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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실 전도사] 주님의 나의, 나는 주님의 – 2021년 12월 26일

이사야서 19장 18-25절, 시편 145편 14-21절, 요한 1서 4장 7-16절

어두운 밤, 고요한 마굿간 안에 평화로 임하신 아이를 기억합니다. 이 아이는 우리 신앙의 주제가 되고, 삶의 노래가 됩니다. 평안으로 우리에게 임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의 탄생을 기억하고 기뻐하며, 우리는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우리에게 평화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억하고, 한 해를 돌아보며, 새로이 열리는 한해를 맞이하는 주일입니다. 우리에게 임하신 평화의 은혜와 축복이 이 자리를 함께 나누는 우리 모두에게 임하길 소망합니다.

tv 프로그램들을 보다보면, 갑자기 빈칸 넣기가 등장할 때가 있습니다. 특정한 문장 속에서 한 구간을 비워놓고, 그 안에 들어갈 단어나 표현들을 짧은 시간 안에 대답해야하는 것, 그것이 갑자기 등장하는 빈칸 넣기에 룰입니다. 최근 한 지인으로부터 저도 이러한 빈칸 넣기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 )만큼 ( )을 사랑할 순 없어.”라는 문장을 받았는데요. 그에 대한 답으로 망설임 없이 “송실만큼 이름을 사랑할 순 없지.” 라고 특정인의 이름을 넣어서 대답하였습니다. 질문을 던진 지인은 질문자의 의도를 생각하지 않은 답변이라 핀잔을 주면서도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며 아쉬워했습니다. 아마도 질문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가기를 기대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여러분이라면 저와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질문에 사랑이 있기 때문에 아마도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 사람을 넘어선 각양각색의 것들을 떠올렸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냥 문장의 일부분을 비워놓고 던지는 질문임에도 사람들은 답변자가 어떤 대답을 할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답변자가 답을 내놓으면 그 답변에 유쾌하게 웃기도 하고 심각해지기도 합니다. 질문의 대답만으로도 답변자가 무엇을 사랑하는지, 더 좋아하는지, 사랑받고 싶어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등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기에 더욱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불완전한 우리는 많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맺는 관계들을 통해서 우리는 삶의 힘을 얻기도 하고, 위안을, 위로를 받기도 합니다. 생각만 해도 힘이 되는 사람,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좋은 사람이 있으시죠? 다들 있으시죠? 저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한편으로 과제가 됩니다. 매우 어렵고 복잡합니다. 그래서 어찌보면 단순하면서도 명료해 보이기까지 한 저 빈칸넣기가 관계를 쉽게 규정해주는 것 같아 좋아보입니다.

너무 바쁜 삶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우리를 돌아볼 시간을 쉽게 저버립니다. 우리를 돌아볼 여력도 없는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관계들을 생각하며 돌아볼 여유 역시 부족합니다. 한해의 끝자락에 서 있는 지금,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을 돌아보기에 더 없이 좋은 시기인 것 같습니다. 더불어 신앙인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고 있는지 돌아보기에도 좋은 시기입니다. 오늘 함께 말씀을 나누며 그 속에 오래된 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관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구약의 말씀 이사야서의 13장부터 27장까지는 유다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던 이방나라들에 대한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유다 왕국은 지속적으로 대·내외적인 국가적 위기 속에 처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던 이사야의 주된 메시지는 국제 정세 속에서 유다를 흔들었던 이방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이사야 19장은 이집트에 대한 심판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주목해보아야 할 부분은 오늘의 본문 중에 하나인 19장 18~25절의 말씀입니다. 19장 18~25절의 말씀은 상반절에 나오는 심판의 예언과는 다른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사야 19장 상반절이 이집트의 멸망과 심판을 주로 다루고 있다면, 19장 하반절은 심판과 멸망을 넘어선 새로운 미래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를 심판하시지만 다시 만져주시고 회복시켜주신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유다왕국 위기의 주요원인이 되는 앗시리아 까지도 하나님의 손에 있으며, 변화의 대상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다왕국은 거대한 강대국 사이에서 외교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불안하고 절망적인 정세 속에서도 19장 하반절을 통해 전하고 있는 예언의 말씀은 억압하는 이방국가들에 대한 심판을 넘어서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아래에서 하나가 되는 놀라운 미래상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선 모든 것이 하나가 되고 평화가 실현된다는 유토피아적 세계를 노래합니다. 당시 현실과는 정반대되는 유토피아적인 예언의 메시지입니다. 마치 이사야 11장에서 하나님의 정의 아래서는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사자가 풀을 뜯는 세상을 예언했던 것 같이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실현될 수 없을 것 같은 미래상이며 이상향입니다.

이사야 19장 하반절을 통해서, 이사야 예언자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특정 민족만을 대상으로 하여 관계하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선택하셨지만, 그분의 궁극적인 관심은 이스라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모든 민족, 모든 이들에게 확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와, 간구하는 이들의 소리를 들으시는 분, 하나님의 손길이 임하면 원수였던 나라들까지도 나의 백성이라 불러주시는 하나님을 이사야는 말합니다.

우리 개개인들은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며 살아갑니다.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경험이 비슷할 때, 강한 동질감을 느끼고 서로의 감정에 깊이 빠져듭니다. 그만큼 개인이 전해주는 진지한 경험은 상대방에게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시편의 시인 역시도, 자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이 시인은 날마다 주님의 이름을 노래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경험을 했는지는 명확하게 나오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시편 145편에 나오는 그의 노래의 주제들을 통해 그가 어떠한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를 형성했는지, 자발적으로 찬양을 부르는 주체가 되어갔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면서, 그가 행하신 일들에 대한 것들을 노래합니다. 절대적인 영역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14절에 들어서면서 하나님은 이런 분으로 강조되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자들의 곁에 서신 분, 넘어지는 사람을 붙들어주시고, 짓눌린 사람을 일으켜주시는 분,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는 분임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는 분임을 강조합니다. 시인이 경험한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시고,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응답하는 분, 곁에서 함께 서 계신 분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함을 체험한 시인은 강한 믿음, 신뢰를 보이며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노래합니다. 절대자의 동행을 경험한 시인은 개인의 찬양을 넘어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경험한 성도들도 노래할 것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있음을 노래합니다.

이사야는 예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찾는 모든 이들과 관계하시고 계심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질 이상향을, 미래상을 전했습니다. 시편의 시인은 개인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과 맺은 신뢰의 관계를 노래하며 개인적인 고백을 넘어서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노래의 범위를 확장 시켜나갑니다. 이사야와 시인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다르게 표현하지만, 자신이 믿는 것으로, 각자가 느낀 것으로 그 가치를 표현했다고 여겨집니다. 이사야와 시인은 자신들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삶 속에서 확신을 가지고 펼쳐나갔습니다. 이들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근본 속성과 본질을 알고 느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또 다른 본문인 요한일서는 공동체의 믿음을 강화시키고 이단들을 경계하며 건강한 공동체로서의 단결을 목적으로 한 서신의 내용들이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사랑을 행하고 신앙의 일치를 이룰 것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4장 7절부터 16절까지는 사랑의 근원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그 사랑을 이해하고 응당히 해야하는 실천들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저자는 사랑의 본질에 대하여 말합니다. 7~8절에 교차법을 이용하여 사랑에 대하여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으로 말합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이 곧 사랑이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저자의 주장에 따라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하나님의 속성이며 본질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의 속성과 본질로서 그 사랑이 역사 속에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심을 이야기합니다.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신앙인들이 어떻게 그 사랑을 체험하고 실천해야 하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요한일서를 통해서 보여지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무조건 부어주시는 사랑의 관계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담백하면서도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유 역시 너무 단순하고 직접적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것이 이유라고 말합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 하나님께 속한 우리가 그 사랑을 실천하고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며 살아가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너무 단순하지만 한편으로 참 어려운 과제라 여겨집니다. 결국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드러나고, 우리는 그 신비 안에서 하나님께 참여한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이사야와 시편의 시인 역시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속성과 본질이 사랑임을 느끼고 있었기에 자신들의 삶 속에서 체험하고 느꼈던 것들을 표현하며 펼쳐나갔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본질을 느꼈기에 민족을 위험에 빠트린 이방나라들까지 구원과 변화의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었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삶의 경험 속에서 끊임없이 느끼는 그 사랑의 흔적들을 쫓아가다 보니 아낌없는 사랑을 주신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은 아닐까요?

비단 이사야와 시편의 시인 뿐만 아니라, 성서 전반적인 내용을 관통하는 메시지들과 교훈들이 인간을 향해 무조건적인 사랑을 부어주시는 그분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여겨집니다. 오랜 시간을 우리 인간들과 관계를 맺고 오신 그분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12월 25일, 아기 예수의 오심을 기뻐하며 탄생의 노래를 불렀던 우리들, 바로 이어서 한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는 주일로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관계들 속에서 행복을 찾고 힘을 얻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냥 소중한 누군가가 어디에 숨 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동시에 관계의 어려움으로 고통을 받기도하고 절망을 느끼기도 합니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많은 스트레스 유발의 원인이 인간관계에 있다고 하니 관계가 얼마만큼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한번 우리의 지난 모습을 돌아봐야합니다. 나는 어떤 관계를 맺으며 어떤 사람들을 만나왔는지, 그 관계는 나에게 어떤 힘을 주었는지, 고통을 주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인간관계를 돌아보면서 한가지 더 돌아봐야겠습니다.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신앙인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있는지 역시 돌아봐야겠습니다. 혹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의 화를 풀기 위한 감정샌드백으로 생각하고 있는건 아닌지, 나의 소원을 이뤄달라 비는 지니로 맺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오늘 성서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어떻게 관계를 맺고 계신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해를 함께 준비했으면 합니다.

한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어요. 실은 오늘 설교 제목이 빈칸 넣기였습니다. 주님은 나의 ( ), 나는 주님의 ( ) 이렇게 말입니다. 코로나19로 뒤숭숭한 연말연시를 보내시고 계시지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시는 건 어떨까요??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복잡한 연말연시를 보내고 있는 모든 교우들이 주님과의 관계를 다시 한번 떠올리며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하옵소서. 주님이 부어주시는 사랑의 크기만큼 우리가 주님을 생각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