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강미희 전도사] 나를 온전히 바라보라! – 2021년 10월 24일

역대기상 5장 23-26절, 시편 107편 17-22절, 마가복음서 8장 14-21절

[소통]

소통은 주로 타인과 생각과 마음을 서로 나누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나와 다른 사람이 만날 때, 서로 이해가 다른 집단을 만났을 때, 종교, 문화 등 삶의 양식이 너무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서로에 대해 더 잘 알기 위해서 우리는 소통을 합니다. 소통을 통해서 우리는 타인을 더 잘 이해하고, 나의 시야와 생각들도 넓혀갑니다.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나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나와 다른 이들을 통해서 경험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더 발전시키고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 그리고 한 공동체가 더 건강해지기 위해 다른 이들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서점에 가보면 이 소통에 관한 책들도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타인과의 소통을 하기에 앞서서 나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고 싶어합니다. 내가 다른 이들만큼 괜찮은 사람인지, 내가 소통하는데 부족함은 없는 사람인지, 더 소통을 잘하기 위해 가져야 하는 마음이나 노력, 기술은 필요 없는지 고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 자신에 대해 잘 알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에 대한 궁금과 앎]

요즘 청년들 사이에서 인기이고 대화 주제에 많이 등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인들끼리 만나서 서로 묻기도 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궁금해하며 물어보는 것입니다. SNS에서도 인기가 많고, 유튜브에서도 이 소재를 가지고 올라오는 영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로 MBTI라는 것입니다. 요즘 청년들은 자기소개에 자신의 MBTI를 소개하기도 합니다. 꽤 오래된 성격검사 인데, 최근에 이것이 유행을 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어떤 유형인가를 궁금해 하며 이 성격유형을 검사하는 사이트에 들어가서 자신의 성격유형을 알아봅니다. 이 성격유형검사는 4가지 선호 지표(에너지 방향, 인식 기능, 판단 기능, 생활 양식)에 각각 2가지 지표(외향/내향, 감각/직관, 사고/감정, 판단/인식)가 있어서 사람들의 성격 유형을 16가지로 나눕니다. 물론 모든 사람을 단지 일 16가지의 유형으로 규정지을 수는 없겠죠. 혹시 안 해보신 분들이 있다면 재미삼아서 한 번 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성격유형검사를 하고나서, 서로 자신이 어떤 유형인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내 성격 유형이 나랑 잘 맞는지도 확인해 봅니다. 사람의 성격을 단지 이 16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작은 범위인 것 같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검사를 즐기고 서로 이야기도 하고, 때로는 나의 성격을 이 MBTI가 뭔지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자기소개를 할 때, ‘제 MBTI는 이거입니다.’로 나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저는 ESFP라는 성격 유형인데, 유튜브에 ESFP를 치면 상황별 특징이나 공감, 장단점 등등 많은 영상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하게 올라오는 영상들을 보면서 정말 나랑 맞으면 공감도 하고, 그렇지 않다면 아 이건 좀 안 맞는데 생각하며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립니다. 그리고 정말 내가 그런 성향인지를 고민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성격이 궁금한 이유는 자신을 설명해야하는 일이 많아지고, 자신이 어떤 것을 좋아하며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를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개성이 무엇이고, 나의 취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관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미 있는 지표에 나를 규정하는 것이긴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무언가를 계속 찾고, 자신에 대해 관심 갖습니다. 나를 잘 아는 것이 삶을 살아갈 때, 무언가 선택을 할 때 중요한 지표가 되기도 하고, 핑계를 삼을 수 있는 것도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람들 ‘내가 누군인가? 나는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가?’에 궁금해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위치가 어디인지, 나의 신앙의 성숙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 하지 않습니다. 나의 교회 생활의 경력이 곧 내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나의 직분이 곧 나의 신앙의 위치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이미 나의 신앙생활의 경험으로 갇혀서 그 이상의 것을 받아들이고, 공부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성숙하지 않고 퇴보할 뿐입니다.

[바리새파와 헤롯의 누룩]

오늘 마가복음서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한 여인을 만난 후 이방사역에도 눈길을 돌리시고 이방사역을 행하시는 부분입니다. 마가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시로페니키아 여인을 만난 것은 예수님에게 아주 큰 변화를 일으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만나기 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의 선교에만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이방인의 여인의 입에서 “주님”이라는 고백과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는 요청에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하고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어쩌면 굉장히 모욕적인 말에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라는 대답을 함으로 당시 예수님의 편견을 깨버립니다. 예수님은 이 시로페니키아 여인을 만남으로 자신이 갖고 있던 한계를 마주하고, 이전의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셨습니다. 자신의 경험과 생각의 한계를 깨닫고,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관심이 없었던,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이방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이방 사역을 계속 하던 중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바리새파와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에게 빵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빵이 아닌 누룩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누룩’이라는 것은 ‘빵’과 관련이 아주 깊습니다. 빵을 부풀게 하려면 이 효소가 필요합니다. 누룩의 상태가 어떠냐에 따라 빵의 상태도 달라집니다. 빵의 반죽에 서서히 스며드는 이 누룩은 어느새 빵과 따로 있지 않고, 하나의 빵으로 존재합니다. 누룩은 그 빵의 정체성을 만들어 내고, 그 빵의 질을 결정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의 정체성을 결정 짓는 것들 중에서 바리새파와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파의 누룩은 무엇일까요? 바리새파는 아주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바리새파는 불의하다고 생각하는 일은 저지르지 않았고, 하나님께 시간을 내어 기도를 하였으며,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에 열심이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바리새파의 모습을 조심하라고 하셨을까요? 마가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는 것을 보며 비난했던 자들이고, 금식을 해야하는 시기에 자신들은 금식을 하는데, 금식을 하지 않는 제자들을 비난했습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고,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는 모습을 보며 안식일에 일하는 모습을 비난하며, 사람들을 고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그를 없앨 모의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빵을 먹는 모습을 보고 왜 모든 유대 사람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켜서 행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느냐며 역시 비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자들이었지만 남을 비난하기에 바빴고, 입술과 행위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그 본질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해 “이사야가 너희 같은 위선자들을 두고 예언했다.”며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들의 전통이 최고인 듯 말하지만 예수님께서 관심을 가졌던 소외된 이들 아픈 자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고, 부정하다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헤롯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헤롯은 야망이 아주 많은 사람입니다. 당시 갈릴리 지역의 권력자였고, 자신은 이스라엘 전 땅을 다스리기를 원했던 사람입니다. 헤롯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더 강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이기에 자기를 비판하거나 자기의 세력의 위협을 가지는 자들이라면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닮지 말고, 너희도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권력을 원하고, 힘을 원합니다. 이것이 남에게 무시를 받지 않고 나를 위해서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리고 권력이 꼭 나쁜 것으 아니라고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고 봐온 권력은 꼭 필요한 곳에 사용하는 권력이 아니었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며, 남을 피폐하게 하고, 다른 이의 생명과 삶을 위협하는 방향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가 이미 알고 경험한 방향으로 힘을 사용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만들어진 우리의 생각과 신념은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험에서 지속되어서 학습되어 온 것은 우리의 경험이 바탕이었기에 더 곤고하게 우리를 그 틀 안에 가둡니다. 예수님 역시 어렸을 때부터 유대인 남성으로서 학습되어 온 문화와 생각 관습에서 쉽게 벗어나시지 못했습니다. 한 여인으로 인하여 그것이 깨어지고 자신을 넘어선 것입니다.

이렇게 수년 간 걸쳐서 알게 모르게 학습되어온 것은 잘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아무리 듣고, 머리로 깨달아도 나의 행동까지 변화기는 쉽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의 많은 활동들을 보았습니다. 소외된 자들과 함께 밥을 먹으시는 예수님을 보았고, 안식일에 일을 하고 사람을 고치는 일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아무리 듣고, 보아도 여전히 무지하고, 예수님의 가르침 보다는 자신들의 생각과 경험으로 다시 돌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것도 아주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자신을 바라보지 않으면 여전히 우리의 관습과 경험의 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 잣대와 윤리의 잣대로 남을 평가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를 돌아보고 성찰하는 자가 된다면, 우리의 경험과 인식을 너머서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는 바리새파처럼 자신의 옳음으로 남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위선자가 아닌지 돌아보는 자가 될 것이고, 만약 내가 그런 사람이라면 그것을 돌이키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힘과 권력을 갖게 되면 그것을 나의 안위와 나의 힘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더 좋은 모습으로 만드는 일에 내가 가진 힘을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것]

예수님은 여전히 자신들의 생각으로 판단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어 있느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기억하지 못하느냐?”라고 꾸짖으십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두 번에 걸쳐 사람들을 먹이신 이야기에서 남은 광주리들을 물어보십니다. 제자들은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열두 광주리와 일곱 광주리입니다. 이 각각은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민족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이 모두를 향하여 자신의 사역을 펼치시고 하나님 나라를 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눈을 보아서 알고 있지만 ‘아직 깨닫지 못합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요?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성경을 통하여 보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 경험하였습니다. 많은 매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웠습니다. 그런 우리는 바르게 보고, 제대로 들으며, 참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깨닫고 있는지 돌아보아야합니다.

[나와 하나님의 관계]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 더 성숙한 자신을 위해 자신을 성찰해야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지만 내가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고 관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 홀로 기도하고 노력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역대기상의 본문을 보면 하나님과의 소통을 끊고 살아가는 자들의 최후를 알려줍니다. 오늘 본문의 나오는 므낫세 반쪽 지파의 자손들은 용감한 군인으로 각 가문의 유명한 족장들입니다. 허나 이들은 조상의 하나님을 배신합니다. 토라에서 조상의 하나님은 계약의 연속성을 확립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이 지파는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그 땅의 백성들의 신을 섬겼으므로 자신이 살던 땅에서 살지 못하고 추방당합니다.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고 하나님과 정직한 관계에 서있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인 나의 성숙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만들어 집니다. 모세가 억압 때문‘

에 괴로워하는 중에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기 전, 홀로 광야에 나가 시험을 받으며 자신의 앞으로 삶의 방향을 정한 것처럼, 잡히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시며 고통과 근심에 싸여 죽을 것 같은 자신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신 것처럼 우리는 홀로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합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온전하게 서고, 나를 성찰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만큼 참된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죄의 돌이킴은 나의 현 상황을 제대로 아는 것]

나의 욕망만을 들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나의 생각만으로 가득차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올바르게 소통하고 정직한 관계를 이룰 때, 우리는 우리의 관습과 편협한 생각에서 벗어나고, 우리의 슬픔과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는 것은 우리는 죄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은 어리석은 자들은, 반역의 길을 걷고 죄악을 저지른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고난을 받고 밥맛까지 잃어 죽음의 문턱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 상황에서 나에게 처한 고난의 상황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죄에서 돌이킨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곤경과 고난 상황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실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외적인 모습이 아닌 내면에서부터 나오는 감사의 기도와 찬양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온전히 하나님 앞에 설 때, 참 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다]

우리는 교회를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 배웁니다. 예수님을 따라 산다는 것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일궈 가는 것임을 배웁니다. 이렇듯 다른 이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이 진정한 삶이되기 위해서, 이 배움과 삶의 척도가 위선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위선의 섬김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위선의 진리는 결국 무너집니다. 참된 기독교의 진리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아야합니다. 남을 사랑하기에 앞서 내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올바르게 서 있는지,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 있는가를 확인해야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진실 되게 서 있지 않고,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나의 사랑은 금방 지쳐서 무너질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과 소통하지는 않으면서 나는 온전하지 않으면서 남을 위한다는 거짓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나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그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다면,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더 큰 힘을 허락하시고, 우리는 그 힘을 얻어 지치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는 나는 아무리 남을 돕는 삶을 살더라도 기쁨보다는 공허함이 몰려옵니다. 나의 내면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면, 이웃을 위하지만, 나의 삶은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의 한계를 알고, 나의 마음과 욕구를 알고, 하나님과의 온전하고 정직한 소통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고, 그리스도의 참된 진리를 선포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주님, 우리가 나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남을 위한다는 것 뒤에 숨어서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는 삶을 살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며, 나를 돌아보는 것에 소홀히 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 하나님과의 정직한 관계에서 나오는 나의 모습인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