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한문덕 목사] 하나님의 능력 – 2023년 2월 5일
사무엘기상 5장 1-12절
[블레셋의 침략과 이스라엘의 패배]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에 정착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처음에는 12지파의 연합 공동체로 느슨한 연대 속에서 지내게 됩니다. 사사 시대까지는 괜찮았지만, 정치 상황이 달라지고 12지파는 더 긴밀하게 결속하여 주변국과 비슷한 국가를 만들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하도록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바로 블레셋 세력이었습니다. 에게 해 지역 출신의 인도-게르만 족속인 블레셋은 기원전 1200년경 이스라엘과 거의 같은 시기에 팔레스티나 지역에 발을 붙입니다. 이들이 점점 성장하여 해안 평야에서 내륙 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것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왕을 세워야 한다는 백성들의 요구가 드높아졌는데, 중앙집권적인 왕정 체제만이 블레셋의 침략에서 이스라엘 전체를 보호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서는 바로 이런 새로운 체제가 도입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책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패배하고 하나님의 언약궤마저도 빼앗긴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사장과 사사와 예언자의 역할을 동시에 했던 사무엘이 엘리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부상하게 될 즈음에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략했습니다. 이스라엘도 이들과 맞서 싸우려고 에벤에셀에 진을 치고 전쟁에 돌입했으나, 4천 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배하고 맙니다.
패배한 이유가 하나님의 도움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여긴 원로들이 실로에 있던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오게 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이라는 굳센 믿음 속에서 땅이 진동할 정도로 모두 환호성을 지릅니다. 이 환호성 소리에 블레셋 사람들이 놀랐는데, 이들은 애굽의 신을 쳐부순 야훼 하나님의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한편으로 두려워하면서도 죽기 살기로 싸우자고 다짐을 하게 됩니다.
다시 전쟁이 벌어졌는데, 결과는 이스라엘의 대패였습니다. 성서는 이때 보병 삼만이 죽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사사 역할을 했던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이 때 전사했고, 하나님의 궤마저도 빼앗겼습니다. 고대의 전쟁은 사람들의 전쟁인 동시에 그 사람들이 섬기는 신의 전쟁이기도 했습니다. 히브리 백성이 애굽을 물리치고 애굽의 군대가 홍해에서 몰살당한 것은 히브리가 섬기는 야훼가 애굽의 신인 태양신 라(Ra)를 이긴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진데다가 하나님의 언약궤마저 빼앗겼습니다. 광야에서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족속을 물리치며 만군의 하나님, 전쟁의 신으로 중근동 지역에서 이름을 날린 야훼 하나님이 패배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실로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니 야훼 하나님이 적들에게 포로로 잡혀간 것이고, 이제 하나님 백성의 앞날은 추락과 몰락만이 남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드러내기 위해 성경은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엘리의 두 아들은 전사하고, 엘리 제사장도 이스라엘의 패배 소식을 듣고 죽게 됩니다. 이 때 비느하스의 아내는 임신 중이었고, 시아버지와 남편의 죽음 소식을 듣게 되면서 갑자기 진통이 와서 아이를 낳게 됩니다. 갑작스런 해산이었기에 여인은 거의 죽을 위험에 처하게 되었는데, 곁에 있던 여인들이 “아들을 낳았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이 여인은 대답도 없고 관심도 두지 않다가 그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짓습니다. 이가봇의 뜻은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사로잡혀갔다”라는 뜻이고 성경은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깊은 절망과 좌절 앞에서]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블레셋은 이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언약궤를 자신들의 신전이 있는 아스돗으로 가져가서 자신들의 주신인 다곤 상 앞에 내려놓습니다. 이런 행위는 이제 야훼가 자신의 신인 다곤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전쟁에서 패하고 이제 블레셋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며, 많은 것을 빼앗기고 종으로 살아갈 일만 남았을 때, 이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이런 수모를 당해야 했는지 지난 과거를 성찰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절망의 수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없이 전쟁을 치를 때는 그렇다 치고,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왔는데도 이렇게 크게 졌다면 그 실망과 충격은 이루다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고대 근동의 다른 강대국들과 주변 국가의 신들은 대체로 형상이 있었습니다. 하늘의 태양과 달, 바람과 강, 거대한 나무나 큰 바위덩어리는 모두 신을 상징하는 중요한 표징이었고, 집안마다 개인마다 작은 조각상들을 만들어서 자신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삼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야훼 하나님은 어떤 형상도 만들지 못하게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거기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 반드시 너와 함께 하겠다는 그 하나님과의 약속에 근거한 신앙으로 살게 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그 어떤 것도 없이 그저 약속 하나로, 또 정신력만으로 이루어지는 삶이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언제든 눈에 보이는 것에 유혹당하기 쉽고, 보이는 현실 앞에서 무너질 수 있습니다.
형상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뜻을 어느 것 하나로 묶어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를 규정하면 나머지는 배제되기 때문에, 형상을 만들지 않는 정신은 하나님이 어느 때 어떤 모양으로든지 자신을 계시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면서 늘 세상의 모든 변화에 민감하게 응답하며 살겠다는 뜻을 지닙니다. 어느 것 하나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깨인 정신으로 살아가겠다는 것이 바로 형상 금지의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않고 그저 십계명 돌판을 담은 언약궤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믿었던 그 모든 신뢰가 오늘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간신히 지키던 그 마음과 정신이 뿌리부터 흔들릴 위기에 놓인 것입니다.
[꺼지지 않은 희망]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은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다곤 신상 옆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놓아둔 다음 날 아침, 블레셋 사람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보니, 다곤이 주님의 궤 앞에 엎어져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다시 다곤 신상을 들어서 세운 다음에 제자리에 가져다 놓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에 또 와서 보니, 이번에는 다곤이 주님의 궤 앞에 엎어져서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었을 뿐 아니라, 다곤의 머리와 두 팔목이 부러져서 문지방 위에 나뒹굴었고, 다곤은 몸통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어서 주님은 아스돗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셨고, 이에 놀란 아스돗 사람들은 주님의 궤를 가드로 옮겼는데 거기에서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일이 발생했고, 에그론으로 옮기자 거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궤를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긴 것은 분명 패배입니다. 그 누가 보아도 다곤 신과 야훼 하나님의 전쟁에서 야훼 하나님이 진 것처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적진에 들어간 야훼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으셨고 당신의 능력을 펼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임금과 신들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엎드리듯이 다곤 신이 주님의 언약궤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엎드렸을 뿐만 아니라, 머리와 팔과 다리가 다 잘려 나가서 완전히 무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스돗은 블레셋의 다섯 성읍 중 하나입니다. 블레셋은 위대한 첫 승리를 통해 야훼를 굴복시켰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 가져온 야훼 하나님의 언약궤가 아스돗을 비롯하여 가드, 에그론까지 재난을 불러오게 된 것입니다. 애굽에 재앙이 내린 것처럼 이제 블레셋 전역으로 재앙이 퍼지고 있는 것이지요. 블레셋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고, 그래서 다시 하나님의 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달라고 자신의 통치자들에게 애원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인 전쟁에서의 패배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케 만들었으나, 하나님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펼쳐질지 예측할 수 없음이 오늘 본문을 통해 다시 한번 알려집니다.
오늘 성서 본문은 고대 문화에 따라 그 시대의 배경 속에서 야훼 하나님의 승리를 신들의 전쟁과 재앙과 힘겨루기로 표현합니다. 싸움에서 진 것 같았으나, 그래서 절망과 좌절만이 남은 줄 알았으나, 실은 진 것이 아니고 희망의 불씨를 살렸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곤 신의 능력 없음을 만천하에 폭로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언제나 잔뜩 움츠린 모습으로 살아야 했던 이스라엘에게, 강대국들이 벌이는 전쟁의 길목에 위치해서 원하지 않게 남의 싸움에 휘말려 고통을 당했던 이들에게 오늘 이야기는 분명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힘없는 자들은 강한 자 앞에서 그저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지배자들의 논리에 맞서 평등한 사람들의 연대를 꿈꾸던 이들이 당해야 했던 수모와 무력감 속에서 오늘 이야기는 다시 새 희망을 간직하도록 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능력은 어디에서]
그런데 오늘날은 고대 사회와 다르고 전쟁이 일상이진 않습니다. 물론 이 지구상에는 아직도 전쟁의 그늘 밑에서,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싸움에서 승리와 패배를 하는 가운데 신음하고 고통당하는 민중들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도 남북이 갈라진 채 아직도 분단 이데올로기의 망령에 사로잡혀 정치에서, 일상에서 잘못된 판단을 하고, 그것 때문에 또 고통의 수렁으로 빠져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종교의 세계가 과거처럼 다곤 신과 야훼 하나님이 싸우는 것처럼 되어 있진 않습니다. 누가 누구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식의 단순한 논리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17세기 이후 지난 500년 동안 자연과학의 놀라운 발전은 현대 세계 인류를 신화적이고 주술적인 세계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물론 아직도 일부 종교인들 속에는 너무나 미신적인 사유들이 남아 있습니다만, 교육을 받은 상당수의 사람은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인 말들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의 성경 말씀을 읽어 주면 어린아이들의 동화에나 나오는 이야기 정도로 치부하고 말 것입니다. 유치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다곤 신상이 야훼의 언약궤 앞에 얼굴을 박고, 신상도 산산조각났으니 야훼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하냐고 말하면서 전도를 한다면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본문을 해석하면서 형상 금지 전통이 지니는 의미, 눈에 보이는 절망적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안목 등을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과 함께 진짜 나누고 싶은 이야기, 함께 고민하고 싶은 이야기는 오늘날 진정으로 어디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어떤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가난했던 한국 사회의 가난 극복과 맞물려 하나님 잘 믿으면 복받는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려 했습니다. 조용기 목사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이런 논리에 따랐고, 급격한 경제성장을 일구었던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는 이런 논리가 먹혀들어 갔습니다. 그래서 지난 한국교회가 크게 성장하고 부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가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사회문화적으로 진보한 오늘날은 예수 믿고 천국 가라는 전도 방식이나, 하나님 믿으면 복 받는다는 얘기는 더 이상 잘 통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전도하면 세상 사람들이 되묻습니다. 천국이 있느냐 없느냐는 둘째치고라도 예수 믿는 사람의 현실이 어떠하냐고 묻습니다. 죽어서 가는 천당 이전에 살아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고 있느냐고 되묻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 믿고 복 받으라는 말에는 하나님 안 믿어도 나는 내 삶을 잘 살고 이미 복 받았다는 사람들도 많고, 또 하나님 믿고 복 받은 사람들의 행실이 왜 그 모양이냐고 따집니다. 그 따지는 말에 할 말이 없어서 사실 더 부끄럽습니다. 범죄를 행하는 사람들 중 그리스도인들의 비율이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이 사실이고, 하나님께 복 받으려고 예수 믿은 사람들이 보여 주는 이기적 행태는 정말 꼴사납기 그지 없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작년 4월 국민일보가 일반 시민 1000명을 대상으로 각 종교의 이미지를 조사한 결과, 불교는 ‘포용적인’, ‘친근한’, ‘상생하는’, ‘엄숙한’, ‘보수적인’,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이었고, 천주교는 ‘경건한’, ‘배려하는’, ‘공감하는’, ‘헌신적인’, ‘도덕적인’, ‘진정성 있는’, ‘희생적인’ 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개신교에는 어떤 이미지들이 나왔을까요? 개신교는 ‘세속적인’, ‘배타적인’, ‘물질적인’, ‘이기적인’, ‘위선적인’입니다. 물론 이런 이미지가 크게 잘못하는 소수의 교회 문제가 언론을 통해 증폭되어 생긴 왜곡된 이미지라 할지라도, 우리는 이런 현실을 결코 좌시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오늘날 하나님의 능력은 어디에서 발휘되는 것일까요? 어떤 모습에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날까요? 첫째는 도덕성의 확보입니다. 성숙한 인격을 지니고, 그리스도인이 그 누구보다 훨씬 나은 도덕적 삶을 살아갈 때에야 무너진 신뢰를 조금씩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과 아무런 차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더 못된 짓을 한다면 그 누가 하나님을 믿을 생각을 할까요? 예수님 보고 하나님 믿는 것이지, 사람 보고 하나님 믿는 것 아니라고 늘 말하지만 그것은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행실을 보고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얄팍한 욕망을 채우는데 머물거나 미신이나 주술에 빠지지 않으려면 먼저 높은 도덕성을 확보해야 합니다.
최근 사람들 사이에서 감동을 주며 회자 되는 다큐멘타리가 하나 있습니다. “어른 김장하”입니다. 여러분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꼭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80이 다 되신 김장하 선생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한약방 머슴살이를 하면서 살다가 해방 후 처음 실시한 한약사 국가자격시험에 응시해서 합격하고 19세의 나이에 남성당한약방을 차립니다. 약값은 저렴하면서도 좋은 재료를 잘 써서 효험이 좋아, 입소문을 타고 전국에서 환자들과 손님들이 몰리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부자가 된 김장하 선생은 20년간 모은 돈으로 1983년 경남 진주에 명신고등학교를 세우고, 극진한 헌신으로 탄탄한 학교로 키워 낸 뒤에 1991년 국가에 헌납합니다. 100억 원이 넘는 자산을 그대로 내놓은 것입니다. 1990년 창간한 옛 진주신문에는 월 1000만원에 달하는 적자를 10년간 보전해 주고, 토호 세력이 겁 없이 설치지 않도록 언론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지난 해 60년간 운영해 온 한약방 문을 닫으면서 남은 자산 34억원도 경상국립대에 기증했고, 자신을 내세우는 인터뷰는 일절 거절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손을 내밉니다. 진주는 ‘저울처럼 평등’하다는 형평운동이 시작된 곳으로, 이 운동은 1923년 백정 신분제 철폐를 필두로 모든 인간의 사회적 평등을 주창했고, 김장하 선생은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을 지냈습니다. 호주제 폐지에 앞장서고, 가정 폭력 피해자 쉼터 건립을 후원하는 등 늘 평등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신했습니다. 지리산 생명연대 공동대표, 지리산 살리기 국민행동 영남대표, 진주환경운동연합 고문, 진주문화사랑모임 부회장, 진주오광대보존회 후원회장, 진주문화연구소 이사, 진주신문의 창간주주 겸 이사, 뉴스사천의 발기인 겸 주주, 남성문화재단을 설립 등 일을 하시면서도 자가용 한 대 산 적 없이 평생을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걸어 다녔습니다.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한다는 믿음 속에서 “똥은 모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되어 식물이 자라고 꽃이 피게 한다. 돈도 똥과 같다. 돈을 주변에 나누면 사회에 꽃이 핀다.”고 말합니다. “나는 아프고 괴로운 사람을 상대해서 돈을 벌었다. 다른 직업을 선택했더라면 그 돈을 가지고 호의호식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소중한 돈을 함부로 쓸 수 없어서 차곡차곡 모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서 이 일을 시작했다.”고 말씀하시는 김장하 어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어디에서 발휘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의 능력이 발휘되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존경받던 랍비가 있었습니다. 그 집에는 이 거룩한 사람의 충고나 치유 혹은 축복을 받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이 매일 모여들었습니다. 랍비가 말을 하면 사람들은 한마디라도 빠뜨릴세라 열심히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청중 중에는 기분 나쁜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랍비에게 반박할 기회를 한 번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약점을 주시하는가 하면 잘못을 비웃곤 해서 제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제자들은 그 사람을 악마의 화신이라고 여기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악마”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모두가 안도의 숨을 내 쉬었습니다. 겉으로는 숙연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이 무례한 이단자가 죽었으니 스승의 영감 어린 설교가 방해받지 않고 그 행위가 비난받지 않게 되었다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스승은 그의 장례식에서 진심으로 애통해했습니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놀랐는데, 어떤 제자가 스승에게 그 사람의 영혼이 불쌍해서 그렇게 슬퍼하시느냐고 여쭙자 스승이 대답했습니다. “아니다. 이제 그 사람은 천국에 있을 텐데 그 영혼을 위해 울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 나 자신이 불쌍해서 우는 거다. 그 사람은 내 유일한 친구였다. 나는 나를 존경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는데, 내게 도전한 사람은 그 사람뿐이었다. 이제 그가 떠났으니 도전하는 사람도 없어졌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할 거다.” 이렇게 말하면서 스승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은 어디에서 나타납니까? 경쟁 사회에서 남을 짓밟고 승리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돈을 가지고 떵떵거리는 것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까? 3000억이 넘는 돈을 가지고 궁전 같은 교회를 지으면 하나님이 거기에 머무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는 가진 것이 없었고, 머리를 누일 곳 하나 없이 떠돌아다녔지만, 5천이 넘는 군중을 먹이고, 아픈 자를 치유하고, 모든 악한 세력을 물리쳤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자들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딸로 삼으시고, 작은 겨자씨 한 알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그것을 통해 제국의 폭력, 가지고 힘 있는 자들의 무자비함을 만천하에 드러내셨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소망이 되셨고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려면 어른 김장하 선생님처럼 자신을 내어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랍비처럼 자신을 비방하고 조롱하는 자들에게서 배울 줄 아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유혹, 자본이 주는 달콤한 그 유혹을 넘어설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잣대로 비교하면서 우리를 한없이 주눅 들게 만들지 모르지만, 그래서 세속적 가치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런 모든 상황에 초연한 우리들의 신앙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삶을 소망하시길 빕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의 목회와 선교 속에서 하나님의 이런 능력이 드러날 수 있다면 저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다곤이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 머리를 숙이듯, 세상의 모든 권력이 하나님 앞에서 무너질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올 한해 생명사랑교회의 목회와 선교가 주님의 능력을 드러내길 원합니다. 생명사랑 신앙공동체 구성원 한명 한명이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참된 믿음과 사랑의 마음과 생명의 활력을 주소서. 세상 눈치 보지 않는 용기를 허락하시고, 거짓과 헛된 것들을 구별하는 안목을 주소서. 잘못된 행실은 고치게 하시고, 날마다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여 주소서. 모든 것이 귀찮아질 때 우리를 깨우시고, 하나님의 부름에 속히 응답하게 하여 주소서. 세상에 물들지 않는 비둘기의 순결함을 지키되, 뱀의 유혹에 저항하는 참된 지혜를 얻게 하여 주소서. 늘 우리 곁에서 스승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따뜻한 봄바람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날씨는 춥지만 어김 없이 입춘이 되었습니다. 두꺼운 얼음 밑에서도 시냇물은 졸졸졸 흐르고, 긴 겨울 딱딱하게 굳은 나무에서도 보드랍고 여린 새싹이 돋아납니다. 우리가 그늘진 땅에 있을 때, 마음이 어렵고 시려 누구하나 마주하고 싶지 않을 때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찾아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너무나 많은 일에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았고, 그래서 마음에 여백이 없이 주님과 이웃을 맞이할 여유조차 마련하지 못하며 살았지만 주님께서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드린 이 예물을 받아 주소서. 이 예물이 쓰일 때에 온전히 하나님의 이름만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게 하소서. 누군가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언제나 나의 손이 빈손이 되어야 하듯이, 우리가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릴 때, 주님께서 채워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입으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세상에 보여 주십시오.
* 축도
2023년 새해에는
여러분 모두가 하나되어 살아갈 수 있도록
온 세상을 위해 기도하길 빕니다.
여러분 하나하나의 마음마다
사랑과 평화가 넘치게 하시고
여러분 하나하나의 삶이
모두 빛으로 가득 차길 빕니다.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신과 세상을 치유하는 생명사랑가족들 위에, 함께 예배하고 목회하고 선교하는 전국의 성도들 위에, 해외에서 애쓰고 수고하는 선교 동역자들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