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한문덕 목사] 봄의 정원으로 오라 – 2020년 6월 7일

레위기 1933-34, 시편 1271-5, 고린도전서 134-13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1885년에 여러 개의 단편을 묶어서 출판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신에게 벌을 받고 쫓겨난 천사 미하일과 구두장이 시몬이 만나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미하일은 하나님이 이제 막 쌍둥이 아이들을 낳은 어떤 여인의 영혼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셔서 세상에 내려 왔지만, 아이들이 죽게 될 것이라며 애원하는 엄마의 말에 마음이 약해져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미하일을 지상으로 쫓아내고 세 가지의 질문을 합니다.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을 때 천사 미하일은 다시 하늘로 올라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 가지 질문은 이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나요?” “지금 우리들은, 여러분 자신은 무엇으로 사시나요?”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진정한 발견은 새로운 대륙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은 무엇으로 살고 계신 지 새로운 눈을 갖게 되길 바랍니다.

생명사랑 제자교육을 할 때마다 종종 사용하는 Life share 카드(삶 나눔 카드)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 일, 미래, 관계, 치유, 사랑, 가치, 일상, 삶, 여행>이라는 10개의 주제에 관련된 질문들이 있는 카드입니다. 지난 주 수요일 오전 제자교육 배움반 모임을 하면서 이 카드를 사용했는데, 한 분이 뽑은 카드에는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죽는다면 무엇이 가장 후회될 것 같나요?” 저도 속으로 이 질문을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일이나 모레 나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면 과연 무엇을 가장 후회하게 될까?’

수년간 말기암 환자를 지켜보았던 일본인 의사가 쓴 책 중에 <죽을 때 후회하는 25가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모든 환자들이 죽을 때 후회하는 첫번째 것은 “자신의 몸을 소중히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두번째는 “유산을 어떻게 할까 결정하지 않은 것” 세번째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 네번째는 “맛있는 것을 먹지 않았던 것” 다섯번째는 “마음에 남는 연애를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계속 말씀 드려보면 “결혼하지 않은 것”,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았던 것”, 이것은 많은 여성환자들의 후회라고 합니다. “악행에 손댄 일”, “감정에 좌지우지되어 일생을 보낸 것”, “자신을 제일이라고 믿고 살아온 것”, “생의 마지막에 자신의 의지를 보이지 않았던 것”,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마워요’라고 말하지 않았던 것”, “가고 싶은 장소를 여행하지 않았던 것”, “고향에 찾아가지 않았던 것”, “취미에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던 것”,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지 않았던 것”,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았던 것”, “사랑하는 사람에게 불친절하게 대했던 것”, “아이를 결혼시키지 않았던 것”, “죽음을 불행하다고 생각한 것”, “남겨진 시간을 소중히 보내지 않은 것”, “자신이 산 증거를 남기지 않은 것”, “종교를 몰랐던 것”, “자신의 장례식을 준비하지 않은 것”, “담배를 끊지 않은 것” 등입니다.

나에게 당장 죽음이 찾아온다면 나는 무엇을 가장 후회하게 될까, 그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제 아이들과 아내와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저의 경우 돈을 많이 벌지 못한 것이라든가, 좋은 곳에 가 보지 못한 것, 그 밖에 다른 것이 아니라, 가족이 제일 먼저 생각났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의 말씀에서 자식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하면서 젊어서 나은 자식은 용사의 손에 쥐어 있는 화살과도 같다고 하는데, 저도 모르게 아내와 아이들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은 우선 “사람은 함께 하는 가족의 사랑으로 산다.”입니다.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인가요?

[소중한 가족의 사랑]

13세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남부 이탈리아의 왕이었던 프레드릭 2세는 언어 능력이 탁월하여 여러 외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습니다. 이 황제는 언어의 기원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아이들을 키울 때 어떤 말도 들려주지 않으면 원래 인류가 지니고 있는 태생적 언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실험정신이 강했던 이 황제는 고아가 된 갓난 아이들을 모아서 양부모와 유모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기들을 먹이고 씻길 수는 있으나, 절대로 쓸데없는 소리를 내거나 말을 건네지 말라.” 그렇게 하면 그 아기들이 일정한 때가 되어 말을 할 때 그 말이 히브리어인지, 그리스어인지, 라틴어인지, 아라비아어인지, 아니면 아기를 낳은 부모의 언어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프레데릭 황제의 실험은 어떤 언어학적 결과도 낳지 못하고 종결되고 맙니다. 아기들은 한 마디 말을 하기도 전에 모두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실험을 제안했던 황제는 당황했고, 후에 이 실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 냅니다. “아기들은 손을 꼭 쥐어주고 동작을 보여주고 즐거운 표정을 지어주고 얼러주지 않으면 살지 못한다.”

그로부터 800년 후인 1940년대에 정신분석학자인 르네 스피치는 고아원과 보호시설에서 자라는 고아들과 수감 중인 젊은 어머니들과 격리된 아기들을 관찰하고 한 보고서를 냅니다. 보호 시설의 아기들에게는 음식과 의복, 그리고 따뜻하고 깨끗한 잠자리가 제공됩니다. 하지만 아기들은 어른들과 함께 놀거나 안기거나, 보호의 손길을 느낄만한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당시 현미경의 발달로 처음 확인된 병균이 사람에게 들어와 모든 질병을 일으킨다는 매균설의 영향으로 인간의 접촉을 통해 아기들이 해로운 병균에 노출될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아기들은 먹고 자고 배설하는 신체적 욕구가 충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시름시름 앓았고 체중이 감소했습니다. 그리고 다수가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새끼를 낳아 젖을 먹이는 모든 포유류를 포함하여 인간의 생리는 열린 고리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개인은 자신의 모든 기능들을 홀로 지배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나 외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달되는 조절정보가 자기 자신 체내의 호르몬 수치, 심장 기능, 수면 리듬, 면역 기능 등을 조절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리는 다른 사람이 있어야 완성될 수 있고, 두 사람은 함께 모일 때 비로소 안정되고 균형 잡힌 유기체로 탄생하는 것입니다. 특히 이제 막 세상 빛을 본 아기는 자신을 돌봐주는 어른의 다양한 얼굴 표정, 목소리, 향기, 따뜻한 손길과 즉각적인 반응을 통해서 진정으로 사람이 되어 갑니다. 부모가 건강한 방식으로 아기를 사랑한다면, 즉 아기의 욕구가 우선적으로 배려되고, 실수가 용납되고, 인내가 인색하지 않고, 상처가 효과적으로 치유된다면, 아기는 자기 자신과 타인들에 대해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단순히 먹고 마시는 것과 물질적 조건에 의해서만은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며, 우리의 삶에는 반드시 사랑이 필요합니다. 파리의 지하철 공사에서 시민들에게 시를 공모했는데, 약 8천편이 응모되었고 그 중에 1등으로 당선된 시가 있습니다. 그 시의 제목은 ‘사막’입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사막

– 오르텅스 블루 지음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정말 가슴에 와 닿지요? 아무도 없는 사막, 너무도 외로운 한 사람이 있습니다. 걸어도 걸어도 끝없이 펼쳐지는 모래벌판, 내리 쬐는 뙤약볕, 사람이 그리웠던 이 사람은 때때로 뒷걸음질로 걷습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면서라도 위로를 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관계적 존재이고, 함께 살아갈 때만이 스스로도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법]

우리가 운전할 때, 앞차가 갑자기 정지하면 뒤에 따라오는 차 또한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아야 합니다. 누구나 아는 상식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가속도와 운동의 법칙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 봅시다. 그런 사람이 운전을 한다면 아마 그 사람의 뼈는 부러지고, 몸은 만신창이가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 봅시다. 사랑의 법칙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인생을 허비하고 마음을 다치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사랑하고 사랑 받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다양한 고통이 있습니다. 최근에 계모의 학대로 한 아이가 목숨을 잃었고, 한 역에서는 묻지마 폭행을 당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사랑을 주고받지 못했기에 생긴 감정적인 고통들과 결과들은, 우리들의 일상에서 너무나 많이 목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라 사는 동물이라면, 특별히 방울뱀이나 악어 같은 파충류와 같은 존재라면 자신의 가족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어떤 감정도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은 생태계의 먹이 사슬 속에서 자기보다 훨씬 작은 생명체가 큰 동물에게 잡혀 먹힐 때, 매우 안타까워합니다. 우리 인간은 나약한 존재에 대해 다정함을 지니고, 배려를 하고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사랑보다는 힘을, 서로 존중하고 아끼기 보다는 지배하고 명령하려는 사람들이 있고,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즉 사랑에 미숙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지옥이란 사랑의 무능력으로부터 발생하는 고통이 가득한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발딛고 있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방법은 미숙한 사랑을 성숙한 사랑으로 바꾸어 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향한 어린 아이들의 갈망이나, 젊은 연인들의 열정, 흔들리지 않는 모성애, 오랜 친구에게서 느끼는 일체감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랑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자신의 뱃속에 아이를 품은 어머니들처럼 자신 안을 비워 거기에 세상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비워내는 사랑의 고통에서만이 창조의 기쁨,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고, 이 세상을 사랑의 나라로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참으로 깊고 넓은 이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로마 교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로마서 8:38-39) 그리고 바울 사도는 이제 자신이 발견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들에게 알려 주려고 합니다.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요한일서의 말씀을 조금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존재이시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 사도께서도 ‘사랑’은 바로 ‘사랑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사랑하는 행위 즉 동사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은 무엇인가라고 묻기보다 사랑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사랑을 15개의 동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 구절, ‘사랑은 오래 참고~’로 시작하는 이 구절을 읽을 때, 사랑 대신 하나님을 주어로 읽어 봅시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훨씬 더 실감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은 오래 참습니다. 하나님은 친절하시며, 하나님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시지만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이렇듯 오늘 고린도전서의 말씀은 사랑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누군가 주체가 되어 실천해야 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명심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 대신 여러분 모두,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서 7절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천천히 또박또박 한 글자 한 글자 짚어가며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읽으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딸인지 아니면 이 세상의 물든 자본주의자인지, 천박한 유물론자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이 구절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천천히 읽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바울은 이 구절을 쓰면서 자신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스스로 이런 사람이 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실존 인물로서 예수님을 눈으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지지는 못했지만, 바로 이 사랑 안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또 사랑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눈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숙한 사랑]

파스칼(Blaise Pascal)은 “마음은 이성이 전혀 모르는 자신만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파스칼이 생각한 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마음입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랑은 인간 경험의 가장 핵심적인 초점일 뿐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생명력으로, 우리의 기분을 결정하고, 신체리듬을 안정시키고, 뇌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동력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존재와 가능성을 결정합니다.

코로나 19로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고,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느라 봄이 온 줄도 모르고 보내버렸습니다. 저는 그것이 매우 아쉬웠고, 그 마음 달래려고 오늘 설교의 제목을 정했습니다. “봄의 정원으로 오라”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머리속에 그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때는 봄입니다. 온갖 나무와 꽃이 만개하고, 나비와 벌이 춤을 춥니다. 따뜻한 햇볕, 간혹 불어오는 바람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는 곳, 봄의 정원을 상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정원이 있다면 여러분은 거기에 누구를 초대하시렵니까?

페르시아의 시인이자 법학자였던 잘랄루딘 루미의 시 제목이 바로 “봄의 정원으로 오라”인데, 여러분에게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

봄의 정원으로 오라

– 잘랄루딘 루미

봄의 정원으로 오라.

이곳에 꽃과 술과 촛불이 있으니

만일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만일 당신이 온다면

이것들이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렇습니다. 봄의 정원에 사랑하는 사람이 오지 않는다면 그 아름다움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동시에 그 사랑하는 사람이 온다면 또 꽃과 술과 촛불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저와 여러분은 사랑하는 사람을 초대한 사랑의 정원 주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오지 않으면 정원은 소용이 없겠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온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사랑은 공포를 이깁니다. 사랑은 모든 두려움과 불안을 몰아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줍니다.

오늘 바울 사도는 사랑의 또 하나의 특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은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부분적인 것은 사라지지만 온전한 것은 영원합니다. 우리는 온전한 사랑을 누릴 때까지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것들은 과감하게 버리고 이제 성숙한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 받지 못해서, 또 사랑했기 때문에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찾아온다면, 우리는 따뜻하게 안아주고 뜨거운 한 잔의 차를 건넬 줄 알아야 합니다. 잔잔한 미소로 그 속 얘기를 차분히 들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성숙할수록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미숙한 사람인지 깨닫게 되고, 그렇게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 인정으로부터 우리는 더 온전한 사랑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성숙한 사랑으로 이끌어 주는 시 한 편을 읽고 오늘 설교를 마칠까 합니다. 인도 캘커타 마더 테레사 본부 벽에 붙어 있는 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때로 믿을 수 없고, 앞뒤가 맞지 않고, 자기 중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용서하라.

당신이 친절을 베풀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을 베풀라.

당신이 어떤 일에 성공하면 몇 명의 가짜 친구와 몇 명의 진짜 적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하라.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기 쉬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고 솔직하라.

오늘 당신이 하는 좋은 일이 내일이면 잊혀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을 하라.

가장 위대한 생각을 갖고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가장 작은 생각을 가진 작은 사람들의 총에 쓰러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생각을 하라.

사람들은 약자에게 동정을 베풀면서도 강자만을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약자를 위해 싸우라.

당신이 몇 년을 걸려 세운 것이 하룻밤 사이에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라.

당신이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발견하면 사람들은 질투를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롭고 행복하라.

당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세상과 나누라.

언제나 부족해 보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것을 세상에 주라.

– 인도 캘커타 마더 테레사 본부 벽에 붙어 있는 시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 안에 사랑의 불꽃이 타오르게 하여 주소서. 우리들이 온전히 하나님을 향해 불타오르고, 온전히 하나님에 의해 타오르게 하여 주소서. 사랑 없이 행하는 모든 일들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아낌없이 베푸시는 주의 사랑 안에서 우리가 참된 평안을 누리게 하여 주소서. 때때로 세상 살이에 지치고, 더러운 얼룩이 묻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솟구쳐 오를 때에도, 주님의 살아 있는 형상이 우리 안에 있음을 기억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생각 속에 사랑을, 우리의 말 속에 사랑을, 우리의 행위 속에 사랑을, 그리고 우리의 영혼 깊이 감춰진 그 곳에 사랑을 심어 주소서. 우리가 참기 힘들어 하는 이들과 우리를 참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모두 사랑하게 하소서. 영원하시며, 언제 어디서나 사랑과 지혜로 우리를 이끄시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자비하신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주님을 송축하고, 우리의 입술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방황을 이겨내게 하시고, 우리가 반항할 때에도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사랑할 사람들을 주시고, 아름다움은 누리게 하시며, 고요히 머물 장소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삶의 놀라운 선물들, 우리가 배운 진리와 성취할 수 있던 선한 일들에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시간 주님께 우리 자신을 드립니다. 받아 주소서. 오늘 예배를 통해 받은 천국의 기쁨을 간직하며 살아가겠습니다. 바쁜 세상에서도 주님께서 허락하신 평안을 누리며, 주님께서 감당하라 명하신 소명을 이어나가겠습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삶으로 주님께 찬양을 드리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여러분들에게 가장 좋은 길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영원할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 축도

여러분의 손에 언제나 할 일이 있기를.

여러분의 지갑에 언제나 한 두 장의 지폐가 남아 있기를.

여러분의 발 앞에 언제나 길이 나타나기를.

바람은 언제나 여러분의 등 뒤에서 불고

여러분의 얼굴에는 해가 비치기를.

이따금 여러분의 길에 비가 내리더라도 곧 무지개가 뜨기를.

불행에서는 가난하고, 축복에서는 부자가 되기를.

적을 만드는 데는 느리고, 친구를 만드는 데는 빠르기를.

불행은 여러분을 아는 체도 하지 않기를.

여러분이 죽은 것을 사탄이 알기 30분 전에 이미 여러분이 천국에 가 있기를.

앞으로 겪을 가장 슬픈 날이 지금까지 겪은 행복한 날보다 더 나은 날이 되기를.

그리고 성부 성자 성령 성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영원히 여러분 곁에 계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