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육성한 목사] 가장 긴 프로젝트 – 2022년 7월 17일
예레미야서 32장 36-41절, 시편 16편 5-11절, 사도행전 20장 30-37절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어려움과 무게]
몇 주 전 수요기도회가 끝난 후 한 권사님으로부터 카톡이 왔습니다. “목사님, 수요기도회 설교 잘 들었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실천하지 못해서 마음은 늘 무겁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목사님 파이팅!”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메시지였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권사님도 여전히 말씀대로는 사는 것을 두고 씨름하고 계신다는 것에 참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혹시 저의 설교가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애쓰는 교인들에게 늘 무거운 마음만 가지게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고민도 동시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은 결코 얕은 신앙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진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지함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품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사실 말씀대로 사는 것에 대해 거룩한 부담감을 느끼는 신앙인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자신의 문제에 매몰되어 있고, 그것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말씀을 따라 사는 것에 관심을 둘 여력이 없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더라도 그저 복 받기 위해서 교회를 다닌 사람들은 말씀을 따라 사는 것 보다 세속적인 축복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기복신앙은 아니지만, 부담이 되지 않을 만큼만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장이나 과제 없이 적당히 신앙을 유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성장한다면 이 정도의 신앙생활에는 머무를 수 없습니다. 믿음이란 그 믿는 대상과 주체 사이의 거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더 단단해지고 깊어질수록 우리 안에는 하나님과 하나 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알고 싶고, 모든 부분이 연결되고 싶은 것처럼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만이 나의 가장 큰 관심이 되고, 세상의 다른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 됩니다. 폴 틸리히는 그래서 신앙을 ‘궁극적 관심’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이처럼 믿음을 진지하게 갖고, 신앙의 여정에 들어선 사람들은 하나님을 더 알고 싶고, 더 가까워지고 싶기에 더이상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삶을 점점 변화시켜 나갑니다.
여기서 한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믿음 생활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더 깊은 믿음의 단계로 나아가고자 하지만, 우리는 매번 넘어집니다. 말씀의 깊이와 의미를 깨달을수록 더 많은 과제가 생겨나 낙담이 되기도 합니다.
말씀대로 실천하지 못해 마음이 늘 무겁다는 권사님에게 저는 이런 답장을 드렸습니다. “일평생 넘어지고 일어서고 반복하는 우리의 모습도 너그럽게 품어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또 걸어야지요. 감사합니다.”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어쩌면 전 일생에 걸친 가장 긴 프로젝트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긴 신앙의 여정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끝까지 해낼 수 있을까, 마냥 무겁고 어려운 일로만 느끼지 않고, 기쁨과 보람 속에서 걸어갈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자 합니다.
[빛나는 유산을 기억하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의 저자는 주님께서 주신 복들에 감사의 찬양을 합니다. 주님께서 기름진 땅을 주시고, 빛나는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노래합니다. 그러나 오늘 시인이 노래하는 주님이 주신 복과 유산은 문자적인 의미의 땅이나, 물질적 재산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 하나님과 함께 하며 얻은 좋은 생각과 교훈,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생명의 길입니다. 시인은 죽음의 길이 아니라 진정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큰 기쁨을 누립니다.
우리가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며 첫 번째로 해야 할 것은 우리 삶에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얻은 새로운 깨달음과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갓 기독교인이 된 사람이 비기독교인 친구와 나눈 대화를 잠시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래, 자네 크리스찬이 됐다지?” / “그렇다네” / “그럼 그리스도에 관해 꽤 알겠군. 어디 좀 들어보세: 그리스도는 어디서 태어났나?” / “모르겠는걸.” /
“죽을 때 나이는 몇 살이었지?” / “모르겠네.” / “설교는 몇 차례나 했나?” / “몰라.” / “아니, 크리스찬이 됐다면서, 정작 그리스도에 관해 별로 아는 게 없잖아!” / “자네 말이 맞네. 아닌게아니라 난 아는게 너무 적어 부끄럽구먼. 하지만 이 정도는 나도 알고 있지: 3년 전에 난 주정뱅이였고, 빚을 지고 있었어. 내 가정은 산산조각이 돼가고 있었지. 저녁마다 처자식들은 내가 돌아오는 걸 무서워하고 있었던 걸세. 그러나 이젠 난 술을 끊었고, 빚도 다 갚았네. 이제 우리 집은 화목한 가정이야. 저녁마다 아이들은 내가 돌아오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게 됐거든. 이게 모두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이루어 주신 걸세. 이만큼은 나도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네!”(엔소디 드멜로, <개구리 기도 1>)
이 이야기의 의미는 앎이 필요 없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깊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삶의 변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를 정말로 신앙의 소중한 유산으로 간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갓 신앙인이 된 이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선물, 삶의 변화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온 그 걸음들을 돌아보면 분명 우리 삶에 맺은 열매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품지 못했을 가치관, 마음과 태도, 삶의 방식 등 우리 삶에 주어진 변화들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빛나는 유산을 주목하지 못하고 잊을 때, 우리 신앙의 여정은 메마르고, 힘겨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성실하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을 알아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 내용에 따라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변화시켜야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때로 내 삶이 앎을 따라가지 못할 때, 변화해야 할 과제가 너무 커 보여서 마음이 무거울 때, 여러분이 이미 맺은 하늘의 열매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신 그 유산들을 기억하며 여러분 스스로를 격려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의 선물을 기대하며 용기를 내 한 걸음씩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함께 걸어야 하는 길]
두 번째로 우리가 신앙의 여정을 포기하지 않고 기쁨 가운데 걸어가기 위해서는 신앙의 여정을 함께 할 동반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하는 착각 중 하나는 신앙생활을 공동체 없이도 홀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개인주의, 각자도생의 풍조 속에서 신앙 공동체의 중요성을 잊어버립니다. 코로나 19 이후 홀로 하는 신앙생활이 편하고, 유익하다고 여기시는 분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교 전통은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해왔습니다. 신앙의 교제, 그리스도인이 함께 모이는 공동체 없이는 신앙의 성장도 없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사도행전의 말씀은 바울의 고별 설교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러모아 마지막 당부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튼튼하게 교회를 세워 신앙의 유산을 이어가라고 권면하고, 자신이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보여 주었던 헌신에 대해 말합니다. 3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훈계했던 일, 교회 공동체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일을 해서 생활을 유지한 일 등을 열거하며 자신이 모든 일에서 본을 보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에베소의 장로들도 헌신을 할 것을 당부합니다. 자신이 했더 일들을 그들도 감당해주길 바랍니다. 바울과 에베소의 장로들은 설교가 끝난 후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 껴안고 입을 맞추며 작별을 합니다. 이 눈물의 작별 속에 서로를 향한 격려와 감사, 그리고 바울의 권면에 대한 진심 어린 응답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습은 교회 공동체의 존재 목적이자,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교제의 모습입니다. 디트리히 본 회퍼 목사님은 핑켄발데 신학교 기숙사 ‘형제의 집’에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영성생활을 생각하며 <신도의 공동생활>이라는 책을 쓰셨는데, 거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 주는 다른 그리스도인이 필요하다. 확신이 없고 낙담할 때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하고 또 필요하다. 왜냐하면 혼자서는 진리에 어긋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신성한 말씀을 전달하고 선포하는 형제가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를 격려해주고 충고해주며 도전을 일으키는 다른 그리스도인이 필요합니다. 곁에 있는 다른 그리스도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에게 필요한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지 못하고 보지 못한 신앙의 길로 인도받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이렇게 서로 배우고, 이끌며 신앙의 길을 함께 걸어 나가는 곳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안에 신앙을 주제로 한 대화 모임이 많이 생겨난 것이 참 기쁩니다. 한문덕 목사님이 계시지 않는 상황이지만, 교인들끼리 주체적으로 모임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모임에 참여하진 않지만, 마태복음서 모임에는 늘 나눔 자료를 만들어 드립니다. 마태복음서 자료를 만들 때, 가장 고민하는 부분은 서로 대화를 나눌 질문을 만드는 것입니다. 내용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질문도 있지만, 최대한 서로의 삶과 신앙을 나눌 수 있는 질문을 준비합니다. 질문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신앙이 깊어진 사건이나 계기가 있었나요? 이후로 달라진 삶의 모습은 무엇인가요?” “신앙의 이름으로 세상의 가치나 질서에 저항했던 경험이 있나요?”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은 언제인가요? 그 시절을 어떻게 극복했나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 경험이 있나요?” “일상에서 하나님을 가장 의식하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언제 느끼나요?”
꼭 마태복음서 강해를 들어야 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닙니다. 어쩌면 관계가 없는 질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을 나누다 보면 우리는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고, 서로의 삶과 신앙을 통해서 서로 배움의 과정이 일어납니다. 내가 발견하지 못한 나를 발견하기도 하고, 신앙의 과제나 목표가 생겨나기도 합니다. 더 깊은 신앙으로 독려받기도 합니다. 저는 이러한 모임에 더 다양한 분들이 참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을 나누는 귀중한 모임이 더 생겨길 바랍니다. 더 다양한 신앙의 이야기들이 꽃피워져서 신앙의 여정을 가는데, 서로가 서로의 안내자요, 선생님이요, 위로자요, 동반자가 되길 소망합니다.
많은 사람이 교회의 친교를 생각할 때, 교회 안에서 신나게 노는 것을 생각합니다. 함께 웃고, 재미난 활동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교인들 사이의 이러한 친목은 꼭 필요하고 이러한 이 시간이 우리의 삶을 활력 있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교제, 코이노니아(κοινωνια)는 친목과는 다릅니다. 코이노니아는 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무엇에 참여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헌금에 함께 참여할 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고 할 때,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한다는 의미로도 코이노니아가 사용됩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신앙, 복음, 하나님 나라라는 공동의 목표에 함께 참여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더 진지하게 신앙의 길을 걷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함께 참여하게 되길 바랍니다. 그 과정 가운데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고, 권면하는 진정한 교제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 여정은 한결 가벼워지고, 힘찬 걸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예레미야서의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여정에 있어서 꼭 기억해야 할 한 가지를 알려줍니다. 오늘 예레미야서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전과는 다른 온도로 유다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린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악을 고발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맹렬한 분노를 쏟아냈다면, 오늘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의 복음을 전하십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결같은 마음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언약을 맺어 그들을 영영 떠나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또 이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를 깨트리지 말라고, 두 마음을 품고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고,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이 모든 것을 직접 그들에게 주시겠다고 합니다.
오늘 예레미야서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임과 동시에 포로기를 겪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백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본문의 맥락상으로는 아직 예루살렘 멸망 전으로 보이지만, 이 본문은 포로기를 겪고 있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경험한 이들이 예레미야서를 편집하고 써 내려가면서 깨달은 것과 당시의 희망을 이 말씀 안에 담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땅에서 살아간 유대인들에게 있었던 가장 큰 변화는 종교적 영역에 있었습니다. 국가라는 큰 공동체가 무너지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이 사라지니 이들의 신앙방식은 가족 단위의 경건 생활로 축소됩니다. 그리고 희생 제사 중심이 아니라, 말씀 중심의 예배로 변합니다. 가족 단위로 모여서 함께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형태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가족들이 모여서 예배하는 시간에는 이전에는 귀를 닫고 듣지 않았던 예언자들의 설교가 읽혔습니다. 또 지난 선조들의 이야기들이 들려졌습니다. 이들은 선조들의 이야기와 예언자들의 설교를 들으며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고, 지금 상황의 원인을 깨닫습니다.
이러한 시간을 통해서 포로기의 유대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라는 지금의 상황이 자신들의 죄악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돌아오라고 외치셨지만, 선조 때부터 지금까지 듣지 않고 거역했던 역사를 돌아보게 됩니다.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특별히 불러서 맺으신 계약을 파기했음을 깨닫습니다. 포로기의 유다 백성은 이제 자신들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합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이 아무리 말씀하셔도 끊임없이 죄를 저지르고, 하나님을 떠나갈 수밖에 없는 약한 존재임을, 자신들은 결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존재임을 더 철저하게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포로기의 유다 백성은 이제 온전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자신들의 마음부터 하나님이 완전히 새롭게 해주시길 구합니다. 자신들은 할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 온전히 새롭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셔서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시길 바랍니다. 이들은 이제 자신들에게 그 어떠한 희망도 두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희망합니다.
우리가 신앙의 여정을 걸어갈 때,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이 깊고, 오랜 시간 신앙의 길을 걸어왔다고 해도 흔들리지 않고 넘어지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만 하는 우리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 길을 인도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고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한계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란다고 해서 이것이 우리를 멈추게 하거나, 우리의 신앙이 도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결국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을 끝까지 걷게 하시리라는 희망을 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희망이 있을 때, 다시 움직입니다. 희망은 미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현재를 바꾸는 원동력이 됩니다. 희망을 품으면 우리는 그 희망대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장 긴 프로젝트]
우리는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인생에 가장 긴 프로젝트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긴 순례 길, 여행 길을 걷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 길이 멀고 험하게 느껴질 때,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멀게만 느껴질 때, 잠시 멈추어 뒤를 돌아보십시오. 눈을 감고 여러분이 지금까지 이 길에서 받은 선물과 맺은 열매들을 살펴보십시오. 우리는 다시 걸을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곁에서 함께 걷고 있는 믿음의 동지를 기억하십시오. 때로는 그들에게 손을 내밀기도 하고, 어려움을 쏟아 놓기도 하십시오. 그들의 걸음에서 배울 것들을 찾으십시오. 그들이 목소리에서 이 길을 인도하시는 하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이 길을 끝까지 걸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그 믿음과 희망으로 오늘도 내일도 더 깊은 신앙의 여정으로 나아가십시오.
* 설교 후 기도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당신께로 나아가는 신앙의 여정으로 초대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신앙의 여정을 가는 동안 당신께서 주신 은총을 늘 기억하게 하소서. 우리 삶의 변화와 맺은 열매들에 주목하게 하옵소서. 가는 이 길이 외롭지 않도록, 함께 손잡고 걸어갈 믿음의 동반을 늘 허락해 주시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과 능력이 되게 하옵소서. 이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기억하며 희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걷게 하옵소서. 먼저 이 길을 가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