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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수 장로] 평신도, 강단에 서다! – 2023년 10월 29일 종교개혁주일

디모데전서 4장12절 / 누가복음 19장38~40절

  • 인사와 소개

생명사랑교회 교우 여러분 안녕하세요. 매년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진행하는 평신도강단교류를 위하여 ‘정의평화를위한 기독인연대’에서 생명사랑교회로 파송받은 윤영수입니다. 평신도강단교류는 평신도설교를 시행하는 교회들 간에 상호 설교자를 파송하여 강단교류를 하는 활동입니다. 생명사랑교회는 교회 목표 3가지 중에 ‘평신도 중심의 사역’을 위해 실천하는 활동의 하나로 평신도 설교를 하는 교회로 알고 있습니다. 한문덕 목사님이 부임한 이후 여러 번 예배에 참여한 적이 있고, 다양한 현장예배에서 교우분들과 인사를 나누어 매우 친숙한 느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1. 한국교회의 구분 기준이 평신도설교

여러분은 한국의 많은 교회들을 어떻게 구분하시는지요? 누구나 교회를 다니던 초기에는 모두 똑 같은 교회라고 생각해서 관심을 갖지 않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교단에 따라 예장, 기장, 감리교, 성결교 등의 구분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보수적인 교회, 복음주의 교회, 진보적인 교회라는 평가를 통해 구분하는 얘기도 듣게 됩니다. 생명사랑교회는 교단으로는 기독교장로회 소속이고 성향은 진보적인 교회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 않나요?

그런데 저는 평신도강단교류 활동을 담당하고 부터 교회를 구분하는 기준이 평신도설교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절대 다수의 교회가 평신도설교를 하지 않기에 무의미한 구분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진보적인 기독인이기를 원하고, 평신도운동을 신앙생활의 중심에 놓고 있으며, 종교개혁으로 개신교가 탄생했지만 500년이 지나도 여전히 한국기독교는 개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평신도설교를 하는 교회와 하지 않는 교회라는 구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평신도 설교를 하는 교회들이 점차 늘어나서 이러한 구분이 의미 없는 때가 오기를 소망해봅니다.

  1. 평신도설교 경험담 (에큐메니칼, 연대, 공교회)

평신도설교를 처음 들은 것은 2003년 10월 어느 날 향린교회 예배였습니다. 새로운 목사가 부임하고 평신도설교를 제안함에 따라 신도회별로 차출된 6명의 신도회 설교자들이 3개월간 준비하는 과정을 거쳐 매월 1명씩 목사와 함께 평신도설교를 진행하였는데 첫 번째 평신도설교자의 설교는 여러모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목사는 ‘앞으로 예배중에 설교하기 쉽지 않겠다.’는 즐거운 엄살을 부렸고 교우들은 그날의 설교자에게 ‘직업을 바꾸는게 어떻겠느냐.’는 칭찬의 인사를 나누었지요. 그 후 준비된 평신도설교가 차례차례 진행되었고 저도 부족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라는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다른 교회에서도 특별한 절기나 일정에 평신도 설교가 진행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향린교회에서 평신도설교가 계속될수록 내부에서 못마땅하게 반응하는 교우들의 불만에 목회실이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는 후문도 들었습니다. 그 당시 가장 진보적이었던 교회에서조차 부정적인 반응이 있었다는 것은 한국교회의 설교 강단에 목사가 아닌 사람이 서면 불편하다는 상황을 보여준 단적인 사례가 될 것입니다. 몇 년전에는 평신도활동을 열심히 하는 어떤 교회에서 평신도가 하는 설교를 목사가 주보에 간증이라고 표현을 하여 교우들과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개혁 활동의 진전에 따라 교회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평신도의 자각과 주체적인 활동이 강조되는 분위기가 커지면서 평신도설교는 점차 확산되었고 진보적인 목사들은 설교를 통해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현장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평신도들과 함께 설교 강단에 서야 할 필요성을 점차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은 아주 소수의 교회에 국한된 모습이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평신도 강단이 계속 이어질지는 자신할 수 없습니다.

  1. 성서말씀1

누가복음 19장 38~40절은 많이 알려진 성서말씀입니다.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예수를 환영하고 찬양하는 제자와 무리들을 못마땅하게 여긴 바리새파 사람 몇이 제자들을 꾸짖으라고 하자 예수가 대답한 말입니다. 예수는 제자와 무리들이 잠잠하면 소리를 낼 수 없는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누구나 하나님과 예수,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구하며 소리를 질러야 한다는 예수의 선언입니다. 전문적인 지식이나 전통에 따른 권능을 받은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예수의 선포는 수 많은 돌들, 수 많은 민중들 누구나 하나님 나라를 증거할 수 있다는 복음입니다. 당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 하는 자들이 기득권에 사로 잡혀 바른 소리를 내지 못했던 상황은 지금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 때일수록 오히려 그들은 다른 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억압합니다. 예수는 그런 상황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소리를 낼 수 없는 돌들을 가리키며 그들의 소리, 외침이 절실하다고 비유적으로 얘기하셨습니다.

  1. 강단교류 활동 개요 (2014~2023, 10)

평신도강단교류는 2014년에 처음 시작되었고 올해로 10년 차가 되었습니다. 현재 10번째 평신도강단교류가 진행 중인데, 올해는 서울, 경기도, 대구 창원, 김제에 있는 15개 교회가 참여하였고 첫 번째 강단교류는 지난 주에 있었습니다. 대구와 창원에 있는 두 교회가 봉하마을에 있는 노무현대통령 묘역 공원에서 함께 연합예배를 드리며 교류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생명사랑교회를 포함하여 8개 교회가 강단교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10년간의 평신도 강단교류를 개괄하여 말씀드리면 한번이라도 참여한 교회는 19개이며 파송 받은 설교자의 숫자는 100여 명에 이릅니다.

강단교류 활동을 진행하기 위하여 접촉했던 교회들 중에 기억에 남는 3개 교회가 있습니다. 한 곳은 진보적인 교회로 알려진 교회였고 당연히 참여할 것으로 예상했는데강단교류 제안에 대하여 목사가 이메일로 회신을 보냈습니다. 그 내용은 ‘교회 운영을 평신도가 담당하는 상황에서 설교만은 목사인 내가 해야겠다.’는 답변을 받아서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다른 한 교회는 방문하여 예배를 마치고 목사와 신도들과 점심을 하면서 평신도강단교류에 함께 해주기를 제안하였지요. 그랬더니 목사가 동석한 평신도에게 참여하자고 하며 ‘설교를 한 번이라도 하지 않으면 좋다.’며 웃었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또 한 교회는 운영위원장이 공문을 받아서 검토하겠다고 하더니 2주 후에 교회에서 참가 결정을 했다며 본인이 설교자로 파송 받아 나온다는 얘기를 들으며 큰 힘을 얻었던 좋은 기억이 있습니다.

‘한국교회 최초 평신도강단교류’ 라는 제목으로 2014.10월에 한 기독교언론사가 보도한 기사는 평신도강단교류 활동의 내용과 의미를 잘 정리하였습니다. ‘정의.평화를 위한 기독인연대는 5개월간의 준비과정을 거쳐 10월26일과 11월2일 두 번의 주일예배에서 7개 교회가 참가하는 ‘평신도 강단교류’ 활동을 실행한다. 이들 교회는 주일예배 중에 다른 참가교회에서 파송하는 평신도가 설교한다. 한국교회에서 강단은 목회자가 설교를 하는 곳이며 목회 활동의 중심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지금도 여전히 목회자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일부 교회에서 평신도들이 일 년에 몇 번 설교를 담당하기는 하지만 이는 실험적이거나 평신도 활동을 강조하는 교회에 국한되고 있다. 따라서 이번에 7개 교회가 함께 협의를 거쳐서 진행하는 평신도 강단교류는 그 만큼 뜻 깊은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7개 교회로 평신도강단교류는 시작되었습니다.

  1. 설교의 의미 (예배, 교회에서 어떤 역할)

그럼 이제 평신도강단교류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설교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예배에서 제일 중요한 순서가 무엇인가는 기독인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설교가 제일 중요한 순서라고 생각하는 분이 다수라는 점은 대체로 비슷할 것입니다. 예배에서 차지하는 시간적인 비중이나 참여자들의 집중도가 높다는 측면이 그 이유일 것입니다. 그럼 설교를 누가하느냐는 질문에 대부분의 기독인은 목사라고 대답합니다. 기독교적 전통에 따르든 관행에 의하든 당연한 대답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한국에서 기독인이 되어 한 교회에 소속되면 10년 이상을 예배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10년의 시간이라면 대략 500번의 주일 예배에 참여하여 500번 정도의 설교를 듣게 됩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임기가 없는 목사 한 명이 계속한다면 10년이 시간이 흘러 교인들의 머리 속에 설교에 대해 남는 기억과 감정은 어떨까요? 대단한 설교자가 아니라면 상당수의 교인들은 설교가 시작되면 어떤 감정으로 그 시간을 맞이하게 될까요? 현실적이지 않은 가정들이 있어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많은 기독인들이 경험하는 상황이 아닐까요?

설교에 대해 정의하고 있는 것들 중에 잘 정리된 개념이 있어 소개합니다. 설교란 설교자가 성서본문(Text)를 읽고, 그 본문에 대한 성실한 주해(exposition)를 통해, 예수 사건에서 드러난 하나님 나라의 경험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본문이 지닌 내적 의미를 체득하고, 그것을 그리스도인 청중의 상황(Context)에 딱 알맞게 적절한 언어를 통해 전달하는 일련의 행위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설교는 성서라는 텍스트와 예수 사건은 설교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설교자는 성서본문에 대한 주해를 찾아보고 연구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한 후 듣는 청중의 상황에 맞게 적절한 언어로 전달을 하기 위해 설교문을 준비하여 언어로 전달을 해야 합니다. 개념적으로 이해는 되지만 설교를 준비하는 많은 과정을 통하여 훈련하고 익숙해져야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정의를 제시한 목사에게 듣고 있던 평신도가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들은 설교 준비를 할 때 모두 그렇게 하나요?’ 질문을 받은 목사님의 대답은 어땠을까요?

제가 들어본 많은 평신도들의 설교는 성서본문을 먼저 선택하지 않고 본인이 경험한 사건과 경험 중에 하나님 나라의 가치인 생명과 평화 정의의 기준에 부합한 경험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건과 경험을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에 맞는 성서본문을 찾아서 설교하는 것 같습니다. 사건과 현장이 먼저 있었던 것입니다.

설교자가 어떠한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상황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물론 종교개혁을 통해 공표된 만인사제설이 가장 기본 전제가 될 것입니다. 목사와 신학전공자를 먼저 떠올릴 수 있지만 그 사람들로 제한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많은 이야기를 생생하게 설교에 담기에는 부족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이 평신도설교자가 될 수 있습니다.

최근 자주 듣는 공동목회, 문화가 있는 예배, 이야기 예배, 함께 드리는 예배 같은 표현이 의미하는 것은 다양한 형태의 예배를 시도한다는 측면도 있지만 그 중심에는 목사의 설교 강단 독점에 따른 문제점을 보완하려는 생각들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1. 성경말씀 2

디모데전서 4장12절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그 당시는 디모데가 30대 초반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바울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던 에베소교회의 지도자인 디모데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교회의 구성원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도록 유의하라는 권면의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평신도가 성서에 대해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는 기독교적 관습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생각하게 하는 성서 말씀입니다.

  1. 평신도강단교류 의미와 역할

이제 설교를 마무리하며 평신도강단교류가 설교자 개인과 참가교회에 주는 긍정적인 의미 그리고 종교개혁에 주는 영향에 대해서 함께 나누어보겠습니다.

무엇보다 평신도설교자는 한편의 설교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 동안의 신앙생활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설교 주제를 정하고 성서본문을 찾기 위해 성서를 뒤적이고 찾아본 성서를 제대로 이해하고자 다양한 형태의 노력을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 기준에 따라 세상 모습과 자기를 성찰하고 그 결과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궁리하고 결단하는 경험도 하게 됩니다. 코로나 이전에는 설교자 준비모임을 했는데 서로의 설교문을 들으며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는 과정도 소중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목사의 설교를 들을 때 준비 과정에 대한 공감으로 집중도와 공감도가 높아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종교개혁 전통에 따른 만인사제설은 목사와 평신도의 역할은 예배를 위한 직무상의 직책이나 역할뿐이며 예수를 통하여 하느님에게 직접 예배하고 교통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교회는 종교개혁 이전의 카톨릭과 같이 목사만이 사제의 역할을 하고 평신도는 목사가 주재하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는 관념이 지배적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평신도강단교류는 평신도의 설교권 회복을 통하여 만인사제설이 주창하는 정신을 회복할 수 있게 합니다.

끝으로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 정신을 회복하는 일에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습니다. 원래 교회는 공적인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야 함에도 한국교회 현실은 개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래 하나였던 개신교가 시간이 갈수록 분파주의에 휩쓸려 이제는 하나였던 뿌리를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로 인한 폐해는 더 이상 세상은 교회에 공적인 역할을 기대하고 있지 않습니다. 평신도가 서로 연대하여 다른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는 평신도강단교류 활동은 이러한 흐름을 되돌릴 수 있는 방안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강단교류가 진행되는 날 설교자를 응원하러 교류하는 교회를 방문하여 예배교류를 해본 경험은 에큐메니컬 회복의 소중한 기쁨을 맛보는 의미가 있습니다.

  1. 생명사랑교회와 평신도 중심의 사역

평신도강단교류에 함께 하는 19개 교회 중에는 격주로 평신도가 설교를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목사가 없는 평신도교회도 있습니다. 매월 1번 또는 분기에 한번 평신도설교를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10차례의 평신도강단교류에 10번 모두 참여한 교회는 2 개뿐입니다. 어떤 평신도설교자는 매년 다른 교회에 설교하기를 원하여 금년까지 10번째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합니다.

생명사랑교회는 2016년부터 평신도강단교류에 함께 하여 올해로 7번째 강단교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6명의 설교자가 파송되어 6개의 교회에서 설교를 해주셨습니다. 강단교류를 위하여 수고를 해주신 담임목사님과 목회운영위원회 그리고 설교자 여러분의 관심과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강단교류를 지속하기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상황은 쉽지 않음을 느낍니다. 교회에 대한 세상의 신뢰도 저하와 청년층의 기독교 외면에 따른 교인의 노령화. 물질 만능이 초래하는 자본의 우상화, 근본주의적 성경해석 고수와 정치적 보수화 경향 강화 등 한국기독교와 교회가 대적해야 할 과제는 손꼽을 수 없을 정도로 산적해 있습니다.

우리 기독인들이 깨어있고 주체적인 신앙인으로 살아가기에는 무력감과 패배주의에 빠지기 쉬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어려운 화두들을 끌어 안고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고자 애쓰는 교회들과 평신도설교가 만들어가는 평신도강단교류가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위해 겨자씨 같은 역할이라도 할 수 있기를 기도하며 오늘의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태초에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 죄로 인하여 낙원에서 쫓겨나고 우리 인간은 낙원을 잃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소망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자기 것으로 칭하던 암흑 같은 시대를 종교개혁을 통하여 다시금 각성하고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종교개혁 주일을 맞이하여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다짐을 하고 세상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실천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모든 기도를 지금 우리와 함께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