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덕 목사] 정직한 믿음과 확고한 사랑 – 2024년 3월 10일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절-3장 5절
[담임목사 청빙 하던 때의 이야기]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지난 2015년에 담임목사 청빙 공고를 하면서 “우리가 바라는 목회자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⑴ 우리는 복음의 진수를 알려주고, 인격적으로 성숙하며, 성도들과의 소통을 중시하며, 모든 교인이 스승처럼 따를 수 있는 목회자를 원합니다.
⑵ 우리 교회가 추구하는 방향과 목회 활동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특별히 참여율이 점점 저조해지고 있는 어린이, 청소년, 청년들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부흥시킬 수 있는 목회자를 원합니다.
첫째는 목회자인 저의 영성과 전문성에 대한 것이고, 둘째는 우리 교회의 목회 방향과 활동에 대한 것이지요. 제가 담임목사로 부임한 이후에도 저는 바로 이 두 가지를 마음속으로 늘 되새기고 있습니다.
또 우리 교회가 담임목사를 청빙할 당시 교회는 공동의회 한 주 전에 최종 1인 후보가 된 저에게, 와서 설교도 하고 목회 계획도 발표하고 교인들이 궁금해하는 것에 대해 답변도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실시한 공청회 시간에, 장모세 집사님께서 제게도 질문할 기회를 주시면서 교인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말씀해 달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두 가지를 말했는데, 하나는 그리스도교 신학과 진리를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가르치는 기회가 제게 왔을 때 저를 보내달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땅에서 어려움을 당하며 눈물로 지내는 분들을 위한 현장에서 저를 설교자나 다른 일로 부르면 그때에도 제가 가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기꺼이 허락해 주셔서, 지난 9년의 목회를 하면서 다양한 곳에서 청년들을 만나고, 또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 곁에 갈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학교에서 이제 막 대학교에 입학한 학생들 70명에게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전하고, 신학 전공생에게 학문적 유산을 물려 주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맞이해서 태국 봉사활동도 하고, 4대 종단이 함께 하는 DMZ 생명평화 도보순례에도 지지 방문차 다녀왔습니다.
[청년주일을 맞아]
오늘은 청년들의 신앙을 북돋우고 그들의 열정에 격려를 보내기 위해 우리 교단 총회가 제정한 청년주일입니다. 청년주일은 1953년 제38차 교단 호헌총회에서 결의되었기 때문에 우리 교단의 역사와 함께해 왔고, 올해로 벌써 71회를 맞고 있습니다. 청년주일은 특별히 청년들을 교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세워주고, 청년들의 신앙으로 교회와 이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사명을 고백하는 날이며, 우리 교단의 모든 성도가 애정을 가지고 청년 선교에 관심을 갖는 날입니다. 우리 교회는 청년주일을 따로 지키지 못하다가, 2019년에 처음으로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정기모임을 가지면서 청년주일 예배를 주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청년들은 지금은 거의 다 가정을 꾸리고 부모가 되었습니다.
우리 교단 청년연합회가 올해 청년주일을 맞아 정한 표어는 “약동하는 청춘, 비상하는 우리”입니다. 어느 사회이든지, 젊은이들이 생기 있게 활약해야 그 사회가 건강하고 밝은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청춘들이 약동하고 높이 날아오르려면 기존 세대가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고, 젊은 세대들이 실수해도 넉넉히 받아주면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2018년부투 2020년까지 OECD 38개 회원국의 연령 표준화 평균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11.1명인데 비해 대한민국은 24.1명이라는 높은 비율을 보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청년 자살률의 경우 2000년부터 2021년까지 약 52.2%가량 증가했다는 것입니다. 매일 20대 청년들 4-5명이 극단적 선택을 하고 죽음에 이릅니다. 한국 생명존중 희망재단의 2021년 통계 자료에 따르면, ‘정신과적 문제’가 전체 자살 동기 중 39.8%, 경제생활 문제가 24.2%입니다. 통계청 자료 ‘2022년 사회조사 결과’에서도 20대, 30대의 자살 충동 주요 이유로 ‘질환/우울감/장애’가 20대, 30대에서 각각 36.8%, 29.8%로 가장 높게 나타났습니다.
이런 조사들을 보면 많은 청년이 깊은 우울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청년 빈곤의 문제도 매우 심각합니다. 우리 사회가 청년들 한명 한명을 개별적으로 존중하지 못하고 집단적 정체성에 따르라고 하는 데다가, 무한경쟁 속에서 남보다 앞서 나가라고 강요하기에 타인의 기대와 평가에 부응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리는 청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베이비 붐 세대의 자녀들로 태어나 ‘열심히 노력하면 보답이 돌아온다.’는 능력주의의 분위기에서 자라왔으나, 취업난과 결혼 문제에 직면하며 스트레스를 받고, 소셜 미디어 등을 통해 사람들과 자신을 수시로 비교하며 열등감과 우울감을 느끼는 세대가 오늘날 20대입니다.
청년 자살률의 증가라는 사회적 현상은 오늘날 20대 청년들이 얼마나 고민이 많고 힘든 삶을 이어가는가를 단편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이 힘들 때 도와줄 사람들을 찾고 있지만, 실제로 도움을 얻기란 매우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기성세대가 그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고, 또 젊은이들은 기성 세대와 대화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꼰대들]
흔히 기성세대를 두고 젊은이들이 ‘꼰대’라고 부르고, 고(故)노회찬 의원 같은 분은 세상에는 “지금 꼰대인 사람과 앞으로 꼰대가 될 사람,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는 농담도 하셨는데, 영국의 국영방송인 BBC에서는 우리말 꼰대(kkondae)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늘 자기만 옳다고 믿고 타인은 항상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나이 많은 사람’(An older person who believes they are always right and you are always wrong) 여기에 특별히 나이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젊으면서도 자기만 옳다고 믿는 사람들을 ‘젊은 꼰대’라 하여 ‘젊꼰’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청년들은 진정한 인생의 선배를 만나길 바라지만 대체로 꼰대를 만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자기 문제를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잘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젊은이의 고단한 삶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올해 매주 수요일 저녁에 각 아가페별로 안전한 공동체를 위한 이해와 경청의 대화법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대화와 논쟁에 차이에 대해서 다루었습니다. 논쟁과 대화의 가장 큰 차이는 배우려는 자세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논쟁은 배우려는 마음이 눈꼽 만큼도 없이 남을 굴복시키려는 방식의 이야기 나눔이지만, 진정한 대화는 상대를 이해하면서 자신도 배움을 얻으려는 자세를 갖습니다. 이삼십대 젊은이들과 대화하는 기성 세대가 과연 이삽십대 젊은이들에게 배울 마음이 있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젊은이들에게 충고할 생각만으로 가득하다면 그런 어른은 젊은이들과 절대로 대화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그런 어른들을 피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성세대가 진심으로 이해하고 배우려는 마음으로 젊은이들을 대한다면, 젊은이들은 선배들의 경륜에서 지혜를 얻고,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을 통해 변하는 세상에 적응하는 법을 익히게 될 것입니다.
꼰대에 대해서 아주 정확하게 성찰한 글이 하나 있어서 다소 길지만 전문을 읽어 드리려고 합니다. “지식채널 e”라는 영상을 만들었던 김진혁 PD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독립언론 뉴스타파에 올린 글입니다.
꼰대 VS 선배
요즘의 20대, 소위 88만원 세대라 불리는 이들에 대한 선배 세대들의 충고는 잊을만하면 언론을 통해 소개 되고, 소개가 될 때마다 이런 저런 논란에 휩싸이곤 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러한 충고를 하는 이들이 단지 장노년층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장노년층은 물론 386세대, 그리고 소위 x세대라 불리는 298세대 모두 한마디씩 거든다. 그러다 보니 충고의 내용도 크게 세 가지로 분류가 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최근 개봉한 국제시장의 주인공과 같은 세대인 장노년층들의 경우 오직 정규직 일자리만 바라는 20대의 태도에 특히 문제를 제기한다. 중소기업 혹은 3D 업종엔 일자리가 많이 남아도는데도 불구하고 20대가 편한 일자리만 바라기 때문에 취업을 못한다는 게 이들 세대의 주요 의견이다. 더불어 비정규직이나 아르바이트 같은 일도 결코 ‘부당한 대우’가 아니라 인생에 있어 ‘좋은 경험’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다음으로 386세대는 부당함에 저항하지 않는 20대에 불만이 많다. 아무리 일자리를 얻기가 어렵더라도 부조리와 불합리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고 순응하는 요즘의 20대는 그들이 보기에 나약하거나 혹은 이기적으로 비친다. 무엇보다 그러한 부당함으로부터 벗어나려면 단순히 자기 일자리만 지켜서는 안되고 그러한 부당함을 강요하는 ‘사회 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게 이들 주장의 요지다.
마지막으로 90년대 초중반, IMF 외환위기 이전에 대학을 다녔던 298세대는 뭔가 늘 주눅 들어 있고 눈치를 보고 열심히 적응하려 애쓰는 20대가 불만스럽다. 열심히 일하든 부당함에 저항하든 아니면 다른 뭘 하든 간에 자유롭게 했으면 좋겠는데 요즘의 20대는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너무 다른 내용의 충고들이지만 이들 세대 모두가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태도가 있다. 자신들이 20대에 경험했던 것을 기준으로 현재의 20대를 판단하고 규정한다는 점이다. 현재 20대가 경험하고 있는 것들, 그리고 현재의 20대에게 주어진 현실에 근거해서 판단하지 않는다.
더불어 중요한 또 하나의 공통점은 각 세대 나름대로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었고, 그 희망은 적어도 내일이 오늘보다 나으리란 ‘낙관’ 속에 놓여져 있었다는 점이다. 장노년층에겐 ‘경제성장’을 통해 가난으로부터 벗어나리란 희망이 있었고, 386세대에겐 ‘민주화’를 통해 ‘독재’로부터 벗어나리란 희망이 있었고,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과실 모두를 영위한 298세대에겐 그러한 구조적 문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개인’을 추구하는, 서구 유럽의 선진국 같은 미래가 찾아올 것이란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20대가 경험하는 현실이란 어떤가? 위 세대의 그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저성장’이란 환경에 놓여 있다. 이로 인해 경제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더 나은 내일’은커녕 ‘오늘보다 나쁘지만 않은’ 내일을 바라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단순히 지금 현재의 일자리가 부족하고, 비정규직이 넘쳐나고, 임금이 낮고의 문제만이 아니라 심지어 앞으로는 상황이 더 나빠질 거라는 불안감, 바로 그러한 불안감 속에서 20대를 맞이한 ‘첫 세대’인 셈이다.
고속성장 속에서 20대를 보냈던 대부분의 선배세대는 적어도 20대에 이처럼 ‘불안한 미래’ 속에서 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기 나름대로 무언가를 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었고, 실제로 각 세대 나름의 무언가를 이뤄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부분이 각 세대가 지니는 ‘자부심’이자 ‘자존감’으로 형성이 됐다.
반면 현재의 20대에겐 그러한 ‘자존감’이 허락되지 않는다. 자기 세대 나름의 새로운 무언가를 이뤄내기는커녕 선배세대가 기존에 만들어 놓은 구조에 ‘편입’되기 위해, 그 구조로부터 미끄러져 추락하지 않기 위해 바둥거리는데, 그 모습 어디에서 스스로를 존중하고 사랑할 여지가 생길 수 있겠는가? 수동적이고 회피적인 삶은 오히려 자존감을 깎아 먹기 마련이다.
그런 그들에게 선배 세대가 쥐어 주는 건 두 가지. 하나는 자기계발서고 다른 하나는 소위 ‘힐링’ 도서다. 자기계발서엔 당연히 자기 세대가 어떻게 성공했는가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현재 20대가 놓여진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이 결코 아니다. 그렇게 충고하는 것이 미안했는지, 혹은 충고해줘봤자 어차피 지금의 현실에서 20대가 따라 할 수 없는 걸 알았는지 다른 한 켠으론 힐링 도서를 내민다. 그러면 두 권의 책을 쥔 20대는 마치 냉온탕을 오가듯 자기계발서와 힐링 도서 사이에서 ‘가상의 희망’이란 걸 잠시나마 쥐어 보게 된다. 물론 그 희망은 진짜가 아니다.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해서 남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 이런 걸 속된 말로 ‘꼰대질’이라고 한다. 그렇게 보면 꼰대는 꼭 나이가 많아야 하는 건 아니다. 정치성향과 이념성향이 특정한 쪽에만 꼰대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하루 하루 버텨내기 어려운 20대들에게 선배가 되어줄 자신이 없으면 꼰대질은 하지 않는 게, 현재 20대가 겪는 불안감 가득한 세상을 만든 선배 세대가 갖춰야 할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싶다.
[교회는 청년들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
김진혁 PD가 선배 세대에게 ‘예의’를 갖추라고 한 조언은 오늘날 한국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20대 30대를 막론하고 다양한 일상의 스트레스 한복판에 놓여 있습니다. 김진혁 PD의 말대로 지금의 젊은이들은 이전 세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미래에의 희망을 꿈꾸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세계화되고 다원화된 가치 속에서 그리스도교가 일방적으로 퍼부어 대는 소리는 복음의 소식이 아니라 잔소리이거나 헛소리로 들리면서 오히려 역효과만 가져올 뿐입니다.
코로나 19 이후에 한국은 더욱더 세속화되고 있고, 종교인들의 신앙 양상도 달라지는데, 교회가 이런 변화를 간파하지 못하고 기존의 방식만을 고집하는 것은 젊은이들에게는 답답함을 유발할 뿐입니다. 교회에 나오기 싫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상 세계’, ‘랜선 사회’의 일상화는 느슨한 연대로도 우리 삶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핵개인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예전처럼 온갖 다양한 집회에 참석해서 열정적으로 찬송하고 소리 높여 기도해야만 마치 신앙이 좋은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가 지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청년 목회는 더 세밀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더 개별적이고, 더욱더 안전하면서도 부드럽고 감동이 있는 터치가 필요한 것입니다.
청년 목회에 있어서 우리 생명사랑교회도 충분한 역량을 발휘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 우리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빈약한 부분들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당장 청년들만 따로 모일 공간도 없고, 청년 사역에만 집중할 수 있는 상황도 되지 못합니다. 공간 마련을 위해서 장기적 계획이 필요하듯이 청년 사역에 대해서도 좀 더 긴 시간의 기획과 준비가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마냥 뒤로 미룰 수만도 없습니다. 그래서 적절한 시점에는 반드시 우리 생명 사랑의 장기적 목회 계획과 더불어 힘을 모으고 마음을 모아서 청년에 대한 집중적 사역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디모데에게 주는 바울 사도의 조언]
오늘 바울 사도는 자기가 마케도니아로 떠나면서 디모데에게 에베소에 머물러 있으라고 부탁했던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에베소에는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이 아닌 다른 율법과 교리들을 가르치고 다양한 신화와 교설로 교인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는 바울 사도가 부탁한 대로 교인들이 쓸데없는 토론에 빠져 서로 분열하거나,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되어 인생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애를 씁니다. 세상 풍조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바울 사도가 강조하는 것은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에게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신뢰 속에서 우러나오는 확고한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솔직하고 정직한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믿음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흔히 우리는 청년들의 신앙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또 젊은이들이 교회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 걱정과 염려를 하지만, 사실 정직하게 돌아보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과연 우리가 우리의 후배들에게 제대로 된 신앙인의 삶을 보여주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반하여 확고한 사랑을 하였는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거짓 교사들에 대해 이렇게 비판합니다. “그들은 율법교사가 되려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또는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7절) 혹시 그동안 우리가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알짬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실제로 삶에서 살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의 자녀와 후손들이 믿음에서 멀어진 것이 아닌지 진지하게 반성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해를 동반하지 않는 믿음은 맹신으로 이어지기 쉽고, 맹신이 곧 불신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건전한 많은 젊은이가 교회를 떠나는 것은 교회가 오히려 비상식적인 곳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교회가 진정으로 복음의 능력, 신앙과 사랑의 힘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한 설문조사에서 3040세대 그리스도인 10명 중 4명이 “신앙적 회의 느끼고 있다.”고 응답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비도덕적이고, 이중적이어서”(37%)가 가장 많았습니다.
마하트마 간디 선생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의 믿음이 너의 생각을 만든다. 생각은 말이 되고, 말은 너의 행동이 된다. 행동은 습관을 만들고, 습관은 너의 가치가 된다. 그리고 그 가치가 너의 운명이 되는 것이다.”(“Your beliefs become your thoughts, Your thoughts become your words, Your words become your actions, Your actions become your habits, Your habits become your values, Your values become your destiny.”)
오늘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운명이 된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정직한 믿음 안에서 우러나는 확고한 사랑을 우리의 자녀와 후배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이 신앙의 유산이 이어지고, 우리 생명사랑교회의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우리를 주님의 백성으로 택하셔서 불러 주신 하나님! 우리가 신앙 안에서 살아가게 하신 은혜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는 청년주일을 맞아 예배를 드립니다. 이 예배를 받아주시고, 주님 영광 받으소서. 우리의 믿음이 더 단단하길 소망합니다. 세상의 풍파도 넘고, 거대한 장벽도 뚫고 나아가는 믿음 되게 하소서. 우리의 사랑이 확고하길 기도합니다. 사랑으로 혐오의 세상을 치유하고, 나눔과 기쁨으로 가득한 세상을 만들게 하소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참된 삶으로 이끄는 길임을 정확하게 알아 후손들에게 전하게 하시고, 우리 모두가 함께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그 길에 앞장 서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하나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고,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오직 주님을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세상은 어수선하고, 숱한 어려움들이 여전히 밀려오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우리를 지켜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삶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정직한 믿음과 확고한 사랑을 이루기 위하여 늘 기도하길 원합니다. 지치고 고된 삶 속에서도 지혜로운 방식으로 서로를 돌보게 하시고, 삶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을 함께 나누며 해결하도록 도와 주소서. 동시에 내면을 풍성하게 하는 일에도 힘쓰게 하여 주소서. 어둠 속에 감춰진 빛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주님의 은총을 부어 주시고, 우리의 사랑이 더욱 힘 있고 아름답게 피어나게 하소서. 오늘 우리는 우리의 전 삶과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을 기억하며 주님께 예물을 드립니다. 이 예물이 하나님 나라 사역에 올바로 쓰이게 하소서. 특히 더 약하고 힘든 이들에게 작은 빛이 되게 하여 주소서. 사랑의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정직하게 내 믿음과 삶을 돌아보십시오. 부족한 것은 채우고, 넘치는 것은 나누어 단단한 믿음과 확고한 사랑을 지니십시오. 최선을 다하여 우리가 가진 신앙의 유산들을 후배와 후손들에게 전하십시오.
* 축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람이 되어
여러분을 주님 곁으로 데려가게 하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여러분의 힘이 되어
주님을 섬기게 하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이 생명이 되어
여러분의 영혼을 넘치도록 채워 주시기를 빕니다.
전능하신 주님, 성부 성자 성령 성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영원히 여러분 곁에 계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