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한문덕 목사] 생사화복의 갈림길에서 – 2020년 9월 20일
신명기 30장 11-20절, 시편 74편 18-23절, 누가복음서 5장 27-32절
[레위를 부르시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서의 말씀은 예수께서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홀로 하나님 나라 사역을 하시지 않고, 갈릴리 호수 주변 마을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셔서 언제나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세리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은 마태와 마가복음서에도 나옵니다. 공관복음서에 모두 이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이 이야기의 중요성을 이미 말해 주는데, 세 이야기는 세부적인 면에서 조금씩 차이가 납니다.
가장 먼저 쓰인 마가복음서에서 레위는 알패오의 아들로 명시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그냥 레위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부른 사람이 레위가 아니라 마태입니다. 마가복음서에서는 바리새파의 율법학자들이 비판자로 등장하지만 누가복음서에서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이 많은 세리들과 예수님이 함께 어울려서 먹고 마시는 것을 비판합니다. 마태복음서는 율법학자들은 빠지고 바리새파들만이 등장합니다. 이들의 비판에 예수께서는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하시면서 자신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시는데, 누가복음서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하시고, 마태복음서에서는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라는 호세아 6장 6절의 말씀을 인용하며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권면합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부분들에서 각 복음서의 신학적 특징이 드러납니다. 세리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신다고 비판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제물보다 자비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마태의 설명은 바리새파들의 율법 준수와 종교생활이 죄인으로 낙인찍힌 이들을 품어 않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예수께서 죄인을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감동이 되었던 마가복음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누가복음서는 죄인이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 레위가 세리인가?]
그런데 제가 오늘 더 주목하고 싶은 것은 주인공인 레위입니다. 마가복음서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고 한 것을 왜 누가복음서는 그냥 레위라고 말하고, 마태복음서는 레위를 왜 마태로 고친 것일까요? 레위라는 이름을 우리가 읽거나 들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레위 지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알패오의 아들이라는 말을 뺌으로써 누가는 로마에게 바치는 세금을 관리하는 세관에 앉아 있는 사람이 레위 지파라는 역설적인 모습을 더욱 실감나게 연출합니다. 레위 지파는 어떤 지파입니까?
이들은 땅이 아니라 하나님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이들입니다. 레위지파는 거룩한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제사하는 모든 일들을 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 종교의 중심지로 유대인들의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를 이끌어 가는 상징적 공간입니다. 레위인들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유대교 신앙의 뿌리이자 근원인 성전이라는 거대한 기계를 돌리는 톱니바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토라에 능통한 사제였고, 율법 조문에 정통한 스승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또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스런 노래들의 연주자이자 합창 지휘자였으며, 성전을 굳게 지키는 수문장이자 형리였으며, 거룩한 일을 담당하는 사제의 의상 관리자였고 보루를 지키는 경비원이었으며, 율법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을 내리는 사형집행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레위가 로마에게 바치는 세금을 담당하는 세리가 되었다는 것은 정말 민족의 수치이고, 유대 백성들의 굴욕입니다. 전 근대적 사고이긴 합니다만, 조선왕조를 이끌어 간 왕가의 후손이 일본 제국주의의 주구(走狗)가 되어 백성들의 돈을 갈취해서 바치고 있다면 뜻 있는 유림(儒林)의 선비들과 백성들이 그 사람을 어떻게 볼까요? 유대교의 정통성을 새롭게 개혁하는 방식으로 온전히 계승하고자 했던 마태복음서 저자는 거룩한 레위 지파의 사람이 로마에게 세금을 바치는 세리가 되었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마태로 고치는 것이지요.
오늘 누가복음서는 예수님을 따라간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에게 큰 잔치를 베풀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상상력을 발동해야 합니다. 주님의 거룩한 일을 하던 레위가 어쩌다가 민족의 고혈을 짜서 로마에게 바치는 세리가 되었을까요? 이 사람의 인생에는 어떤 우여곡절이 있었을까요? 그동안 이 사람은 얼마나 많은 손가락질과 비방에 시달렸을까요?
[세리 레위의 삶을 상상해 보다]
우리는 누가복음서에 실려 있는 삭개오의 이야기를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 또한 세리였고, 심지어 세관장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준다고 약속하면서 만약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말은 자신은 절대로 강제로 뺏은 적이 없다는 항변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부자이기에 자신의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겠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기쁨이 너무나 컸기 때문입니다. 삭개오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레위 또한 얼마나 많은 비난에 시달렸을지, 얼마나 외롭고 힘든 삶을 살았을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찾아 와 주시고, 제자로 삼아 주신 것에 감동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고, 또 많은 세리들을 초청하였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비판자들에게 병든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도, 바로 이 세리들이 깊은 마음의 병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리들 가운데 몇몇은 실제로 로마편이 되어 세리가 된 것을 기회 삼아 부를 축적하기도 했지만, 같은 동족으로서 동족을 배신할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세리라도 해야 했던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일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너무나도 큰 죄책감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것은 그들을 병들게 했을 것입니다. 예수를 보기 위해 나무 위로 올랐던 삭개오처럼 사람들 근처에 갈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삭개오의 키가 작았다고 설명하지만 어쩌면 그의 마음이 작아졌을 것입니다. 수많은 동족들의 손가락질 속에서 기를 펴고 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냥 평범한 유대인이 아니라 레위 지파의 후손이 세리가 되었다면 그가 겪어야 할 심리적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삶은 살았으나 죽은 삶, 생기 없는 삶, 마지 못해 사는 삶이 됩니다. 목숨 부지하려고 일은 하지만 언제든 모든 걸 때려치우겠다고 생각해보지만, 또 막막한 생계유지와 가족들을 생각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들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깊이 속병이 들어가는 레위를 오늘 예수께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제자로 부르셨던 것이고, 레위는 이제 과감한 결단을 통해 다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의 삶으로 되돌아 왔고, 그래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진정한 의미에서 삶을 되찾았습니다. 생사화복의 갈림길에서 진정한 복을 누리며, 생명을 택한 것입니다.
[생명을 택하라! 하지 않는 것인가? 할 수 없는 것인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구약성서의 말씀에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모압 땅에 모두 불러 놓고, 생명을 택하라고 매우 긴 설교를 합니다. 모세는 야훼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어떤 일을 벌이셨는지, 백성들을 이끌고 나오셔서 어떤 표징과 기적들을 보여 주셨는지, 광야에서 어떻게 먹이고 입히셨는지를 말하면서 이제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을 잘 지켜서 생명과 복을 얻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 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내리는 이 명령은, 당신들이 실천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당신들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명령은 하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당신들은 ‘누가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받아다가, 우리가 그것을 듣고 지키도록 말하여 주랴?’ 할 것도 아닙니다. 또한 이 명령은 바다 건너에 있는 것도 아니니 ‘누가 바다를 건너가서 명령을 받아다가, 우리가 그것을 듣고 지키도록 말하여 주랴?’ 할 것도 아닙니다. 그 명령은 당신들에게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당신들의 입에 있고 당신들의 마음에 있으니, 당신들이 그것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 절대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서 우리 자신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모든 규례가 있으니 그것을 실천하기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구약성서의 말씀을 읽으면서 맹자가 제나라 선왕을 설득하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제나라의 선왕이 어느 날 제사를 드리기 위해 바치는 소가 끌려가면서 벌벌 떠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소의 왕방울만한 눈에 어린 눈물을 보고 마음이 동한 제선왕은 다른 동물로 바꾸면 안 되겠느냐고 말한 일이 있었습니다. 맹자는 최고의 권력자의 마음 안에 있는 공감의 능력, 참된 인간성의 씨앗을 보고,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제 선왕에게 그 마음으로 백성들을 생각해 주십사 하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지금 (임금님의) 은혜가 금수에게는 미치면서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은 유독 어째서입니까? 깃털 하나를 들지 못하겠다는 것은 힘을 쓰지 않으려는 것이고, 수레에 가득 실린 섶나무를 볼 수 없는 것은 밝히 보려고 애쓰지 않는 것이며, 백성이 보호받지 못하는 것은 (임금님이) 은혜를 베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왕께서 왕도를 시행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今恩足以及禽獸, 而功不至於百姓者, 獨何與. 然則一羽之不擧, 爲不用力焉. 輿薪之不見, 爲不用明焉, 百姓之不見保, 爲不用恩焉. 故王之不王, 不爲也, 非不能也.)
그러나 제선왕은 곧바로 실천할 생각은 안하고 하지 못함과 할 수 없음이 어떤 차이가 나는 것인지를 또 묻습니다. 그러자 맹자가 대답합니다.
“태산을 옆에 끼고 북해를 뛰어넘어 보아라”라고 할 때, “그것은 못하겠소”라고 한다면, 그건 정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르신을 위하여 나뭇가지 하나 꺾듯이 안마를 해 드려라”고 할 때 “그것은 못하겠소”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지 않는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曰: “挾太山 以超北海.” 語人曰: “我不能”, 是誠不能也. 爲長者折枝, 語人曰: “我不能.” 是不爲也, 非不能也.)
지금 우리는 코로나 19의 상황을 맞이하여 우리 삶에 몇 가지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코로나 19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학 지식의 축적과 올바른 행정력이 필요합니다. 지난 8개월의 시간을 통해 마스크가 얼마나 유용한 지, 사회적 거리두기의 효용성이 증명되었습니다.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시간 동안 우리는 마스크 착용의 일상화, 사회적 거리두기 지키기, 손 씻기와 모임 자제 등 가장 기본적인 원칙들을 철저하게 지켜야 합니다. 이것을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이것조차 할 수 없다면서 몽니를 부리고 있습니다. 코로나 19는 우리들에게 다시 한 번 공존의 감각과 도덕성을 가지라고 채근합니다. 유치원에서 배웠던 것들을 실제 제대로 해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속이지 말고, 정직하게 말하며, 거짓 뉴스를 퍼뜨리거나, 거짓 뉴스에 속아 넘어가지 말라고 말합니다. 작은 거짓말이 많은 사람의 생사화복을 좌우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모두 뉴스를 봐서 아시겠지만, 지난 5월 인천 학원 강사의 작은 거짓말이 큰 피해를 불러 왔습니다. A씨는 지난 5월 2~3일 서울 이태원과 포차(술집) 등을 방문했다가 같은 달 9일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후 방역 당국의 역학 조사 과정에서 학원 강사인 신분을 숨기고 ‘무직’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확진 판정을 받기 전 인천시 미추홀구 한 보습학원에서 강의를 한 사실도 숨겼습니다. 이로 인해 지역 내 n차 감염이 이어졌는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이 방문한 노래방과 PC방을 통해 사진 기사 겸 택시 기사 B씨가 감염됐고, B씨가 일한 부천의 웨딩 업체에서 확진자가 이어졌습니다. 인천에서만 초·중·고교생 등 40명이 넘었고, 전국적으로는 80명 넘게 감염되었으며, A씨에게서 시작된 전파로 ‘7차 감염’ 사례까지 나왔습니다.
지난 주 15일에 A씨에 대한 공판이 있었는데, 검찰은 A씨에게 징역 2년을 구형했습니다. 재판을 받는 A씨의 몸에는 여러 군데 자해를 한 흔적이 있었고, 재판 내내 불안한 모습을 보였으며, 공황 장애와 우울증까지 겪고 있었습니다. 학비와 거주비를 벌기 위해 시작한 학원 강사 생활이었는데,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까 두려워 허위 진술을 한 것이 이렇게까지 큰 일이 될 줄을 몰랐고, 또 그 자책감으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사례로 말씀 드렸지만, 지금 전 세계를 혼돈으로 몰아 넣는 코로나 19의 상황은 매우 다양한 측면에서 우리의 모든 삶을 되돌아보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코로나 19는 우리가 만든 사회의 부정적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한편 동시에 세계적 가치 사슬이 흔들리면서 우리나라의 무한한 가능성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한국의 K 방역이 성공할 수 있는 요인으로 4T를 말합니다. 진단(Test), 추적(Trace), 치료(Treat), 투명(Transparency)입니다. 그런데 철학자 김재인 씨는 여기에 신뢰(Trust)라는 항목을 덧붙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나라 국민이 현 정부를 신뢰하고, 또 각 개인들이 서로를 신뢰했기 때문에 한국 방역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김재인 씨의 분석은 매우 중요합니다. 앞으로도 각종 전염병의 세계적 대유행이 주기적으로 반복될 수 있기 때문에 인류는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새로 획득해야 하는데, 이것은 개인이 풀 수 있는 문제가 절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나서서 안전한 공간을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가 가장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함께 안전한 공간이 되도록 하는 일에 서로를 향한 신뢰는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 대면 예배를 고집하는 교회들이 비난의 온상이 된 이유는 전 시민이 함께 만든 안전한 공간을 파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편의 저자는 구석구석, 폭력배의 소굴이고, 어리석은 백성들이 주님의 이름을 모욕하며 주님께 항거해서 일어서는 자들의 소란한 소리가 끊임없이 높아간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억눌린 자가 수치를 당해서 물러나는 일이 없도록, 가련하고 가난한 사람이 주님의 이름을 찬송할 수 있도록 세상을 바꾸어 달라고 탄원합니다.
즉 주님께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은 모두가 서로를 신뢰하는 사회, 정의가 넘치고 안전하게 저마다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과 연결됩니다. 오늘날 교회가 새롭게 거듭나는 일은 대면예배를 고수하며 사회의 위험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고통당하는 이들 곁에서, 어렵고 힘든 나날들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나아가서 그들을 돕고 우리 사회가 더욱 더 안전하고 좋은 사회가 되도록 나서는 것입니다.
생사화복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생명을 택해야 합니다. 예배가 이웃을 위태롭게 하면 모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신앙이라는 안서교회 고태진 목사님의 말씀을 깊이 경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이지, 희생제물이 아니라”는 호세아 예언자의 목소리를 청종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정말로 세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레위의 기구한 삶에 깊이 들어가서 그를 위로할 수 있을지, 혐오와 배제의 언어가 아니라 사회적 소외계층을 품어 않으며 사랑의 언어와 실천으로 주님의 향기를 퍼뜨릴 수 있을지 더 먼저 고민하고 시도해야 합니다.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규례와 명령은 우리의 마음에 이미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께서 만드신 길을 따라가면 됩니다.
그런데 그동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만 축복해 주시기를 빌었고, 남들이야 어떻게 되든지 간에 자신만 구원받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19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연의 모든 피조물과 이웃이 서로 신뢰하고 보듬어 줄 때만이 모두가 함께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제가 예배 마지막에 세상으로 파송하는 예전을 할 때, 여러분에게 참 자유인으로 사시고, 당당하게 세상으로 나아가라고 보냄의 말씀을 합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제 양팔을 쭉 펴고 축도를 합니다.
많은 목사님들은 손을 위로 약 45도의 각도로 한 다음에 축도를 하십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리는 복을 상징하고, 종교심리학적으로는 교인들로 하여금 축복을 받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제 양팔을 넓게 벌리고 축도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그 축복으로 세상에 나아가 모두를 품으라는 뜻입니다. 움츠리지 말고 자신을 온전히 개방하여 그 누구도 제외하지 말고 넓은 품으로 들어 올 수 있도록 자신을 열라는 뜻도 있습니다. 동시에 양팔을 벌린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내 놓아 모두를 품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신 것처럼 우리들도 자신을 십자가에 내 놓아 모두를 품겠다고 다짐하기를 바라면서 양팔을 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영상을 통해 함께 예배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는 성도 여러분! 코로나 19는 방심하면 우리에게 재앙과 죽음을 불러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심하면 얼마든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우리에게 새로운 삶과 복을 줄 수도 있습니다. 생사화복의 갈림길에서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말고, 온전히 우리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밝히 분별하십시오.
세리 레위를 찾으셔서 레위의 본래 자리를 회복시켜 주신 주님 예수의 뜻을 받들어, 우리 또한 본래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리를 찾아갑시다. 예수께서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실수와 잘못과 무지와 욕망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고통에서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실수하지만 주님께서 고쳐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주님의 은총을 입은 자들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로 우리 또한 코로나 19 세상에서 힘들고 외롭고 불안하고 아픈 이들 곁에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 저는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의 눈을 바라보며 여러분들 앞에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내 놓습니다.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자손들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십시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의 말씀을 들으며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은 살 것입니다. 주님께서 믿음의 선조들에게 약속한 미래의 땅에서 여러분들이 잘 살게 될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오늘날 인류는 생사화복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코로나 바이러스의 감염으로 고생하고, 지난 날 사람의 욕심으로 발생한 기후재앙으로 인해 온 지구 생명체들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태를 보며 우리들의 삶과 믿음을 되돌아봅니다. 생명과 사망, 저주와 복 사이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며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주님께서 가신 길을 따르게 하시고, 주님의 규례와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여 주소서. 레위를 찾아 오셔서 참된 삶으로 인도하신 예수를 따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참된 위로가 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자비하신 하나님! 우리가 주님을 송축하고, 우리의 입술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지난 8년의 세월을 지켜 주시고,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한없는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방황을 이겨내게 하시고, 우리가 주님께 거역하고 반항할 때에도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사랑할 사람들을 주시고, 진정한 아름다움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골방에 들어가 숨어 계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며 주님께서 주신 삶의 놀라운 선물들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배운 진리와 성취할 수 있던 선한 일들을 보며 감격하며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시간 주님께 예물과 함께 우리 자신을 드립니다. 받아 주소서. 오늘 예배를 통해 받은 천국의 기쁨을 잘 간직하겠습니다. 바쁜 세상에서도 주님께서 허락하신 평안을 누리며, 주님께서 감당하라 명하신 소명을 이어나가겠습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생명을 택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주의 말씀을 들으며 그를 따르십시오.
* 축도
이제는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지시는 손길이시며, 우리를 모든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부활의 능력으로 모든 죽음의 세력을 이기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하시는 거룩한 영의 감동과 친교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생명을 택하고 주님의 복된 길을 걸어가는 생명사랑 교우와 지금 이 시간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