 이 모든 일을 시도했음이 밝혀졌습니다. 비록 몇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이었지만 이 일은 단순한 촌극이나 헤프닝이 아니었습니다. 무장한 계엄군과 무장 경찰이 국회의사당에 진입하고 봉쇄했으며, 급기야 유리창을 깨고 본회의장에 진입했습니다. 이는 불과 몇십 년 전 박정희, 전두환을 비롯한 군부세력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민주투사들이 지켜 낸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 그리고 지금까지 굴곡이 많았던 한국의 역사 속에서 평범한 시민들이 일구어낸 자유와 평등과 같은 민주적 가치들을 무참히 짖밟은 행위였습니다. 이미 윤석열 대통령과 그의 지시를 따라 이 반헌법적이고 반민주적인 계엄 사태에 동조한 현 정권은 국민에게 총을 겨눔으로써 스스로를 국민을 위한 정부임을 부인했습니다. 이러한 대통령과 현 정권을 우리는 더 이상 통치권자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도심 광장을 비롯한 곳곳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퇴진과 위법적 반민주적 계엄선포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위헌적 반민주적 계엄과 관련된 처벌은 당연하고 이에 따른 정치적 사회적 변동도 예상되지만 우리가 여기서 멈춰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계엄 사태는 단순히 한 사람의 정치적 일탈이나 위법적 행위를 넘어 한국사회가 가진 근원적 문제를 드러낸 증상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보다 근본적인 전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원하는가? 둘째, 우리는 이를 성취하기 위해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 우선 첫 번째 질문의 답은 대게 같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85:10-13처럼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함께하는 나라. 마치 시적으로 표현하자면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는 나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사유의 길
저는 첫 번째로 오늘날 우리 사회를 위해 필요한 예수의 길을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사유의 길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아마 어떤 분들은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데 사유의 길이라니 지금은 행동해야 할 때가 아닌가? 맞습니다. 우리는 광장에서 불의한 정권에 저항하면서 사회를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성찰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사유가 필요합니다. 저는 그 사유의 방향을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실 때, 비유라는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34을 보면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중요한 내용을 전달할 때, 비유를 사용하면 그 내용은 감추어진 채로 어떤 비밀이나 수수께끼처럼 듣는 이에게 전달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를 들은 제자들은 깨닫지를 못해 예수님에게 늘 그 뜻을 물어야 했습니다.
이처럼 비유로 말한다는 것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직접 드러내기는 커녕 오히려 감춥니다. 하지만 이런 감춤의 이야기 방식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은 단순히 지식이나 정보를 얻는 것과 다릅니다. 깨달음은 내가 가진 잘못된 이해가 드러나는 것이면서, 더 심한 경우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을 알게 되어 충격을 받을 때 나타나는 어떤 각성 상태와도 같습니다. 이 깨달음을 우리말로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잠에서 ‘깬다’ 할 때, 그 ‘깸’은 거짓과 허구의 세계가 깨어지고 잠들어 있는 무지몽매한 상태에서 벗어나 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감각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한 예는 병아리가 알에서 나올 때,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오듯이 어떤 것을 덮고 있는 껍질을 깨는 깸입니다. 이러한 깸을 통해서 우리는 갇힌 세계가 아닌 그 보다 크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합니다. 저는 이것이 깨고 도달한다 해서 깨달음이라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고집스런 생각이나 진실을 보지 못하게 나의 마음의 눈을 가리는 어떤 껍질이 깨지는 경험과 각성으로부터 시작해서 나의 감정과 태도와 행동의 변화에까지 이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깨닫게 해주려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깨달음에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유 곧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깊이 사유하고 스스로를 성찰하는 것을 점점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우리 사회 시스템은 우리가 고민할 틈 없이 빠르게 판단하고 결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방대한 양의 정보의 바다 속에서 헤엄치듯 살지만 우리 스스로 상상하고 고민하고 비판적으로 들여다봄으로써 얻는 지혜는 사라져 갑니다. 짧게 짧게 화려한 영상으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숏폼 형태의 지식 전달 체계는 단답형 질문에나 어울리는 지식으로 우리 머리를 채우지만 전체적인 안목에서 길게 내다보는 사유의 정신적 근육을 쇠퇴시켜 버렸습니다. 따라서 사유 곧 자기 성찰이 없기에 자신의 욕망이 언제나 정당하고 역사 안에서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유의 방법은 거리를 두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사람들을 점점 극단적인 입장과 선택을 강요합니다. 사람들은 특정 각자 자기 입장에서 상대방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을 취하든지, 아니면 정치적 무관심으로 기울어 버립니다. 한 마디로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분법적 선택의 구도 하에서 자기가 속한 정치적 입장을 실천하든가 혹은 유용함을 주던가 해야 합니다. 이런 이분법적 구도는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공동선과 우리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가치들, 그리고 새로운 사회를 향한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이처럼 이쪽과 저쪽 중 하나를 끊임없이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지배 체제를 가리켜서 전체주의라 규정했습니다. 전쟁에서 전우가 아니면 모두가 적이 되듯, 나의 입장과 같지 않다면 모두 악이고 제거해야할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체주의는 공산주의 국가나 나치와 같은 지배 체제에서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질서도 전체주의적입니다. 정치적 전체주의가 이데올로기를 기준으로 나와 상대를 이쪽 저쪽으로 나누고 분리와 대립을 강요한다면, 자본주의적 전체주의는 유용성과 교환가치로 쓸모있는 것과 쓸모 없는 것을 나누어 이쪽 저쪽으로 구분합니다. 이렇게 될 때, 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유용성에 의해 평가되고 교환가치를 기준으로 쓸모가 없는 것은 모조리 폐기처분 대상이 됩니다. 이런 전체주의적 사회에서는 자기 확신과 편견이 여과 없이 작동하고, 이 사회는 누군가의 적과 동지가 되지 않고서는 모두 의심스러운 자 혹은 이 사회에 적합하지 않은 자가 됩니다. 이분법적 전체주의가 작동하는 사회에서는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법을 근간으로 하여 서로의 자유를 최대한 지키는 민주주의가 구현되지 않습니다. 사실 자유민주주의는 자유권에 기초해 있고, 그런 이유로 다양한 생각과 이념 그리고 이해관계를 법치의 기초하에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있는 곳에는 필연적으로 갈등이 있고, 반대로 갈등이 있기에 필연적으로 민주주의가 작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체주의는 반대 세력을 반국가세력 혹은 악의 축으로 규정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제거하려 하는 것입니다. 윤대통령의 위헌적 반민주적 계엄선포는 바로 이런 전체주의적 사유에서 작동된 것입니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전체주의 사회와 문화에 저항하기 위해 어떤 행동이나 결정 이전에 사유가 우선 작동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사유는 깊이 생각하는 것 뿐 아니라 끊임없이 양자택일 사이에서 어디에 속하지 않고 계속 표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 불일치의 틈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가 어떤 사람에게는 기회주의처럼 혹은 우유부단한 양비론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는 것 자체가 이미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유입니다. 절대적으로 옳음이 있고 그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신념이 바로 전체주의적 사유입니다. 참된 사유는 내가 잘못할 수 있다는 오류 가능성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나의 판단과 생각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기에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그 긴장과 불일치를 견뎌냅니다. 또한 이 사유를 통해서 우리는 이것 혹은 저것을 강요하는 전체주의로부터 자유를 얻습니다. 아도르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유란 흑백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규정된 선택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에 처하는 사유의 자세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더욱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이 세계의 한계를 넘어서는 대안을 찾도록 이끕니다. 다시 말해,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는 사유의 길은 우리를 진실을 향해 안내합니다. 저는 머지 않아 탄핵 정국이 시작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미 8년 전에 탄핵 정국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뼈아픈 진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그때의 기대만큼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범죄자의 처벌을 넘어 이제 우리는 보다 근원적인 방향 곧 오늘 여기에서 예수의 길을 물어야할 단계에 와 있는 것입니다. 승자독식과 한 사람에게 권력을 몰아주는 대통령제는 오늘날 이미 한계에 도달했고 다양한 가치가 공존해야 하는 우리 시대에 적합하지 않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탄핵이라는 급진적인 정치적 결정을 넘어 더 급진적인 사회적 변화를 위한 논의를 시작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의 길을 통해서 주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 불일치와 긴장을 견디고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는 사유의 길입니다. 이것은 어정쩡하거나 기회주의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보다 근원적인 가치, 사랑과 진실이 만나는 세상,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세상을 만들어 내기 위한 길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길이 바로 이 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심당의 길도 에세네파의 길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 나라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길을 보여주는 사유의 길이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의 비유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비유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모호함으로 진실을 의도적으로 감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진실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모호함 속에서 그 이야기고 사유하여 성찰하는 청중을 목표로 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옳다는 사고 방식을 가진 자들, 편견과 독선에 사로잡힌 자들은 예수의 비유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진리는 비유를 두고 사유하는 자들, 뼈아픈 진실이 나에게 해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한 자들에게 깨달음과 변화를 향한 힘으로 드러나는 진실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유의 길을 걷는 자들을 통해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추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자기 내어줌의 길
오늘날 필요한 다른 하나의 길은 바로 자기 내어줌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자기 내어줌의 길입니다. 이 사실이 가장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은 바로 성찬입니다. 성찬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기념하라고 제정하신 것입니다. 성찬은 떡과 포도주를 함께 나누며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에 동참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성찬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성찬은 권력과 자본을 중심으로 편성되는 이 세계의 질서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새로운 중심으로 편성되는 하나님 나라 질서에 우리를 편입시킵니다. 성찬이 행하는 곳이 바로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고 그곳이 곧 세상의 중심이 됩니다. 우리는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과 함께 떡과 포도주를 함께 나누는 것은 정치적 견해, 신분, 경제적 수준, 나이, 인종, 성별을 넘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 떡과 포도주는 서로 다른 더 나아가 서로 갈라지고 분열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라는 중심으로 이러한 분리를 극복하고 한 몸이 되는 신비입니다.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 주어진 성찬의 삶은 이처럼 이 세상 나라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정치적 입장과 사회적 정체성의 중심성을 해체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이끕니다. 이 성찬의 길을 상실한 그리스도교는 광화문에서 괴성을 지르며 타자를 혐오하고 소수자들을 고립시키는 이교와 다릅니다. 그렇다면 성찬에서 주어지는 그리스도 예수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저는 대림절 그리고 성탄절에 자주 볼 수 있는 말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의 그림에서 그 메시지를 찾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갈 곳이 없어 어느 집 마굿간 말구유에 놓이셨습니다. 말구유는 말, 나귀와 같은 가축들의 먹이를 놓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땅에 오셔서 말구유에 놓이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전해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음식이 되신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음식이라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55입니다. “내 살은 참 양식이요, 내 피는 참 음료이다.”
누군가의 음식이 되는 존재는 그것을 먹는 존재보다 약한 존재입니다. 음식은 약함을 통해 자기 생명을 다른 이의 생명을 위해 희생합니다. 성찬을 나눌 때, 예수의 살과 피를 우리가 나눔은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희생하셨을 뿐 아니라 그분이 약한 생명이 되셨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이 약한 생명이라는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구원하는 자는 구원받는 자보다 강해야 하기에 예수님은 우리보다 지혜롭고 강하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본다면 희생하려면 약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입니다. 약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은 강한 존재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는 능력보다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더 큽니다.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마치 먹어서 살찌는 것보다 먹지 않음으로 살을 빼는 것이 더 힘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모두의 구원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장 강한 자가 되어서가 아니라 가장 약한 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이미 사십 일 금식을 마치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가장 취약했던 그 때 사탄으로부터 가장 약해져야 하는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자신을 증명하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나에게 절을 하고 이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가져가라. 사탄이 준 시험의 본질은 모두 강해지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험에서 늘 따라오는 조건은 이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네가 진정 강한 존재라면 이 세상을 구원할 존재라면 강해져라 이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거절하셨습니다.
구원자가 약해져야 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내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희생이 아니고서는 자기 내어줌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자기 희생이 없이 그것은 기부에 불과합니다. 예수께서 자기 생명을 내어주셨다는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예수께서 진정으로 약한 존재가 되어 우리의 음식이 되심으로 우리에게 구원 곧 자기 생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냉혹한 현실 속에서 이런 이야기는 자칫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인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를 변화시키고 성장시키고 일으켜준 것은 바로 이렇게 스스로 약한 존재가 되어 자기를 내어준 누군가의 사랑 때문임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세상 곧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이런 자기 내어줌을 기초로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음식이 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기다리며 꿈꾸며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가운데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떠올립니다. 예수의 길은 이 세상 나라 질서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속하는 길입니다. 하나님 나라 질서는 이 세상의 질서를 끊임없이 벗어납니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기존 질서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질서에 대한 사유를 필요로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이것 아니면 저것의 편견과 독선에서 벗어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사유를 통해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 질서를 끊임없이 상상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의 길은 자기 내어줌의 길입니다. 우리의 음식이 되신 예수님의 자기 내어줌의 희생이 이 세상을 구원합니다. 그런데 이 자기 내어줌은 약한 존재가 되어야 가능합니다. 이 자기 내어줌은 강력한 권력과 영광을 중심으로 하는 이 세상의 질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질서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약해 지심으로써 이 질서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길을 따르라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주님. 우리는 주님의 승리를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지혜를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오늘 여기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길을 걸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