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성한 목사] 참 빛을 보았는가? – 2025년 1월 5일 주일예배
에베소서 1장 3-6절, 요한복음서 1장 9-18절
[아픔과 함께 시작한 2025년]
2025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를 맞으면 언제나 설렘 속에서 서로 한 해를 축복하며 기쁨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모두 조심스럽게 서로 슬픔과 위로를 나누며 연시를 보내는 분위기입니다. 지난주일 정말 참담하고 슬픈 사고로 179명의 소중한 생명을 주님 곁으로 보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 종일 마음 졸이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상황을 지켜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참담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원망과 탄식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마주했습니다.
4.16 세월호 참사, 10.29 이태원 참사를 겪으며 다시는 이러한 참사가 일어나지 않길 간절히 바라왔지만, 또 한 번의 대규모 참사 앞에 우리는 아물지 못한 가슴을 다시 움켜쥡니다. 지금과 같이 그 뜻을 알 수도 이해하기도 힘든 고통 앞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섣불리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야기한다거나 신앙의 이름으로 이 상황을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4.16 세월호 참사 앞에서, 10.29 이태원 참사 앞에서 많은 목사와 기독교인들의 경거망동한 언행으로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에게 큰 상처를 주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저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롬12:15)라는 바울 사도의 권면에 따라 지금 가장 슬프고 아픈 이들과 함께 울어주고 그들의 필요를 어떻게 채워줄 수 있을지 마음과 지혜를 모아야 할 뿐입니다. 대규모 참사는 휘발성이 높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높지만, 그만큼 빨리 사그라들고 쉽게 피로감을 느낍니다. 반대로 참사 이후 유가족들의 시간은 우리들의 시간과는 전혀 다르게 아주 느리게 흘러갑니다. 하루하루가 참사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사고 수습과 진상 규명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끝까지” 기도하며 연대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참사 앞에 가져야 할 마땅한 자세일 것입니다. 지금 유가족들에게,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를 위하고 보듬는 따뜻한 마음입니다. 우리 생명사랑 교우들이 이 마음을 잘 품고 끝까지 함께 해주시기 바랍니다.
올해 2025년은 을사년, 푸른 뱀의 해 입니다. 을사년을 생각하면 사실 우리 역사 속의 아픔이 가장 먼저 떠오르기도 합니다. 1905년 11월 7일, 일본은 강압적으로 ‘한일협상조약’을 체결했는데, 이것을 우리는 ‘을사늑약’이라고 부릅니다.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와 이사청을 설치하여 일본이 대한제국의 국가 내정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큰 아픔을 담고 있는 말이 바로 ‘을씨년스럽다’입니다. 주로 날씨나 분위기가 침울할 때 쓰는 말인데, ‘을사년스럽다’가 ‘을씨년스럽다’로 변형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힘들고, 어쩌면 을씨년스럽게 새해를 시작했지만, 그런 때일수록 우리가 더 희망을 품으며 시작했으면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둠을 밝히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짙은 어둠 가운데, 절망 가운데 오심을 믿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잦은 실패 앞에, 내일에 대한 염려와 걱정에 마음이 짓눌리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오히려 큰 실패 속에서 작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각자의 삶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세상을 밝히는 존재로 살아갈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다시금 희망을 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빛이 아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 빛을 알아보는 존재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라는 참 빛에서 삶의 의미와 세상의 구원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 빛을 보았는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복음서의 말씀은 “참 빛이 있었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빛은 이 세상에 있으면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에서 빛은 생명이자 진리를 알게하는 상징입니다.(1:4,5) 그리고 그 빛은 바로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서를 써낸 이들은 예수에게서 참된 생명을 얻었고, 어둠 속에서 이끌림을 받았습니다. 요한 공동체가 예수를 지금까지의 빛과는 다른 참 빛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참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요한공동체는 예수께서 창세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며 그분을 통해서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고백합니다.(요1:1-3) 이렇게 예수님은 말씀이시며, 심지어 말씀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성취한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으로 번역된 로고스(λόγος)는 그리스 철학에서 진리를 이해하고 이데아(이상적인 형상)의 세계로 나아가는 이성적 통로로 여겨졌습니다. 플라톤에게 로고스는 인간이 불완전한 감각의 세계를 넘어, 보이지 않는 참된 실재, 즉 이데아를 깨닫게 해 주는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그는 감각으로 보이는 세계는 그림자에 불과하며, 이데아의 세계야말로 진정한 실재라고 보았습니다. 로고스는 그 세계에 다가가는 방법이자, 인간이 진리를 사유하고 탐구하도록 돕는 힘이었습니다. 이후로도 이 로고스는 이데아나 신, 그리고 인간 사이를 중개하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요한복음서는 그리스 세계관에서 아주 친숙한 로고스 개념으로 예수님을 설명하지만, 요한복음서가 말하는 로고스는 다릅니다. 요한복음서에서 말씀, 로고스는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실행함으로 중개자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일치를 이룬 존재로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하늘의 뜻,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므로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된 분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참으로 진실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도 상종하려 하지 않았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거시며 인간 사이를 가르는 경계를 허무시고, 그녀의 목마른 마음에 생명의 물을 채워주셨습니다(요한4장).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동안 머물며 누군가가 자신을 그 치유의 연못에 넣어주길 기다리던 중풍 환자에게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고 말씀하시며(요한 5장), 주체적 존재로 살아가라는 새로운 구원의 길을 안내하십니다. 힘 있는 이들은 안식일 법을 들이대며 막아섰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지금 이 순간도 생명을 살리시니, 자신도 묵묵히 생명을 살리는 일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간음을 저질렀다고 고소당해 홀로 끌려와 돌팔매질을 당할 위기에 처한 여인을 온몸으로 보호하심으로,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를 온전히 보여주셨습니다(요한 8장). 세상의 어둠 속에서 앞을 볼 수 없던 시각 장애인의 눈을 밝히시며 어둠 가운데 있는 모든 이들에게 새로운 시야와 그들이 나아갈 진리의 길을 보여주십니다(요한 9장). 그렇게 가장 어둡고 연약한 자리로 직접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의 중심인 생명과 사랑을 온전히 이루신 분이셨습니다.
요한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깊이 들여다보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참 빛을 발견했습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어떤 모습에 감격하여 지금 이 자리에 모이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 속에서 우리 내면과 이 세상의 어둠을 밝힐 참 빛을 발견하셨나요?
[인공조명 아래의 우리]
참 빛이 있다는 것은 가짜 빛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아도 참 빛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지만, 모두가 그 빛을 알아본 것은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서 세상은 참 빛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참 빛을 보지 못하고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조명, 가짜 빛 아래 고통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밤길을 걷다 보면 가로등 주변으로 나방이나 하루살이 같은 곤충들이 빙글 빙글 날아다니는 것을 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곤충들이 따뜻한 걸 좋아한다거나, 빛을 탈출구로 여긴다는 가설도 있었습니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곤충들은 해나 달과 같은 자연적 광원으로 하늘과 땅을 구분하고 비행을 하는데 너무 가깝고 밝은 광원을 보게 되면 감각에 이상이 생겨 빛 주변으로 모여 빙글빙글 도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빛을 좋아하는게 아니라 인공 조명에 곤충들이 이상 행동하며 고통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도 이 인공조명으로 인해 건강에 문제가 생기곤 합니다. 낮은 색온도의 조명만 비추는 실내에서 태양 빛을 보지 못하고 낮 시간에 반복적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은 주광의 푸른빛을 받지 못해 신체적, 감성적 활력이 줄어드는 일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푸른색 형광등 아래에서 저녁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자연의 사이클과 어긋난 빛에 노출되고 휴식하고 수면을 취해야 하는 몸 상태를 만드는 데 방해를 받는다고 합니다. 심할 경우 이것이 불면증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편리함을 가져다주는 인공 조명이 우리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우리 일상 가까운 곳에 있는 실제 인공조명에 대해서 한참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것은 실제로 우리의 삶을 밝게 해 준다고 믿고 있는 가짜 빛들입니다. 오늘날 한국 현대 사회를 돌아보면, 곳곳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날 한국 현대 사회는 ‘보이는 것’에 지나치게 집중하고 있습니다. 높은 빌딩 숲이 자랑하는 도시의 화려한 야경, SNS 속 반짝이는 행복 모멘트, 그리고 경쟁과 성취로 화려하게 포장된 성공 신화들은 우리 마음속에 ‘이것이 진짜 빛’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화려함 속에서도 우울증, 과로사, 자살 등 각종 사회적 문제와 고립감이 끊임없이 대두되는 것을 보면, 우리가 믿고 좇던 ‘빛’이 실제로는 우리에게 참 기쁨과 만족을 주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성취·성과중심적 삶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더 가져야만, 무엇을 더 해야만 빛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강박을 심어 줍니다. 대학 입시부터 취업, 결혼, 육아에 이르기까지 경쟁과 평가가 일상화된 구조 안에서, 사람들은 ‘인정받지 못하면 내가 무가치해진다’고 두려워합니다. 결국 우리는 보다 밝아지기보다, 점점 더 어둠 속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가짜 빛에 사로잡힌 우리는 한편으로는 과도한 불빛 아래 계속해서 깨어 있어야 한다는 부담을 느낍니다. 삶이 24시간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초연결 시대에, 잠시라도 소식을 놓치면 뒤처진다는 불안감 느낍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자극과 비교 속에서 마음은 휴식할 틈을 찾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영혼의 쉼과 회복은 점점 어려워지고, 마치 조명이 너무 밝아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곤충처럼 우리도 정신적·정서적 소진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가짜 빛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진정 우리를 비출 수 있는 참된 빛이 무엇인지, 누구인지를 다시금 물어야 합니다.
[참 빛을 알아보는 하나님의 자녀들]
오늘 요한복음서는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들을 열거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총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하셔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셨던 행위, 사역, 정체성을 나 또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특권, 다른 번역으로 권세를 가진다는 것은 단순히 내가 가진 지위의 위상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권세는 그 지위에 합당한 성품을 가지고, 권세를 부여한 이에게 순종과 의무를 지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받은 존재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받은 이들이라면 우리는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함이 당연합니다. 그 삶은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는 성육신적 삶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수라고 말할 수 있는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1:4)
그리스 철학에서 육체와 물리적 자연은 이데아 세계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영에 비해서 항상 열등하다고 여겨지고, 신을 만나기 위해, 진리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육체의 감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요한복음서는 바로 그런 사람에게, 육체에, 이 물리적 공간에 말씀이자 하나님이신 그 거룩한 분이 거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사셨다에서, 사셨다로 번역된 에스케노센(ἐσκήνωσεν)은 스케노오(σκηνόω)에서 파생된 말로 장막을 치다는 뜻입니다. 즉 말씀이신 하나님, 거룩한 분께서 사람의 육신에 장막을 치셨다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은 땅을 벗어나 하늘을 향해야 한다고 말해왔지, 하늘이 땅으로 내려왔다는 것은 이전에는 없던 충격적인 생각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길을 걸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친 장막 가운데 임하시며 그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전능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이 비천하고 연약한 이들 가장 가까운 곳으로 임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서가 고백하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의미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한없이 낮추셔서, 사람의 연약함을 함께 나누시며, 결국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십자가 사랑으로까지 이어진다는 놀라운 은총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야만 신성을 만나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더 높는 곳을 향해야 인생이 빛을 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서는 분명히 선언합니다. 하늘이 땅으로 내려왔고, 말씀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유한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연약함과 고통, 아픔을 누구보다 강렬하게 느끼시며 지금 슬퍼하는 이들, 억눌려 있는 이들을 직접 찾아가 손을 잡아 주신다고 말합니다. 바로 참사랑이 피어나는 그곳에서 세상을 밝히는 참 빛이 드러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가진 이들은 바로 하늘이 땅을 향하는, 하늘과 땅의 경계를 허무는 그 사랑을 행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성탄절을 앞둔 22일 주일에 우리와 강단 교류를 한 적도 있었던 고기교회는 ‘멀리 가는 물’이라는 제목으로 작은 음악회를 열었습니다. 이 음악회가 특별했던 것은 쿠팡에서 로켓배송을 하다가 쓰러진 고 정슬기 씨 유가족을 초청했기 때문입니다. 교인뿐 아니라 지역 주민도 음악회에 초청해, 우리가 왜 쿠팡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현재 노동자들은 얼마나 불합리한 노동환경에 처해 있는지를 함께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많은 교회가 성탄을 맞이하며 교회 내부에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고기 교회는 예수님이 오시는 하늘을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실 낮은 땅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 빛을 환히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을 밝히는 모습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참 빛은 누구입니까? 그 분이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사랑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참 빛으로 받아들이며, 우리 또한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누리게 되길 소망합니다. 매 순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빛을 축적하여 빛을 방사하는 존재가 되었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매순간 순종하여 이 세상에 하늘의 빛을 보내는 존재가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부르시어 어둠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밝히고자 하십니다. 올 한해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깊은 기도와 고민으로 새해를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어두운 시대와 아픔 한가운데서도 우리를 향해 은밀히 빛을 비추시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슬픔과 상실의 골짜기에 머물러 있는 이들을 기억하시어 당신의 따스한 숨결로 위로하시고, 그들이 다시 걸어갈 힘을 얻게 하옵소서. 찬란해 보이는 가짜 빛들에 흔들리는 우리의 눈을 열어 참 빛 되신 주님을 보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꺼지지 않는 희망으로 빛나게 하옵소서. 영광의 보좌를 떠나 낮은 땅으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가 서로의 눈물과 상처 사이로 뛰어들어 생명의 장막을 펼치는 이들이 되게 하소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삶 한복판에 장막을 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은혜와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새벽 이슬에 촉촉이 젖은 꽃잎처럼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 주시는 그 크고 깊은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지난해 어두운 길을 비추어 주시고 봄의 햇살처럼 따뜻하게 우리 곁에 머물러 주셨던 주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기억합니다. 이제 새해의 첫 주일에 감사를 담아 정성껏 준비한 예물을 봉헌합니다. 온 땅에 뿌려지는 아침 햇살처럼 우리의 작은 소망과 결심을 온전히 받아 주시고, 눈앞의 길이 흐려질 때에도 늘 신실하신 말씀으로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소서. 새싹이 돋아나는 들판처럼 새로운 마음을 허락하시어, 올 한 해도 주님 닮기를 갈망하며 주님 뜻을 이루는 기쁨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드리는 이 예물이 교회와 세상에 주님의 구원의 복음 전하는 사역에 쓰이게 하시고, 올 한해도 주님께 드릴 때 우리 안에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라운 은총들로 채워주소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날들이 주님을 찬양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올한해도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참 빛을 바라보십시오. 그 사랑의 빛을 여러분의 온몸과 마음을 열어 받으십시오. 그 빛이 여러분을 사랑의 존재로 빗어가도록 하십시오.
*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말씀이 참 빛을 받아, 성육신의 삶을 이어가고자 결단하는 하나님의 자녀인 생명사랑교우들 위에, 함께 예배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려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