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성한 목사]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 2024년 12월 15일
빌립보서 4장 4-7절, 누가복음서 3장 7-18절
[대림절 셋째주일, 기뻐하십시오!]
대림절 셋째 주일은 전통적으로 Gaudete Sunday, 기쁨의 주일로 지킵니다. 가톨릭 전통에서 대림절 셋째 주일에 미사를 시작할 때 부르는 입당송 후렴구가 “Gaudete in Domino semper(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였던 데서 유래했습니다. 오늘 빌립보서 말씀의 첫 구절이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 절기를 낭만적이고 화려한 세상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이 세상의 어둠을 깊이 들여다보고, 우리의 죄악을 회개하며 겸손히 주님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 기다림의 절기는 무엇보다 어둠을 뚫고, 정의와 평화, 사랑의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 그리고 주님의 다스림이 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희망과 기쁨으로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오늘은 바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올 구원의 희망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날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이 더 기쁘게 다가오는 것은 어제저녁, 윤석열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었기 때문입니다. 비상 계엄령으로 비상식적인 폭정의 정점을 찍은 윤석열의 직무는 어제 오후 7시 24분부터 정지되었고,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아직 갈 길이 남아있고, 불안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지만, 우리가 함께한 멋진 투쟁을 생각할 때, 충분한 기뻐할 만하고 기쁨을 감출 수 없습니다.
비상 계엄령이 선포된 후 지금까지 우리 국민이 보여준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수많은 희생으로 세워진 우리의 민주주의는 단단했습니다. 특별히 10대, 20대, 30대 젊은 층의 집회 참여가 인상적이었고 그중에서도 여성들이 보여준 용기와 정의를 향한 뜨거운 갈망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이번 탄핵 집회에서 단연 돋보였던 것은 10대 20대 여성들이 들고 나왔던 아이돌 응원봉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재미와 신선한 아이디어가 아니었습니다. 응원봉은 없으면 새로 사면되는 LED 초나, 디자인이 화려하고 독특한 야광봉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아이돌을 응원하는 도구였고, 사용하고 나면 배터리까지 분리해서 다시 상자 안에 고이 모셔 놓는 특별한 것이었습니다.(오지윤 교우 이야기) 그중에는 포장을 뜯기도 아까워하던 한정판 상품들도 있었습니다. 응원봉을 들고나온 이들은 소중한 존재와 가치들을 폭력으로, 불법으로 침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아끼고 아껴두었던 응원봉을 꺼내 든 것입니다. 소중한 것을 내던져 더 소중한 것을 지키려는 행동이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눈부신 장면입니다.
어둠을 뚫고 이 땅에 빛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기다리는 계절에 역사에 드리운 짙은 어둠을 환한 정의의 빛으로 몰아낸 우리의 경험은 너무나도 조화롭고 가슴 벅찹니다.
[기쁨의 감정을 깨는 요한의 외침!]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서 말씀을 묵상하던 중 세례 요한이 던진 날카로운 비판이 저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습니다. 기쁨으로 부푼 감정이 가라앉도록 작은 구멍을 내고 이내 다시 긴장감이 감돌게 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오늘 세례자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온 이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르며, 이들이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매서운 말을 합니다. 우리는 떨리는 마음으로 단칼에 모든 것을 베어버릴 것만 같은 요한의 날 선 비판의 대상이 누군지 주목해봅니다. 그 대상은 옷을 두 벌 가진 사람, 군인, 세리입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라는 배경 속에서 바라볼 때 불의하고, 지배 권력에 편에서 이득을 취하던 이들로 보입니다. 가진 한 벌의 겉옷이 재산의 전부인 이들이 대다수였던 당시에 여러 벌의 옷을 가진 사람은 부유한 계층을 뜻합니다. 이웃에게 인색하거나 민중들의 농지를 장악하던 예루살렘 지주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군인은 로마 제국 체제를 유지하는 구성원으로서 그 존재 자체가 민중들에게 위협이었습니다. 세리는 이런 군인들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둬서 로마에게 바쳤습니다. 세리 중에는 정해진 세금보다 더 많은 돈을 요구하며 착취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요한이 정말 분노할 만한 대상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비판을 받고 알맞은 회개의 열매를 맺으라고 요청을 받는 사람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온 이들이었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요한이 광야에 활동하며 요단강에서 베푼 죄사함의 세례는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낯설고 충격적이었습니다. 죄를 용서받고, 정결하게 되는 것은 성전에서 행해지던 희생 제사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심판을 면하고 구원을 얻는 것은 개인의 회개나 결단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고, 성전 제사에 충실하고, 제물과 성전세를 잘 바쳐서 얻는 것이었습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 즉 언약 백성인 유대인은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으로 장차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때, 분명 심판을 면할 것이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란 믿음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광야와 요단강에서 펼친 세례 운동은 어쩌면 근본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활동했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매우 특별한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첫걸음을 뗀 곳이었습니다. 광야 생활은 분명 힘들었지만,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애굽의 질서에 길들어진 나는 이제 죽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나던 공간입니다. 또 요단강은 애굽, 그리고 광야 생활을 끝내고 이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상징적인 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구원의 삶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던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 운동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심판의 하나님이 곧 오시니 이전의 더러운 모습은 완전히 씻어내고,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날 것을 촉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요한을 찾아와 온 이들은 그가 베푼 죄사함의 세례에서 진리의 빛을 보았고, 그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버젓이 성전은 작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고 구원을 보장하는 기존의 종교 체제와 권력이 정하고 있는 절차와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지금 이들은 새로운 길을 찾고 있습니다. 요한을 찾아온 이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한 기존 권력 체제에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거나,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길 소망하던 이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요한은 지금 우리 눈으로 보기에 올바른 길을 찾아 걸으려고 하는 이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소리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좀 다른 사람들인가?]
지난 12일 목요일에 우리 교단에서 진행한 긴급시국기도회가 있었습니다. 이날 기도회에는 500-600명의 기장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모였습니다. 제가 아는 목회자들은 거의 다모인 것 같은 기도회였습니다. 모교회의 교인분들도 보였습니다. 민주화와 사회정의를 위해 헌신해오고, 역사의 화살촉이라는 사명을 품고 있는 우리 한국기독교 장로회의 저력을 보여주는 시간이었습니다. 한국기독교 장로회의 목회자임이 자랑스럽고, 가슴 뜨거워지는 하루였습니다.
우리 교우들도 지난 두 주간 민주주의를 지키고 정의와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윤석열 퇴진을 위한 1만 그리스도인 서명에도 동참하고, 기독교 연합 시국기도회와 국회 앞 집회에도 참여했습니다. 교우들과 함께,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광장에 모임 수많은 국민과 뜨겁게 투쟁했습니다. 보수 교단과 교회들은 여전히 입을 닫고 침묵하거나, 혹은 윤석열을 지켜야 한다고 옹호하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침묵하지 않았고,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지금 역사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광야로 나갔습니다. 교회가 아닌 거리에 섰습니다. 우리는 분명 좀 더 나은 그리스도인 것 같습니다. 새로운 길을 찾아 요한을 찾아왔던 이들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도 요한으로부터 같은 말을 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요한의 날카로운 비판 앞에 우리는 변명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정의를 위해 싸우다 왔습니다. 저기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침묵하는 이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정말 그런가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시국 집회를 보도하는 언론 기사에는 항상 이런 댓글이 달립니다. “이제 와서.” 그동안 우리 사회의 불의에 침묵하거나 동조했으면서 왜 이제 와 이러느냐는 것입니다. 또 한 번의 변명이 올라옵니다.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목소리 낸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 교단은 역사 속에서 정말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탄핵의 물결을 타서 함께 목소리를 내고, 절반의 승리를 가져와 뿌듯함을 누리고 있는 나름 진보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는 우리는 지금 정직하게 지난 삶과 신앙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 달랐는가? 스스로 질문해야 합니다. 어제의 승리 이전에 지난 한주 광야로 나갔던 우리의 모습 이전을 한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라는 사명 앞에, 정의와 평화를 갈망하는 이 사회의 요청 앞에 때론 겁쟁이가 되었고, 침묵하기 일쑤였으며, 질끈 눈을 감고 지나가길 반복했습니다. 이번 탄핵 국면처럼 확실한 승리가 보장되었을 때 비로소 시대의 요청에 응답하는 게으름을 보였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선행 앞에 자주 망설였습니다. 매일을 투쟁 속에서, 거리의 기도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보며 대리만족하기도 했습니다. 굳이 나까지라는 생각으로 용기 내지 않았으며 언젠가 하나님이 이루실 그 날을 희망하며 두 발 뻗고 잠들었습니다. 우리는 정말 다른 사람들인가요? 오늘 요한은 우리 안에 여전히 바뀌지 않고 굳게 자리 잡은 어둠을 보게 합니다. 우리의 어둠, 묵을 때를 완전히 벗겨내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자유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똑같이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할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의 외침에 변명과 자기변호는 잠시 내려놓고,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지난 12월 11일(수) 부산에서 열린 ‘윤석열 탄핵 집회’에서 한 여성의 발언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 여성은 자신을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는, 술집 여자라고 소개하며 자신의 발언을 이어갔습니다. 누군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전해야 하는 설교단에서 손가락질 받아야 마땅한 할 일을 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전한다고 흉을 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분이 탄핵을 이루어낸 우리 국민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야 할 우리 그리스도인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하게 전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기 온천장에서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는, 소위 말하는 술집 여자입니다. 너같이 무식한 게 나대서 뭐 하냐?’, ‘사람들이 너 같은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줄 것 같냐’는 말에 반박하고 싶어서, 또 많은 사람들이 편견을 가지고 저를 경멸하거나 손가락질하실 걸 알고 있지만, 오늘 저는 민주 사회의 시민으로서 그 권리와 의무를 다하고자 이 자리에 용기 내 올라왔습니다. 제가 오늘 이곳에 선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께 한 가지를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어서 이 자리에 올라왔습니다. 그건 우리가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난 다음에도 계속해서 정치와 우리 주변의 소외된 시민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일입니다. 우리는 박근혜를 탄핵했고 또 윤석열을 탄핵할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 국민의 절반은 박근혜와 윤석열을 뽑은 사람들입니다. (중략)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우경화가 가속화되는 시대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이 거대한 흐름을 막지 못한다면 또 다른 윤석열이, 또 다른 박근혜가, 또 다른 전두환과 박정희가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협할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우리 주변의 소외된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주십시오. 더불어 민주주의에 관심을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오로지 여러분의 관심만이 약자들을 살려낼 수 있습니다. 저기 쿠팡에서는 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파주 용주골에선 재개발의 명목으로 성노동자의 삶의 터전이 파괴당하고 있습니다. 동덕여대에서는 대학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고, 서울 지하철에는 여전히 장애인의 이동할 권리가 보장되고 있지 않습니다. 여성을 향한 데이트 폭력이, 성소수자들을 위한 차별금지법이, 이주 노동자 아이들이 받는 차별이 그리고 전라도를 향한 지역혐오 등 이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완벽하지 못한 것입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두 발 뻗고 잠자리에 들지 말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다소 길지지만, 앞으로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야 할지 귀기울여 들어야 할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어제 그리고 곧 우리가 이루어낼 탄핵은 우리가 더 온전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정의와 평화, 생명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한 걸음일 뿐입니다. 이곳은 종착역도 아니고, 우리가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도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고, 이제 진짜 우리가 더 선명하고 세밀하게 보아야 할 우리 사회의 과제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이루어낸 어제의 승리는 분명 하나님께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여기서 멈추고 우리 안에 자리잡은 죄의 관성, 어둠을 벗어버리지 못한다면, 앞으로의 걸음에 주저한다면, 곧 오실 우리 주님이 주실 세례는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성령과 불의 심판일 것입니다.
[어제와 오늘이 아니라 항상 기뻐하려면]
함께 박수를 치며 기뻐해야 할 아침에 너무 마음을 무겁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마음껏 기뻐하십시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시오. 어제와 오늘만이 아니라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주님 곁에, 주님 안에서, 주님의 길에 서 있어야 합니다. 오늘 항상 기뻐하라고 말하는 바울이 처한 상황은 전혀 기뻐할 상황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다 감옥 갇히고 목숨을 잃을지 모를 심각한 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동역자 에바브로디도는 죽을 병에 걸려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도 이 사실을 알고 염려하고 있습니다. 걱정과 두려움이 가득할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그럼에도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동시에 사랑과 정의로 다스리실 것이기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이 확신이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쁨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오늘 바울 사도의 권면처럼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한다면, 주님이 가실 그 길에 선다면 하나님의 심판은 두려움이 아닌 희망의 근거가 됩니다. 정의 앞에 서 있는 사람, 하나님의 온전한 평화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 예수가 가신 생명 살림의 길에 있는 사람은 심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며, 주님의 뜻대로 하루하루를 철저히 살아가는 삶 속에서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힘을 발견합니다. 어제와 오늘의 기쁨이 여기서 끝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으로 이어지려면 우리가 어제와 오늘 서 있었던, 살아내었던, 정의와 평화, 생명에 길을 앞으로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분명히 기억합시다. 우리가 무엇을 하며 진정한 기쁨을 누렸는지 잊지 맙시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승리의 기쁨이 잠깐의 기쁨으로 끝나지 않도록, 우리 안에 깊이 뿌리 내린 어둠을 뽑아내고, 깨끗이 씻어냅시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읍시다. 그렇게 어둠을 뚫고 오실 정의와 평화의 빛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기다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정의를 향한 외침과 간절한 기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고 열매 맺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주님, 우리가 여기에서 안주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우리는 주님의 나라를 꿈꾸는 이들임을 항상 기억하게 하시고, 어제의 기쁨을 더 아름다운 주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내일의 동력으로 삼게 하소서.
오늘도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충실히 걸으며, 그 걸음 속에서 오실 주님을 기쁨으로 기다리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감사기도
오시는 주님, 기다림의 촛불을 밝히는 이 계절에 우리의 마음도 함께 밝혀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는 마음으로 이 작은 예물을 당신 앞에 드립니다. 우리의 손을 통해 흘러간 것들이 당신의 사랑 안에서 열매 맺기를 기도합니다. 어둠 속에 비치는 빛이 되시고, 허기진 영혼을 채우시는 생명의 떡이 되시는 주님, 우리의 봉헌이 그 빛과 떡처럼 세상의 위로와 평화가 되게 하소서. 우리의 기다림 속에 당신의 은혜가 머물고, 우리의 삶 속에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이 어디인지
더 치열하게 고민하십시오.
주님 나라를 내 삶에, 이 사회에
이루는 일에 더 땀을 흘리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어제와 오늘의 기쁨에서 멈추지 않고, 주님과 함께 내일의 기쁨을 만들어가는
생명사랑교우들 위에, 함께 예배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려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