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미희 목사] 사랑의 겉옷, 성숙의 시간 – 2024년 12월 29일
사무엘상 2장 18-20, 26절, 누가복음서 2장 41-52절
[굿 바이, 2024]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오늘은 2024년 12월 마지막 주일, 송년주일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 여러분의 삶 속에서 겪었던 수많은 일들을 회상하고 곱씹어보는 달이기도 합니다. 2024년 어떤 일들이 여러분의 삶 속에 차곡차곡 쌓이셨나요? 어떤 날은 환희와 기쁨을 주었을 거고, 어떤 날은 슬픔과 어려움을 안겨주었을 것입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했던 즐거운 시간, 작은 성공에 환호했던 순간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 계획 했던 것을 다 이루지 못한 아쉬움과 함께 조금은 성장한 나의 모습을 품고 다가올 새해를 기대해 봅니다.
[여전히 겨울]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은 언제쯤 괜찮아질지 모르는 차디찬 겨울 같습니다. 겨울은 바깥생활을 하기가 수월하지 않습니다 밤은 일찍 찾아오고 추위는 오래 지속됩니다. 우리말 겨울은 “집 안에서 지낸다”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겨’라는 말이 “계시다, 있다”라는 말의 고어인 “겨시다”라는 말에서 유래했으며 ‘울’은 “울타리, 집”이란 뜻이 있다고 하니, 농경을 중심으로 살았던 옛 시절,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겨울에는 더더욱 밖에 나가서 할 일이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추운 겨울 바깥생활이 쉽지 않았던 우리 조상들의 오랜 삶이 어떠했는지 그 모습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헬라어의 겨울이란 말은 ‘케이몬’이라고 하는데, 이 케이몬은 사계절이 뚜렷하지 않은 지역에서는 눈이 내리고 얼음이 어는 추운 겨울이라기보다는 비가 자주 내리는 우기를 말합니다. 또 폭풍과 같은 거센 바람이 많이 부는 시기를 일컫는 말이기도 합니다. 겨울은 어쨌든 사람이 살기에 썩 좋지 않은 계절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이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이 연말 우리는 따뜻한 공간에서 2024년을 갈무리하며 지난 날들을 추억하고 조금은 아쉬워하며 하루를 보냈을 것입니다.
윤석열의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후 그 과정이 빠르지는 않더라도 차례차례 해결 될 거라는 기대를 비웃듯 책임을 져야하는 자들의 버티기와 선동은 이 나라를 지키고자 거리에 나온 국민들을 농락하고 있습니다. “이미 대한민국은 국민 전체가 국가의 운명을 걸고 더 끔찍한 오징어게임을 하고 있다”는 한 대학교수가 SNS에 올린 글은 이 어둠이 언제쯤 사라질지, 차디찬 이 겨울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과 끝날 때까지 끝이 아님을 경계하고, 혼란의 상황에서 신뢰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그것을 수호해야함을 알려줍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결국 이 추운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올 것을 압니다. 꽁꽁 얼어붙은 것이 녹고, 그 사이를 비집고 싹이 틔고, 이 땅이 다시 초록잎으로 메꿔지는 계절이 옴을 우리는 압니다. 비록 추운 계절이지만 우리의 집, 터전,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서로가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 그 안에서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얼어붙은 이 대한민국에 봄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한층 더 성장할 것입니다.
[교회가 기지가 되어야 한다.]
기다림, 성장, 새로움이라는 단어를 곱씹다보니 교육부 아이들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육아를 하고 계신 많은 분들도 생각납니다. 어제 어린이부 6학년 아이들과 당일로 졸업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어린이부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며 함께 한 시간은 아이들도 아이들이지만 저에게는 더 뜻깊게 다가왔습니다. 생명사랑교회와 함께한 시기는 각각 다 다른 친구들이지만 이들이 처음 교회에 나와서 어색하게 저와 인사했던 모습들, 서로가 낯선 관계에 있는 친구들도 있지만 조금은 익숙해진 모습들이 떠오르는 시간이었습니다.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는 이 아이들이 잘 자라기를 기다리고, 성장을 응원하며, 기도해줄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합니다.
유아부터 청소년까지 교육부 아이들이 많아진 요즘, 교회의 많은 관심이 교육부로 향해 있습니다. 아이들이 교회 안에서 잘 성장하며, 좋은 그리스도교의 유산을 잘 받을 수 있을지 고민하고, 물질적, 정신적, 영적으로 지원을 해주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신들이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담아 지난 주일, 카드를 작성하고 사진을 찍어 예배당 뒷편에 있는 유아실 유리 창에 그 마음을 전해 놓았습니다.
교회는 사랑에 바탕을 둔 곳, 각 사람의 외적인 환경과 상황이 어떻든, 제 아무리 비천한 자라도 사랑받는 곳이 교회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막 3: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혈연의 가족관계를 넘어 사랑을 배우고 익히고 실험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오늘 사무엘상과 누가복음서 본문에는 어린 사무엘과 소년 예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두 본문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며 자라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라는 사무엘]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사사시대가 끝나고, 왕정체제가 수립되는 과정에 있는 인물입니다. 사무엘은 오랫동안 자녀가 없었던 한나의 기도로 얻은 아이입니다. 그래서 한나는 주님께 구하여 얻은 아들이라고 하여, “하나님이 들으셨다.”, “하나님에게 간구하였다”라는 의미를 가진 ‘사무엘’이라는 이름을 아들에게 주었고, 아이가 젖을 떼자, 제사장 엘리에게 데려가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렇게 성전에서 생활하게 된 사무엘은 주님을 섬기는 생활을 합니다. 사무엘은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제사장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무엘이 입은 모시 에봇이 그것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에봇은 제사장의 직무 수행 의복이며, 그것은 반드시 모시로 지어졌어야 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서 성전에 일을 하며 커갔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그를 성전에 바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사무엘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한나와 그의 남편 엘가나는 매년 드리는 제사날이 다가오면 예배하기 위해 성소로 올라갔습니다 그때마다 한나는 작은 겉옷을 만들어 사무엘에게 주었습니다. 이 “작은 겉옷”은 사무엘에 대한 한나의 지속적인 관심과 마음을 뜻합니다. 이 옷에는 어머니의 사랑이 듬뿍 담겨있을 겁니다. 사무엘은 한참 성장하는 소년이었습니다. 아이의 몸에 맞는 옷이 해마다 필요했을 것입니다. 비록 어머니와 함께하지는 못하지만 일년에 한 번씩 내 몸에 맞는 새로운 옷을 선물 받을 때마다 사무엘은 자신을 향한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을 잘 느꼈을 것이고, 그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이 어느 정도 성장했는지 예측하며 옷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고대에 옷을 만들려면 재료 생산에서 가공, 직조 등 모든 공정을 거쳐야 했기에 매우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한나는 사무엘에게 줄 겉옷을 만들기 위해 1년 내내 수고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옷을 만드는 내내 그를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비록 일년에 단 며칠 사무엘을 만났지만 그 작은 겉옷에 담긴 정성, 기도 그리고 사랑은 그를 주님과 사람에게 사랑받는 사람으로 커가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유년시절]
예수님의 어린시절 이야기는 누가복음서에만 등장합니다. 예수의 부모는 해마다 유월절이면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에 따라 일년에 세 번,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서 하나님 앞에 나가야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총을 기억함과 동시에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확실히 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 절기에 온 가족이 다 동행해야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가족이 함께 왔다는 것은 그들의 신실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의 가족이 유월절 절기를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루가 지나서야 요셉과 마리아는 아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부모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예수를 찾았는데 사흘이 지나서야 성전에서 그를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그들과 토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슬기와 대답에 경탄했다고 말합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에게 말합니다.
“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
마리아의 걱정을 알지 못했는지,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 뜻밖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았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여러분, 이 대답을 듣는다면 어떤 반응이 올라올 것 같나요? 예수의 부모는 아들이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마리아만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했을 뿐입니다. 예수는 부모와 함께 나사렛으로 돌아가서,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습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고 누가는 예수의 성장을 말하고 있습니다.
[반복을 통한 성숙]
우리가 참된 신앙의 길로 나아가려면 그 출발점은 반복을 통한 성숙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유대 전통을 충실히 배우고 익히며 자랐습니다. 우리가 매주 드리는 예배, 반복해서 성서를 읽는 것, 매년 반복되지만 교회력에 따라 우리의 삶을 맞추는 것, 규칙적으로 참여하는 이 반복적인 행위가 우리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우리의 일상이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정기적이고 반복적인 예배 없이 신앙이 성숙하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낯선 당신]
예수님이 어머니 마리아에게 했던 말은 매우 낯선 것입니다. 12살의 예수는 본인이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육체적으로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지만, 이제 곧 머지 않아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름 받은 존재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슬슬 독립을 향해 나아가는 어린이, 청소년의 모습이기도 하죠. 아이를 키워본 분들, 또는 가까이에서 아이의 성장을 지켜본 분들은 이런 경험이 다들 있을 겁니다. 내가 모르던 다른 모습이 튀어나오고, 수년을 같이 산 아이에게서 낯선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기 고집도 늘어나고, 잘 이해가 안되는 말과 행동도 합니다. 예수의 말을 듣고 그의 부모가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좋게 포장 된 말로 ‘컸다’라고 이야기하지만, 이제 부모의 욕심을 조금씩 내려 놔야 하는 과도기에 들어선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는 또한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는 부모와 함께 내려가 나사렛으로 돌아가서, 그들에게 순종하면서 지냈다.” 유년기 시절 예수는 경계에 서있기는 하지만 완전히 넘어가지는 않습니다. 아직 성장해야 할 인간임을 보여줍니다.
독립된 주체가 되어 나가기 전까지 공동체는 성숙의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구성원의 사랑과 섬김의 삶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곳, 평화롭고 부드럽다가도 불의 앞에서는 단호할 수 있는 곳, 이익에 양심을 팔지 않고, 지름길 보다는 삶의 원칙을 지키며 손해보더라도 무너지지 않는 곳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야 그 안에서 자라나는 신앙인들이 유혹에 쉽게 넘어가지 않고, 삶의 중심을 잘 잡으며, 바른 길로 묵묵히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먼 곳에서 방황하다가도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 어딘가에 부담 없이 안길 품이 있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안전 기지’같은 곳이 되어야 합니다. 안전한 안식처가 있다는 것은 든든한 마음으로 세상을 탐색하러 앞으로 걸어 나갈 수 있고 닥쳐오는 고난들을 견뎌 낼 수 있는 겁니다.
[표준화에서 토핑으로]
최근에 우리 사회의 트렌드는 ‘표준화에서 토핑으로’입니다. 트렌드 코리아 2025라는 책에서 내년을 이끌 소비 트렌드의 하나로 ‘토핑경제’를 꼽았습니다. 피자에 토핑을 얹듯이 소비자가 기존 상품을 변형해 개성을 부여하는 커스터마이징하는 트렌드를 일컬읍니다. 응원봉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꾸미는 일명 ‘봉꾸’라고 부르는데, 다양한 상품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꾸미는 N꾸의 시대가 왔음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대표적인 예로, ‘요아정’이라는 브랜드가 있는데, 올 상반기 가장 큰 인기를 끈 디저트입니다. 작년 동기 대비 약 422%나 증가했다고 하는데, 이 요거트 아이스크림이 이렇게 각광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50가지가 넘는 토핑을 가지고 서로 다른 나만의 조합을 만들 수도 있었고, ‘최애 조합’을 추천하며 유행이 빠르게 확산 된 것에 있습니다.
인류의 소비생활에 가장 큰 변화 중 하나인 ‘포디즘’은 대규모 컨베이어벨트 생산공정의 표준화를 통해 생산성을 극대화 했고, 곧 대량생산 체제가 가능하게 했습니다. 가내수공업 수준에 머물던 생산 효율을 극적으로 높여 공급 부족을 해결하고 ‘동질성’이 강조 됐으며, 그 규격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불량품으로 여겨졌습니다.
약 100년이 지난 지금, 획일화보다 개인의 고유함이 다시금 강조되고 있습니다. 한나가 사무엘의 성장에 맞추어 그에 맞는 옷을 지어 입혔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고유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나랑 똑같은 사람은 없죠. 개인의 신앙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각각이 모두 다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남과 비교를 하며 어느 한쪽에 맞추고, 비난하기에 바쁩니다. 우리는 각자의 성장에 맞게 알맞은 옷을 지어 입혀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빠르게 변하고 다양이 추구되는 시대에 맞춰 알맞은 것을 제시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본질이 옷은 것은 잃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키와 지혜가 자라나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는 그리스도인, 교회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는 성탄절 기간, 주님의 부드럽지만 강한 마음을 닮게 하소서. 사랑의 겉옷을 입고 서로의 성장을 축복하며 살아가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나와 공동체의 성숙을 기다리고, 고대하며, 그 인내의 시간이 헛되지 않음을 깨닫게 하여 주십시오. 2024년, 한 해 동안 우리와 함께 동행하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했던 날들을 품고, 추운 이 겨울 잘 견뎌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