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덕 목사]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려면 – 2023년 11월 12일
누가복음서 5장 1-11절, 베드로후서 1장 3-7절
[인생은 선택의 연속]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지만,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거나 지난날과는 전혀 새로운 길로 접어들게 하는 선택들이 있습니다. 이 한 번의 선택으로 인생이 술술 풀리기도 하고, 아주 힘들고 모질게 꼬이기도 합니다. 단단히 마음을 먹고 오랜 시간 준비된 상태에서 선택하기도 하지만,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뭐에라도 홀린 듯 자신도 모르게 선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선택이란 알고도 하고, 모르고도 하는 것이지요. 알고 택했는데도 낭패를 보기도 하고, 모르고 한 선택이 의외의 좋은 결과를 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언제나 선택이란 아직 가보지 않은 그래서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자신을 던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늘 불안과 긴장을 동반합니다. 때론 큰 용기도 필요합니다. 물론 오랜 시간 준비했다면 두려움보다는 설렘과 기대가 있기도 하지요. 그리고 선택했다면 책임도 져야 합니다.
저의 짧은 인생에서도 수많은 갈림길이 있었고, 그때마다 저 또한 어느 한쪽을 택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를 포기하고 다른 하나를 붙잡을 때 어떤 것이 기준이 될까요? 우선적으로는 당장 생존에 있어서 필요한 돈과 생활환경일 수 있습니다. 자기 내면에 자리 잡은 실존적 고민과 이런저런 삶을 살고 싶다는 바람이 영향을 줄 때도 있겠지요. 그런데 이런 것들 못지않게 선택에 매우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가족이나 친구는 말할 것도 없고, 직장 동료, 학교 선후배와 스승, 존경하는 인물이나 유명인 등. 그들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내 삶의 중요한 순간순간에 작동합니다. 사람 사이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은 결국 사람에게 영향을 받고, 또 한 사람의 인생에는 우주가 담겨 있기에, 가장 무게 있는 선택은 역시 사람과 연결됩니다.
1966년 열한 살 먹은 아프리카계 소년이 가족과 함께 워싱턴의 백인 동네로 새로 이사를 옵니다. 그는 형제자매들과 집 앞 계단에 앉아서, 동네 사람들이 자기들을 반겨주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반겨주지 않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도 인사를 건네거나 미소를 짓지 않았습니다. 백인들이 흑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관해서 들었던 모든 무서운 이야기가 마치 현실로 나타나는 듯 했습니다. 소년은 속으로 생각합니다. “이사를 오지 말았어야 해. 동네 사람들은 우리를 좋아하지 않아. 앞으로 나는 친구 하나 없겠네.” 이런 생각을 하던 중 한 여인이 길 건너편에서 지나가다가 이 소년의 형제자매들이 있는 쪽으로 와서 빵을 주면서 미소를 지으며 말합니다. “환영해” 그 여성은 집으로 들어갔는데 잠시 뒤에 접시에 음료수와 크림치즈와 젤리 샌드위치를 담아서 나와 그들에게 내주었습니다. 소년은 이 여성의 친절한 호의를 평생 잊지 못했고, 이 여인 덕분에 자신들이 백인 구역에서도 고향처럼 살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 소년은 훗날 예일대학교 법대 교수가 되어 이날 이 여인에게 배운 것에 관해 책을 씁니다. 우리말로는 <예의>라고 번역할 수 있는 그 책에서 스티븐 카터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눈을 감고 그 여름날 오후에 급하게 먹었던 크림치즈와 젤리 샌드위치의 달콤한 맛을 지금까지 내 혀로 느낄 수 있다. 진심에서 우러난 하나의 행동과 당연하지 않은 예의가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지를 내가 발견한 날이었다.”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는 예수라는 한 사람을 잊지 못해 생겼습니다. 신약성서도 마찬가지이지요. 오늘 저는 예수를 만나 인생이 바뀐 베드로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삶의 한 자락을 나누고자 합니다.
[부름 받은 베드로]
마가복음서와 마태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갈릴리에 가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자마자 제자들을 부르십니다(막 1:16-20, 마태 4:18-22). 첫번째로 부름을 받은 제자는 두 집안의 형제들입니다. 하나는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또 한 집안은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마가복음서에서 이들은 그물과, 부모와 일꾼들을 내버려두고 곧 바로 예수님을 따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두 복음서의 말씀만으로는 베드로가 어떤 이유로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다릅니다. 누가는 마가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기본으로 하여 자신이 알고 있는 예수님 이야기들을 보충하면서 예수님에 관한 일을 처음부터 순서대로 정확하게 정리해서 데오빌로에게 알려 주고 싶었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일어난 일을 좀 더 자세히 적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네 개의 복음서가 있고 요한복음에도 예수님의 제자들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베드로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지, 상상력을 동원해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1세기 모든 유대인은 위대한 다윗 왕이 다스리던 시절을 떠올리며 하나님께서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독립 국가로 회복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라는 것 자체가 국가적 수치였고, 불의한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굴욕도 참아내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더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로마 황제를 신으로 받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영적인 갱신을 외치며 대중들을 이끌었습니다.
세례 요한도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듯이 예수님 또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의 운동에 동참했던 사람 중에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도 있었습니다.(요 1:35-42, 특히 40절 참조) 아마도 예수님과 안드레는 세례 요한을 따르는 과정에서 서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헤롯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서 처형됩니다. 헤롯과 로마 당국은 반란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세례요한을 따르던 무리를 해산시키고, 후계자가 될 만한 인물들을 잡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 중 한 명이었던 안드레는 자신의 고향인 가버나움으로 피했고, 예수님 또한 나사렛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례 요한과는 또 다른 맥락에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치기 시작하자(마가 1:14), 안드레는 이제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한 예수님을 따르기로 작정합니다(요한 2:40-41). 그리고 안드레는 자기 형인 베드로에게 말을 합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 이때까지만 해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자신의 지도자로 스승으로 모실 생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본문의 일을 겪게 됩니다.
[베드로! 배를 내어 주다]
예수님께 자신의 배를 내어주고, 거기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었을 때라고 베드로는 예수님께 깊이 빠지게 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무리에게 어떤 내용의 말씀이 펼쳐졌는지 우리가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성경의 다른 본문들을 통하여 상상해 본다면 아마도 산상수훈이나, 비유의 말씀, 또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 등이 선포되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이 말씀을 통하여 베드로는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수요사경회를 보신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댓글도 다는 분들이 계시고, 우리 교회로 찾아오기도 하시고, 상담을 요청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알았고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깨달음을 주는 말은 언제나 행위를 불러일으킵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의 말씀에 감명을 받고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으라.”는 명령에 순종합니다. 고기를 잡는 데에 있어서는 베드로가 전문가이고 예수님이 초짜입니다. 그럼에도 베드로가 예수의 명령에 따릅니다. 한 개인의 경험을 넘어서는 깊은 말씀으로 인해 베드로는 밤새도록 애를 썼어도, 더 이상 고기를 잡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어도 다시 한번 그물을 던지러 나갑니다. 그리고 결과는 여러분이 모두 아시는 대로 입니다. 베드로의 배 뿐만 아니라 야고보와 요한의 배에도 고기가 가득 실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을 한 베드로는 주님께 자신을 떠나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베드로를 자신과 평생 함께 할 제자로 부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고기가 가득 들어 있는 그 배를 고기와 함께 뭍에 내버려 둔 채 예수님을 따릅니다. 제자가 된 것입니다.
베드로 인생에 결정적 전환을 가져온 오늘 본문 이야기에서 제자로 거듭나게 되는 베드로가 제일 처음 한 것은 바로 자신의 배를 예수님께 내어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베드로 인생 전환의 첫 시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밥줄인 배를 예수님께 내어드리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서에는 베드로가 그물 하나 가지고 있지만, 누가복음에서는 배가 있습니다. 오랜 투망질로 벌어들인 돈을 모아 배를 샀거나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 배에는 베드로의 모든 꿈과 추억, 생사가 걸려 있습니다. 베드로는 언제나 배와 함께 하였고, 그 배로 가족을 먹여 살렸을 것이고, 심지어 장모님까지 모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가 그 배를 예수님께 내어 드립니다. 베드로의 육체적 생명을 보장해 준 배를 주님께 맡기자, 바로 거기에서 영혼을 깨치는 영생의 말씀이 울려 나옵니다.
이 첫 장면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습니다. 인생의 전환은 자신이 밥줄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생명을 주실 분께 맡겨야 합니다. 고기를 많이 잡으려는 욕심으로 배가 가라앉는 줄도 모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욕심이 잠깐의 행복을 주지만, 그칠 줄 모르는 탐욕으로 결국 밥줄이 끊기는 이들도 많이 봅니다. 자신의 밥줄을 믿고 있다가 허무하게 인생을 마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맡기면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집니다. 고기가 많이 잡혔지만 배는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제 알게 됩니다. 배가 더 이상 나의 밥줄이 아니라는 사실을. 거기에 가득 실려 있는 물고기가 내 생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신앙은 결단입니다. 결단이 없이 신앙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이란 주님께 나 자신을 드리는 모험적 행위입니다. 나 자신을 주님께 맡길 때 내 욕심으로 망칠 내 인생이 결실로 가득 찰 뿐만 아니라, 육신의 결실을 좇던 삶에서 거룩한 영의 이끌림을 받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 길로 가는 첫째 일은 바로 자신이 밥줄을 주님께 내어 드리고, 그 밥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 퍼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라는 것을!
[베드로!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리다]
두 번째 베드로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렸습니다. 분명한 것은 베드로가 어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수이거나 목수의 아들이며, 기껏해야 농사를 좀 지어본 사람일 것입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호수로부터 대략 35km나 떨어져 있고, 차로 달리면 40분 정도 걸리고 언덕보다 훨씬 높은 마을도 세 개나 지나야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의 지형이나 생태환경을 잘 알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갑니다. 그런데 그 가는 곳이 “깊은 데”입니다. 여기서 깊다는 것을 정말 호수에서 깊은 곳만은 아닙니다. 저는 베드로가 가보지 않았던 곳, 베드로가 위험을 무릅쓰고서까지 굳이 가야 할 이유가 없었던 곳, 아니면 전문가라고 해도 넘기 어려웠던 한계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갈릴리 호수를 잘 알고 있던 베드로도 밤새도록 애를 써서 고기를 잡으려고 했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애를 쓴 베드로가 가지 않은 곳이 있습니다. 바로 “깊은 데”입니다. 그곳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 낯설고 두렵고 떨리는 곳입니다. 기존의 경험에 의존해서는 절대로 갈 수 없는 곳, 오히려 기존의 경험을 내려놓고 무작정 도전해 보아야 하는 그런 곳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로 인해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그곳으로 오늘 예수님께서 가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를 찾아오셔서도 같은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 오늘 우리 한국의 교인들에게,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곳은 어디입니까? 지난 코로나 판데믹을 겪으면서 그동안 겪어 보지 않은 깊은 곳이 우리에게 몰려왔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그 상황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 교회들은 코로나도 극복하고 그 이상의 목회와 선교를 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교회는 코로나 시기에 응급조치로, 언 발에 오줌 누는 방식으로 대처했다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모양새를 취했습니다. 그런 교회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고, 코로나로 변한 세상에서 어디로 갈지 모르고 헤매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야 할 깊은 곳은 어디일까요? 아직도 우리는 신앙의 깊은 바다로 나아가지 못하고 기존의 종교 습관, 자본주의적 안락함이 보장하는 작은 풀장에서 헤엄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유교적 습관으로 일상을 살다가 죽은 이후에는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이나 천당을 꿈꾸고,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당하면 무당을 불러 액땜을 하고 복을 비는 형식에 익숙합니다. 그리스도교인들조차도 점집에 가고, 유교적 관습을 버리지 못하고,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불교의 극락세계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깊은 데는 커녕 깊은 곳 근처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깊은 데는 어디입니까? 정말 그곳으로 나아가 잡아야 할 물고기는 무엇입니까? 이제 우리는 더 깊은 데로 나가야 합니다. 개인의 안위를 바라는 자리에서 역사와 사회가 원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내 유익을 바라고 내 가족만을 위한 이기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서 이웃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그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물질적 축복만을 꿈꾸지 말고, 높은 정신의 경지에 이를 희망으로 부풀어야 합니다. 더 이상 창조주 하나님을 일개 도깨비방망이처럼 여기고,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천국 가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고, 하나님 나라를 일구는 것을 교회당이나 키우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베드로, 물고기를 낚는 어부에서 사람을 구원하는 지도자가 된 베드로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여러분의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을 더하고, 경건에 신도간의 우애를 더하고, 신도간의 우애에 사랑을 더하도록 하십시오.”
우리의 신앙은 덕이 있습니까? 자기 삶을 이끌어가고 세상을 지도할 지식이 있습니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절제할 줄 알면서 균형 잡힌 신앙을 유지합니까? 어떤 역경 속에서도, 때로 의를 행하다가 겪는 박해와 모욕과 조롱 속에서도 인내하면서 더욱더 경건한 사람이 되어갑니까? 거룩함을 간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이에 두고 신도들과 함께 우애 있게 지내며 사랑을 나누십니까? 여러분의 신앙이 이런 깊은 경지로 지금 나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베드로 사도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세상에서 정욕으로 부패하는 사람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신앙]
그리스도교 신앙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셨다고 고백해 왔습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씨앗이 있습니다. 그 씨앗을 잘 키우면 우리는 창조주가 하실 일들을 하게 됩니다. 창조주께서 자신이 만드신 피조물들을 아끼고 사랑하여 돌보시듯이, 우리 또한 그러하며, 사랑의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 세상을 구원하셨듯이 고통당하는 이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온 인류의 죄악을 담당하셨듯이, 우리 또한 생명과 평화와 정의를 위한 거룩한 산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깊은 곳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자리잡고 있는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아직 그곳에 이르지 못한 듯 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담긴 하나님의 씨앗은 싹을 틔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더 미룰 수 없습니다. 열심히 물을 주고, 거름도 주고, 잡초도 뽑아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저나 여러분은 티끌만도 못한 존재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사탄의 후손이 아니요, 어둠의 자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빛의 자녀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작은 불씨가 모든 생명을 북돋게 하는 태양이 될 때까지 우리 모두 힘차게 달려가 봅시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우리를 하늘의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 우리는 누구보다도 연약하고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그런 우리를 부르셔서 제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일에 동참시키시고, 더 깊은 데로 나아가도록 하였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생명사랑교회를 세우셨으니, 우리가 이곳에서 할 일을 하게 하소서. 주님의 일군들을 세우고, 새 시대를 열어가는 목회와 선교를 하게 하소서. 우리를 통하여 세상 사람들이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희망을 간직하게 하소서. 지금 우리는 세상에 뿌려진 작은 씨앗에 불과하지만 옥토에서 자라나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거룩하시고 좋으신 하나님! 맑은 가을 하늘, 선선한 바람이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이 좋은 날 우리 모두를 주님 전에 불러 모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는 전교인 야외예배로 드립니다. 좋은 공간에서 신선하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예배하고 친교를 나누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예배와 모든 활동을 통해 삶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을 함께 나누어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임을 더 깊이 깨닫게 하시고, 서로의 만남을 감사하게 하소서.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늘 행복하게 하시고, 우리의 사랑이 힘 있고 아름답게 피게 하소서. 오늘 우리는 주님의 은총을 기억하며, 우리의 전 삶과 모든 것을 바친다는 의미로 예물을 드립니다. 이 예물을 받아주소서. 움켜쥔 손을 펴게 하시고,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을 서둘게 하소서. 아픔과 고통이 있는 곳에서 부를 때에, 달려 나가게 하소서. 우리의 삶이 거룩한 산 제사가 되길 바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두려움을 물리치십시오. 불안을 떨쳐내십시오. 주님의 크신 은총을 믿고 더 깊은 신앙의 바다로 힘껏 나아가십시오.
* 축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셔서 무지에서 지식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불행에서 평안으로, 오류에서 진리로, 죄에서 승리로 옮기셨습니다. 이제는 전능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과 은총과 능력이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생명사랑교우들 위에 전국에서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