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 글: 한문덕 목사

– 목소리: 육성한 전도사

– 반주: 박지형 집사

8.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주 하나님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땅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 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창세 2:9)

=====================

하나님은 보기에도 아름답고 먹기에도 좋은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인간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을 수 있지만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금지되었습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물론 먹을 수 있습니다. 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금지하셨을까요? 우리가 아는 과일나무 중에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열매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가 열리는 나무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두 나무를 성경이 함께 언급하는 것은 참된 삶, 즉 생명이 과연 이성적 지식에 달려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에 선과 악을 알고 분별하여 판단해주는 역할을 하는 이는 대체로 제국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신의 아들로 생각하며 바로 자신이 옳고 그름의 기준이라고 여겼습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달라고 기도한 이유는 왕으로서 선과 악을 판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도덕경 2장에서 노자가 말했듯이, 천하 사람들이 좋고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좋지 않고 추한 것일 수 있습니다.(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知爲善, 斯不善已.) 그리고 세상은 선과 악으로 분명하게 구분해서 나눌 수 없는 것들도 많습니다. 게다가 앎이 모름과 반비례의 관계에 있는 것만도 아닙니다. 알면 알수록 모름이 줄어들 것 같지만, 알면 알수록 더 모를 일도 많습니다. 앎과 모름의 경계는 모호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알아간다고 할 때, 그 사람을 어디까지 알아야 충분히 안 것이라 할 수 있을까요? 일찍이 칸트가 말했듯이 우리의 이성은 객관적 사물이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것에 대해서만 작동할 수 있습니다. 상상력의 영역 또한 기존의 존재하는 것들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공자가 제자 자로에게 말해 주었듯,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에서 이성은 역할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성이 생명을 다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생명은 모름의 영역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면 더 사랑할 수 있겠지만, 모름을 간직한 채 사랑하는 모험을 통해서만 생명은 더욱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다 알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연인이 서로 모든 것을 알기에 함께 하는 것이 아니듯, 생명을 살리는 것도 꼭 다 알아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칼로 아이를 가르라고 말하지만, 아이의 엄마는 사랑 때문에 다른 여인에게 주라고 합니다. 생명을 살린 건 엄마의 사랑이었습니다. 물론 사랑하면 더 알고 싶습니다. 그러나 안다고 반드시 사랑하는 건 아닙니다. 사랑이 먼저입니다. 기도 : 주님, 우리가 더 많이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