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강미희 전도사] 나와 세상을 바라보는 용기 – 2021년 2월 14일 신학교육주일
사무엘상 15장 10-23절, 시편 36편 5-6절, 에베소서 2장 11-22절
[지난 한 주의 삶]
지난 한 주는 저에게 참 고뇌의 시간이었습니다. 고민도 많고, 생각도 많고, 평소에 보이지 않던 것들도 눈에 보이고, 모든 것이 신경이 쓰이는 한 주였습니다. 목사후보생, 목사수련생 과정에서 주일 장년 설교를 한다는 것이 아주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은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설교 날짜가 정해진 이후에는 설교 당일이 빨리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설교 후에 강단을 내려갈 때 오는 그 말로 형언할 수 없고, 설교 후에만 느낄 수 있는 평안한 마음을 기다리기도 합니다.
지난 주 설교 잘 들으셨지요? 목사님께서 지난 주일에 설교 준비의 어려움과 설교의 목적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설교를 한다는 부담감은 크지만, 그 설교를 들으면서 어렵고 힘든 마음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선택하는 것]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선택합니다. 선택의 연속이죠. 그 가운데 지혜로운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고, 자신의 욕망만을 생각하며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내 선택이 옳은 선택이었다는 것을 또는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것을 아주 나중에 깨닫기도 합니다.
[사울의 선택]
주변 나라들과 전쟁을 해야 하던 시절, 끊임없는 전쟁과 주변국의 침략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했습니다. 사무엘은 왕이 세워졌을 때에 백성들을 다스릴 왕이 갖는 권한을 이야기를 이야기합니다. 백성들은 왕을 위해 일을 하여야 하고, 왕의 신하들에게 자신의 밭, 포도원, 올리브 밭에서 얻은 가장 좋은 것을 줘야 하고, 마침내 백성인 당신들까지 왕의 종이 될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러나 사무엘이 이 말을 하여도 백성들은 듣지도 않고, 자신들에게도 왕이 있어야겠고, 이방나라들처럼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그 왕이 우리를 이끌고 나가서 전쟁에서 싸워야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당장 자신들에게 급한 것은 전쟁에서 싸워서 자신들에게 승리를 안겨줄 왕이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세워진 것이 사울 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사울을 왕으로 세우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요청대로 왕이 세워졌으니 환호를 지릅니다. 그런데 백성들 중에는 사울을 보고 “이런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할 수 있겠느냐?”하고 떠들면서 그를 업신여기고, 그에게 예물도 바치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습을 사울은 못 들은 척하였지요. 이렇듯 자신의 반대 세력이 자신 앞에서 대놓고 비난을 하는 것을 안 상태로 왕이 되었던 사울, 왕으로서 인정을 하지 않는다는 무리가 있음을 안 사울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사울은 이 백성을 무시했을 수도 있지만, 자신을 비난하는 세력을 무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당연히 사울은 이것을 마음속에 계속 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울은 반대 세력을 포함한 모든 백성이 인정할만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주변 나라들과 싸워 백성들에게 승리를 안겨 줄 강한 왕, 그 기대에 부응하는 왕이 되는 것에 아주 심혈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사울이 왕으로 뽑히고 나서 암몬 사람들과 싸움을 하는데 사울은 이 싸움에서 승리합니다.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한 것이지요. 이에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가서 ‘사울이 어떻게 우리의 왕이 될 수 있겠냐고 떠들던 사람들이 누구냐고, 우리가 그들을 죽여야겠다.’라고 합니다. 자신들에게 승리를 안겨준 사울을 지지하고 반대 세력을 없애겠다는 이 백성들을 진정시킨 것은 사울입니다. 이로써 자신을 반대하던 반대파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사울은 왕으로서 백성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었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이전의 불안함은 조금 사라졌을 것입니다. 이 모습으로 계속 나아간다면 사울은 강하고 윤리적인 왕의 이미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마음에 불안감은 계속 찾아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블레셋은 엄청난 수의 군사를 투입합니다. 이스라엘 군사들은 모두 겁에 질려 떨고 있고, 사울은 사무엘이 약속한 이레, 7일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은 오지 않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백성들은 사울에게서 떠나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이 모습을 본 사울은 불안한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주님께 번제를 드려야 하는데, 이 자격을 가진 자는 사무엘뿐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오지 않고, 백성들은 떠나가자 불안한 사울은 사람들을 시켜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가지고 오라고 한 다음, 자신이 직접 번제를 드립니다. 결국 자신의 불안함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 도착한 사무엘은 이런 사울을 꾸짖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 요나단은 블레셋을 습격하여 그들에게 큰 타격을 입혀 이스라엘 군에게 공을 세웁니다. 요나단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사울의 모습과 대조되는 모습이지요. 요나단은 이 싸움에서 의지해야 하는 자는 오직 하나님뿐임을 알았습니다.
전쟁이 이어지던 도중 사울은 ‘적군을 물리치기 전까지 무엇이라도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맹세를 합니다. 백성들은 배가 고픔에도 이 저주가 두려워 아무것도 먹지 않습니다. 그 맹세를 어긴 것은 다름 아닌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입니다. 사울의 맹세를 어긴 요나단은 죽을 위기에 쳐합니다. 사울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왕으로서 한 자신의 맹세를 어길 순 없었습니다. 결국 요나단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온 백성이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를 안겨 준 요나단을 죽여서는 절대 안 된다고 사울에게 호소합니다. 백성들의 마음은 자신들의 왕이 한 맹세보다 이스라엘에게 이익을 준 요나단에게 향한 것이지요. 이러한 일을 겪은 사울은 백성의 눈치를 더 보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권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생각에 불안하고, 자신이 왕이 되었을 때 자신에게 환호하던 백성들의 모습으로 돌려놓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울은 가장 중요한 본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바로 사울에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없습니다. 예언자요, 제사장이고 왕이 있기 전 백성들의 지도자였던 여전히 강한 힘을 가진 사무엘이 있고, 이스라엘의 왕인 자신의 맹세를 따르기 보다는 공을 세운 요나단을 지킨 백성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권력은 약화되는 것 같고, 백성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사울은 본질을 잃고, 스스로 눈을 가리고, 하나님보다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신경 쓰기 시작하였고, 심지어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하게 순종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생각대로 명령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그의 생각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잊어서는 안 되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지요. 모든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한다는 것은 예언자든 선지자든 백성이든 왕이든 모두 동일한 것입니다. 자신의 위치가 어디이든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은 절대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울이 놓친 부분은 이 가장 중요한 한 가지입니다. 백성들이 원하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사울은 하나님을 놓으면 안 됐습니다.
사무엘상 15장 첫 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 명령하십니다. 이를 전하는 사무엘은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들으라의 ‘쉐마’는 비타협적이고 순종의 명령입니다. 그 명령은 아말렉의 모든 것을 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사울은 주님의 명령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사울과 그의 군사들은 가장 좋은 것들은 남기고, 쓸모없고 값없는 것들만 없애버립니다.
이 모습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이 후회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울은 이미 나에게서 등을 돌렸고, 더 이상 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사울은 심지어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위한 승전비를 세우고 길갈로 내려갑니다. 이를 들은 사무엘은 사울을 만나러 갑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명령을 어긴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고 계시는데, 사무엘을 만난 사울은 아주 당당하게 주님의 명령대로 다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어겼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미 다 알고 온 사무엘은 묻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귀에 들리는 이 양 떼와 소떼의 소리는 무엇입니까?”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들으라고 사울에게 말했지만, 사울은 그 명령을 듣지 않았고, 사무엘에게 들리는 것은 아말렉에게서 뺏어온 짐승의 울음소리였습니다. 사울은 주님의 명령은 온전히 듣지 못하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아말렉의 짐승 소리를 들으면서 좋아했던 것입니다.
화가 난 사무엘은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의 것을 전부 없애라고 했는데 왜 순종하지 않고 약탈하는 데만 마음을 쏟으면서, 주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악한 일을 하였냐고 사울을 꾸짖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생각으로 가득 차고, 더 이상 자신을 성찰하지 않고, 스스로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은 사울은 사무엘의 이 꾸짖음에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합니다. ‘저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저는 사울의 이 말이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은 이미 스스로 생각하기에 옳은 일을 하였다고 확신할 때, 아무리 주변에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해도 들을 수 없습니다.
사울은 깨닫지 못하고 핑계를 댑니다. ‘주님께서 보내시는 대로 전쟁터에 나갔고, 아말렉의 왕 아각도 잡아 왔고, 아말렉 사람도 진멸하였습니다. 다만, 전리품 가운데서 좋은 것을 가져와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했다.’ 사울은 자신의 욕망으로 좋은 것을 탐하며, 하나님을 중심으로 둔 것이 아니라 제물에 중심을 두었습니다. 이에 사무엘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비난 받는 다는 것]
인간은 누구나 미움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삶을 살아가면서 모두에게 인정받고 모두에게 칭찬을 받기를 참 힘듭니다. 유명해질수록 비난 역시 늘어나고, 나의 말 한마디가 비난의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비난을 받을 때, 이에 반하여 방어기제가 강하게 올라와서 비난으로 대항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말을 돌아보며, 자신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발견하고, 그것을 고쳐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 비난이 타당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논쟁 가운데서 본질을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사울은 왕을 간절히 원했던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받는 비난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따르지 않은 것에 타당한 이유가 될 순 없습니다.
[변화 가운데 생기는 갈등]
지난 주 목사님께서 설교하셨듯이 우리는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계속 살아가고 있습니다. 변화는 불편함을 야기하고, 불편함은 갈등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는 이 갈등을 해결하기도 하고 유지하기도 하고 모른척하기도 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집단 간에 갈등을 잘 해결 하면, 그 공동체는 더 나은 공동체가 되나 그 갈등을 마주하는 것 역시 쉽지 않습니다. 바울이 편지를 보냈던 공동체 역시 이런 갈등이 있었던 곳이지요. 그래도 바울은 갈등이 있는 공동체에 갈등의 표면적인 다툼보다 그 안에 중요한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오늘 에베소서에 나오는 공동체도 집단 간 갈등이 있었던 곳입니다. 에베소는 거대한 도시로 그리스와 로마 신들을 섬기는 신전도 많은 종교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민족 중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있고 한 교회의 공동체 일원 가운데 다른 민족 사람들이 점점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다민족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교회 안에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집단 간의 갈등]
이 갈등은 먼저 공동체를 이루던 사람들이 이후 들어오는 사람들을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으로 차별을 합니다. 우리는 기존에 있었던 공동체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강한 언약공동체 의식이 강했습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복음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더라도 이방인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란 힘들었을 것입니다.
서로 다른 생각과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교회에 모입니다. 당연히 서로 이해가 안 되고, 상대방의 행동과 생각에 이해가 안 됩니다. 그렇기에 갈등은 불가피합니다.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을 따돌림 시켰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 사람들을 자신들의 공동체에 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 뿐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리스도교에서 주를 이루고 있던, 자신들의 문화 전통을 그들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변화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바울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알려줍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입니다. 그리스도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또한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제는 당신들이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예수님을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한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새로운 가족 공동체를 이야기 합니다.
[변화와 갈등 속에서 찾아야 하는 본질]
계속 변해가는 세상에서 갈등과 논쟁은 계속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안에 모두 합의할 수 있는 본질을 찾고, 갈등을 해결하여 변화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변화하는 세상을 볼 줄 알아야 하고, 이전과 무엇이 달라졌으며, 이 변화가 왜 생겨났는지 생각하고,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의 모습에서 바꿔야 할 모습을 발견했다면, 불편하지만 그것을 바꿀 용기도 내어야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그저 변화가 불편한 사람이 되어버리고, 그것에 그냥 그칩니다.
제가 인상 깊게 읽은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의 생각이 얼마나 무지하고 부끄러운 것인지를 알게 되었고, 나는 여전히 변화에 민감하지 않으며,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차별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습관처럼 뱉었던 말, 습관처럼 행했던 말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누군가에게는 차별의 언어였고, 불편한 말과 행동이었을 것이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특권은 내가 생각하지 않아도 너무도 당연한 것이기에 누군가 이의제기를 하면 그것이 ‘그게 너가 지금까지 가진 특권이었어.’가 아니라 ‘너의 것을 이제 내가 빼앗을게.’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책이 그것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이 책을 읽은 지금의 저도 여전히 부족하고, 고쳐할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끊임없는 성찰과 질문 그리고 변하고자 하는 용기는 이전보다는 조금 더 나은 저를 만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한 부분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한 개그맨이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흑인 분장으로 웃음을 유도했다가 여론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피부를 검게 칠하고 입술을 크게 그리고 곱슬머리 가발을 쓰고는 머리에 파를 붙이고 등장해 우스꽝스러운 춤을 췄습니다. 시청자들은 ‘흑인 비하’라고 비판을 했고, 제작진은 공식 사과와 함께 영상을 삭제했습니다. 이 장면을 연출한 사람도 자신의 “사려 깊지 못했던 개그”에 사과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가지고 방송인들 사이에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방송인 A씨는 “인종을 놀리는게 웃겨?”라며 SNS를 통해 공개 비판을 하였고, 이에 방송인 B씨는 “단순히 분장한 모습을 흑인 비하로 몰아가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응수했습니다. ‘단순히 분장한 모습을 흑인 비하라고 몰아가는 형의 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는 어떻게 해석이 되냐면 영구, 맹구라는 캐릭터는 자폐아들에 대한 비하로 해석될 수 있고, 예전에 한국에 시커먼스라는 오랫동안 사랑받았던 개그란 것도 있었어. 그럼 그것도 흑인 비하인건가?’라며 이에 대응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이 글들을 통해 오래된 개그 소재들이 소환되면서 사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프로그램들이 개그와 비하 사이를 오가고 있었는지 돌아보게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1980년대 인기를 끓었던 개그 코너, ‘그때와 지금은 무엇이 달라졌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 다음에 말하는 저자의 말이 제 머리 속에 계속 남아 있습니다. ‘그로부터 약 30년이 지난 오늘날 중요한 변화의 하나는, 그런 개그가 더이상 “웃기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타인의 약함이 더 이상 웃김의 소재가 될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죠.
작년과 올해 가장 큰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바로 코로나19 상황입니다. 이 변화는 종교 내에서 여전히 갈등을 이루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너무 강조를 해왔던 교회에 와서 드리는 예배, 그것을 어기면 죄의식을 심어주었던 한국 기독교의 역사는 새로운 변화에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지금의 문제가 되는 종교단체는 복음의 본질이 왜곡되었을 때 이렇게까지 무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안에 예수의 사랑도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변하는 이 세상에서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해야합니다. 그리고 변화에 한걸음 나아갈 용기를 내어야 합니다. 코로나 19는 예배의 본질이 현장, 공간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만약 우리 교회가 그 용기 없었다면, 우리는 이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여전히 혼란을 겪으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시간 함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 오랜 전통 가운데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추구했던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다시 붙잡고 나아가야합니다. 그걸 다시 붙잡는 것은 세상을 바로 보고, 자신을 바로 성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주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는 돌보시는 하나님, 우리의 모습이 사울처럼 자신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생각대로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착각할지도 모릅니다. 또한 우리의 생각이 옳다며 타인을 배척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마음과 생각을 주시고, 그 가운데 참된 기독교의 본질을 찾는 지혜 역시 허락하여 주십시오. 세상을 바로 보고, 끊임없이 생각하며 변하는 세상에서 용기를 내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