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한문덕 목사] 눈물로 씨를 뿌리며 – 2021년 6월 13일 총회선교주일
열왕기상 11장 9-13절, 시편 126편 4-6절, 계시록 1장 20절-2장 7절
[제도 교회와 예수 운동 공동체]
지난 주 수요사경회 81회를 보시고 뉴욕에 사시는 한 분이 이런 댓글을 다셨습니다. “목사님께서 <마가복음>의 신학을 늘 반복하며 강조하셨듯이, 과연 오늘날의 기독교가 <마가복음>이 지향했던 그 ‘하나님 나라 운동’과 ‘제자 공동체 운동’을 온전히 이루어갈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제도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되려면, 어떤 대안이 있을까요? 최근, 목사님의 주일 설교에서 들었습니다. “<생명사랑교회>의 모든 교우 분들이 보석처럼 귀하고, 내가 평신도라면 나도 이런 교회를 평생 섬기며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목사님의 설교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뉴욕에 있는 저로서는 부러울 따름이지만, 아마도 저와 같은 사람들이 훨씬 많이 있지 않을까요?”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실천했던 초기 예수 운동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조직화되고 제도화되어 갑니다. 임박한 재림을 기대했던 첫 제자들은 떠돌이 생활을 하며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서의 복음을 전했고, 그로 인해 생긴 새로운 공동체들은 서로 섬기며 함께 살아가는 생활 공동체를 지향했습니다. 첫 교회들에는 생활비를 받고 전문적으로 교회의 일을 하는 목사직과 같은 직제도 없었고, 모든 직무는 공동체를 꾸리기 위해 필요한 봉사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로마 세계에 깊숙이 뿌리를 내려야 했던 교회는 헬레니즘 시대의 학문과 로마의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예수의 본성이 신인가 인간인가 하는 철학적 논의로 점점 바뀌게 되었고, 일종의 마을 공동체를 이루어 유무상통하는 모임들은 주교와 사제가 이끄는 조직체가 되었습니다. 이런 모든 과정은 어쩔 수 없는 과정이었습니다.
초기 교회가 조직화되고 제도화 되지 않았다면 하나님 나라 운동은 한 때 시대를 풍미하고 사라져 버리는 과거의 유산이 되었을 것입니다. 황제 숭배와 다신교적 신념 체계들이 분분한 사회에서 이제 막 태생한 그리스도교는 자신들을 변호하고, 세상에 홍보하면서 좀 더 단단한 체계를 만들어갔고, 조직화와 제도화는 교회 생존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선택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예수 운동의 생생함은 시들어가고, 첫 신앙공동체가 추구했던 평등과 나눔의 이상들은 갈수록 희미해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교 교회의 역사는 현실과 이상, 본질과 왜곡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타기를 해 온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목사 없는 평신도 교회를 지향하는 이들도 있고, 공동체성을 담보할 수 있는 작은 교회 운동에 도전해 보기도 하지만 막상 운영해 보면 유지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을 때도 있고, 생각지 못한 어려움들을 겪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현 제도 속에서도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생기를 유지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도로서의 교회와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제도교회 속에서 경직화되기 쉽고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요소들을 계속 경계하면서 복음의 생생함을 일깨우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매주 일정하게 드리는 예배와 교회가 지속적으로 하는 활동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모습이 되도록 스스로를 성찰하고 새로운 것을 계속 도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에베소 교회에서 배우라: 복음의 저항정신]
요한계시록 2장 1절부터 3장 22절의 말씀은 로마의 우상 숭배적인 사회문화 체제에 동화될 위기에 처해 있는 일곱 교회를 향한 글입니다. 편지의 목적은 각 교회의 상황과 행위를 진단하고 교회의 개혁을 요구하는 데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를 진단하고 변혁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게 들려주는 말씀입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 지역을 관할하는 로마의 총독부가 있는 곳으로 정치와 상업과 종교의 중심지로 당시 로마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 안에는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아르테미스 신전을 비롯해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로마의 여신을 위한 신전도 있었습니다. 한편 에베소는 귀신을 쫓는 주술과 미신으로도 유명해서, “에베소의 문자”(Ephesia grammata)라는 부적을 소지한 사람은 신의 행운과 보호를 받는다는 이야기가 퍼져 있었으며, 아르테미스 여신상과 신전의 모형물을 파는 가게가 곳곳에 있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종교는 세속화되기 쉽고, 세속적 욕망이 신의 이름으로 선포되고 왜곡되듯이, 에베소의 다신교적 문화와 로마의 상업주의적 분위기는 복음의 순수성을 해칠 위협으로 작동했습니다. 오늘 주님은 에베소의 교인들에게 네가 한 일, 즉 수고와 인내를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수고는 복음의 증언을 위해 흘리는 피와 땀을 말하며, 인내는 억압과 불의, 박해를 수동적으로 참고 견디는 것만이 아니라, 거기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에베소 교인들은 세속적 로마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세상의 악이 교회에 스며들지 않도록 싸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에베소 교인들은 악한 자들을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을 거짓말쟁이임을 밝혀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참고 고난을 견디어 냈는데, 심한 박해 속에서도 낙심한 적이 없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받은 칭찬에 대해서 우리는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초기 문헌인 디다케에 의하면 참된 사도는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계속 떠돌아다니며 주님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거짓 사도요, 거짓 예언자들은 교회 성도들의 가정에 식객으로 오래 머물면서 돈을 요구하고 민폐를 끼쳤습니다. 이들은 우상 숭배로 물든 로마문화에 적당히 순응하고 적응하라고 가르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했습니다.
초기 교회에 위협이 되었던 거짓 가르침은 크게 몇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 유대교 율법으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주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할례를 하고, 음식법을 지키고, 모든 율법 규정들을 준수해야만 한다고 하는 주장들에 휩쓸리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편에는 그리스도의 자유를 빌미로 방종을 일삼는 자들의 유혹이 있습니다. 영적인 정신만 중요하고 육체는 함부로 해도 되고, 더 나아가 이 세상의 삶과 규칙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면서 일상의 도덕과 관습을 함부로 무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생각들은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으로 서로 돌보며 자율적이면서도 매우 고귀한 도덕성을 지키려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흐려 놓았습니다.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교 내에 있는 왜곡된 복음, 거짓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유혹과 속임수는 무엇이 있을까요? 가장 첫 번째는 사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을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즉 샤머니즘적 기복주의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분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복이 나만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생명체 전체를 위한 것인가를 살펴보면 됩니다. 어느 누구도 혐오하지 않으면서 모든 생명을 아우르려는 생각은 그리스도교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 다른 종교인들과 우리들의 이웃을 혐오하고 배제하면서 자신만 선택받은 백성이고 하나님의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생각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자본주의 시대이다 보니 교회의 운영이나 설교가 돈을 중심에 두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봉사직인 교회의 직분을 돈으로 사고파는 하는 행위,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부유함이 교회 안에서도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순종하는 자세가 아니라, 세상적 기준이 교회 안에서 아무런 문제제기 없이 시행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섬기고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내는 헌금을 마치 개인의 부의 증식을 위한 투자처럼 설교하는 사기꾼 목사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 어떤 매개자도 없이, 중개인도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목회자의 권위를 빌어 마치 자신만이 하나님과 연결된 것처럼 말하면서 교인들을 자신의 종처럼 생각하는 독재자 스타일의 목사도 있습니다. 한편 반대로 자신의 종교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목사를 종처럼 부리려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이런 교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보다도 개인의 사적인 욕망 추구가 가득합니다.
복음과 진리의 힘으로 사회구조적 악과 맞서 싸우고, 예측할 수 없는 불행과 불안, 두려움과 공포 상황에서도 믿음의 힘으로 극복하기 보다는 값싼 심리적 위로와 그럴싸한 감정적 흥분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종교 장사꾼이 된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곳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에베소 교회처럼 악한 이들을 몰아내고 거짓과 싸우는 일이 오늘날 매우 중요합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이런 사람들에 맞서 싸우고, 예수님의 이름이 올바로 전해지도록 투쟁하는 가운데 고난을 당했으면서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잘못: 첫 사랑의 상실]
그런데 이렇게 싸우는 과정 속에서 그만 에베소 교회는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인들이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나무라는데, 여기서 처음 사랑이란 아들 예수를 보내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 사랑, 아버지에게 순명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내 놓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주님의 몸 된 성령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지향하는 아가페적 사랑은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 당대 이웃에 포함되기 어려웠던 사회적 약자들,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에 더 고난이 많았고, 고통과 불행에 취약했던 이들을 품어 안으려는 사랑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들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저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있으니 용서해 달라”는 예수님의 기도를 본받아 무지로 인해 발생하는 온갖 고통의 현장에서 사랑으로 그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하려고 했던 모든 노력과 수고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과 악한 행위를 하는 이들과 싸우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아가페 사랑의 마음이 사그라진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 정의와 평화를 위해 불의에 맞서 싸우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분노의 감정에 휩싸이고, 평화를 외치면서 전쟁을 일으키는 일들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문제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비판, 그에 대한 개선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러는 사이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우리는 명심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 내서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에베소 교인은 차분히 자신들의 그간의 활동을 되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잘못된 지점들을 찾아내 다시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서로 사랑하고, 고통당하는 이들의 이웃이 되어주는 사랑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박해를 받거나, 무시를 당하거나, 조롱을 당할 때, 억울하고 화가 나고 속상할 때에는 주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며 풀어내야 합니다. 원수 갚는 일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심판자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명하신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예수의 제자임이 증명되는 것이고,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할 때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확인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주님은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경고하십니다. 교회가 자신의 본질인 사랑을 상실하고 회개하지 않으며 자신을 개혁하지 않으면 주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주님께서 모른다고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 우리 생명사랑교회도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니골라당을 조심하라]
첫 사랑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책망한 다음에 주님은 다시 에베소 교회를 칭찬합니다. 에베소 교회에 대한 두 번째 칭찬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했다는 것이고, 주님께서도 거기에 동의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니골라당이 어떤 사람들이고 무엇을 했는지는 매우 어렵습니다. 니골라당이라는 표현 자체가 성서 전체를 통틀어 요한계시록에만 두 번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부들의 해석과 여러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도행전에서 새롭게 지도자로 세워진 니골라가 욕망과 정욕을 제어하기 위해 육체를 경멸하였는데, 후에 이것을 잘못 해석하여 육체를 함부로 대하고, 방종과 자신의 쾌락을 위한 탐닉을 일삼던 이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생각)을 니골라당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한편 니골라당은 “승리”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니코스와 “사람들”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라오스가 결합되어 “승리의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을 가지고 유추하여 보면 니골라당은 아마도 그리스도인들이면서도 로마의 제국주의가 가지고 있는 우상 숭배적 사회문화에 순응하고 적응함으로서 사회적인 지위와 경제적인 이익을 얻는 데 성공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큰 틀에서 보자면 니골라당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면서도 로마의 신전들에게 개최되는 상인 조합의 연례회의와 친교 모임에 참석하고 조합원들과 함께 신전의 식당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 부유한 사람들이었는데, 이런 것을 행하면서도 어떤 거리낌도 갖지 않았고, 그리스도교 복음이 지향하는 바,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고 그들과 연대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교회를 타락시키고 교회의 하나님 나라 선교를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들의 행위는 귀족적이고 엘리트적인 계급질서만을 옹호하는 로마의 황제 숭배에 맞서 고난과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순교마저 감수했던 교인들의 삶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대형교회가 자본주의에 순응하고, 정치적으로는 보수적 우파의 성향을 가지면서 엘리트들만의 친교모임으로 전락한 것과 매우 비슷한 상황이라고 하겠습니다. 교회가 사회적 권력과 경제적 부를 소유한 사람들만의 친교모임이 될 때, 참되게 복음을 전하려는 목회자와 교인들은 교회 안에서 제대로 활동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적이고, 개인적인 이기주의가 만연한 시대에 돈의 올바른 쓰임을 강조하고, 불의한 재물을 거부하며 공동체적인 삶과 약자를 향한 무한한 애정을 표현하려는 이들은 사회에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금융자본에 의한 단기간의 수익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을 때, 하나님의 거룩한 가치를 얘기하는 사람은 너무나 쉽게 왕따가 됩니다. 그러나 한편 사회의 이런 전반적인 흐름 때문에 사회적 빈부격차는 심해지고, 사회적 약자들은 소리 없이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불안과 분노, 우울증과 스트레스 지수는 높아지고 이것이 또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고려하면서 이 땅을 하나님 나라고 일구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게 마련입니다. 외롭고 힘든 길을 가게 됩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도 복음의 깊이를 추구하려는 이들이 별난 사람으로, 잘난 체하는 사람으로 오해되곤 합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극복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실 것입니다.
[늘 조심하라. 씨앗은 언제나 울면서 뿌리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성서의 말씀은 솔로몬 임금에 대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다윗에 이어 이스라엘의 세 번째 왕으로서 하나님께 “듣는 마음”, 즉 주님께 순종하고 청종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여 부귀와 영화까지 함께 누렸던 왕입니다. 솔로몬 치하에서 이스라엘은 가장 큰 영토를 가질 수 있었고, 문화 대국이 될 수 있었으며, 순탄한 외교관계를 통해 국제적 명성과 지위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솔로몬을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권력과 부에 대한 추구와 실현이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멀어지게 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지금의 한국은 G7에 들어갈 만큼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한국은 이제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 곳곳에는 고난과 아픔을 호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여전히 사회 구석구석은 더럽고, 위험합니다. 사람보다는 돈이 주인 되어서 사람의 목숨이 너무나 하찮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삶은 풍족해지고, 편리해졌지만 우리의 정신은 오히려 가난하고 궁핍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특히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늘 새로운 이상을 보여줄 줄 알아야 합니다. 솔로몬이 갔던 부귀영화의 넓은 길이 아니라 좁디 좁은 길을 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생명에 이르는 좁은 길이 곧 구원의 길인 줄 알려면 들의 핀 꽃 한송이가 솔로몬의 영화보다 더 아름답다는 예수님 말씀에 동의하고 실제로 그렇게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시편의 저자는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가 기쁨으로 거둘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의 저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것에 방점을 두고 이 말을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씨앗은 언제나 눈물로 뿌리는 것입니다. 교회가 바로 그런 곳이어야 합니다. 좁은 길로 걸어가는 것이기에 더욱 눈물이 나고 울음이 터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넓고 좋은 길, 넉넉하고 풍족한 삶만을 추구한다면 언제든 솔로몬처럼 주님을 저버리게 될 수 있고, 주님께서 촛대를 옮기는 결과를 맞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총회선교주일이기도 합니다. 우리같이 작은 교회도 첫 제자들의 사명을 이어 어떤 상황이라도 선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삶의 그늘진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제 건물을 크게 짓고 사람을 불러 모으는 일보다 우리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모든 것을 가르쳐서 제자로 훈련시켜 세상으로 파송하는 것에 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교회 공간과 예산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복음의 씨를 뿌리는 것에 쓰여야 합니다. 통곡하는 심정으로 주님의 복음의 씨앗을 뿌릴 때에 진정 참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돌아오는 한 주간도 늘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주님께서 세상을 처음 창조하실 때 지니셨던 마음을 떠올리며, 우리 또한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필요한 곳에 주님의 복음을 들고 나가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소서. 가을의 수확을 기대하며 씨를 뿌리는 농부처럼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감당하려는 마음을 갖게 하소서. 주님께서 주셨던 그 첫 사랑을 회복하게 하시고,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세상, 생명을 살리고 기쁨이 넘치는 세상을 가꾸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주님이시며 참된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감사기도
거룩하시고 좋으신 하나님! 이 좋은 날 우리 모두를 주님 앞에 불러 모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일주일에 하루, 주님 부활하신 날을 기억하여 나머지 날들의 완성으로 삼으시고, 또 새로운 날들을 준비하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우리에게 성령을 허락하시어, 세상살이에서도 거룩한 하늘의 음성을 듣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가 주님을 더 잘 알게 하시고, 우리의 일들을 좀 더 부지런히 감당하게 하시며, 우리의 이웃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은총에 감사하여 오늘 우리의 삶을 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소서. 우리가 드린 예물이 꼭 필요한 곳에 쓰이며, 이것을 통해 많은 이들이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하여 주소서. 특별히 생명사랑교회의 모든 사역을 통하여 우리가 날마다 진보하게 하시고, 더욱 더 주님과 가까워지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눈물을 흘리며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입니다. 험한 세상을 살아도 끝까지 싸워 이기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받으십시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의 거룩한 친교가 첫 사랑을 회복하고 진리를 향한 길로 매진하려는 생명사랑교우들과 이 시간 전국에서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