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한문덕 목사] “누구를 기억하고 무엇을 기념하는가?” – 2023년 1월 8일
여호수아기 4장 1-9절
[기억과 기념, 그리고 해석의 메카니즘]
오늘 설교 제목은 “누구를 기억하고 무엇을 기념하는가?”라고 되어 있지만, “무엇을 기억하고 누구를 기념하는가?”로 바꾸어도 무방합니다. 우리가 어떤 인물이나 사건을 기억하고 기념할 때 어떤 기준을 가지는지 그리고 또 어떤 인물과 사건을 기억하고 기념해야 하는지,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고, 수많은 사건이 일어나는데 어떤 것은 계속 기억되지만, 어떤 것은 왜 소리 없이 사라지는지, 또 같은 인물을 두고도 사람마다 기억이 왜 다른지, 남들은 다 기억하지 못해도 신앙인이라면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등등을 오늘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2022년을 보냈습니다. 일상의 반복되는 삶에서부터 새롭고 뜻하지 않게 겪었던 일까지, 매우 다사다난한 날들이 이어졌을 것입니다. 또 많은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 많은 일과 사람 중에, 또 많은 사건 중에, 사람들과 나눈 대화 가운데 지금 여러분의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억을 얘기할 때 가장 깊이 성찰하고 주목해야 하는 것은 ‘기억이 실제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 코, 입, 귀, 피부와 같은 감각기관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을 지각합니다. 감각기관을 통해 지각된 세상은 우리의 뇌 속에서 정리되고 이야기를 구성하며 조합되는 과정 즉 일종의 왜곡과 해석을 거쳐 기억됩니다. 해석되지 않으면 기억되지 않는데, 해석 자체가 사실은 실제에 대한 왜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제 말이 여러분에게 낯설게 들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고 듣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귀는 16Hz에서 20,000만 Hz 사이의 주파수에 해당하는 소리만 들을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중에서도 우리 귀는 4,000Hz 정도 주파수에 있는 소리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박쥐는 100,000Hz 이상의 초음파를 들을 수 있고, 일부 고래는 물속에서 7Hz 이하의 초저주파를 감지합니다. 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눈은 각막과 수정체를 통하여 사물을 보고 그 사물은 망막에 비추어져 시신경을 타고 들어가서 사물을 인식하게 되는데, 망막 안에는 시신경이 한데 모여서 빠져나가는 점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는 시세포가 없기 때문에 수정체를 통해 들어온 사물의 상이 맺히지 않습니다. 이 부분을 맹점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맹점을 인지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뇌가 맹점 주변 이미지를 토대로 상을 채워넣기 때문입니다. 맹점 테스트라는 것을 해 보면 그때서야 알게 됩니다.
사고나 질병으로 신체의 일부분을 절단하는 수술을 한 환자 중에 65% 정도는 환상통(幻想痛, Phantom Pain)이라는 것을 겪습니다. 절단한 부위가 가볍게 불편한 정도도 있지만, 극도의 아픔을 느끼기도 하고, 분명히 절단해서 없는데도 그 부분이 간지럽거나 쓰라리고, 쑤시는 등 다양한 증상을 보입니다. 심지어 해당 부위가 운동을 하고 있는 듯한 감각을 느끼기도 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의식한다고 할 때, 벌써 거기에는 12개 정도의 속성(통일성, 다양성, 순차성, 감각양식의 통합, 구성적 채워넣기, 지향성, 접근성, 중심과 주변, 집중과 분산, 고유한 감각질[Qualia], 세계 속 위치와 상황에 민감, 친숙도의 친소)이 작동하고, 우리가 무언가를 느꼈다고 말할 때에도 그 안에는 기본 정서(primary emotion)와 사회적 정서(social emotion), 배경 정서(background emotion)가 함께 작동합니다. 기본 정서는 두려움, 분노, 혐오, 놀람, 슬픔, 행복과 같이 타고 나는 감정들이라고 할 수 있고, 사회적 정서는 동정, 당혹감, 수치, 가책, 긍지, 질투, 부러움, 감사, 동경, 분노, 경멸 등과 같이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감정이고, 배경 정서는 우리 몸 자체 내에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동시에 일어나는 몇 가지 조절과정들이 감정에 미치는 영향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느낌은 타고나는 것과 주변 환경이 미치는 영향과 자기 몸의 상태가 함께 작동하면서 발생하는 생명의 에너지인데, 자기가 무엇을 느꼈다고 할 때, 그 감정 또한 매우 복잡하고 내적인 해석 과정 뒤에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리가 하는 생각, 기억, 느낌, 모든 정신적 활동은 모두 자기 해석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형태의 생각조차도 우리는 범주화하여 이해하고, 이미 존재하는 기억 정보들과 비교하면서 해석된 것입니다. 이 해석은 대부분 잠재 의식적인 수준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해도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기억과 의식과 느낌은 외부의 사건이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기보다는 자신의 몸 상태에 따라, 자신의 기존 이해와 해석에 따라 발생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같은 사건을 두고도 저마다 다른 이야기가 나오고, 똑같은 말속에서도 다른 느낌을 갖는 것입니다. 성경의 복음서도 네 권이나 됩니다. 모두 같은 예수를 겪었지만,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서를 읽거나 인문학의 고전을 읽으면서, 심지어 역사책을 읽으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관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해석을 하고 있는가 입니다. 누가 사실을 얘기하느냐에 목매면서 옳고 그름을 두고 따지기보다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거기에서 풍부한 삶의 의미를 얻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열두 개의 돌을 기념비로 세우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서 본문은 이스라엘 온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갔을 때 기념비를 세운 이야기입니다. 여호수아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백성 가운데서 각 지파 대표 열두 사람을 뽑아,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요단강 가운데서 돌 열두 개를 가져다가 길갈에 세웁니다. “길갈”이라는 말이 글자 그대로는 “둥근 원”을 뜻하기 때문에, 아마도 열두 개의 돌을 둥글게 세우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4장 9절에 보면 약간 다른 이야기가 또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열두 개의 돌을 요단강 한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머무른 그곳에 세웁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은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역과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역을 사용하여 여기에 “다른 열두 개의 돌”이라고 했지만 원래 히브리어 성경은 그냥 “열두 개의 돌”로 되어 있습니다. 다른 돌인지 아닌지가 불분명한 것이지요. 요단강으로부터 약 3km 떨어진 길갈에 돌을 세웠든, 아니면 요단강 한 가운데 돌을 세웠든, 양쪽에 모두 세웠든지 간에 이렇게 돌을 세운 데에는 분명한 목적과 뜻이 있습니다.
첫째 그 돌은 야훼 하나님께서 요단강 물을 막아주셔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 둘째는 이 사건을 대대로 자손들에게 교육하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여호수아는 모세의 시종이었고, 가나안 땅에 정탐을 갔던 12명 중 한 명이었지만, 지금은 모세의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되었고, 열두 개의 돌을 세우는 12 대표는 이전에 정탐했던 사람들을 대신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스라엘 12지파의 대표들로 이스라엘 전체 백성을 상징하면서 이제 새로운 역사를 쓰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7장 4-8절에서 아브라함과 이런 약속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는 너와 언약을 세우고 약속한다. 너는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다.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만들었으니, 이제부터는 너의 이름이 아브람(존귀한 아버지)이 아니라 아브라함(많은 사람의 아버지)이다. 내가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너에게서 여러 민족이 나오고, 너에게서 왕들도 나올 것이다. 내가 너와 세우는 언약은, 나와 너 사이에 맺는 것일 뿐 아니라, 너의 뒤에 오는 너의 자손과도 대대로 세우는 영원한 언약이다. 이 언약을 따라서,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뿐만 아니라, 뒤에 오는 너의 자손의 하나님도 될 것이다. 네가 지금 나그네로 사는 이 가나안 땅을, 너와 네 뒤에 오는 자손에게 영원한 소유로 모두 주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해주신 약속은 세 가지로 요약되는데, 바로 그것은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겠다는 것”과 “아브라함 및 그의 후손들과 언약을 맺겠다는 것”, 그리고 “가나안 땅을 영원한 소유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여호수아서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물을 두 번 건넙니다. 한 번은 홍해를 건넜고, 두 번째는 요단강입니다. 바다와 강은 육지를 나누는 경계가 되는데, 이 두 번의 물 건너기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3단계로 구분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 세 단계에서 바로 아브라함에게 했던 3가지 약속이 모두 실현됩니다.
첫째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큰 ‘민족’이 되어(출 1장) 홍해를 건넙니다(14장). 이 때 이스라엘만 나온 것이 아니라, 함께 고생하던 다른 민족의 히브리들도 함께 나왔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광야에서 출애굽한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회막을 통해 이제 이 신앙 공동체안에 머무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온 누리, 우주의 창조주 하나님이시지만, 출애굽한 신앙 공동체 안에 계시고, 이 공동체를 통하여 다른 민족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들은 선택받은 백성이 된 것입니다. 셋째로 이제 이 신앙공동체는 요단강을 건너서(수 3장), 약속대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오늘 이들이 세운 기념비는 출애굽 이전의 종살이로부터 출애굽, 광야 생활, 그리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까지 전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돌보시고 구원하셨는지를 기억하려는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요단강 한 가운데에도 돌을 세우고, 첫 번째 야영지였던 길갈에도 돌을 세웠다면, 이것은 지도자 모세를 세워 맡긴 가장 중요한 책임인 애굽으로부터의 구원과 여호수아의 가장 핵심적 과제인 땅의 정착이라는 것 모두를 함께 생각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상징은 이제 후대의 신앙 공동체들에게도 이어져서, 구원의 체험을 기억하며, 훈련의 시간을 거쳐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하는 소명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가나안에 세울 나라는 노예와 하층 계급의 노동력을 기반으로 하는 애굽과 같은 제국이 아니라 서로 평등한 열두 지파 연합공동체입니다.
[우리의 기념비]
우리의 생각과 기억, 느낌은 모두 해석의 과정을 거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좀 더 적극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해석하고 기억을 만들어야 합니다. 출애굽 신앙공동체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기념비를 세운 것처럼 우리 생명사랑교회 또한 우리만의 기억을 생산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 기반은 바로 구원의 하나님 체험일 것이고, 우리가 기억하여 기념으로 남길 목표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질서가 작동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작게는 각 가정으로부터 교회 공동체 세우기,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사회의 변혁에 이르기까지, 일부러라도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개인의 삶에서도 반드시 기억하고 기념해야 하는 날과 사람과 사건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처음 설립하고자 했을 때의 그 첫 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는 다른 여타 교회와 똑같은 교회가 아니라 훨씬 더 개혁적인 교회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정관도 새롭게 갖추고, 목표도 세웠던 것입니다. 그 정신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또 지난 10년의 세월 동안 특별히 헌신했던 분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구경꾼이 아니라 참여자로, 방관자가 아니라 일꾼으로 봉사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겼던 이들의 노고를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 나와 기도하고, 예물을 드리며,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손발로 헌신했던 이들에 대한 존중과 존경이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앞으로 세워나갈 우리 생명사랑 신앙공동체 미래를 위해 우리는 함께 수고해 나갈 새 교우들에게 마음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어린이 청소년 청년 교우들이 마음껏 활약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출애굽 신앙공동체가 당시 주변 나라들과 다른 대안 공동체를 꿈꾸었듯이, 우리도 오늘날 돈과 권력이 추앙받는 사회에서 대안적인 활동과 목회와 선교를 통해 맘몬의 지배에 저항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맹점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광야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잘 준비되고 훈련된 백성들이 많아지면, 그렇지 못한 이들도 덩달아 모두 좋아질 수 있고, 주님의 능력을 믿고 나아가고자 하는 이들이 많으면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출애굽 신앙 공동체가 세운 기념비는 모두 야훼의 법궤를 들고 가장 앞장서서 걸어간 제사장들의 발과 연관되어서 서술됩니다.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야훼 하나님을 유산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요단강 물로 제일 먼저 들어가서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가, 백성들이 다 지나간 후에 제일 나중에 나옵니다. 열두 지파 신앙공동체가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으로 여러 민족 가운데 뽑힌 이들이라면, 제사장들은 열두 지파 모두를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지도력을 지니고 모든 것에 솔선수범하는 교우들이 있습니다. 그분들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누구라고 호명하지 않아도 스스로 드러나고, 또 많은 교우가 알고 계십니다. 당회와 부서장, 신도회와 권사회 임원들은 모두 제사장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하나의 기념비적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나]
교회는 교회만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오셨듯이,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해서 독생자를 주셨듯이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는 존재여야 합니다.
작년 12월 27일에 뉴욕에 있는 한 분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내용은 이러합니다. 개인정보는 빼고 읽어 드리겠습니다.
Happy holidays!
안녕하세요, 아버지가 추천을 해주셔서 이렇게 목사님께 이메일 보내는데요. 저는 현재 미국 뉴욕주에서 거주 중이며 의대생 준비를 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연말 연휴는 잘 보내고 계신지요? 날이 갑자기 추워졌네요.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면 좋겠네요!
시간이 조금 흘렀지만, 나름 최근인 할로윈 때 이태원 참사가 발생하면서 정말 많은 청년들이 안타까운 상을 당했는데요. 사실 저는 평소에 뉴스를 잘 챙겨보거나 주위에 일어나는 일들에 큰 관심을 두지 않던 사람이었지만, 이번 사태에는 나름 제 나이대 또는 저보다 훨씬 어린 친구들이 무자비한 일들을 겪은 걸 보고 정말 마음이 많이 아프고 어쩌다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하며 근심도 많이 하고 신경이 쓰였습니다. 정말 그 유가족들과 또 상처 입은 모든 관련된 분들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헌금을 하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이태원 참사 관련 기부단체나 직접적으로 그 유가족과 관계된 분들을 위해 봉사하는 단체나 사역하는 분들을 찾기가 힘듭니다. 어려운 부탁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혹시 목사님께서 이 헌금을 이태원 참사 사역에 보탬이 될 수 있게 도와주실 수 있으실까요? 사역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도움이 되고 싶을 뿐입니다.
아버지께서 목사님은 어려운 분들, 정말 하나님의 보호 또는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교회로 보내는 헌금은 좋은 일임에도 한 개인이 자유롭게 사용하는 게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헌금을 보내려고 합니다. 금액은 $2000 정도 보내려고 합니다. 아버지가 신뢰하는 목사님이라면 저도 신뢰하기에, 헌금이 어떠한 방법으로 이태원 참사로 흘러갈지는 목사님께 전적으로 맡기겠습니다. 이태원 참사에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크지만 목사님께도 보탬이 된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사람을 위한 것이니 좋은 일에 쓰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자유롭게 목사님 뜻 가는데로 사용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긴 이메일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 제가 헌금을 보내드려도 된다면 알려 주세요! 그러면 은행 상담을 통해 목사님한테서 제가 무엇이 필요하고 어떤 절차로 보내야 하는지 알아보고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분으로부터 지난 금요일(1월 6일)에 후원을 받았고, 이것은 10.29 참사 시민대책회의에서 추모제를 열고 진상을 규명하는 일에 쓰이게 됩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그동안 우리 생명사랑교회의 사회선교가 다소 주춤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가장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역사를 바로 세우면서 이 땅의 민주주의와 평화 통일을 위해 애썼던 분들,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분들과 함께 한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세월호 현장에 있었고, 노동자들의 아픔에 함께 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선교를 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생명사랑교회의 미래 세대들, 후배들이 우리에게 어떤 기념비가 있냐고 물을 때 우리는 답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1월 28일에 있을 연탄봉사도 그런 사역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서 계신 그 자리에서 여러분만의 기념비도 세우시고, 또 우리가 다같이 힘과 마음을 모아서 생명사랑의 기념비도 만들어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목회와 선교와 사역이 우리 사회에서, 한국 개신교계에서 하나의 기념비가 될 수 있도록 올 한해 더욱 수고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지난 한 해도 지켜 주시고 우리에게 소중한 2023년을 또 주시니 감사합니다. 벌써 한 주를 보내고 둘째주간을 맞이합니다. 속절없이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수많은 사건 속에서 우리가 기억하고 기념할 것들을 제대로 선택하게 하여 주소서. 올 한해도 우리가 열심히 주님의 길을 따르게 하시고, 때를 앞당겨서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표징의 교회가 되게 하여 주소서. 말만이 아니라 삶으로, 입술만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나지 않은 길을 새롭게 열어가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뒷사람들이 길을 찾을 때 하나의 이정표가 되게 하소서. 늘 우리 곁에서 스승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하나님!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 올 한해, 주님의 환한 얼굴을 대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이따금 비틀거려도 이내 중심을 잡고 일어서는 팽이처럼, 어려움 속에서도 기어코 몸을 일으켜 주님의 마음에 잇댄 채 살아가게 해 주소서.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섬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런 우리의 소망이 물거품처럼 스러지지 않게 해 주소서. 오늘 우리는 주님의 은총을 기억하며, 우리의 전 삶과 모든 것을 바친다는 의미로 예물을 드립니다. 이 예물을 받아 주소서. 움켜쥔 손을 펴게 하시고,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을 서둘게 하소서. 아픔과 고통이 있는 곳에서 부를 때에, 달려 나가게 하소서. 우리의 삶이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리스도의 푯대를 향하여 늘 전진하기를 원합니다. 올 한 해 주님의 은총 안에서 더욱 넉넉한 품을 가지고 살기를 기대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누구를 기념해야 할까요? 우리는 우리 삶에 어떤 이정표와 기념비를 세워야 할까요? 올 한해 자신만의 기념비들을 하나씩 세우시길 빕니다.
* 축도
사랑하는 여러분!
새날이 밝았습니다.
오늘 떠오른 태양은 어제의 그 태양이 아니고,
지난밤 불었던 바람은 이제 다시 불지 않습니다.
새 역사에는 새바람이 불고 새로운 해가 뜹니다.
이제는 지난 10년의 세월을 지켜 주시고 새로운 10년을 열어주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총이, 많은 일과 사건과 사람 속에서 특별히 생명과 사랑의 사역들을 기억하여 이어가고자 하는 생명 사랑 모든 믿음의 지체들 위에, 함께 예배하고 선교하는 전국의 모든 성도 위에,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길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