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육성한 목사] 보라색 하나님 – 2023년 3월 26일
출애굽기 34장 1-9절, 로마서 11장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이미지]
유한한 존재인 우리는 온 우주를 품고 계신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도,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신학자라고 해도,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일치를 경험하는 영성가라도 하나님을 전부 알 수는 없습니다. 신앙인들은 하나님에 대해 알고 체험하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아주 작은 일부분입니다. 끝을 알 수 없는 우주를 품고 계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의 하나님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카메라에 담긴 찰나의 순간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안다고 말할 때, 그 앎은 우리의 존재에 아주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지, 어떤 배경에서 살아왔는지에 따라서 그 앎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렌즈를 통해 하나님을 우리 안에 담습니다. 고통당하는 민중들에게는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해방을 선물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권력자들에게는 왕에게 영원한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뇌리게 강하게 남는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내가 어떤 하나님을 알고 있고, 믿고 있는지 정직하게 성찰한다면 우리는 오히려 우리 자신에 대해서 더 깊이 알게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앎과 체험, 그리고 믿음은 우리의 삶에 많은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믿음 혹은 자신의 신념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특히 신앙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믿음은 구체적인 일상과 연결됩니다. 죄책감과 불안, 두려움이 일상을 사로잡고 있다면 그것은 삶의 어떠한 문제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이해가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은혜를 내려주시는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아주 엄격한 아버지로 믿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담당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주기적으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생각해? 한번 이미지로 표현해보자.” 청소년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물으면서 혹시 잘못된 하나님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고, 요즘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일상을 보내고 있는지 주목합니다. 우리 청소년은 대부분 하나님에 대해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따뜻함, 밝은 빛, 강한 에너지, 위로해주고 안아주는 느낌 등입니다. 이전에 들었던 대답과 크게 다른 게 없다고 생긱 할 때쯤, 한 청소년이 오랜만에 신선한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저는 보라색이요.” 오늘의 설교 제목이 ‘보라색 하나님’인 이유입니다. 보라색은 파란색과 빨간색이라는 상반되는 색의 조합입니다. 이 청소년이 하나님의 이미지로 보라색을 떠올린 이유는 하나님은 심판하는 두려운 분이기도 하면서, 사랑해주시고 따뜻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두 색이 섞인 보라색이라는 이미지가 떠올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수식어와 이미지가 있지만, 이 파란색과 빨간색으로 표현되는 두려움과 사랑의 하나님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이자 우리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하나님 이미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설교를 나누는 가운데 여러분이 믿고 있는 하나님 이미지를 성찰해보시는 시간이 되길 바라며, 오늘 저는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분 이시자, 우리에게 두려운 분이 되시기도 하는 보라색 하나님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왜곡된 두려운 하나님]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자연과 같이 자신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경험하며 인간을 초월하는 어떤 존재를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신을 떨리는 존재, 알 수 없기에 더 두려운 존재로 인식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존재가 바로 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고, 신의 비위를 잘 맞추는 것이 평안한 삶을 사는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두려운 힘으로서의 신과 인간의 욕망, 그리고 권력자가 만났을 때, 신의 이름으로 많은 사람이 억압을 당했고, 고통을 겪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SNS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는 여전히 사이비 교주들의 악행을 고발하는 “나는 신이다”라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입니다. 한문덕 목사님이 지난 주일 설교 때 자세하게 다루어 주셨듯이 지난 주일에 많은 교회 목회자분들이 이 문제를 다룬 것 같습니다. 선정성과 폭력성이 강조된 구성 등의 문제는 차치하더라고, 이단 사이비 문제가 얼마나 위험한지 우리 사회 전반에 알리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이 방송에서 폭로하는 사이비 교주들은 사람들의 연약함, 그리고 신앙을 악용합니다. 자신들의 성적, 물적, 권력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한 사람의 생명과 종교성을 짓밟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악한 이들입니다. 제가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몇 가지 주목했던 부분 중에 하나는 두려운 존재로서의 신입니다. 교주들은 늘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심한 벌을 받는다며 공포심을 유발합니다. 피해자들은 이미 지옥과 같은 현실을 겪고 있었지만, 신의 이름으로 하는 협박에 큰 공포를 느끼며 교주의 말에 순종합니다.
우리는 삶의 고비를 마주했을 때,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을 찾을 것 같지만 가만히 성찰해보면 강한 힘과 능력을 지닌 두려운 하나님을 찾습니다. 닥친 문제를 기적적으로 빨리 해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단 사이비는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들었습니다. 혹할만한 기적을 보여주며, 남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힘을 보이며, 자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행세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이라며 공포심을 일으키고 결국 자신에게 종속되도록 합니다.
피해자들이 교주들의 터무니없는 협박과 저주에 공포를 느끼는 이유를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당시와 지금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런 사이비에 넘어갈 정도로 그만큼 불안하고, 삶에 대한 불확실성과 두려움에 괴로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사이비 문제는 분명 한국 사회 전체의 문제일 것이고, 건강한 교회로서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한국 교회에도 그 책임이 분명히 있습니다.
[공포가 아니라 두려움!]
과거부터 지금까지 두려운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계속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공포심을 자극해 목회자에게 순종하게 하거나, 교회 성장의 도구로 사용하거나, 지금은 소수자를 차별하고 배제하는데 두려운 하나님의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공포심을 자극하는 하나님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말하는 두려운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윤을 얻기 위해 기업이 사용하는 공포 마케팅에 불과합니다.
기업들은 상품을 판매할 때, 소비자에게 공포심과 불안감을 일으켜서 구매를 유도하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사실과는 다르지만 공포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지점을 과장하거나 거짓말 섞어 상품을 광고하는 것입니다. 입 냄새 때문에 이성에게 무시당하는 스토리를 보여주는 구강 청결제 광고, 요즘 유튜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돈을 적금에 넣으면 바보가 된다는 주식 투자 광고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교회가 숱하게 말해온 두려운 하나님은 이러한 공포심을 자극하는 거짓 공포 마케팅과 차이점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두려운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 고백은 공포 마케팅과는 다른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뜻을 우리는 다 알 수도 없고, 하나님 앞에서 고개 숙일 수밖에 없는 삶을 사는 우리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자신을 숨겼던 것처럼,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 떳떳하고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눅5:8)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완전하신 분 앞에서 서면 우리의 약함과 한계가 분명히 드러나며 우리는 경외심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몸도 둘 다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10:28)라고 말씀하시며 우리가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운 분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억압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겁박과는 다릅니다. 공포는 무지와 폭력성에 기인한 것인데,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러한 공포심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완전하심 앞에 우리가 겸손해지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제대로 느끼는 것, 세상의 불의한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진정한 힘을 느끼는 것, 그분의 크신 뜻과 사랑 앞에 앞도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경외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 어떠한 폭력도 무지로 인한 불안감도 없습니다.
[사랑으로 압도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신앙이 두려움에만 기대어 있지 않길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두려움과 경외심을 느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에 기대어 있는 종교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출애굽기의 말씀은 하나님은 두려우신 분임과 동시에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시고 사랑으로 압도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직접 소개하십니다. “주, 나 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 이 한 문장에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자비롭고’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락훔’입니다. 락훔은 명사로는 ‘렉헴’인데, 어머니의 자궁, 모태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뱃속에서 품는 깊은 사랑을 표현한 단어입니다. ‘은혜로우시며’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한눈’은 종주국의 왕이 봉신들에게 베푸는 풍성한 혜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충성을 다하는 백성에게는 하나님께서 넘치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고 번역된 ‘에레크 아파임’은 긴 두 개의 콧구멍을 뜻합니다. 우리는 화가 나면 금세 콧김이 나오지만, 하나님은 호흡이 기셔서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마지막은 풍성하다는 의미의 ‘라브’와 진실, 참, 진리를 가리키는 ‘에메트’, 그리고 하나님이 조건 없이 베푸시는 사랑을 뜻하는 ‘헤세드’를 하나로 엮고 있는데, 이는 거짓 없는 진실한 사랑이 풍성하시다고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사랑은 이익을 따지거나, 누군가를 구속하는 폭력으로 왜곡되기 쉽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이해타산을 따지고 해를 입히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모세가 야웨 하나님께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하나님께 큰 잘못을 범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지키기로 약속하고 주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성막 건설을 위한 하나님의 명령을 들으러 산을 오른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약속을 깨버립니다. 모세가 사라진 것이 불안했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제작하여 예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잘못에 분노하시며 꾸짖으십니다. 이스라엘과 함께 가지 않으시겠다고 단호하게 대하십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회개와 모세의 간청에 두려움보다 더 큰 사랑으로 그들을 품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과 허물로 인해 우리를 가차 없이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용서하시고, 오늘 모세에게 허락하신 두 번째 돌판처럼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기대어 있어야 합니다. 깊은 사랑으로 아이를 품는 어머니, 풍성한 선물을 내려주는 왕, 진실한 사랑과 용서의 손길, 이러한 하나님 이미지가 우리의 신앙의 바탕이 될 때, 우리의 삶은 두려움과 불안, 죄책감이 아니라 자유와 기쁨, 평안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진정한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더 깊이 깨닫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보라색 하나님]
그런데 성경은 언제나 묘한 줄타기를 좋아합니다. 사실 엄밀하게 따지면 사랑의 하나님과 두려운 하나님은 상반되는 이미지입니다. 심판하시고 혼내시거나, 사랑으로 품으시고 용서하시는 것 둘 중에 하나만 하시는 게 오히려 더 일관성 있어 보이고 좋습니다. 두 이미지를 모두 가져간다는 것은 모순되는 지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이미지도 포기하지 않고, 섞어 보라색 하나님을 만들어 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의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 사도께서 오늘 말씀을 전한 이유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로마교회 신도의 대다수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이들은 많은 이방인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는 것과는 반대로 유대인들은 그렇지 못한 것을 보며 교만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모습을 보며 언제나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기대어 있음과 동시에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준엄하심 앞에 놓여 있음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공로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언제든지 하나님의 준엄하심으로 은혜의 선택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보이는 유대인들의 완고함은 더 많은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자 신비임을 깨달아 겸손하라 합니다.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사랑에만 기대어 간다면 정말 좋겠지만, 우리의 믿음의 연약함과 부족함이 그 사랑에만 기대어 갈 수 없게 합니다. 우리는 쉽게 사랑을 잊고, 쉽게 익숙해지며 무뎌집니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크신 사랑에 온전히 기대어 나아가길 바라면서도,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의 준엄하심에 우리 자신을 세우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에 기대어 살아가는지,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 계속해서 성찰해보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지 못하고, 주님의 도구로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때, 언제든지 우리도 하나님께서 준엄하게 대하심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보라색 하나님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우리에게 보라색 하나님이 필요한 이유는 이 땅이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출애굽기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죄악을 자비로 용서해 주시지만, 죄에 대해서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고 삼사대까지 벌주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든 행동을 눈감지 않고 엄하게 다루신 이유는 이 행위가 하나님을 자신들의 욕망 안으로 가두는 행동임과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했던 제국의 질서를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의 형상을 만들어 예배하는 우상 숭배는 그저 다른 신을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의 이름으로 약한 이들을 억압하는, 풍요라는 명목으로 생명을 죽음으로 내모는 제국의 더러운 문화, 불의한 질서와 맞닿아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불의 앞에서는 타협하거나 부드럽게 넘어가지 않으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세상의 불의 앞에 단호하게 맞서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만 강조하고 두려움이시자, 심판하시는 하나님 이미지를 경시할 때, 우리 안에 정의에 대한 감수성이 약해지기도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통해 고통당하는 이웃에게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숱한 세상의 불의 싸우고, 악에게 저항하려고 할 때, 끝까지 싸울 용기와 힘은 정의의 하나님, 심판자이시자 두려운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얻습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우리 생명사랑 청소년이 전해준 보라색 하나님을 귀한 배움으로 받으시길 바랍니다. 보라색 하나님을 여러분 신앙의 중요한 자리에 놓으십시오. 우리는 사랑과 두려움 그 사이의 균형을 잃지 않고 신앙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먼저 우리를 구원하시고,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한 하나님의 사랑을 신앙의 토대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주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가 성실하게 하나님의 사랑의 도구가 되고 있는지, 정의의 왼팔로 일하고 있는지 성찰하십시오. 우리도 언제든지 하나님의 도구가 아니라 사용할 가치를 잃어버린 골동품이 되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시며 오늘 이 시간 다시 한번 믿음의 매듭을 단단히 묶으시기를 바랍니다.
* 설교 후 기도
기도하겠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형언할 수 없는 크신 사랑을 느낍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인자하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언제나 주님의 사랑에 기대어 있게 하옵소서. 우리의 생명과 삶이 주님의 사랑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음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놀라운 은혜에 대한 감격이 희미해지지 않도록 우리를 지키시고, 하나님의 준엄하심에 우리를 성찰하며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바로 걸어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힘차게 걸어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에 기대어 살아가되 하나님은 준엄한 분이심을 잊지 마십시오. 사랑과 두려움 사이에 긴장을 놓지 마시고, 사랑과 정의의 균형을 잘 잡으며 보라색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십시오.
* 축도
축도하겠습니다.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거룩한 친교가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두려우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늘 성찰하기를 결단하는 생명사랑교우들과 함께 예배하는 모든 이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