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미 목사] 진리, 평화, 생명, 그중에 제일은… – 2024년 1월 21일 여신도회 주일
이사야서 11장 1-9절, 로마서 12장 1-2절, 요한복음서 4장 23-24절
기독교 신앙을 대표하는 성구 하나를 뽑으라고 한다면, 여러분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저는 대표적인 구절 중 하나로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헬, 더 큰 것은] 사랑입니다.” (새번역)그 “사랑장”으로도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도입부인 2절에서 모든 지식을 아는 능력과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확고하게 선포할 정도로 사랑의 실천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믿음, 소망, 사랑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는 13절은 모든 상황에 고정불변의 공식처럼 적용되는 원칙인지? 아니면,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기독교 신앙의 주요한 가치이지만 그 중의 으뜸가는 가치는 시대와 공동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스스로 던진 이 질문에 대해 저는 여신도회 주일 본문인 이사야 11:1~9, 로마서 12:1~2, 요한복음 4:23~24를 통해 그 답을 여러분과 함께 찾아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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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회 기장 총회 주제
방금 읽었던 세 본문은 108회 기장총회 주제 본문이기도 한 데, 저는 총회주제위원으로 이 주제 본문 선정과 주제해설 집필 전 과정에 참여하였습니다. 총회 주제의 표어가 길어지게 된 데는 좀 사연이 있었습니다.
처음 시작은 당시 부총회장이셨던 전상건 목사님(전경연 교수님 아들)이 기장의 ‘학문과 경건’의 정신을 주제에 담았으면 좋겠고, 코로나 이후 침체된 예배의 전통을 되찾고 싶다는 뜻을 밝히셨습니다. 이에 한 분이 기장이 원래 학문과 경건 만이 아니라 학문, 경건, 선교 세 가치를 중심으로 시작했다고 말하자, 기장 선교의 중심 주제인 평화와 최근 기후 위기 등의 위협으로 소중한 가치로 떠오른 생명도 놓칠 수 없는 주제라는 의견이 덧붙여져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생명,평화,선교 공동체”라는 긴 표어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좀 산만해 보일 수도 있는데, 이번 108회 총회의 주제는 진리, 생명, 평화라는 세 단어로 압축될 수 있다고 봅니다. 예배와 선교 공동체인 기장 교회가 이 세 가지를 성심껏 실천해보자는 다짐입니다. 고린도교회가 믿음, 소망, 사랑의 세 가지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한 것처럼, 기장교회에게 진리, 생명, 평화의 세 가지 중에 제일은 무엇일까?
첫 번째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고, 또 다른 질문을 던졌는데, 먼저 진리, 생명, 평화의 의미를 오늘의 본문을 통해 살펴본 후 답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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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로마서 12:1-2)
먼저, 로마서 12장 1-2절입니다. 1절에서 바울은 합당한(logikos, 혹은 영적) 예배를 드릴 것을 권고합니다. 그리고는 바로 이어서 합당한 예배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noos)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롬 12:2)
바울은 ‘본받다’와 ‘변화를 받다’의 대조를 통해 수사력을 발휘하고 있는 데, 이 대조가 한글로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영어로 보면 그 대조가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데, conform과 transform입니다. 공동요소로 보이는 form은 형태입니다. 산 제사로 드려지는 영적 예배는 ‘form/형태’에 관한 것입니다. 이 시대의 풍조(form)를 따라(con) 살아갈 것인가? 이 시대의 풍조(form)를 변화시켜(trans)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살을 살 것인가?
틀(form)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한 노력과 열정이 믿음으로 간주되고, 그 결과를 하나님의 뜻이요 축복이라고 간증하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세대를 따라가는 것일 뿐이며, 합당한 예배가 아니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이 요구하는 것은 세상의 틀을 인정한 채 그 안에서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틀 자체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 틀이 세상의 가치를 중심으로 만든 것이라면, 이 틀을 하나님을 중심으로 재구성하는 것을 뜻합니다.
2절 하반절이 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합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가능합니다. 여기서 마음으로 번역된 헬라어 “누스”는 ‘지적인 능력’을 뜻합니다. 감정적인 변화가 아닌 지적 영역에서의 변화, 즉 가치관 혹은 인식의 변화를 말합니다. 변화를 위해 틀을 바꾸기 위한 준거점은 바로 하나님이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며, 그 뜻은 분별을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진리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의 틀이 아니라 내 이념과 신조라는 틀을 가진 것은 아닌지를 끊임없이 분별을 통해 구별하는 신앙인의 자세를 끊임없이 하지 못한다면 그 진리가 나와 이웃을 족죄이는 굴레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8:31-32에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믿음은 진리와 짝을 맞출 때 진정한 예배가 됩니다. 그 진리의 틀이 내가 아닌 하나님에 기반을 두고 있는 지를 늘 분별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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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사 11:1-9)
두 번째 본문인 이사야 11:1-9는 공의로운 통치자의 출현으로 도래할 이상적인 평화의 세상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1-5절은 공의로운 통치자의 특징을 묘사하고, 6-9절은 평화가 이룩된 미래 낙원을 생태적 은유로 표현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생태적으로 묘사한 유사한 사례는 고대 수메리아의 낙원 신화인 엔키와 닌후르삭(Enki and Ninhursag)에 “사자가 죽이지 않고, 늑대는 양을 갈취하지 않으며…”라고 적힌 대목에서 발견됩니다. 은유 뒤의 실제적인 의미에 대한 해석은 다양한 데, 창 49:1-27; 신 33:1-21에 이스라엘 부족이 동물에 비유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부족(tribes)간의 내적 조화를 은유적으로 묘사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다른 곳에서 열두 부족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여기서의 동물을 부족의 상징으로 보는 해석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오히려, 히브리 예언자들이 야수를 침략을 일삼는 제국들을 묘사하는데 자주 사용한 점을 주목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아모스 3:12는 적이 사마리아를 침공한 것을 사자에게 물린 양에 비유합니다. 예레미야 5:7은 바빌론의 군대를 “사자, 늑대, 표범”으로 묘사합니다. 이사야도 앗시리아의 위협을 사자의 표효에 비유합니다. (사 5:29; 31:4 비교) 그러므로 이사야 11장 6-9절에 나타난 야수와 가축의 조화로운 모습은 대제국과 약소국 사이의 전쟁이 끝난 “국제적 평화”의 비전을 묘사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6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7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8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주목할 것은 이 평화의 세계를 다스리는 이상적인 새 지도자가 아이의 모습을 띠고 있는 점입니다. 아이 앞에 붙여진 형용사 “어린”은 이 아이의 연약함, 순진성, 약함, 그리고 의존성을 암시합니다. 이 세상의 통치자가 왕이나 용사 같은 강력한 성인이 자신의 힘에 의존하는 자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영에 의존해 다스릴 자임을 이미 1-5절에서 암시하였습니다.
또한 이 평화의 세상은 타락의 긴장을 넘어선 창조세계의 회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뱀과 아이 사이의 긴장이 없는 세계라는 묘사에 주목해봅니다. 창세기 3장의 타락 설화에서는 인간과 뱀은 유혹이라는 긴장 속에 둘이 서로 대치합니다. 그리고 타락으로 인해 둘은 적대관계로 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고 논다는 것은 둘 사이의 갈등관계가 해소되고 평화가 형성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결론적으로 이사야 11장 1-9절은 팍스 로마나나 팍스 아메리카와 같이 강자의 힘으로 잠잠한 거짓된 평화가 아니라, 강자의 내려놓음으로 실현되는 평화, 약자의 이끔으로 실현되는 평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평화는 인간의 힘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영)에 의해 정의가 회복된 창조세상입니다.
평화는 정의와 짝을 이룰 때 참 평화의 세상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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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요한복음 4:23-24)
세 번째 본문에서는 요한복음 4장의 배경에 주목해보았습니다. 이야기는 여섯 시경(지금의 낮 12시경), 사마리아 지역의 수가 동네에 있는 우물가에서 시작됩니다. 구약전승에서 우물가는 여성의 자리를 대표하는 공간임을 중요한 시기에 중요한 여성 인물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만났고(창 24), 모세가 십보라를 만난 곳(출 2:15-22)입니다. 물이 귀한 장소에서 우물가란 생명을 살리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요한복음 4장을 생명과 연관시켜 보았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의 만남은 여러 면에서 뜻밖입니다. 사마리아 지역에 유대인이, 여성의 장소인 우물가에 남자가, 인적이 드문 시간에 사람이 이 여자를 맞이합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내 상식을 뛰어넘는 어떤 상황에 놓이면, 먼저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 나의 상식과 편견으로 상황을 단정짓는 편협함을 드러냅니다. 사마리아 여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우물가에 다다라 만난 한 남자가 물을 달라고 요청하자, 그 여자는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고 대답합니다. 자신의 상식과 편견에 따라 예수를 그 사람으로 보지 않고 사회적 틀로 판단합니다. 유대인 남자!. 상종하지 않는 부류의 사람. 그런데 상식과 편견을 딛고 다시 한번 그 사람을 바라볼 열린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그 존재의 새로운 면을 보는 눈을 갖게 됩니다. 상식을 넘어설 작은 용기, 편견을 내려놓을 열린 마음은 하나님의 선물로 내가 만난 존재를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볼 수 있게 도와줍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제일 처음에 예수를 만났을 때 유대인이 아닌 지치고 목마른 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긍휼의 마음을 가졌다면 이야기의 전개는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생명을 대하는 이에게 있어서 긍휼의 마음, 사랑이 중요합니다. 생명은 사랑과 짝을 이룰 때 생명을 살리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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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그중에 제일은 조화이니라.
이제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으뜸가는 것은 사랑이다”는 것이 고정불변의 원칙인지, 시대와 공동체에 따라 유동적인 것인지에 대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그 답변을 할 때입니다. 먼저 저의 답변을 하자면, 그중의 제일은 시대와 공동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입니다.
“진리, 평화, 생명 이 세가지는 중요한 데, 그중의 제일은 무엇인지”라는 질문으로 바꿔서 살펴본다면, 기장교단과 여신도회, 생명사랑교회, 그리고 70-80년대와 2000년대가 그 방점이 좀 달라 보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생명,평화,선교공동체”라는 주제를 내건 108회 총회는 동회기에 7대문서를 발표하면서 7개 의제를 제시했습니다.
의제1.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
의제2. ‘교회의 위기와 기장성의 지속적 실천’
의제3. ‘차별 없는 사랑의 교회 공동체’
의제4. ‘기후 위기와 생태적 전환’
의제5. ‘과학기술의 발전과 디지털 혁명’
의제6. ‘불평등의 극복과 경제정의 실현’
의제7. ‘한반도 평화를 일구어 나가는 교회’.
마지막 제언으로 팬데믹 이후 미래세대를 위한 선교의 새 이름, ‘마음의 에큐메니즘’(An Ecumenism of the Heart)’을 제안합니다.
이 의제를 읽으면서 저는 “정의”라는 단어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점이 다소 의아하긴 했지만 여기 담긴 가치의 방점은 진리,생명,평화 중에 제일은“평화”인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여신도회 주일로 지키고 있는 데, 예배자료로 제시된 여신도회 선교방향은
“생명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생명문화운동, 바른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을 실천하기 위한 기독교어버이운동, 나눔선교, 남북화해와 세계평화를 염원하여 평화문화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폭력근절운동을 3대 과제로 삼고 아울러 평화통일운동, 연합선교운동, 여성의 주권과 참여 확대를 위한 양성평등운동 등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신도회가 운영하는 희년의 집과 희년교회에 2년 협동목사로 참석한 적이 있어 여신도회가 친숙하게 느껴집니다. 희년의집은 무의탁 노인, 소년소녀 가장, 방치된 어린이들을 위한 센터로서 실직가정과 어려운 이웃을 위한 사랑의 김장김치 나누기 등의 활동을 합니다. 또한 북한에 쌀 보내기 운동,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선교센터인 두레방(평택, 아세안, 쉼터), 생태운동 등의 전반적인 선교사업을 살펴볼 때 여신도회는 진리,생명,평화 중에 생명에 더 방점을 두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생명사랑교회 한 구성원으로 첫 예배를 함께 드리고 있지만 생명사랑교회는 이름값에 보여지듯이 진리,평화,생명 중에 생명+사랑을 제일로 삼는 곳인 듯합니다.
다음으로 시기적으로 본다면, 선교공동체로서 기장이 70-80년대는 JPIC(정의, 평화, 창조세계의보전)로 평화에 더 강조점을 두었다면, 2000년대 들어 기후위기를 급격하게 체험하면서 생명에 무게가 더 실리고 있습니다. 세 가지가 항상 있지만 그 중 더 으뜸가는 것은 시대와 공동체에 따라 다소 변하는 것 같습니다.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주보에 제시한 설교 제목의 빈칸을 채우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을 무엇으로 채우시렵니까? 저의 최종적인 대답은 “진리, 평화, 생명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고 그 중의 제일은 조화이다”입니다. 이 대답은 총회 주제의 네 번째 본문인 시 85편 7-13절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시인은 10-13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10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춘다.
11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는 하늘에서 굽어본다.
12 주님께서 좋은 것을 내려 주시니, 우리의 땅은 열매를 맺는다.
13 정의가 주님 앞에 앞서가며, 주님께서 가실 길을 닦을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데 필요한 네 요소들- 인애, 진리, 정의, 화평-을 각기 나열하지 않고 둘의 만남으로 표현합니다. 그 조화로운 모습은 자연과의 화해로까지 이어집니다.
진리를 주장할 때 타인의 자유를 구속하고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면서 상대를 혐오하지 않는 사랑을 잊지 말고, 정의가 없는 평화의 가면을 깨닫고, 생명을 사랑으로 대할 때 아픈 곳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 모두가 하나님의 품 안에서 살아나는 생명 살림의 평화 세상이 될 것임을 믿습니다. 침묵으로 기도합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세상이 믿는 돈이나 권력이 아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줍시다. 절망 가득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들의 희망의 몸짓을 보여줍시다.
축도: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명을 그 자체로 축복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아픈 곳의 중심에서 병든 자를 치유하시며, 높은 자를 내리시고 낮은 자를 높이시는 십자가 사랑과 부활의 신비를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내가 만든 형태 속에 안주하려는 우리 안의 이기심과 게으름을 딛고 세상으로 나가 하나님의 의를 전하도록 토닥이며 이끄시는 성령의 감화 감동하심이 이 땅의 정의와 평화, 생명살림에 힘쓰는 기장의 전국 여신도회와 생명사랑교회 교우들과 그들이 만나는 모든 생명체 위에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