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강미희 목사] 영원한 생명의 길 – 2024년 10월 13일

아모스서 5장 5-10절, 마가복음서 10장 17-22절

[주를 찾지 않는 자들]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예언자 입니다. 아모스 예언자가 활동했던 시기는 다윗과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시기가 지나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진 후, 북왕국의 여로보암 2세가 왕으로 있었던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는 이스라엘이 가장 번성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앗시리아 제국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북쪽 아람 왕국도 쇠퇴하였는데, 여로보암 2세는 이 시기에 북 이스라엘의 옛 영토, 즉 다윗과 솔로몬이 다스리던 영토를 회복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은 군사적 확장을 통해 영토를 넓히고, 무역을 활성화하여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시대를 이끌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주변 국가와의 무역을 통해 재정적으로 성장하였고, 이는 시민들의 생활 수준을 높였습니다. 풍요로움을 누리고, 화려한 삶을 살았습니다. 부유했고, 가장 흥했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아모스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회개를 촉구합니다. 이들이 무엇을 잘못하였기에 아모스는 이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는 것일까요? 여로보암 2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열왕기하 14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주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북왕국을 시작했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 즉 여로보암 1세의 죄에서 떠나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본받았다’고 말합니다. 여로보암 1세의 죄는 금송아지 상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그것에 제사를 지내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성전으로 제사를 지내러 가다가 그들의 마음이 옛 주인인 남 유다 왕에게 돌아가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휩쓸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금송아지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베델에, 하나는 단에 두고, 예루살렘이 아닌 바로 이곳에 우리를 구해내신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합니다. 또 여러 높은 곳에 산당을 짓고, 레위 백성이 아닌 일반 백성 가운데서 제사장을 임명하여 세웠습니다. 다시 말해,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으로 섬기게 한 죄, 레위인이 아님에도 누구든 원하면 제사장으로 세운 죄, 그래서 그로 인해 모든 이스라엘로 하여금 범죄하게 만든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왕의 마음대로 종교를 좌지우지 할 수 있게 만든 것이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백성들의 신앙을 이용하고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백성들도 하나님을 섬기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죄가 여전히 여로보암 2세 때도 남아있다고 말합니다.

가장 부유한 시대를 살고 있는 이스라엘의 내부를 들여다 보면 모두가 평화를 누리는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국력은 강하고 부귀영화가 넘쳤지만, 절대 다수가 빈곤을 겪는 사회였고, 사회 경제적인 불평등과 억압, 착취가 만연했습니다. 율법의 가르침인 하나님을 섬기는 것 이웃을 섬기는 것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던 때입니다. 그렇기에 아모스는 풍요로움은 누리지만 이스라엘에 그들의 죄가 만연해 있음을,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본 본문에서 아모스는 ‘너희는 베델을 찾지 말고, 길갈로 들어가지 말고, 브엘세바로 넘어가지 말아라. 길갈 주민들은 반드시 사로잡혀 가고, 베델은 폐허가 될 것이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으라고, 그래야만 산다고 선포합니다.’ 베델, 길갈, 브엘세바는 모두 종교 활동의 중심지 입니다. 예배의 중심지였습니다. 이곳은 모두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생활과 정치적 통치를 강화하는데 기여했지만, 이 당시는 바알 숭배와 같은 우상숭배로 인한 복잡한 상황을 가진 곳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찾기 위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만든 성소가 이제는 허울 뿐인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모스는 아무리 이곳에서 화목제물과 감사제물을 바치고, 십일조, 예물을 바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용서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지만, 그 종교적 행위는 남아있지만 삶에서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길]

이스라엘 백성이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을 찾는 일입니다. 그것은 성소를 찾아 제물을 바쳐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는 이들이 해야하는 것은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선은 공의와 정의를 되찾는 일입니다. 정의와 공의는 구약성서 곳곳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것을 저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행하심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아모스서는 가난한 자를 짓밟는 현실을 주목합니다. 그리고 이런 현실이 하나님을 떠난 결정적 증거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웃과의 나눔이 없는 제사,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억압과 압제가 공존하는 제사는 하나님과 무관한 제사를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살 수 있는 길은 다시 하나님과 관계를 올바르게 맺는 것입니다. 권력이 만들어 놓은 방식, 우리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게 하는 것을 떨쳐내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분별하는 능력을 가져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러고 여전히 존재하는 공의와 정의가 힘을 쓰지 못하는 곳을 봐야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죽음의 길이 아닌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우리의 삶을 정의로운 삶, 가난한 이웃을향한 삶, 억울한 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제아무리 열심으로 종교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허울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 아모스의 외침을 귀기울여 들어야합니다. 우리의 주변에 공의와 정의가 무너진 일은 없는지, 아픔을 품고 살아가는 이웃은 없는지 말입니다. 우리의 관심이 필요한 곳은 없는지 말입니다. 그런 관심 없이 그저 이 자리에 나와 예배만 드린다면 아모스가 비판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허물 뿐인 종교생활과 다를 게 없을 것입니다.

[간절한 물음]

오늘 마가복음서에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본문은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에 다 등장하는데요. 마태복음서에서는 그를 젊은 사람으로, 누가복음서에는 지도자(관리인)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를 통하여 오늘 예수님께 질문한 사람이 젊은 지도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젊은 나이에 상당한 권력을 갖은 사람이 길을 떠나려는 예수님을 붙잡고, 무릎을 꿇습니다. 매우 열정이 있고, 간절하고, 예의 바른 자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다가와 이렇게 묻습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부족함 없어 보이는 청년의 물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서에서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나라’와 함께 사용됩니다. 영원한 것은 하나님 뿐이시며, 참된 생명, 진짜 제대로 된 삶을 산다는 것은 그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 가능합니다. 오늘 이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자신이 무언가 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어떤 것을 한다면 그 결과로 얻을 수 있는 보상처럼 여긴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젊은이의 물음에 먼저 그가 부른 “선하신 선생님”에 주목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선하다’라는 표현을 신중하게 쓰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 선함이라는 속성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곱씹어 보면, 어느 사람도 온전히 선하지 않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율법]

예수님의 이어지는 대답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십계명의 이웃을 향한 계명을 언급하십니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속여서 빼앗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관련된 앞의 계명을 제외하고 사람들, 이웃에 관한 계명을 언급하시면서 너는 이 계명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에 관한 물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하신 것을 보면 영원한 생명이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과 연관이 있는 듯합니다. 계명을 언급하는 예수님의 말에 이 젊은이는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답합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당시 유대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유대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참된 삶, 영생은 주님께서 주신 율법을 온전히 잘 따르며 사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복음서에서 한 율법교사가 예수를 시험하려고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눅 10:25).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그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이 젊은이는 생명을 지키고 지탱하기 위해 옛 조상으로부터 지금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율법을 성실히 지켰습니다. 그럼에도 의문이 생겼었나 봅니다. 아니면 예수님께서 언급하지 않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계명에 대해 깊이 성찰하며 지키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또는 율법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어서 예수님을 찾아왔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를 예수님이 알고 계실지도 모르는 기대를 품고 왔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 온 젊은이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십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서에서 유일하게 이 젊은이만이 예수님께 사랑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은 젊은이를 자신의 사람으로 초대하십니다.

[한 가지 부족한 것]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젊은이가 알지 못했던 새 삶의 길입니다. 그가 간절히 무릎까지 꿇으며 궁금해했던 것을 예수님께서 알려주십니다. 영원한 생명,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것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가르침을 품고 가서, 너가 지금까지 안정을 누릴 수 있게 만들어준 소유, 삶의 기반으로 삼았던 부에서 벗어나 가난한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잘 따르는 것에서 완성됩니다. 기존의 자신의 모습에서 벗어나는 것이 있어야합니다. 자기 중심으로 살려는 욕구와 자기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려는 것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결단을 하고, 예수님을 따라는 것이 같이 있어야합니다. 그의 제자가 되는 조건은 익숙한 세상의 지혜와 타성에 젖은 신앙생활, 안주하려는 타고난 성향을 끊고 예수님께 오라는 도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율법을 넘어 새로운 삶의 방향을 열어 주십니다.

그런데 재물을 팔아 하늘의 보물을 차지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젊은이에게 힘든 요구였나 봅니다.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며 떠나갑니다. 그 이유는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단순히 재산이 많은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이자 세리장이었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기쁨으로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겠다고 한 것, 바울이 빌립보에서 선교를 시작할 때, 상당한 부를 축적했던 루디아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바울의 선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문제는 재물이 안겨주는 거짓안정과 힘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이 재물 뿐만 아니라 권력이나 나 자신을 내려 놓을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 중에서도 부를 포기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이 부에 굉장히 취약하다는 것을 우리는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 시대에도 마찬가지 였고, 이 마가복음서를 기록한 저자도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듯합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만나 복음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병고침을 받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부자 젊은이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과 대화를 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에 대해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저 슬픈 얼굴이 되어 예수를 떠나간 사람입니다. 마가복음서에서 예수가 사랑스럽게 여긴 유일한 사람인데, 그 사람이 예수를 따르지 못하고 떠나가 버립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흔히 ‘부자 청년의 이야기’로 알고 있습니다. 재산이 많은 것, 부자라는 것은 이 사람을 나타내는 한 특징이기도 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부는 계급과 신분, 가문과 직결됩니다. 그는 유대 사회에서 부와 율법준수, 지도자라는 신분으로 존경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대는 재물을 기반으로 삼지 말고 오히려 거기에서 자유로워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젊은이는 이걸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죠.

그가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없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지만, 남을 향해 나를 열지는 못하는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찾고자 율법은 잘 지켰지만, 정녕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알았을 때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나를 지켜주고 안정시켜주는 재산을 포기하지 못하고 결국 주님을 포기하고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재물을 잘 쓰는 것이 아닌 재물에 매몰되는 것을 경고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

오늘 마가복음서의 말씀 역시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 재물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 그 가운데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재물이 주는 유혹을 쉽게 뿌리치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실제로 돈은 우리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해주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위에 설 수 있는 권력을 주기도 하죠. 하지만 성경은 분명 이 둘 사이를 적당히 타협하면서 오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을 섬기고 있는지 무엇이 내 삶을 이끌어가고 있는지 우리는 생각해 봐야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어느 수준인지 돌아봐야 합니다. 내 삶에 가장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돌아봐야 합니다. 돈이 하나님의 자리에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따르는 그 신앙 아래 돈이 밑에 있는지 따져봐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는 삶,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일구는 삶, 영원한 생명에 매달려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재물에서 자유로우며, 그 재물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꺼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가치 있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이웃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아모스서의 말씀, 누가복음서의 말씀 모두 이웃을 섬기는 일로 귀결됩니다. 성경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야기 할 수 있듯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이웃을 섬기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의 소유를 이웃과 나누는 일 사람의 마음으로 쉽사리 되지 않습니다. 오늘 함께 읽지는 않았지만 마가복음서 뒷부분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오직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품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마음을 받아 이웃을 향하 우리를 끝없이 내어놓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길에 함께 서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주님을 내 안에 품고 살고자 다짐합니다. 그러나 내가 쥔 것을 쉽사리 놓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만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기억하게 하여 주십시오. 사람에게 불가능 한 일이 하나님과 함께한다면 가능한일이 됨을 경험하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이 주신 말씀을 잘 묵상하고 곱씹으며 살게하여 주십시오. 내 몸과 마음이 이웃을 향하여 끝없이 펼쳐질 수 있도록 인도하여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