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한문덕 목사] 하는 일마다 잘 되는 사람 – 2021년 1월 10일
사사기 8장 22-27절, 시편 1편 1-6절, 사도행전 11장 19-30절
[2020년과 2021년 사이에서]
우리에게 <크리스마스 캐럴>이라는 작품으로 잘 알려진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160년 전에 쓴 <두 도시 이야기>의 첫 머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무엇이든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 쪽으로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최고’와 ‘최악’, ‘지혜’와 ‘어리석음’, ‘믿음’과 ‘의심’, ‘빛’과 ‘어두움’, 희망과 절망. 서로 상반되는 가치들을 대치시키는 이 첫 문장들은 곧장 독자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당신은 앞에 놓인 삶의 두 갈래 길에서 과연 어떤 쪽을 선택할 것인가? 소설은 독자에게 일관되게 질문을 던지면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물론 누구라도 좋고 편한 길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하는 일마다 잘 되는 길이 있다면 바로 거기로 걸어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최고’와 ‘최악’, ‘지혜’와 ‘어리석음’, ‘믿음’과 ‘의심’, ‘빛’과 ‘어두움’, 희망과 절망의 갈래길에서 좋은 길을 선택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2020년을 보내고, 2021년을 맞이하는 지금 우리의 심정이 이 소설의 첫 문장과 매우 비슷합니다. 코로나 19라는 전대미문의 사태를 맞이하면서 인류는 거대한 혼돈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최근 세계 소식을 듣고 있노라면 한숨이 깊어집니다. 최근 일본은 하루에 확진자가 7000명도 넘게 나왔는데, 하루의 검사 건수가 2만명도 안 되기 때문에 검사를 하면 세 명 중 한 명은 감염자가 나오고 있는 상태입니다. 영국도 벌써 세 번째 전국 봉쇄조치에 들어갔고, 미국의 LA도 난리입니다. 40만이던 신규 확진자가 한달 만에 80만이 되었고, 15분마다 1명씩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가 나오고 있습니다. 방역을 잘 해왔다고 하는 우리나라도 연일 천명에 가까운 확진자가 쏟아지고, 병상은 가득 차고, 사망자가 속출하며, 썰렁한 거리에 문 닫는 가게들, 빈 점포들이 계속 늘고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제 백신이 개발되었고, 우리나라도 2월 말부터는 접종을 시작해서 가을이 되는 3분기까지는 집단 면역이 형성되도록 한다는 정부당국의 계획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백신이 부작용 없이 잘 작동된다면 감염의 확률을 낮출 것이고 코로나가 종식되는 날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이러스 입장에서 볼 때 인류는 세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감염자와 감염 가능자, 그리고 감염되었다가 회복된 사람입니다. 문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감염시킬 수 있는 사람의 숫자를 나타내는 감염률인데, 알제로(RO)라고 부르는 감염확산수치가 1미만으로 줄어들어야 확산이 멈추고 질병이 종식될 수 있습니다. 백신을 맞으면 감염가능자가 줄어들기 때문에 전 국민의 70%정도에게 백신을 접종하면, RO값이 1미만이 되고 그러면 코로나를 종식시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코로나 백신은 구입부터 시작해서 접종하고 실제적 효과가 나올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올해 말까지도 마스크를 벗을 수는 없다는 것이 대다수 전문가들의 진단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이 위기를 잘 견뎌내고, 매번 현명한 선택을 하며 지혜롭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작년 1년 동안 코로나 19를 겪으면서 코로나 방역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 중에 하나가 “연대적 시민성”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즉 자발적으로 방역에 참여하고, 코로나로 인해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국가나 사회가 지원하는 것에 관대하며, 이를 위해 세금을 올린다고 해도 기꺼이 낼 사람이 많을수록 코로나 19를 극복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남을 믿어주고 이웃과 함께 살려는 마음으로 특별히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약한 자들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시민들이 많을 때, 위기를 넘길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삶의 위기가 한 개인에게 닥치면 어쩔 수 없이 당하는 숙명이 될 수 있지만, 사회 전체가 힘과 마음을 모아 공동으로 대응하면 이 위기는 계산 가능하고 관리도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됩니다. 그동안 선진국이라고 알려진 나라들이 코로나 방역에 계속 실패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개인의 자유”라는 가치를 너무 높이 평가한 나머지 어려움이 닥칠 때 필요한 연대적 시민성을 기르는 것에 미숙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위기가 닥치면 자신 먼저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전부가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을 택하면 잘 사는 사람만 더 잘 살게 되고, 어려운 사람은 더 어렵게 됩니다. 위기가 불평등 지수를 높이고, 불평등한 사회는 상대적 박탈감을 심화시키고, 일상의 스트레스 지수를 높이기 때문에 사회적 불안은 더 가속화됩니다. 그래서 이럴 때일수록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며 공동체적인 협력을 통해 사회적 안정망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위기가 상생하는 연습을 하는 기회가 되어야 하고, 그 길만이 모두가 살 수 있는 길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 시대에 악인은 누구이며, 죄인은 누구이며 오만한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바로 남이 피해를 입든 말든 자기만 생각하며 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국가가 지원 재난금을 준다고 하니까 그것을 이용해서 보이스 피싱 사기를 치는 인간들이 있고, 국민의 고통을 덜고자 하는 노력에 참여하기보다 그저 정치적 유불리만을 따지는 정치인들이 있고, 온갖 거짓 뉴스를 통해 혼란을 가중시키는 언론인들이 바로 악인이요 죄인입니다.
지난 7일 오전 부산의 세계로 교회 앞에서 한 무리의 개신교인들이 모여 “비대면 예배 거부” 집회를 열었습니다. 이들은 “예배는 생명이다”라는 표어를 들고 나와서 “비대면 예배는 교회를 파괴하는 행위며, 정부는 헌법에 명시된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지 말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대면 예배를 계속 강행하고, 당국의 폐쇄 조치에는 가처분 소송으로 대응하겠다고 했습니다.
“예배가 생명”이라는 말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예수님을 떠올리고 하나님과 만나는 예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삶의 용기를 불어넣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합니다. 그래서 예배는 참으로 소중합니다. 그런데 예배를 통해 확고하게 형성하려고 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란 결국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재현하기 위해 생긴 공동체이며, 신앙공동체의 일원인 우리들은 예수께서 하신 대로 세상을 사랑하여 아들을 보내신 그 사랑을 닮아 이웃과 세상을 위하여 헌신해야 합니다. 주일 예배의 궁극적 목표는 우리 일상의 삶이 예배가 되게 하는 것이며, 예배는 세상의 구원이라는 목표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를 생명처럼 여기는 이들이 다른 이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짓을 서슴지 않고 하려는 것을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를 비롯해 전국의 수많은 교회들은 온라인을 통해 예배를 하고 있고, 코로나 상황에 맞게 목회의 변화를 꾀하며, 새로운 시대에 복음의 내용을 담을 새로운 형식을 찾는데 애쓰고 있습니다. 교회와 예배당이라는 공간과 주일 11시라고 하는 예배 시간, 성직자와 직분 등은 모두 우리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과 소통하며 우리 삶의 터전이 되는 세계 전체를 하나님 나라로 바꾸는 한 명의 그리스도인을 양육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의 공간은 결국 우리 삶의 현장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모두가 함께 협력하며 살 수 있도록 하는 것, 우리 교회의 이름으로 말하자면 저와 여러분들이 있는 곳마다 생명을 살리고 사랑이 넘치는 일들이 일어나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시고 그 모두가 함께 어울려 살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뜻은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국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리에 임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모든 생명체들이 함께 상생하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잘못 배운 한국의 많은 교인들은 예수에 대한 믿음을 그저 천국행 티켓으로 여기면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와 소통하지 못했습니다. 온 우주의 생명들을 아끼고 함께 살아갈 줄 모르고 자신의 종교적 욕망을 채우는데 급급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부르짖고, 거룩한 언어들을 쓰면서 참 신앙을 외치지만 가만히 보면 무엇이 진정한 그리스도교 신앙인지도 모르고 왜곡된 신념 속에서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 반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몸과 정신에 아로 새겨진 잘못된 신념은 매우 무서운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하나님을 믿는 열정과 정열로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이들을 박해한 것이 그 하나의 예입니다. 베드로도 유대인으로서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을 지켜 왔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먹으라고 하시고, 괜찮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먹기를 거부했는데, 인간의 잘못된 신념과 고집은 이렇게 무섭고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제가 설교 제목을 “하는 일마다 잘 되는 사람”이라고 붙였습니다. 오늘 시편의 저자는 복 있는 사람은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기에,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제목을 정했습니다. 이 말은 진리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묵상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대로 사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계절에 따라 맛있는 열매를 맺을 뿐 아니라,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입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정말 하는 일마다 모두 잘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어리석고 욕심에 휘둘리고 나만을 생각하면서 때때로 잘못된 선택을 하기 때문에 넘어지고 쓰러지는 일들이 생깁니다만, 주님의 지혜와 힘과 능력에 의지하면서 옳은 길을 걸어간다면 하는 일마다 모두 잘 되는 사례가 갈수록 늘어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코로나를 통해 우리가 서로 협력하고 도와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건강하게 연대하는 시민이 되라는 것입니다.
[위기를 넘을 때 조심해야 할 것]
공동체나 개인이나 삶의 위기가 닥치면 그것을 뚫고 나갈 지혜와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공동체가 평안할 때는 모든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긴 시간을 논의하면서 민주적인 방식으로 운영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그 공동체가 발전하고 성숙합니다. 그런데 위기의 상황에서는 다른 방식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위기 상황에서는 빠른 판단과 과감한 실행력이 중요합니다. 공동체를 운영할 때 서로 다른 목소리는 항상 있기 마련이고,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평안할 때는 충분한 논의 속에서 불협화음을 최소화할 수 있지만 위기의 상황은 다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도 코로나 19 상황에서 목회의 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모임 중심의 모든 목회활동은 중지해야 했고, 지하라는 공간은 최악의 조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코로나가 오기 전에 우리는 예배 처소 옮기는 문제를 충분히 논의했습니다. 상계동에서 차로 30분 이내로 갈 수 있는 곳, 깨끗한 화장실, 엘리베이터가 있고, 아이들과 함께 교육 프로그램이 가능한 곳, 주차장이 확보되며, 우리의 재정 형편으로 감당할 수 있는 새 예배처소를 마련하자는 것에 온 교우들이 합의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조건들을 생각하며 많은 교우들이 새 예배 처소를 물색했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렇게 예쁘고 아늑한 장소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4차 산업혁명을 앞두고 새롭게 변화해야 한다는 저의 목회 방침에 모든 교인들이 동의했고, 과감한 변화에도 여러분들은 힘써 힘을 보태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해와 올 해 다른 어떤 교회보다도 안정적인 목회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가 조심해야할 때입니다. 섰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넘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사사기를 보면 이스라엘의 멸절 위기 속에서 구원을 가져다 준 사사 기드온이 나옵니다. 사사기 전체를 통해 기드온의 활약은 무려 6장에서 8장까지 세 장에 걸쳐서 보고됩니다. 모든 백성이 몰려와 왕이 되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기드온뿐만 아니라 그의 자손이 대대로 왕이 되어달라고 합니다. 기드온이 금을 요구했을 때 이 백성들이 내놓은 금의 양을 오늘날로 환산하면 3만천790킬로그램이나 됩니다. 그만큼 기드온의 능력은 출중했고, 모든 사람들이 기댈 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자신이 왕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100점 만점입니다. 아주 잘 한 것입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지금의 위기 상황에서 잘 대처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살펴 보호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주님 앞에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생각하며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자신을 먼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인들을 만나보면 모두가 교회를 염려하고, 어떻게든 도울 마음이 가득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게 모든 공을 자신이 취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길 때, 그 공동체와 개인은 타락하지 않고 옳은 길, 복 있는 사람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올바른 판단을 한 기드온이 한 가지 실수를 합니다. 주님께서 다스린다는 것을 잘 아는 이 사람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백성들에게 금을 받아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주님의 뜻을 받들어 이룬 성공 그 자체가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생명사랑교회의 목회가 주님의 은총 덕분에 튼실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이것이 자칫하면 우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를 방문하는 모든 분들이 공간이 너무 아늑하고 아름답고 예쁘고 따뜻하다고 말합니다. 우리 교회가 지난 세월 목회한 얘기를 들으며 칭찬을 합니다. 지난 주중에 여러 목회자들과 손님들이 다녀갔는데 모두들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모든 상황들이 자칫하면 우리의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칭찬에 기대고 거기에 머물러 있을 때, 여기가 좋사오니 그저 여기에서 잘 지내겠다면서 주님의 선교 사명을 망각할 때 곧 이 모든 좋은 것들이 우상이 됩니다.
[박해의 현장으로 끊임없이 나아가라]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의 구절은 처음 교회가 어떻게 성장해 나갔는지, 부흥하면서 주님의 사역을 어떻게 감당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구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스데반에게 가해진 박해 때문에 흩어진 사람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 섬과 안디옥까지 가서, 유대 사람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 선교의 영역이 확장되고 있는데 바로 그것이 스데반에게 가해진 박해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박해가 새로운 선교의 문을 엽니다. 페니키아 키프로스, 안티오키아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계기가 된 것은 성공이 아니라 오히려 박해였습니다. 처음에는 유대 사람들에게만 말씀이 전해지지만 곧 그리스인들도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활약한 사람은 바로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안디오키아까지 복음이 전해졌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입니다. 예수님의 1세대 제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가 이렇게 중간 지도자, 다음 지도자를 잘 양성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스데반도 바로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는데, 바나바는 여기에 윤리적 도덕성까지 확보한 것으로 나옵니다. 바나바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듭니다. 교회 부흥의 원칙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지혜를 얻고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더하여 그것이 일상의 삶에서 드러나는 도덕성을 통해서 교회가 부흥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나바 한 사람을 통해서입니다. 오늘날도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부흥하려면 우리 교인 한 명 한 명이 성령과 믿음에 충만하고 거기에 도덕성까지 겸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이웃을 향한 배려의 마음, 약하고 어려움을 당한 이들의 아픔에 함께 하려는 공감능력과 실제로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 가는 실천이 담보될 때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바로 바나바의 모습에서 배워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파송 받은 바나바 덕분에 안티오키아 교회가 부흥하자, 이번에 바나바는 다소로 가서 사울 즉 바울을 데리고 옵니다. 처음에는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파송을 받았지만 안티오키아 교회 현장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 스스로 판단하여 바울 사도를 데리고 오는 일을 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1년 넘게 이들은 많은 신자들을 가르칩니다.
교회가 부흥한 다음 필요한 것은 바로 올바른 가르침입니다. 한국교회가 부흥하고 난 뒤 올바르게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이 사회의 천덕꾸러기가 된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처음으로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헤롯 아그립바 2세가 빈정대듯이, 사용한 사도행전 26장 28절을 제외하면 베드로전서 4장 16절에서만 쓰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당하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요? 바나바가 보여준 대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며 그것으로 착한 행실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때로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빛은 어두움을 몰아내고 부끄럽고 추한 부분을 들춰내기 때문입니다. 어둠의 세력은 빛을 싫어하여 박해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고난은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본문은 안티오키아 교회가 예루살렘과 유대에 사는 신도들을 돕는 것으로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사랑교회와 한국의 모든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모든 교회는 서로 돕는 일에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이전하면서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노회가 도왔고, 노회 소속 이웃 교회가 도왔고, 전국의 많은 성도들이 후원과 지지를 보내 주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애쓰고 수고한 것에 많은 사람들이 힘을 보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힘들을 모아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돕고, 이웃을 돕고 세상을 돕는 일에 나서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깨닫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단단한 믿음에 섰다면 이제 우리는 세상을 구원하는 일, 모두가 함께 살고, 특별히 더 어렵고 힘든 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나서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 일에 나설 때, 우리 모두는 하는 일마다 잘 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바른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악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하시고,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주님께서 보여주신 진리에 뿌리를 내려 시들지 않게 하소서. 때에 맞는 열매를 얻게 하시고, 열매를 맺기 위해 무더운 여름 뜨거운 태양을 견디게 하소서. 당신의 가르침 속에서 삶의 방향과 목적을 찾게 하시고, 부드러운 산들바람과 시원하게 쏟아 붓는 빗줄기 속에서 당신의 사랑과 보살핌을 느끼게 하소서. 존재하는 모든 것에 신비를 느끼고, 주님의 지혜를 얻어 하는 일마다 잘 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소서. 오늘 하루를 주신 것에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주님의 말씀에 여러분의 신앙의 뿌리를 내리십시오. 그리하여 하는 일마다 잘 되는 한 해가 되십시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거룩한 친교가 새해를 맞아 주님의 뜻 가운데 모든 일을 감당하고자 하는 생명사랑교우들과 이 시간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아픈 세상에서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